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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간증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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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간증 설교-

말씀: 행 22:1-30, 요절: 행 22: 2019년 12월 22일 일요일 오전 11시

구원받은 성도들은 누구나 간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선한 간증, 주님이 내 안에서 이루신 구원, 그에 따르는 체험 등을 증언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저도 구원 받은 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행하신 수많은 일들을 모아 간증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역교회들이 전도 목적으로 ‘간증 집회’라는 것을 많이 합니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잘 알려진 사람들을 불러서 강단에서 간증을 하는데 주로 내용이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 유명하게 되었다, 성공했다 .......” 등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룹니다. 요즘은 자식이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그것을 간증하라는 부탁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간증이 자기 자랑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유명강사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들을 때마다 점점 부풀려 지는 것과 하나님의 일하심보다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와 환상이 넘쳤지만 이런 일을 자랑하지 않았고 14년이 지난 뒤에 부득이 그 사실을 말할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자랑하는 것이 물론 내게 유익하지 아니하나 내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로 나아가리라.](고후12:1). 자랑하는 것은 내게 유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이제 너희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나니 그러한 기쁨은 다 악한 것이니라.](약4:16)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간증할 때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이 하신 일, 나를 통해서 주님이 이루신 일을 증언함으로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오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두들겨 맞던 바울이 총대장에게 연행되면서 겨우 말할 기회를 얻어 성전에서 자신이 왜 예수님을 전하는지, 왜 유대교에서 개종했는지,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가 무엇인지 모두 설명하는 일종의 간증 설교입니다.
1-2절입니다. [사람들아, 형제들아, 아버지들아, 내가 이제 너희에게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가 히브리말로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그들이 듣고 더욱 잠잠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바울이 성전 계단에 서서 히브리말로 성전에 모여든 유대인들을 향해 “내가 이제 너희에게 변명하는 말(my defence)을 들으라.” 외칩니다.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할 말이 있었습니다. 한 때 어느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바울이었고, 예수님을 핍박했으며, 그 길에 있던 자들은 잡아다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던 그가 지금 반대로 유대인들에게 잡혀 두들겨 맞는데 대한 그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아, 형제들아, 아버지들아”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공식 연설 문구입니다(행2:29, 7:2).
3절입니다. [진실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에서 태어났으되 이 도시에서 가말리엘의 발밑에서 자라며 조상들의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가르침을 받았고 이 날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노라.](3). 다소는 바울의 고향입니다.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 자였지만 동시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고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에 특별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유학해서 당대의 유명한 율법 학자였던 ‘가말리엘’에게 율법을 배웠습니다. 누구도 바울의 이런 점을 의심하거나 시비할 수 없었습니다.
“이 날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노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유대인들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열심,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 자신의 변화되기 이전 상태가 현재 성전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과 동일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열심히 있다고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올바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열심만 내다보면 많은 지체들에게 위험한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4절입니다. [내가 이 길을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자들과 여자들을 다 결박하여 감옥에 넘겨주었노니](4). 이는 바울이 회심하기 전 청년 사울의 행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식 없는 ‘열심’이 강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요, 살인자가 됩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입니다. 바울 역시 그러했고, 지금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 역시 그러합니다.
“내가 이 길을 핍박하여” -바울은 자신이 한 때 교회의 박해자요, 살인자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유난이 “이(그) 길(道)”이란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 길(道)”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요14:6). 히브리 사람들은 “주의 길”,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 “화평의 길” 등 “길”이란 말을 붙여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서는 한자어를 써서 “도”(道)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낮선 사람이 다가와 “도를 아십니까?”묻습니다. 그들은 도가 무엇인지 참된 길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도를 아느냐 묻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신 예수님을 전해야합니다.
예수님을 ‘이 길’(this way)이라고 불렀기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길에 속한 사람”(행9:2)이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에서 어떤 유대인들은 ‘이 길’을 비방했고(행19:9), 또한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 길(道)에 대하여 작지 않은 소동이 일어나니라.](행19:23). 주님은 길(the way)이십니다. “내가 이 길을 핍박하여”란 말은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고 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과거 바울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박해자로서는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의 신분을 가진 모든 사람들도 나에 대해 증언하느니라. 내가 또한 그들로부터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아 다마스쿠스로 가서 거기 있던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 하였노라.](5).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는 열심은 이런 식으로 표출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바울이 만약 다마스쿠스에 가서 교회를 말살하고, 성도들을 많이 잡아 왔다면 그는 예루살렘의 영웅으로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가 열심을 내어 자기를 따르는 큰 무리를 이루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슬프게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보다 지식 없이 열심을 내는 목사를 추종하고 믿고 따르는 집단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자(preacher)보다 살인자를 더 좋아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집을 불태우면 당장 방화범이 됩니다. 그러나 인권 운동가나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가 그 사람을 ‘투사, 열사’란 칭호를 붙여 주는 순간 그는 마음껏 때려 부수고, 불을 질러도 ‘자유를 위한 투쟁’이 되고,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사람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성도들이 받을 고난에 대해, [...... 너희를 미워하고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를 쫓아낸 너희 형제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영광 받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서 너희의 기쁨이 될 것이요,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라.](사66:5)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 [그들이 너희를 회당들에서 내쫓을 것이요,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리라.](요16:2)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비유적으로 풀이하는 이단들이 그러합니다. 여러분들이 피부로 느낄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찾는 이들은 점점 적어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는 이단들은 점점 더 열심을 내고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6-9절은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이 주님을 처음 만난 장면을 말합니다. 하늘에서 빛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사건을 일컬어 역사가들은 기독교의 일대 전환점이라고 평합니다. 바울은 지금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으며, 왜 자신이 변화되었는가를 차분히 설명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임했는데 그분은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이미 하늘에 올라가 계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말씀하신 분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7). 하나님은 율법에 열심인 바울, 교회를 핍박하는데 전문가인 바울, 하나님을 향해 특별한 열심을 지닌 바울을 향해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책망하셨습니다.
8절입니다. 바울은 하늘로부터 나는 음성의 주인공을 향해 “{주}여, 누구시니이까?”(8a) 되물었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답변이 들렸습니다. [.......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8b).
바울이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가 유대교를 파괴하고 자신들을 미혹하는 이단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자들을 거짓 유포자, 유대교의 원수, 율법의 모독자들로 판단했습니다. 바울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이단이라고 판단해 버린 ‘나사렛 예수’가 하늘에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나 스데반의 증언대로 예수님은 주요, 그리스도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9절입니다. 바울에게 임한 빛은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바울에게만 들렸습니다(9). 주님은 우리 각 개개인의 이름을 부르시고, 각자 개개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라고 사울을 부르셨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은 흔히 9:7과 모순된다고 말하는 구절입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words)은 바울만 들었고, 주위 사람들은 음성을 ‘천둥소리’로 들었습니다. *참조: 욥40:9, 시104:7, 요12:28-29.
10-11절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초자연적인 역사,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간증은 귀가 솔깃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큰 빛으로 인해 눈이 멀었던지라(11), 함께 있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유대인들에게 평판이 좋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침례를 받고, 다시 시력을 회복했습니다(13).
14-15절입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의 사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너를 택하사 너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로우신 분을 보게 하시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을 향해 네가 그분의 증인이 되리라.](14-15).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믿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을 아는 것입니다(딤전2:4). 유대인들처럼 열심히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 의로우신 분을 보게 하시고.-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 계실 때가 아니라 저 하늘에 계신 그대로 보았습니다. 이는 다른 사도들과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부활을 증언할 때 “맨 마지막에는.........내게도 보이셨나니”(고전15:8) 라고 했는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본 것을 말합니다.
-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바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목적은 ‘모든 사람을 향해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16절입니다. [이제 네가 왜 주저하느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 침례를 받고 네 죄들을 씻어 버리라, 하더라.](16).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구원의 핵심’(롬10:9-10)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시인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니까?
첫 순교자 스데반이 하나님의 이름을 무어라 불렀습니까?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무어라 부르십니까? 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 (히 1:8) [[아들]에게는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주의 왕국의 홀(笏)은 의의 홀이니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구절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눈이 멀었던 바울에게 곧 바로 침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는 침례에 의한 거듭남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구원 받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후에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도록 초청하는 것을 본 그대로 바울에게 말한 것입니다.
17-18절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하다 다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와서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무의식 상태에서 보니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서둘러 예루살렘을 속히 떠나라. 나에 대하여 네가 증언하는 것을 그들이 받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예루살렘은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증언하는 예수님을 받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명하셨는데 현재 바울은 자신의 의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정결례를 치르고 율법에 따라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몇 차례나 만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고집으로 예루살렘에 와 있습니다.
주님은 바울이 증언하는 것을 그들이 받지 않을 것임을 미리 말씀하셨다면 그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떼를 쓸 때 주님은 사무엘에게 너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너희를, 나를(예수님).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완악함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여 야고보를 칼로 베고 믿는 자들을 모두 쫓아낸 후에 감히 그 누구도 예수님을 증언하지 못하도록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19-20절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내가 모든 회당에서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또 때리며 주의 순교자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나도 곁에 서서 그의 죽음에 동의하고 그를 죽이는 자들의 옷을 지킨 것을 그들이 아나이다, 하니](19-20).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나름대로 사역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을 배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입니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떠나라. 내가 너를 여기에서 멀리 이방인들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1). 하나님은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멀리 이방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바울이 받은 사역은 이방인들의 일꾼이요,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베드로를 이렇게 비교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베드로가 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은 것같이 내가 무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은 것을 그들이 보았나니 (베드로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사 할례자를 위한 사도직을 주신 바로 그분께서 내 안에서도 강력하게 일하사 이방인들을 향하게 하셨느니라.)](갈2:7-8). 베드로는 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았습니다. 바울은 무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았습니다. 베드로는 할례자를 위한 사도직을 주셨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진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불순종인 것입니다.
22-23절입니다.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가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를 높여 이르되, 이런 놈은 이 땅에서 없애 버리라. 그를 살려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하며 소리를 지르고 옷을 벗어 던지며 먼지를 공중에 날리니](22-23). 지금까지 잠잠히 바울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왜 갑자기 광분을 하는 것입니까?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이란 말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 가라고 했다는 증언에 이들은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요, 거룩한 성전이 있는 이 곳 예루살렘을 버리고 멀리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했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짓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계신 예수로 인해, 주님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을 자신의 몸에 채우고 있습니다(골1:24).
24-25절입니다. 총대장은 다시 소요가 일어나자 유대인들이 왜 저리 소리를 지리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재판도 하지 않고 그냥 바로 채찍질하고 심문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24). 그러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 사람임을 알렸습니다(25).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거나 채찍에 맞거나 어떤 고난을 당할 때 좀처럼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11:24-26을 보십시오. 바울은 지독하게 맞을 때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주를 위해 받는 모욕, 수치, 고난은 모두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나갑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님을 위해서 맞는 채찍이 아니었기 때문에 맞으려 하지 않았습니다(25).
바울이 로마 사람이란 말을 듣자(26) 총대장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로마 시민은 전 세계의 1등 시민으로 대접을 받았고, 식민지 나라들에서는 사법적 특혜를 누렸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를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즉시 그에게서 물러가고 총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을 안 뒤에 자기가 그를 결박하였으므로 두려워하니라.](29). 바울을 심문하고 때리려던 사람들이 졸지에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30절입니다. [이튿날 총대장이 무슨 까닭으로 유대인들이 그를 고소하는지 그 진상을 알기 위해 그를 결박에서 풀어 주고 수제사장들과 그들의 온 공회에게 출두하라고 명령한 뒤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 그들 앞에 세우니라.](30). 총대장은 바울이 왜 고소 받았는지, 왜 유대인들은 그를 고소하는지 알고자 하여 수제사장들과 온 공회에 소집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 정식 재판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재판을 받는 도중에 재판관을 향해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는 것이 전부입니다.
23장에 계속됩니다.
2019-12-22 11: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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