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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말씀: 행 27:1-44, 요절: 행27:25. 2020년 2월 9일 일요일 오후 2시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이탈리아의 로마로 이송하는 과정은 매우 멀고도 험한 항로였습니다. 지중해를 동서로 가로 질러 엄청나게 먼 거리를 배로 움직이는 장면의 기록을 읽노라면 마치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을 실은 배는 도중에 몇 개의 섬을 지나서 로마로 도착하는 과정에서 폭풍을 만났기 때문에 참으로 힘든 여정의 연속입니다.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무죄를 알았지만 석방하지 않았고, 바울의 청원대로 카이사르에게 보내어 최종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반드시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는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감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와, “바울아, 기운을 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해 증언하였듯이 반드시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는 말씀대로 되어 가는 중입니다.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사슬에 결박된 채 호송선을 타고 로마로 가는 것은 바울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주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에서 주님 앞에 갖고 있는 많은 소원, 기도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하게 응답되어 진다는 사실을 잘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1절입니다. [우리가 배 타고 이탈리아에 가기로 결정되매 그들이 바울과 어떤 다른 죄수들을 아우구스투스 부대의 백부장인 율리오라 하는 사람에게 넘겨 주니라.](행27:1).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이송하는 책임을 맡은 백부장 율리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이제 바울은 여느 잡범들이나 흉악범들과 같은 죄수의 신분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죄수들 속에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도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로마의 카이사르와 많은 이들 앞에 복음으로 인하여 죄수 된 종 바울을 ‘사슬에 묶인 대사’(엡6:20)로 파송하고 계십니다. 죄수 된 바울은 가장 낮은 모습, 가장 천한 모습으로 복음의 선물을 안고 꼭 한번 방문하겠다고 결심한 로마로 향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우리가 아시아 해안을 따라 항해하려 하는 아드라미티움의 배에 타고 떠났는데 데살로니가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 아리스다고가 우리와 함께하니라. 다음 날 우리가 시돈에 닿았는데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우하고 그에게 자유를 주어 그의 친구들에게 가서 휴식을 취하게 하니라.](2-3).
배는 가이사랴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시돈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대해를 가로 지르는 대신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탄 배에 중요 인물은 백부장 율리오와, 아리스다고 입니다. 백부장은 바울을 친절히 대해주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풀어서 친구들에게 가서 휴식을 취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항해하는 배 속에서도 은밀하고도 강력하게 임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서부 영화를 통해 보거나 “벤허”라는 영화에서처럼 로마까지 끌려가는 죄수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 손과 양 발에 사슬이 채워져 꼼짝 할 수 없게 묶어두거나 배의 밑바닥에서 노를 젓게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외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4-6절입니다. 성경기록자 누가는 지금 바울이 마치 여행을 떠난 문학도나 기자나 되는 것처럼 로마로 가는 여행 일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여행을 다녀온 기행문이 아니라 선교 여행기록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배를 타고 떠나는 과정은 물론이고 배의 이름(아드라미티움), 배에 탄 사람들, 백부장, 항해 경로, 그 때의 날씨 등을 일일이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났으나 바람이 반대로 불므로 키프로스 아래쪽으로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지나 항해하여 루기아의 도시 무라에 이르렀더니 거기서 백부장이 이탈리아로 항해 중인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만나 우리를 그 안에 태우니라.](4-6).
‘바람이 반대로 불므로’란 말은 이 때가 항해하기에 좋지 않는 시점이요, 이번 여행길이 매우 어렵게 진행될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배는 키프로스를 지났는데 이곳은 바울이 태어난 도시 ‘다소’ 앞에 있는 큰 섬입니다. 바울은 자기 고향 앞바다를 통과하며 ‘무라’에 도착했습니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뜻으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는데 고향을 그리워 한다는 말로 씁니다. 사람 역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묻히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땅에 조금도 미련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저 하늘이기 때문입니다(히11:16).
백부장 율리오는 ‘무라’에서 이탈리아로 항해 중인 ‘알렉산드리아의’ 배로 바울을 옮겨 태웠습니다. 신약 성경에 ‘알렉산드리아’란 지명은 언제나 나쁜 인물, 나쁜 사건, 나쁜 영적 의미를 지니는 곳에만 출연합니다. 성경의 인명과 지명을 공부해 보면 알렉산드리아가 처음 등장한 예는 사도행전 6:9입니다.
처음 나오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어떤 사람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철학과 인문학의 고장이지 결코 성경을 믿는 성경 신자들의 도시가 아닙니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던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나오는 알렉산드리아란 지명은 거기 출신의 ‘아볼로’라는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이 에베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장면입니다(행18:24).
세 번째 등장하는 알렉산드리아는 오늘 본문의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배의 이름입니다(행27:6, 28:11).
성경에 등장하는 이 알렉산드리아는 교회사를 통해 볼 때 모든 이단들의 발상지이며, 성경 부패의 온상지가 됩니다. 오늘날 킹제임스 성경을 대적하는 모든 역본들이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옵니다. 필로, 오리겐, 아우구스티누스, 제롬 등이 모두 이곳 알렉산드리아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7-8절입니다. [우리가 여러 날을 천천히 항해하다가 간신히 크니두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나 바람이 우리를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살모네 맞은편을 지나 크레테 아래쪽으로 항해하고 어렵게 그곳을 지나 아름다운 항구라 하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라세아 시(市)에서 가깝더라.](7-8).
오늘날처럼 기름으로 움직이는 배가 아니라 노를 저어가는 배가 역풍을 맞으며 항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들은 겨우 겨우 크니두스 맞은편에 도착했습니다. 바람으로 인해 아테네나 고린도로 직진해서 항해하지 못하고 이들은 방향을 틀어 ‘크레테 섬’으로 향했습니다.
크레테 섬의 ‘아름다운 항구’란 곳에 도착해서 배를 정박시켰습니다. 크레테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삼개 대륙의 한 중앙에 있는 섬입니다. 아시아의 에베소, 유럽의 아테네, 이집트의 구레네에서 모두 가까운 섬입니다. 바울은 이곳 사람들을 향해 “크레테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게으른 탐식가라.”(딛1:12)고 말했는데 이 곳 교회에 ‘에바브로 디도’를 초대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디도서 1:5에 보면 바울이 디도를 이곳에 남겨 두고 목회를 하도록 했음을 봅니다(딛1:5).
9-10절입니다. [이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금식하는 때도 이제 지나 항해하는 일이 이제 위험하게 되었으므로 바울이 그들에게 권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선생들아, 내가 보니 이번 항해에서는 짐과 배뿐만 아니라 우리 생명도 다치게 되고 많은 손실이 있으리라, 하되](9-10). 배는 크레테에서 더 이상 항해하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금식하는 때’란 것은 유대력으로 7월 10일에 행해진 ‘속죄일’을 말합니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전 민족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을 바쳤고, 금식이 요구되었습니다(레23:27; 25:9; 16:29; 23:31). 현재 우리 달력으로 하면 9월 25일 경입니다.
바울은 지중해 연안과 에게 해 지방을 중심으로 수십 년 동안 전도 여행을 다녔던 터라 지금 이 시기가 풍랑이 일고, 바람이 거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중해 연안 사람들이라면 상식적으로 아는 그런 기후입니다. 바울은 지금 항해한다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임을 말했고, 짐과 배는 물론이요 우리 생명도 다치게 될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하는 ‘대언’이기도 했습니다. 경험 많고 노련한 바울의 말은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뱃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확합니다.
11-12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배의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이 말한 그것들 보다 더 믿더라. 또 그 항구가 겨울을 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어찌하든지 베니게까지 가서 거기서 겨울을 나자고 권고하는 자가 더 많더라. 베니게는 크레테의 항구로 남서쪽과 북서쪽을 향하고 있더라.](27:11-12).
백부장은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고, 호감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이번 항해에 관한 바울의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배나 항해에 대해서 바울은 아마추어라면 선장과 선주는 전문가 수준일 것이란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선주와 선장의 말을 들은 것은 현실적인 면도 상당히 고려되었습니다. 지금 정박하고 있는 항구에서는 겨울을 나기가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수의 여론이 하루라도 빨리 베니게까지 가서 거기서 겨울을 나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바울의 목소리는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누구의 말을 더 믿는가? 이것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누구의 판단을 믿을 것인가? 누구의 말을 더 믿을 것인가?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때로 사업을 하는데 투자가들의 말은 목사의 말보다 훨씬 더 신뢰가 갑니다. 때로 직장을 고르는데 선배들의 말이나 유경험자들의 말은 신앙 선배들이나 교회 형제들의 말보다 훨씬 더 믿음이 갑니다.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이들의 말은 설교나 하는 목회자들의 충고보다 더 와 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판단의 기준이 다릅니다. 목회자들은 사업의 승패나 장래성이나 당장의 이익 실현 여부보다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탐욕에서 비롯된 것인가? 신앙을 방해하는 일은 아닌가? 등등을 기준으로 판단해서 권면하고 충고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좋을 것 같다고 권면하며, 수입이 많을 것 같은 일이라도 그 일이 믿음을 해치고, 영적 생활을 방해할 것 같으면 그 일을 하지 말도록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듣는가? 신뢰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전문가들, 유경험자들의 충고와 권면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충고와 권면을 항상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합니까? 세상 학문이나 지식이 부족해서입니까? 목회자는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은 전문가에게 미치지 못함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우신 영적 지도자들을 통하여 인도하심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13-15절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로 생각하여 거기서 닻을 올리고 크레테 곁으로 바싹 붙어 항해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로클루돈이라 하는 폭풍이 일어 그것을 대적하매 배가 휘말려서 바람을 뚫고 나아갈 수 없으므로 바람이 몰고 가게 하니라.](13-15).
백부장은 출항을 명했고, 배가 떠날 때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이 때 출항을 주장한 이들은 자신들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레테 섬의 해안을 따라 항해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로클루돈’라 하는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배는 폭풍에 휘말렸고 이제는 바람과 파도에 밀려 가는대로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얼마나 자주 ‘유로클루돈’을 만나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더 나은 환경, 더 좋은 무엇을 얻고자 시도한 일이 출발을 하자마자 곧 바로 거친 풍랑에 밀려 ‘표류’하는 일은 남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에서 구르고, 쓰러지고, 파선의 위기에 놓인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고난이 겹칠 때는 말씀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합니다.
시편107:23-30절을 보십시오. [배로 바다에 내려가는 자들과 큰물에서 사업을 하는 자들 곧 이들은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깊음 속에 있는 그분의 이적들을 보나니 그분께서 명령하사 폭풍을 일으키시매 그것이 자기의 파도들을 높이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깊음들로 내려가니 고난으로 인하여 그들의 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고 술 취한 자처럼 비틀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도다. 그때에 그들이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그들을 그들의 고통에서 데리고 나오시며 폭풍을 고요하게 하시므로 그것의 파도들이 잔잔하게 되는도다. 파도들이 조용하므로 그때에 그들이 즐거워하나니 이처럼 그분께서 그들이 원하는 항구로 그들을 데려가시는도다.](시107:23~30).
하늘에서 해를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 주님이시듯이 바다에 바람과 폭풍을 일으키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잔잔케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원하는 항구로 인도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인생의 항해 역시 동일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거나 시도하지 마십시오. 주께 부르짖으십시오. 28-29정을 다시 보십시오, [그때에 그들이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그들을 그들의 고통에서 데리고 나오시며 폭풍을 고요하게 하시므로 그것의 파도들이 잔잔하게 되는도다.]
본문 16-19절은 배에 탄 이들이 폭풍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장면입니다. 돛을 내리고,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들을 버립니다(18), 배의 밧줄 감는 기구까지 버렸습니다(19). 그나마 살아남기 위해 정신을 차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풍랑 가운데에서는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버리고, 가볍게 하는 것이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방법과 동일합니다. 붙들고 있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그나마 사는데 좀 더 도움을 주는 예가 허다합니다. 특히 성도들은 자신들을 얽어매는 죄와, 무거운 짐들을 빨리 벗어 버려야 합니다(히12:2). 입술로는 나그네 인생이라 말하면서 생활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너무 많이 쥐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짐을 주께 맡기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가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시37:5),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벧전5:7).
무엇보다도 주께서 친히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자들을 내게로 오라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 11:28) 주님은 우리를 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맡겨도 다 맡아 주십니다. 심지어 원수 갚는 것까지도 자신에게 맡기면(롬12:9), 대신 갚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안고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모두 주님께 던져 맡김으로써 가볍게 하십시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읽고 배워 알고 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애늙은이들이 수두룩합니다. 말로는 청산유수요 남들에게 잘도 아는 척하는데 막상 자신은 행함이 없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의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20절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작지 않은 폭풍이 우리를 덮치매 우리가 구원받으리라는 모든 희망이 그때에 사라졌더라.](20). 바울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닙니다. 전에 세 번 파선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세 번 파선을 당하여 한 밤과 한 낮을 깊음 속에 있었으며](고후11:25b).
매일 보는 해와 달을 여러 날 보지 못했습니다. 매일 먹고 마시는 음식과 물을 여러 날 맛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매일 편안한 잠자리에서 자야하는데 그러한 안식을 누리지 못한 날들이 여러 날입니다. 폭풍은 계속 덮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젠 죽었구나.’란 것 외에 달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이들 가운데는 ‘목자’가 있었습니다. 이 배의 리더는 선장이나 백부장이 아니라 죄수의 신분으로 탄 하나님의 사역자 바울이었습니다.
21-26절은 폭풍 속에서 구원의 희망마저 사라진 배에서 한 바울의 설교입니다.
21-22절, [그러나 오랫동안 먹지 아니한 뒤에 바울이 그들의 한가운데로 나아가 서서 이르되, 선생들아, 너희가 내 말을 듣고 크레테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러한 피해와 손실을 면하였어야 하였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기운을 내라. 배만 잃을 뿐 너희 가운데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아니하리라.](21-22).
바울은 일단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항해를 강행한 이들을 책망했습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는 언제나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능자의 보장이나 전문성이 전혀 없는 점쟁이, 무당, 점성술가 등이 용하다는 소문 하나에 그들의 말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원망이나 책망 이전에 자신이 한 말이 옳았음을 입증하므로 지금 하고자 하는 말에 신뢰를 가지도록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란 점을 각인시켜 주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폭풍우 속의 흔들리는 배에서 그들에게 “이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기운을 내라. 배만 잃을 뿐 너희 중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아니하리라.”(22).고 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바다에서 배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고, 곧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 중 한 명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경험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자기 예언이나 별을 보고 점을 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곁에는 이 폭풍에 시달리는 배 속에서 말씀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23-24절, [나를 소유하신 하나님 곧 내가 섬기는 분의 천사가 이 밤에 내 곁에 서서 이르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반드시 카이사르 앞에 가야 하리라. 보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느니라, 하였으니](23-24). 주님의 천사가 바울을 찾아 왔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전에 주님으로부터 이미 ‘네가 반드시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는 말씀을 받았기에 자신이 바다에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함께 탄 선원들과 죄수들인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의 안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배에 탄 모든 자들을 다 바울에게 맡기셨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이들, 구원의 희망마저 사라진 이들에게 바울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입에서 나온 말대로 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5-26절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들아, 기운을 내라. 내가 하나님을 믿노니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어떤 섬에 닿으리라, 하니라.] 믿음의 근거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하시는 분,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들은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섬에 닿게 된다는 것은 바울의 믿음에 찬 확신입니다. 암흑 가운데서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언제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노니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는 고백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시간이 걸리고, 내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더라도 주님이 이미 말씀하셨으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너무 미리 속단해서 말씀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선원들을 상대로 선포를 했지만 배는 그 다음 날 곧 바로 육지를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항구가 보이거나 구조선이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환경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환경을 바꾸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주시고, 우리 속에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말씀에 소망을 갖고 인내하고, 환경을 이기는 것이 영적인 삶이며, 신앙의 삶입니다.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귀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삽니다. 바울 역시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과정은 자세히 몰랐지만 결과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된다는 한 가지는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27-29절입니다. [그러나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닐 때에 자정쯤 되어 선원들은 자기들이 어떤 지방에 가까이 이른 줄 짐작 하니라. 그들이 물 깊이를 재고는 그것이 스무 길인 줄 알았고 조금 더 가다가 다시 재고는 그것이 열다섯 길인 줄 알았더라. 그때에 우리가 암초에 걸릴까 두려워하였으므로 그들이 뱃고물에서 닻 네 개를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27-29).
바울의 말에도 불구하고 배는 바다 위에서 열나흘이나 더 밀려 다녔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고 말씀을 전한 사람을 비웃고 욕하고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하고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내 포기 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지는 않습니까?
이들에게 2주간은 20년보다 더 긴 시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믿었다고 해서 단숨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2주가 아니라 20년이 지나서 그 말씀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 약속의 말씀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말씀하신 약속들을 이루어 주십니다.
딤후2:13입니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환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믿으면 전부입니다.
아드리아 바다에서 밀려다니던 배가 어느 날 어떤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선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배가 어떤 지방에 가까운 줄 알고, 물 깊이를 재고 암초에 걸릴까봐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30-32절입니다. [선원들이 배에서 도망하려 하면서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머무르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사들이 거룻배의 밧줄을 끊어 그것을 떨어뜨리니라.](30-32).
이런 중에 선원들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 살겠다고 배에서 도망하려고 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언제 다시 폭풍이 올지, 배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함께 기쁨을 나누지 못하고 위험과 슬픔과 고난을 함께 공유하지 못합니다. 기쁠 때는 함께 나누는 대신 자랑을 합니다. 위기, 위험, 고난, 슬픔이 닥치면 홀로 빠져 나갈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성도들은 그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롬12:15).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배를 통제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선장이나 백부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배의 모든 혼들을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망치려는 선원들을 명하여 단호하게 한 명도 도망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배에서 떠나는 이들은 결단코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군사들은 바울의 말대로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거룻배의 밧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거듭난 여러분들은 자신들이 속한 곳의 모든 혼들을 맡은 목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독이란 직분을 맡기셨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주위에 있는 혼들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들(고후5:20)이요, 우리는 화해의 직분을 맡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는 진정한 리더쉽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모든 리더쉽의 근원은 자신의 영적 신분과 영적 사명을 정확히 인식하고 믿는데서 비롯됩니다. 쟌 웨슬레는 온 세상이 나의 교구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곳 간석동과 인천에 우리를 두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 선포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33-38절은 바울이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먹이고, 기운을 내게 하며, 안심케 하는 장면입니다. 목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그들 모두에게 간청하여 음식을 먹게 하고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며 계속해서 아무것도 먹지 아니하고 금식한 지가 이 날로 열나흘 째니 그러므로 청하건대 음식을 조금 먹으라. 이 일이 너희의 건강을 위하느니라. 또 너희 중의 어떤 사람의 머리에서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하고 그가 빵을 취하여 그들 모두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것을 떼어 먹기 시작하매 그때에 그들도 다 기운을 내어 음식을 조금 먹으니라. 그 배에 있던 우리는 전부 이백칠십육 혼이더라. 그들이 충분히 먹고 배를 가볍게 하며 밀을 바다에 버리니라.](33-38).
바울은 2주간이나 굶었던 사람들을 모두 먹게 하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바울이 빵을 취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장면을 보십시오. 이들은 어느 덧 모두 바울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배에 탄 사람은 무려 276명이나 되었습니다.
39-44절입니다. 드디어 해변이 있는 작은 항만을 발견했습니다(39). 그러나 배를 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배는 암초에 걸렸고, 배 뒷전은 파도에 깨어졌습니다(40-41). 군사들은 행여나 죄수들이 하나라도 도망갈까 봐 모두 죽여 버리고자 했습니다(42). 위기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는 그대로 일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들의 계획을 막았습니다.
43-44절입니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의도를 막고 명령을 내려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은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 육지로 오르게 하며 남은 사람들 중 얼마는 널빤지에, 얼마는 배의 부서진 조각들에 의지하게 하니라. 이처럼 그들이 다 땅으로 안전하게 피신 하니라.](43~44).
바울이 미리 말한 대로 ‘배’는 잃어 버렸지만 사람들은 다 땅으로 안전하게 피신했습니다.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말씀을 믿은 바울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020-02-09 14: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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