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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아, 기운을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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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아, 기운을 내라-

말씀: 행 23:1-35, 요절: 행 23:11. 2019년 12월 22일 일요일 오후 2시

성전에서 두들겨 맞다 구출당한 바울이 총대장에게 간청하여 간증할 틈을 얻었지만 그의 간증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간증하는 중에 듣고 있던 무리들이 “....소리를 높여 이르되, 이런 놈은 이 땅에서 없애 버리라. 그를 살려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다.”(행22:22)고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조용하게 듣던 모든 무리들이 동요했고, 자신이 구원받은 간증을 겸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던 바울은 제대로 설교를 마치지도 못한 채 다시 가죽 끈으로 묶이고 채찍질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이며, 재판도 없이 맞는 것이 불법임을 주장함으로 일단 위기를 모면했습니다(행22:25). 총대장은 공회를 소집해서 바울에 대해 심문을 했습니다.
이제 23장은 총대장 루시아의 명령으로 수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공회에 모여 바울을 심문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종교 재판입니다.
1절입니다. [바울이 공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았노라, 하거늘](1). 흔히 산헤드린 공회라고 불려지는 ‘공회’는 70인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자치 기구였습니다. 로마에서 총독이 파견되었지만 공회는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 내부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는 재량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공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합니다.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았노라.”(1) 바울은 변호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을 방어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것입니다. 법정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바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중세 종교 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녀 사냥으로 잡혀온 크리스천들은 교황이나 추기경, 주교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야가 그의 곁에 서 있던 자들에게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매](2). 대제사장은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기가 무섭게 그의 입을 치도록 명령했습니다.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판은 시작부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증거와 증인을 가지고 서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으로 간주하면서 심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이나 스데반, 베드로, 바울 등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모든 종교 재판은 그 결과가 동일합니다. 유대교의 대제사장은 ‘복음 선포자’ 바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거짓 대언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거짓 사역자, 거짓 사도, 거짓 교사 등 ‘마귀의 일꾼’들은 세상 권력,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복음의 원수’ 노릇을 합니다.
아합 왕 때의 ‘시드기야’를 보십시오. 그는 아합에게 고용된 사이비, 어용 대언자였습니다. 거짓 대언자들은 시류에 영합하고, 권세자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의 귀에 좋은 말만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없으면서도 자신들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미가야를 어떻게 했습니까? 뺨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나아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주]의 영께서 나를 떠나 어느 길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하니](왕상22:24). 이것이 악한 현 세상에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성령의 임재나 감동을 받은 적도 없었던 지라 서슴없이 바울의 입을 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3절입니다. [그때에 바울이 그에게 이르되, 너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께서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율법에 따라 나를 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며 나를 치라고 명령하느냐? 하니](3). 바울은 자신의 입을 치라는 대제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격렬하게’ 반응했습니다. “너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께서 너를 치시리로다.” 바울의 입에서 저주와 심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도 사용한 심한 욕이었습니다(마23:27).
성경을 읽다보면 대언자들이나 사도들, 심지어 우리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격하고 ‘쌍스런(?) 욕설’에 깜짝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흔히 복음 선포자들의 입에서는 항상 부드럽고, 고운 말만 나와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통렬하게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회칠한 무덤, 회칠한 담, 위선자들, 눈먼 안내자들, 어리석고 눈먼 자들, 뱀들, 독사들, 개들, 이리들, 돼지들” 등등의 다양한 표현은 소위 스스로 교양 있는 지성인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거스릅니다.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마3:7)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마23:33).
바울은 구원받은 후 지금까지 수십 년간 아시아 각지와 유럽 여러 곳으로 선교 여행을 다니며 이보다 심한 조롱과 매질과 고문이 있었지만 언제나 잠잠했습니다. 주와 복음으로 인해 받는 고난에 오히려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자신을 모함하고 때리는 자들을 고소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회의 재판정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율법대로 하자!, 왜 율법을 논하면서 율법을 어기느냐?”고 조목조목 따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위선을 지적하며 쌍욕을 해 댑니다.
지금 바울은 영적으로, 주 안에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본능대로, 자기 지혜대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거슬러 이곳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런 종교 재판을 받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너희를 회당과 행정관과 권세 있는 자에게 끌고 가거든 너희가 어떻게 혹은 무엇을 대답하며 혹은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가 마땅히 할 말을 성령님께서 바로 그 시각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12:11~12).
그러나 현재 바울은 이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지혜로 맞서 싸웠습니다. 성령을 거역한 대가입니다. 율법에 관해서라면 바울 역시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인용해서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를 통렬하게 비난하고 역으로 공격할 수 있었지만 스데반이 거둔 것 같은 “영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했습니다(롬12:21).
4절입니다. [곁에 서 있던 자들이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느냐? 하매](4). 바울은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으로 볼 때 ‘아나니야’가 더 이상 하나님의 대제사장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은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히2:17), “우리의 신앙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히3:1), “위대하신 대제사장”(히4:14), “죄가 없으신 대제사장”(히4:15), “하나님에 의해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대제사장”(히5:10)이십니다. 이제 더 이상 레위 계열에 따른 대제사장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바울에게 유대의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고 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5절입니다. [이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된바, 너는 네 백성의 치리자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5). 바울은 얼른 꼬리를 내렸습니다. 여기서 대제사장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욕을 했다가는 아마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에 가서 전할 복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는 바울의 말은 위기 모면용으로 한 거짓말입니다.
대제사장은 누구나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복장이 다릅니다. 공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한 때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아나니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사이였습니다. 아나니아는 한 때 예수님을 재판했는데(요18:13) 이는 그의 사위였던 가야바가 당시 함께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입니다(눅3:2).
바울은 예전에 직접 그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다마스커스로 달려가 교회를 박해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행9:1-2).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손에서 ‘성도들’을 죽이라는 편지를 받아 갔던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동명이인의 독실한 신자였던 다른 ‘아니니아’의 손에 안수를 받고, 침례를 받았다는 점입니다(행9:10).
세월이 흘러 바리새파의 동지에서 대적자로 만난 아나니아와 바울이지만 한 눈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한계는 끝이 없습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바울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시작이 하나님이 아니라 육신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꼬여 갑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의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다른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들의 소망과 부활로 인하여 내가 불려와 심문을 받노라, 하니라.](6). 바울은 다시 한 번 재치를 발휘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의 믿음, 담대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지혜, 재치, 임기응변’ 등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공회에 모인 사람들의 구성원을 한 눈에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공회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다른 교리와 주장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평소에 물과 기름, 개와 고양이처럼 앙숙이었던 까닭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외쳤습니다. 그의 이 말은 사두개인들에게는 적대감을 안겨 주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동질감을 안겨 줍니다. 게다가 “죽은 자들의 소망과 부활로 인하여 내가 불려와 심문을 받노라.”는 말은 그들 간에 상호 분리와 대결, 반목을 조장하는 바울의 육신적 지혜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바울은 결코 이 문제로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심문을 받는 것은 그가 성전을 더럽혔고 율법을 대적하여 가르친다는 이유 때문(21:27-30)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교리 문제로 심문을 받는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란 선포로 인한 것일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은 자들의 소망과 부활로 인하여”받는 심문은 아닙니다. 바울은 공회원들의 의견을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하려는 꾀를 부린 것입니다. 바울의 작전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긴 하지만 결코 순결한 모습은 아닙니다.
7-8절입니다. [그가 이같이 말하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뉘었으니 이는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나 영도 없다고 말하되 바리새인들은 둘 다를 시인하기 때문이라.](7-8).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평소에는 모든 문제에서 적대관계에 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부활, 천사, 영의 존재 등에 대해서 정 반대의 교리를 고수했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위선’을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불신과 세속화’를 지적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고, 초자연적인 것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우리 가운데 같은 킹제임스성경을 사용하면서도 7년 환란이나 천년 왕국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고 7년 환란은 믿되 대 환란 전 휴거를 믿지 않고 교회가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성경을 쓰면서도 성경 해석이나 교리문제로 교제하기 어려운 자들이 있습니다.
9-10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울의 편을 들었습니다(9). 사두개인들은 계속해서 바울을 압박했습니다. 이제 이들이 바울을 두고 서로 끌어당기자 총대장은 공회를 중단하고 바울을 성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도록 했습니다(10). 이로써 공회에서 하려던 바울에 대한 심문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그의 곁에 서서 이르시되, 바울아, 기운을 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해 증언하였듯이 반드시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11). 바울은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넘겼습니다. 예루살렘에 온 후 잠시 교회 형제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장로들과 야고보의 권면을 받아 들여 성전에서 율법대로 정결례를 행했지만 유대인들에게 잡혀 반 쯤 죽임을 당하다 구출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행21:31). 그는 유대인들에게 간증 설교를 했지만 설교는 끝마치지도 못하고 소동이 일어나 중단 되었습니다(행22:22).
이제 바울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가능한 모든 수단 방법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혔습니다. 공회에서는 자신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의 교리와 동일한 교리의 소유자임을 밝혔습니다. 상황을 최대한 잘 이용하려고 매 순간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풀려나지 못하고 다시 감옥에 갇혔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때의 바울과 예루살렘의 감옥에 갇힌 바울의 차이를 보십시오. 빌립보감옥에서 한 밤중에 모든 죄수들이 들을 수 있었던 그 ‘찬양’이 없습니다(행16:25). 기도도 없습니다. 땅이 갈리지는 지진과 같은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행16:26). 감옥 내에서 단 한 명도 구원받은 이가 없습니다(행16:23-33).풀려나지도 못 했습니다(행16:36).
오늘 예루살렘 감옥에서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저녁 음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주여 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까?” 물어 볼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이곳에 왔기 때문입니다(행21:10).
“구해 주소서” 간구할 입장도 아닙니다. 주님은 몇 차례 대언자들을 보내서 이렇게 될 것임을 미리 말씀해 주시고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자신을 권면하는 형제들 앞에서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행21:13b)고 큰 소리 쳤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에게는 무사히 살아남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습니다. 한 때 가졌던 “내가 반드시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려면 일단 예루살렘에서 무사히 벗어나야만 합니다. 이런 순간에 주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죄인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십시오. 주님은 육신의 성품으로 성령을 거역하고 대적했던 자신의 종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그의 곁에 서서 이르시되, 바울아, 기운을 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해 증언하였듯이 반드시 로마에서도 증언(證言)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11).
주님께서 감옥에 있는 바울 곁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기운을 내라.” -바울은 지금 낙담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마지막 소원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아 오셨습니다(롬5:8).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 뜻을 행할 때만 아니라 주의 뜻을 벗어나 어려움에 빠졌을 때, 실의와 낙망에 빠졌을 때, 죽음을 생각하는 극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로뎀 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찾아오셨듯이, 주님은 예루살렘의 옥중에 있는 바울을 찾아오시고 곁에 서서 "바울아, 기운을 내라" 하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끈기 있게 주를 기다렸더니 그분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짓음을 들으셨도다. 그분께서 또한 무서운 구덩이와 진흙 수렁에서 나를 끌어 올리시며 내 발을 반석에 두시고 나의 가는 걸음을 굳게 세우셨도다. 또 그분께서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양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주를 신뢰하리로다.](시40:1-3). 참으로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2-13절입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 중의 어떤 자들이 함께 단결하고 자신을 속박하여 저주 아래 두고 자기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말하더라. 이 음모를 꾸민 자가 마흔 명이 넘더라.](12-13). *살인을 결심하는 율법주의자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육신의 자녀들은 약속의 자녀들을 박해합니다. 종교인들은 복음을 반대하며 박해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자기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 이런 일을 서슴없이 자행한다는 정당한 명분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의 이름으로 거룩한 전쟁이라는 성전(聖戰)을 선포하고, 살인을 일삼는 무리들을 보십시오. 로마 캐톨릭, 무슬렘은 유대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이런 일을 자행했습니다. 자살 특공대, 살인 결사대 등이 요즘 보는 테러 단체들이 등장하기 2천년 전에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바울을 죽이고, 죽이지 못하면 자신들이 저주를 받기를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면서 마음의 각오를 했는데 그 수가 무려 4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 살해 계획’을 세우고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했습니다(14-15). 이들은 자신들이 단독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보고’하고 이미 동의를 구했습니다.
이 일은 바울의 누이 아들에 의해 곧 바로 총대장에게 알려졌습니다(16-21). 총대장은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테러 계획을 사전에 듣고, 저녁 아홉 시에 백부장 둘, 군사 이백 명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해서(23),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보냈습니다. 루시아 총대장은 벨릭스에게 바울의 재판에 대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26-30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26-30절입니다. [클라우디우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게 되었을 때에 그가 로마 사람인 것을 내가 알게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구출하였나이다. 그들이 무슨 까닭으로 그를 고소하는지 알기위해 내가 그들의 공회로 그를 데리고 갔는데 그가 그들의 율법 문제들로 고소를 당하였지만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그에게 하나도 없음을 내가 깨닫게 되었나이다. 또 유대인들이 숨어서 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을 내가 전해 듣고 즉시 각하께로 보내며 또 그를 고소하는 자들에게도 각하 앞에서 그에 대하여 고소하는 바를 말하라고 명령하였나이다. 평안하옵소서, 하였더라.](26-30).
편지는 공식 공문에 해당하는 것인데 거짓말이 들어있습니다. 루시아는 바울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알고 구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바울이 말하기 전까지 로마 사람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구출했지만 그를 결박하고 채찍질하려 했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을 위해 일하는 충성스런 로마의 관리인 것처럼 편지에 썼을 뿐입니다. 루시아는 총독에게 바울의 무죄 소견을 밝히고 총독 벨릭스에게 이 사건을 마무리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로마는 3심제입니다. 바울은 이제 1심 재판을 마쳤고, 2심 재판을 받기 위해 총독에게 보내졌습니다.
31-36절입니다. 바울의 신병은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총독에게 인계되었습니다. 총독은 ‘루시아’가 보낸 편지를 읽은 후 바울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만 물어서 파악한 후(34)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이 오면 재판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35). 바울은 재판이 열릴 때까지 ‘헤롯의 재판정 안에’ 구금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던 예루살렘은 벗어났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게 될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석방을 통해 자유롭게 로마로 전도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죄수의 신분으로 사슬에 결박된 채 로마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바울의 생애는 ‘결박당한 대사’로서의 삶입니다. 그의 옥중 서신에는 자신을 “결박당한 대사”(엡6:20)로 표현하며 결박당한 자신에 대해서 9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너무나 다르게 성취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반드시 로마를 보겠다는 바울의 소원은 응답받았지만 자유가 아니라 결박당한 채 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손실을 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 응답은 주어졌지만 가족을 잃고, 건강을 잃고, 재산을 잃어버립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꿈과 야망이 꺾입니다.
어떤 형제는 설교자였지만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알콜을 끊고, 놀라운 구령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는데 알콜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꼼짝없이 술을 끊었고, 죄수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해 교도소에 부흥을 일으켜 그 기사가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시고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바울 역시 그런 경우입니다.
2019-12-22 1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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