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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언자들의 글을 믿으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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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언자들의 글을 믿으시나이까?-
말씀: 행 26:1-32, 요절: 행 26:27. 2020년 2월 2일 일요일 오후 2시

바울이 로마의 카이사르에게 재판을 받고자 상고를 하자 유대의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으라고 했던 총독 베스도는 할 수 없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붙들려 총대장 루시아에게 결박당한 후 총독 벨릭스에게 넘겨져 2년이 넘게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으며 구금되어 있다가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에 의해 다시 재판을 받았습니다.
베스도는 법대로 공의롭게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요소’를 고려하고 ‘유대인들의 여론과 민심’을 반영해서 재판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더 이상 가이사랴에서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에 항소했습니다.
이 때 헤롯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가 총독에게 인사차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총독은 이들에게 바울의 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1절입니다. [그때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 자신을 위해 말하는 것을 허락 하노라, 하매 이에 바울이 손을 내밀고 자기를 위해 답변하되](행26:1). 바울의 간증 설교가 다시 한 번 가이사랴의 총독 관청에서 선포되었습니다. 바울이 한 손을 들고 자신을 답변했습니다.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기를 변명하고 무죄를 주장하는 것보다 더욱 열심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성경을 선포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왕에게 선처를 부탁하거나 풀어 달라고 우는 것이 아니라 총독은 물론이요, 자신의 말을 듣는 이들이 모두 복음을 믿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2-3절,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들이 나를 고소한 모든 일에 관하여 내가 이 날 왕 앞에서 나를 위해 답변할 터이므로 다행으로 생각하오니 이는 특히 왕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모든 관례와 문제를 잘 아시는 줄 내가 알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므로 인내하시며 내 말을 들어 주실 것을 간청하나이다.](2-3).
바울은 총독 베스도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보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던 전임 왕과는 다른 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어쨌든 유대인들의 율법, 관례 등에 정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닙니다. 헤롯 대제는 이두메인이고, 에돔인으로 에서의 후손이었습니다. 그의 조상은 유대 종교를 포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언제나 그를 "반쪽 유대인"이라고 불렀고, 유대인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헤롯 왕은 로마의 원로원과 시저에게 뇌물을 바치고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왕위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유대교를 믿는 것처럼 행세했고, 성전을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헤롯 왕조의 4번째 왕인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의 관례와 문제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4절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내 민족 가운데서 지냈는데 그때부터 내가 살아온 방식은 모든 유대인들이 아나이다.](4).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 바리새인이었고, 유대교에 특별한 열심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바울은 젊어서 자신이 살아온 방식은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는 무명의 청년이 아니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촉망받는 유능한 청년이요,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믿는 바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지 결코 위선자가 아니었습니다.
5절, [그들이 처음부터 나를 알았으니 만일 그들이 증언하고자 한다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종파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다 하리이다.](5). 그는 성전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에서 태어났으되 이 도시에서 가말리엘의 발밑에서 자라며 조상들의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가르침을 받았고 이 날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노라.](행22:3). 이처럼 바울은 유대교의 가장 엄한 종파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향해 워낙 엄하고 무서운 책망을 많이 하셨던 터라 우리는 바리새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란 말은 곧 위선자, 율법주의자, 주님의 대적자 등 나쁜 놈들이요, 악한 놈들이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종파였습니다. 바리새인이란 엄격한 율법주의를 표방하며 스스로 자신들을 분리한 ‘분리주의자들’을 일컫는 사람들입니다.
말라기 대언자 이후에 약 400년 동안 유대 민족은 급격한 이방 문화의 침투로 신앙과 민족적 정체성이 흔들렸습니다. 특히 마카비 시대에 유대 민족은 자신들의 종교를 말살하려는 이교도들의 책략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 때 필사적 신앙의 경건을 지킨 사람들로서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이라고 불렸던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에는 육천 명 가량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던 걸로 전해집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요7:50), 주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던 시몬(눅7:36), 예수님의 무덤을 마련해 준 요셉 등이 모두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다 지키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 모두 분류해서 그대로 살아 보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의 ‘의’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바울 역시 이러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빌3:5). 바리새인으로 살았다는 말은 율법에 관해서는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 말라는 공인된 보증서와 같습니다.
6-7절, [지금 내가 서서 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소망으로 인함이니 우리 열두 지파는 밤낮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이 소망에 이르기를 바라는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인해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였나이다.](6-7).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해서는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바울이 왜 유대인들의 고소를 받아 이렇게 재판을 받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 원인을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소망”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간절한 소망, 그들이 성취를 기다리던 약속은 “여자의 씨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자, 왕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창3:15, 사7:14)입니다. 모세와 같은 대언자가 나는 것입니다(신18:15,18).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이 소망에 이르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이 ‘이 소망’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침례인 요한이나 예수님을 향해 유대인들의 한결같은 질문은 언제나 “네가 그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그 대언자냐?”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이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다시 오심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광스런 소망, 복된 소망, 산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휴거와 부활이야 말로 모든 성도들이 꿈에도 바라고 그리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십시오. 이 소망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거나 육신에 속한 종교인일 것입니다.
8절입니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나이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을 선포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부활은 그다지 놀라운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죽은 자들의 부활’은 생소한 이야기요, 불가능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은 매우 익숙한 기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지금 부활하여 살아 있다'고 전한 것이 무엇이 이상한 일입니까?
유대인들이 그토록 이 사실을 부정하고 반대한 것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못 박은 살인자가 되어 버리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 분이 단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9절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바울의 신념입니다.
[참으로 내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하는 많은 일을 해야 함이 마땅한 줄로 스스로 생각하고](9).
바리새인 시절 바울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것이 마땅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현재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인 줄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요16:2). 캐톨릭은 성경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을 교회를 수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주장합니다.
바리새인 바울이 교회를 얼마나 많이 핍박했는지는 자신의 입을 통해서 다 나오고 있습니다.
10-11절,[예루살렘에서도 그 일을 행하여 내가 수제사장들로부터 권한을 받아 성도들 중에서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며 또 그들을 죽일 때에 그들을 대적하는 목소리를 내었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며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게하였고 또 그들을 향해 심히 격분하여 낮선 도시들에까지 가서 그들을 핍박하였나이다.](10-11).
율법주의자들, 거짓 종교인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12-18절은 바울이 회심하게 된 동기, 자신이 주님을 만난 간증입니다. 바울은 극적으로 주님을 만났는데 이는 바울이 만나고자 했거나 기도했거나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때는 다마스쿠스로 성도들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고 시각은 정오쯤이었습니다.
12-13,[내가 그 일로 수제사장들로부터 권한과 임무를 받아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을 때에 오 왕이여, 정오가 되어 내가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서 나와 및 나와 함께 길가는 자들을 둘러 비추었나이다.](12-13). 정오면 대낮이며, 해가 가장 밝은 때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해가 아니라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서 바울과 그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이 빛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이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에 해와 달이 필요 없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 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입니다(계21:23). 바울과 그 일행을 비춘 빛은 바로 이 빛입니다.
14절, [우리가 다 땅에 쓰러졌을 때에 내게 말씀하시는 한 음성이 있어 내가 들으매 히브리말로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기에](14).
바울을 비롯한 일행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밝은 빛에 모두 땅에 쓰러졌습니다. 이 빛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딤전6:16)이라고 불리는 그 빛입니다. 빛과 더불어 한 음성이 있었는데 주님이 ‘사울’을 부르는 음성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천상의 방언이니 알 수 없는 말이 아니라 바울의 모국어인 ‘히브리어’였습니다.
오순절 교인들이 이상한 방언을 말하면서 자신들이 ‘천상의 언어나 천사들의 말’을 하는 것처럼 떠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천사들이 항상 ‘히브리어’로 말 했다는 사실을 봅니다. 결코 이상한 언어가 아닙니다.주님은 사울에게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롬12:5, 고전6:15, 12:12). 후에 바울은 이것을 ‘교회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성도들을 때리고 가두고 죽인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이었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15).
바울은 말씀하시는 음성을 향해 ‘누구’인지를 물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가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늘에서 사울을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만 믿고, 부활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고 그들을 이단이요, 거짓이라고 정죄하고 핍박했던 바울입니다. 그는 여느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의 무리와 같이 예수를 단지 유대 종교를 모독하고, 율법을 거스르다 정죄를 받아 죽은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학습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들었으며, 체험했습니다.
16-18절입니다.
[오직 너는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곧 네가 본 이 일들과 또 앞으로 내가 네게 나타낼 그 일들에 대하여 너를 사역자와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라. 내가 너를 백성과 이방인들에게서 건져 내어 이제 그들에게로 보내는 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이 죄들의 용서를 받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된 자들 가운데서 상속유업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더이다.](행26:16-18).
주님께서 이렇게 빛 가운데 친히 나타나 바울을 부르시고 만나신 데는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사역자와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직접 본 일들에 대해 증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도권은 다른 사도들이나 교회에서 준 것이 아니라 영광의 주님께서 친히 주신 것입니다.
둘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눈을 열어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많은 이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도록 하기 위해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셋째, 상속 유업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사역의 목표를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바울의 구원 간증, 체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흠모하는 것들입니다. 성도들이 바울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그의 체험이 아니라 그가 주님을 따르고, 고난을 받고, 신실하게 따른 것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신학자가 아니라 복음 선포자요, 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성도들은 바울 신학, 바울이 받은 계시 등에 관심을 갖지만 우리가 따라야 할 바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혼들을 이겨 온 것입니다.
19-21절입니다. [그러므로, 오 아그립바 왕이여, 내가 하늘에 나타난 그 환상에 불순종하지 아니하여 먼저 다마스쿠스 사란들에게 또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두루 모든 유대 지방과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여야 함을 보이매 이러한 까닭에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붙잡아 죽이려 하였나이다.](19-21). 바울은 이제 자신이 받은 소명에 따라 일을 했을 뿐임을 왕과 총독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선포합니다. 바울을 움직인 것은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하늘에 나타난 환상 즉 주의 계시였습니다.
바울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 온 유대 지방은 물론이요 아시아와 유럽을 돌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해야 함”을 보인 것이 전부입니다. 이는 침례 요한이 선포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거듭남은 없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는 것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길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사고방식의 전환이며, 삶의 전환입니다. 이를 행위 구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란 마음속에 변화가 먼저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마음에 변화를 받고, 생각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의 복음을 선포할 때 믿고 받아들이면 그는 구원받습니다. 그렇지 않는 이들은 선포자를 죽이려 드는데 유대인들이 주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붙잡아 죽이려 한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과 이유를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22-23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나는 이 날까지 계속해서 작은 자와 큰 자에게 증언하며 오직 대언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말한 그것들만을 말하노니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야 할 첫 사람이 되사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보이시리라, 하는 것이니이다, 하니라.](22-23). 바울이 구원받은 후 지금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이 순간까지 한 일은 ‘오직 대언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말한 그것들만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입니다. 이것은 신약에 갑자기 나타난 진리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증언된 것들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모든 이에게 증언하는 것인데 그는 철저히 ‘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부활을 증언했고,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임을 선포했습니다.
요즘 “구약 폐기론, 구약 무용론”을 주장하는 궤변을 펼치는 사이비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구약 폐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약으로 자신을 증언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에도 그러하셨고, 부활 하신 후에도 그러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구약으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빌립 역시 구약으로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바울 역시 구약으로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구약 폐기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없애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의 증거를 받습니다. 구약의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 없이는 예수님이 그리스가 될 수 없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뿌리 없는 열매가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시편과 대언자들이 미리 말씀하고 기록한 그 사람을 믿는 것이지 구약의 증거 없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을 폐기하자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뒷받침할 근거와 증거를 모두 없애 버리자는 마귀적인 발상입니다. 구약은 예언이요, 신약은 성취로서 모든 성경 말씀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라는 증언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생명의 말씀(요일1:1)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듯이 신학자들, 철학자들, 소위 높은 학위를 가진 이들이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그가 이같이 자기를 위해 말하매 베스도가 큰 소리로 이르되, 바울아, 네가 제정신이 아니니 많은 학식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 하나](24). 바울의 증언을 들은 베스도는 바울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오순절에 성령 충만한 복음 선포를 하는 사도들을 향해 유대인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능력 있는 이적들을 행하는 주님을 향해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붑'을 힘입어서 하는 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믿으려 하지 않는 이들은 무슨 말이나 행위나 증거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25-26절, [그가 이르되, 베스도 각하, 나는 미치지 아니하였으며 참된 말과 맑은 정신의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들에 대하여 아시므로 내가 왕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아뢰나이다. 또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왕께 숨겨지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한 구석에서 일어나지 아니하였나이다.](25-26).
바울은 총독 베스도가 아니라 ‘아그립바 왕’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지금 아그립바 왕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이런 일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적 배경이나 지식이 전혀 없는 총독과 달리 아그립바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다 아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일 당시 비록 30여 년 전 사건이긴 하지만 예수님이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형 언도를 받고 죽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어느 시골 작은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이요, 모든 유대인들이 모였던 유월절 명절에 있었던 민족적 대 사건이었습니다.
27-28절, [아그립바 왕이여, 왕께서는 대언자들의 글을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하니 그때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 하매](27-28).
바울의 마지막 결정타입니다. “왕께서는 대언자들의 글을 믿으시나이까?”라는 물음에 그는 믿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그립바는 종교적으로 유대교를 표방하고 자칭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언자들의 글을 믿는다면 바울의 증언을 반박하거나 믿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대언자들의 글 즉 성경에 따른 선포였기 때문입니다.
대언자들의 글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대언자들의 글을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일어나 증언해도 확신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옥에서 고통 받는 자의 소원을 거절할 때 한 말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저들의 말을 들을 것이니라, 하매](눅16:29). [그가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지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눅16:31).
구약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구약을 믿는 이들이라면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는 바울의 도전적인 질문에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답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결국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선포를 통해 마음속에는 믿음의 근거가 충분히 생겼고 납득이 갔지만 의지적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이해가 되었다고 하면서 믿지 않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겠다, 나중에 믿겠다, 등등의 변명을 함으로써 여전히 지옥 자식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역시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29절, [바울이 이르되, 각하뿐 아니라 이 날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이렇게 결박당한 것을 빼고는 거의 나와 같이 되고 전적으로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29). 29절은 바울의 소원입니다. 바울은 이 날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믿고 구원받은 것처럼” 구원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소원이며, 기도입니다. 자신이 결박당한 것 같은 결박을 제외하고는 누구라도 다 “나와 같이 되고, 전적으로 나와 같게 되기를” 하나님께 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소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4:16, 11:1, 빌3:17),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외칩니다.
30-32절, [그가 이같이 말하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또 그들과 함께 앉은 자들이 일어나 한쪽으로 물러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이르되, 이 사람은 죽거나 결박당할 일을 전혀 하지 아니하는도다, 하고 그때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카이사르에게 청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도다, 하니라.]
이제 모든 재판은 끝났고, 이들은 바울의 무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바울은 카이사르에게 청원했던지라 석방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사슬에 묶인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2020-02-02 14: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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