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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광 [ E-mail ]
  잃어진 자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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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잃어진 자의 구원
■ 찬송가 219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 본문 : (눅 19:10)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was lost)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각 사람은 자기 인생(life, 삶)을, 자신의 상태를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에 대해 예수님보다 더 잘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길을 잃어버린 상태이며, 그 잃어진 상태에서 구원하러 자신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 119:176) “내가 잃어버린 양같이 길을 잃었사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명령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길을 잃어버린(lost) 상태를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잃어진(was lost) 것입니다.
‘잃어진 것을 찾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어진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진 작은아들(일명 탕자). 이 이야기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눅 15:1~2) “그때에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그분께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 하더라.”
이 이야기의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은 어떤 인물에 해당하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리들’, 즉 세금 거둬들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유대인 남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권한을 로마제국에서 돈을 주고 사들였습니다. 이 세리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그 일의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침례자 요한은 침례를 받으러 온 세리들에게 “너희에게 정해 준 것 이상으로 거두지 말라.”(눅 3:13)고 경고를 한 바 있었습니다. 이 말로 미루어보건대, 그들의 세금 징수가 정직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인 로마의 시스템에 속해서 지냈다는 점에서, 세리는 유대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명목상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실천적인 신앙을 버렸고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라기보다는 이방인들과 같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신성모독 등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드러나게 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율법사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죄는 짓지 않기 때문에 죄 지은 사람들을 율법으로 정죄하는 종교인들로, 이들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생활을 했습니다(마 23장). 이와 같은 종교인들은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눅 18:11).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셨고, 이 같은 부류의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고 맞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많은 수의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들었을 때, 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이 받아야할 영광을 예수님께서 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하여 2절에 “이 사람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라고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싫어하는 비판적인 말(댓글)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판하는 이 말은 누가복음 15장을 푸는 열쇠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사람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그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으며, 그들에게 생명의 새로운 삶을 붙잡을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너희가 길을 잃었으며 그 길에서 구원해 주는 분이 자신이다”고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나 자신이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성공으로 가는 첫 걸음을 뗄 수 있는 싯점인 것입니다. 자신을 길에서 벗어난 죄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의 첫 걸음을 다시 내딛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길 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매우 지혜롭게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눅 15:3) “¶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님은 사역하실 때 종종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해주심으로 깨달아야 할 사람에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비유는 생활에서 친숙하게 볼 수 있는 어떤 것의 묘사를 통해 그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성경을 읽을 때), 좋은 마음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솔직히 인정하면, 말씀의 거울은 창문이 되고, 그 창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리고 나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거울 속에 나 자신을 보고도 나를 부인하게 되면,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다보면, 비유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을 벗어나서 이해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그 비유가 주는 의미는 한 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가 주는 의미도 한 가지입니다. 너희는 잃어버린 자이며, 예수님은 잃어진 자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같은 주제로 세 가지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즉 잃어진 것들을 찾아내어서 그것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는 것이 바로 그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잃은 양,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잃은 아들이라는 삼부작 비유 시리즈를 가지고, 그들이 잃어진 상태라는 것과 그들이 나아와야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양과 동전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로 시작하셨다.
(눅 15:4~7) “너희 중의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가 그것들 중의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남겨 두고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그가 그것을 찾은즉 기뻐하며 그것을 자기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서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
여기서 잠깐, 양이라는 짐승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까? 어째서 양은 길을 잃었을까요? 그것은 그 짐승의 속성 때문입니다. 양은 시력이 매우 좋지 않은데다가, 자기를 인도해주는 감각적 나침반도 없습니다. 양은 초장에서 풀을 뜯다가, 쉽게 양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 이리저리 헤매는 특징이 있습니다. 양이 푸른 초장으로 잘 인도받으려면, 인도하는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기 싫었든지 못 들었든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놓치게 되면 방향을 잃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생각하는 길로 가게 되어 길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마치 양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고 자기 길로 가면, 짐승인 양같이 길을 잃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 53:6a)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성경이 말씀하시는 “자기 길로 갔다”는 것은 “길을 잃었다”, “불법의 길을 걸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 사는 길을 잃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또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 같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결국은 멸망 속으로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통해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 손에 들려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음성(말씀)을 놓치면 길을 잃은 양같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길을 잃지 않도록, 불법을 하지 않도록,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눅 15:8~10) “¶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개가 있는데 그녀가 한 개를 잃어버리면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그녀가 그것을 찾은즉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불러 이르되,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내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여인이 갖고 있던 동전을 한 개 잃어버렸습니다. 그 여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동전 열 개중에서 한 개를 잃어버리고 부지런히 찾습니다. 이 비유에서 동전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여자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이 잃어진 사람들을 향한 마음을 비유로 설명하시며 다시 찾으실 때 하나님께는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를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1절부터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탕자가 우리 자신을 비춰주는 것처럼 여겨서 우리는 탕자의 입장과 감격에 더 관심을 기울이지만, 사실 이 비유의 목적과 주인공은 작은아들인 탕자가 아니라, 잃어진 것을 찾아서 기뻐하시는 아버지입니다.
11절부터 32절까지 읽을 건데요. 형제님들이 홀수 절을, 자매님들이 짝수 절을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눅 15:11) “¶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눅 15:12) “그중의 작은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소서, 하니 아버지가 자기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매”
(눅 15:13) “그 뒤 며칠이 안 되어 작은아들이 전부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4) “그가 다 탕진한 뒤에 그 땅에 큰 기근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니라.”
(눅 15:15) “그가 가서 그 나라의 국민 중 하나에게 연합하니 그 사람이 그를 자기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니라.”
(눅 15:16) “그가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자기 배를 채우려 하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아니하므로”
(눅 15:17)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눅 15:21)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눅 15:22)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눅 15:25) “이제 그의 큰아들은 들에 있더라. 그가 오면서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종들 중의 하나를 불러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니”
(눅 15:27) “종이 그에게 말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당신의 아버지가 그를 무사히 건강하게 받아들였으므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매”
(눅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나와서 그에게 간청하매”
(눅 15:29) “그가 응답하여 자기 아버지께 이르되, 보소서, 이 여러 해 동안 내가 아버지를 섬기며 어느 때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거늘 아버지께서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내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결코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눅 15:30) “그러나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버지의 이 아들이 돌아오매 즉시 아버지께서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하니”
(눅 15:31)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네 것이니라.”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
그 아들을 잃어버린 것은 아버지의 부주의함이 아니라, 그 아들이 제멋대로 제고집대로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버리고 잃어진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과 ‘아들을 잃어진 아버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먼~~ 나라”, “그 뒤 며칠이 안 되어”
작은아들의 마음은 먼 나라에 가기 훨씬 오래 전부터 마음은 이미 아버지 집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원한 것은 아버지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어쩌면 자기 아버지의 구속으로부터 또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아버지 집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었다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결코 만족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유란? 책임과 의무를 스스로 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무서워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은아들에게는 자유에 따른 책임과 의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가족으로부터의 자유와 돈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행복하게 되고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살겠다는 자유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란 자기 스스로가 사랑의 동기에서 진리의 통제를 받는 삶입니다.
(요 8:31b~32)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낸 훈육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면,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그 결과를 스스로 겪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들 마음의 정욕을 통해 부정함에 내주사...”(롬 1:24,26,28)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즐길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에는 헌신과 사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했고, 또한 자기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자유는 방종이 되고, 방종은 무질서가 됩니다.
“전부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더니”
죄에 쾌락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쾌락은 일시적이고 그 대가도 비쌉니다. 죄에는 지속적인 기쁨이 없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사람들이 만족 없는 일상과 향방 없는 생활방식으로 부터 해방시켜줄 것들을 찾아 시간과 돈을 쓰고 있을 동안, 그 사람들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산 결과, 그 아들의 사정은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고, 먼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버지 집에 대한 옛 추억을 먹고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가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자기 배를 채우려 하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아니하므로”
그리고 그(유대인)가 먹으려하던 것으로 봐서는 돼지 농장 주인(이방인, 개로 여김)에게도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제 자리에 있지도 못하고 위험에 처해있으며 쓸모없고 불행한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의 영적인 집에서 나와 방황하다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하는 세리 들과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큰 아들은 예수님과 그의 친구들을 비난하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종교적으로 외식적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큰아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집 안에 있는 탕자’라고도 불립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기 전에 크게 간과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재산(물질)을 요구했지만, 자기 아버지의 뜻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기도를 하면서 물질을 구할 수 있지만,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허비하지 않고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작은아들이 회개를 하고 제정신이 되어 삶에 대한 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집에 계신 자기 아버지의 후함에 비해서 먼 나라에 있는 자신의 상황을 보니, 최선의 방책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작은 아들은 비참한 성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나쁜 본보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도 그러할 것입니다
18~19절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진정한 회개란? 얕은 후회나 일시적인 회한이 아닙니다. 생각 뿐만이 아니라 가던 길을 돌이킨다는 의미입니다. 구원도 진정한 회개, 참된 믿음, 죄의 용서 순으로 나아가야 구원에 이르는 것처럼 진정한 회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과거에 내려주신 축복에 대해 생각하고 옳은 일을 해야겠다는 의지 결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작은아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또한 아버지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그 다음으로 아버지(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자기 아버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반갑게 맞아주고 자기를 용서해 주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눅 15:19).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로 돌아왔고 새로운 인생을 선택했습니다. 길을 잃었던 작은아들이 길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번째 출생,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출생”을 주셨습니다(요 3:1~18). 새로운 생명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 생명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받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주님, 구원, 영생, 사랑, 은혜, 긍휼 등)을 잃지 않는다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 작은아들은 먼 나라에서보다 아버지 집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와의 교제, 지혜의 성장,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들 등이 그것들입니다. 돈으로 지식을 살 수 있어도 지혜는 사지 못합니다. 돈으로 정욕을 살 수 있어도 사랑은 사지 못합니다. 돈으로 육체적인 쾌락을 살 수 있어도 영적인 부요함을 사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잃어진 아들을 아버지는 찾았습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내용은 <아들을 잃어진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을 읽을 때, 두 형제의 말과 행동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각자가 두 아들과 같이 어리석게 낭비하는 사람이었으며, 또한 교만하고 매우 비판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 두 아들과 같은 행동을 한 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버지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는 또 한 번의 인생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자비로운 아버지,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제일 놀라운 것은 그 아버지가 작은 아들이 요구한 것을 그대로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주변의 아버지들이라면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변의 아버지들은 자기 자녀들이 “어린 생각이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세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일장 훈계를 했을 것이고, 경험을 쌓고 더 성장하면 그때에 재산을 나누어줄 것이라는 말로 달래려 했을 것입니다.
작은아들이 자기를 그렇게나 빡빡한 사람으로 보고 자신의 범주를 벗어나 집을 나가고 싶어했다는 것에 대해 아버지는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감정은 제쳐두고 자기 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그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기 원해서 하나님을 거역했던 그 일 이래로, 수백만 번이나 되풀이되어 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고도 풍성한 세상을 만드셔서 그 세상을 아담에게 넘겨주셨고, 하나님과 공동 통치자로 삼으셨는데, 그의 불순종이 죄와 사망을 이 세상에 끌어들일 것임을 충분히 잘 알고 계셨습니다(롬 5:12).
놀라운 것, 또 한 가지는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다니거나 아들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자기의 잃은 양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떤 여자는 자기의 잃은 동전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의 잃은 아들을 이리 저리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녀들이 집에서 쉬운 방법으로 무언가를 배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집을 멀리 떠나 있을 때 그것들을 어려운 방법으로 배워야만 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들이 이러한 것들을 너무 늦지 않게 배우기를 바라고 또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기회들을 남용하고 낭비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부드러운 마음과 열린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보고 있었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은아들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이 자기 아들에게로 뛰어가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었다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자기 가족과 자기 마을에 불명예를 끼친 그 아들에게 돌을 던져 죽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신 21:18~21).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달려가 작은아들을 안으며 이웃들에게 “어서 내 아들에게 돌을 던지시오! 내가 대신 맞을 것이오!”라고 말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 내용는 마치 갈보리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그린 그림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처럼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셨습니다. “어서 내 아들에게 돌을 던지시오! 내가 대신 맞을 것이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셔서 구원 받은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기계적으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은 잃어진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생명 가운데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마무리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없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죄의 용서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작은아들인 탕자는 길을 잃었습니다(눅 15:24,32). 그러나 예수님이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작은아들은 진리에 무지했습니다(눅 15:17).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진리였습니다. 이 작은아들은 죽었습니다(눅 15:24,32).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온 생명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아들이 필요로 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아버지께로 가고 싶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거듭난 우리의 아버지는 긍휼과 은혜가 많으신 탕자의 아버지이십니다. 탕자의 아버지와 같이 용서하시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따지지 않고, 바로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은 정말로 관대하신분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따졌을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상속재산을 가지고가서 다 날리고 왔니?, 아버지로서 내가 뭐라고 그랬니?”, 이렇게 한 마디 정도는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한 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정말로 관대하신 하나님입니다.
사실 아버지에게는 재산이나 과거의 어떤 잘못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다는 그 자체로 너무 기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 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인 신분을 갖고 있는 우리가 작은아들과 같이 길을 잃은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정말 안심하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시 103:13)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우리가 길을 잃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죄를 용서받으려고 집으로 오면 아버지는 반갑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죄인들이 오기를 바라시며 지켜보고 계심과 비슷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세상에서 죄의 삯을 쌓느라 지쳐버린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생명을 붙잡을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작은아들의 비유를 통해 배운 교훈은 우리는 세상에 뜻을 두고 살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그런 아들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이켜 자비로운 아버지를 만나고 그분의 길 안에서 걸으며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끝.
■ 찬송가 220장 ‘주께로 옵니다’
2019-06-30 14:5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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