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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광 [ E-mail ]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리라
  http://av1611.co.kr

제목: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리라
(부제: 교회 내 장애인 인식 개선)
■ 본문: (요 9:1~3) “1)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blind) 사람(a man)을 보시매 2)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 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him)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읽은 요한복음 9:3절에서 “그(him)”는 누구일까요? 네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입니다. 이런 분을 요즈음 표현으로 “시각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이 눈먼 사람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 보시는 반면에 사람들은 한 장애인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장애’를 정의하면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어려워서 장기간에 걸쳐 신체적, 정신적, 지적, 감각적 기능이 낮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을 질병의 원흉이나 바이러스 전파자 같이 여겨서 폄하하거나 낮잡아 여김으로 주변에 있는 것조차도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욱이 지적 장애가 있는 경우는 생각(사고)하는 바가 어린아이 같아서 그의 인격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는 교회 내에서도 세상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하여도 “a man(한 사람)”(요 9:1)이라고 하시면서, 사람으로서 그의 인권을 존중받아야 하는 동등한 존재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장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위로의 하나님
저는 우리 교회 목사님의 조언으로 해서 2018년도부터 장애인 활동지원을 하면서 저의 가정의 경제적 여건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저도 전에는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장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보니 주변에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장애’라는 기준의 범주는 각 시대마다, 또는 각 나라의 여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정한 장애의 15가지 유형과 그 범주에 의하면, 2017년 12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총인구 중에 255만명, 전체 인구의 약 5%가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입니다. 다시말하면 여섯 가구 당 한 가구가 장애인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한 분이 계시고, 또한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옆집에도 장애인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장애가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습니다.
장애를 크게 구분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선천성 장애와 사고나 질환으로 장애를 갖게 된 후천성 중도 장애가 있습니다. 이 두 장애의 비율을 보면 선천적 장애가 약27%, 중도 장애가 약73%가 된다고 합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보다 사고나 질환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 2.7배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요한복음 9장에서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분들이 있고, 불의의 사고로 어느 날부터 장애를 갖게 된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장애인을 사람 이하로 낮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소경’(개역성경)이라고 해서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장애가 있다고 해서 낮잡아 보거나 하찮게 대우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장애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의 머릿털까지 다 세는 분입니다.
(마 10:29~31) “29) 참새 두 마리가 일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31)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들이 다 귀중하지만, 더 귀중한 존재가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장애가 있다고 해도 그도 존중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 귀중한 존재인 사람에게 장애를 허락하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장애인과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분, 그리고 그의 부모님과 가족분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주어진 시험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족 중에 장애인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고전 10:13).
여러분이 장애인 가족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세상의 악한 시선과 차별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장애인 가족을 돌보는 수고와 힘듬과 경제적 애로를 모르실까요? 아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인가 불편하게 하고, 힘들고 유익이 안된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버리는 대상이 장애인 가족이든, 노 부모든 버리면 사람들이 만든 사회 시스템을 통하여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믿음이 있다면, 가족을 돌보고, 형제의 어려움을 살피고 도우며, 부모를 부양하라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이 연결해 주신 관계도 중요시 해야 합니다. 가족 중에 장애가 있건 없건 부모가 부자건 아니건 간에 하나님이 가족으로 맺어주셨기 때문에 가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느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 상대방을 선택해서 연결된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상의 관계로 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자녀인 △△이에게 물어볼까요? △△이는 아빠인 □□ 형제가 자신을 잘 돌보고, 잘 인도할거라고 판단해서 아빠로 선택해서 태어났나요? 아니죠! 그러면 부모인 □□에게 여쭙겠습니다. □□ 형제님은 자녀인 △△이가 착하고 말을 잘 듣고 예쁠거라고 생각해서 자녀로 선택해서 태어났나요? 아니죠!
이렇게 가족이라는 관계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다면, 그 정하심에 각 사람이 좋게 반응할 때 최상의 복된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와 연결시켜주신 관계를 중요시 해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 인해서 부모 자식간에, 형제 자매간에 기분이 나쁘거나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버리거나 끊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한다면 그분이 연결해주신 가족 관계를 중요시 하는 것은 마땅한 행동입니다. 그 대상이 가족 중에 있는 장애인이라도 말입니다. 교회 내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아닙니다.
다 아시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선한 분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나에게 허락하신 그 어떤 일들도 모두 선한 의도와 선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장애인 가족으로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은 돌이킴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알건 알지 못하건 간에 여러분이 장애인의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시험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면 복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이기 때문에 좋은 목적과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험을 기쁘게 감당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허락하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분명히 장애인 가족으로 겪게 되는 시험들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의 자녀 중에, 나의 부모 중에, 나의 형제 중에, 나의 가족 중에 지금 장애를 갖고 있는 분이 계시면, 우리가 고대하는 그 날, 모두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날, 그 때는 우리의 가족 중에 있던 그의 장애가 완전하게 회복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그도 우리와 함께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조금 더 힘내십시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온 수고와 고생을 주님께서 보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2. 사람의 외모를 중히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까? 네에, 맞습니다.
(계 4:11)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그러면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도 주님이 창조하셨을까요? 네에,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면 요한복음 9장에서 하나님은 눈먼 “a man(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우리가 이 사람의 외모를 중시하면(낮잡아 하찮게 여기면)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요?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고서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말라.”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외모를 중히 여기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매주 우리 교회의 ○○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서 누구를 가장 예쁘게 보시고, 가장 선하게 보시고, 가장 순수하게 보실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와 저 중에서 누가 더 예쁘고, 선하고, 순수할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와 여러분 중에서 누가 더 예쁘고, 선하고, 순수할까요? 사람들의 시각 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떨까요?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시각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약 2:9) “너희가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면 죄를 범하고 율법에 의해 범법자로 확정되리라.”
지금 읽을 야고보서 2:9절을 보면, 사람의 외모를 보고 누구는 중요시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면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잘났건 못났건, 장애가 있건 없건, 어떤 사람을 중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보면서 특히 장애인을 보면서 “쯧쯧쯧~” 하면서 마음의 생각으로 장애인을 낮게 여기는 마음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세상에 속해 있을 때, 입으로는 장애인을 외모로 평가하지는 않았겠지만, 스치는 생각으로라도 장애인의 외모를 중시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영접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거듭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런 잘못된 시각을 지금도 여전히 계속 갖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거듭난 이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잘못된 편견들을 올바르게 분별해서 예전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해서 그 어떤 대상(오늘은 장애인에 대한 말씀)을 바라볼 때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시각을 갖고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면 안됩니다.
3. 장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으로 읽은 요한복음 9장에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분이 있는데요,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려고 하나님께서 그를 장애인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만드셨고, 또 어떤 사람은 살아가면서 중간에 장애를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첫째, 요한복음 9장에는 선천성 장애인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각이 드러나 있습니다. 다 같이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 9:1)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예수님이 본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가려져(blind) 있는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장애를 갖고 태어나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요 9:2)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떤 사람이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에 대해 누군가의 죄로 인해 그가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일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성경은 원죄(아담의 유전적 죄)와 자범죄(자기 의지로 지은 죄)라는 표현의 구분 없이 “죄”라고 하고 있으며, 만약 원죄가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죽는다고 기록된 말씀이 없습니다. 어쨋건 누군가의 죄로 인해 그가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는 이런 오류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마저도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죄로 인해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라고 믿었든지, 그게 아니면 부모가 지은 죄로 인해 그 사람이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같이 누군가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면 조상의 죄나 자범 죄로 인해 태어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요 9: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누군가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다시 말하면 그의 장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어떤 일들이 나타내시려고 그렇게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일들”이란?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데 관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창조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요 1:1). 그렇죠! 그분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요 1:3). 그런데 요한복음 9장의 이 사람이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없었던 눈을 그 자리에서 직접 만들어 주시는 창조 사역,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심으로(요 9:6)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때나 지금도 사람들은 장애인 보기를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장애를 갖고 태어나게 하심으로 그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 즉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장애인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들이 생각은 차원이 다릅니다.
교회인 우리들이 장애를 갖고 계신 분들에 대해 갖아야 할 시각이 어때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하심, 우리는 그 일들이 어떤 때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시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모른다고 하나님이 그 일들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들을 나타내려고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도자기 만드는 사람은 어떤 그릇을 만들 때,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그릇을 다양하게 만듭니다. 전시용 그릇일 수 있고, 음식을 담는 그릇일 수 있고, 꽃을 담는 그릇일 수 있고, 더러운 오물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사람은 각각의 그릇마다 용도와 목적을 갖고 만듭니다.
하나님도 선한 목적을 갖고 자신이 계획하는 때에 사용하고자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만드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를 창조하신 공통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엡 2: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는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하셨고 그 안에서 걷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통적인 목적이 있고, 또한 각 사람을 통해서만 나타내고자 하는 특별한 목적도 있습니다. 창세기 45장에는 이집트의 치리자가 된 요셉이 형제들을 만나서 한 말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큰 구출로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당신들을 위해 후손을 땅에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다”(창 45:4~8)는 이런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요한복음 9장에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시려는 특별한 목적이 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음속으로라도 장애인을 낮게 보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그럴리 없지만,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장애를 갖고 태어난 분들을 만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을 볼 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존재라는 인식으로 그분들의 혼(soul)도 중요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갖아야 할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태도입니다.
둘째로 살펴볼 말씀은 창세기 32장인데요. 장애 없이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어느 날부터 장애를 주신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창 32:24~28) “24) ¶ 야곱이 홀로 남았는데 어떤 남자가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wrestled)하다가 25) 자기가 그를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에 손을 대매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그와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out of joint).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를 가게 하라, 하매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당신을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27)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하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니 이는 네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power)이 있어 이겼기(prevailed) 때문이니라, 하니라.”
이 말씀은 설교 예화로 많이 이용되다 보니 많이 아시는 야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형 에서에게 주려던 축복을 가로채서 형을 피해 고향을 떠났고,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지내고, 다시 고향으로 향해 가는 길에 어떤 사람(주님)과 씨름(wrestled, 레스링)을 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 씨름에서 야곱이 만난 어떤 사람은 주님이셨는데, 25절에 야곱의 고관절이 빠진 것으로 보아 씨름에는 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설득함(prevailed)으로 영적인 축복(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음)을 받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축복을 계속 기억하면서 살아가도록 주님은 그의 다리 관절을 위골 시키셨는데, 그 이후 평생 동안 절뚝거리며 걷는(창 32:31) 육신의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영적으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데요. 우리는 여기서 죄인이 주님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서져야 한다는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부서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야곱이라는 그의 이름에서와 같이 육신 안에서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자기 손으로 발꿈치를 잡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하나님 없이 자기 육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thou power with God(네 능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영적 원리는 우리 신약 성도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교리를 아는 것에서만 멈추면 안 됩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이나 프로그램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이나 지역교회나 주님만을 신뢰할 때, 말씀만을 신뢰할 때, 제대로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님이 주로 하시는 일은 주님의 말씀이 성도들 마음속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교회(성도들)도 다른 성도의 마음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일하도록 돕는 것입니다(살전 2:13).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까지 야곱의 삶은 이랬습니다. 그는 거짓말로 인해서 부모를 떠나게 되었고, 형과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삼촌 이자 장인과도 좋은 관계로 혜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관계가 깨진 이유는 야곱의 자기 사랑과 이기주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인생 중에 가장 크게 실패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야곱은 조상의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하나님으로 교제하고 동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창 32:9) “¶ 야곱이 또 이르되, 오 내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전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 고향 네 친족에게 돌아가라. 내가 너를 선하게 대하리라, 하셨나이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씨름하는 이 말씀에 대해 오해들이 좀 있는데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싸움을 먼저 건 것은 야곱이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24절). 야곱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결국은 부상을 당했습니다(25절). 승리할 뻔했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의 약한 부위를 치셨고 그래서 졌습니다. 야곱이 씨름에 승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을 통하여 야곱의 자아와 교만을 끌어내시고 자신의 머리와 수단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야곱이 한 기도를 들으시고(창 32:9~11) 도와주시기 위해서 그를 부수시고 깨뜨리셔야 했던 것입니다(12절). 야곱의 기도와 답변을 확인해 볼까요?
(창 32:9~12) “9) ¶ 야곱이 또 이르되, 오 내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전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 고향 네 친족에게 돌아가라. 내가 너를 선하게 대하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보여 주신 모든 긍휼과 모든 진리 중 가장 작은 것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르단을 건넜으나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그가 와서 나와 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머니를 칠까 염려하므로 내가 그를 두려워하나이다. 12)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네게 선을 베풀고 네 씨가 바다의 모래같이 곧 너무 많아서 셀 수 없는 모래같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잔꾀나 실력을 신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육신적으로 살았던 지난 날들에서와 같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육신의 정욕이나 욕심이나 자랑이나 세상 꽤로 살아간다면, 그의 권능에 하나님이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롬 8:1, 롬 8:4, 롬 8:5, 롬 8:9, 롬 8:13, 갈 5:16, 갈 5:17, 갈 6:8 등). 그의 권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려면 지난 날들과 같은 야곱으로 산 육신적인 생각은 죽고, 영적인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 성도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롬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육신적으로 살던 그런 ‘야곱’에서 그의 능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한 최선의 처방은 야곱이 스스로 신뢰하는 육신을 쳐서 더 이상 그 육신을 신뢰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서 그분의 말씀을 믿는 권능으로 살아가도록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신적으로 살던 야곱이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이스라엘로 살아가도록 육신의 걸음을 대표할 수 있는 넓적다리 우묵한 곳을 치셔서 그날 이후 절뚝거리는 육신의 나약함을 갖게 하시고,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육신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을 기억하도록 육신의 장애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육신적인 생각과 같이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으면 장애를 갖게 되는 것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땅에서의 장애는 영원한 저주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마 5:29~30).
하나님께서 장애를 갖게 된 야곱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중도 장애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장애 없이 살다가 어느날 사고를 당해서건, 병을 통해서건 장애인이 된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앞서 야곱에게 더 낳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장애를 주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인이 된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 장애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걷고 사는 영적 생활을 위해서 장애를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갖아야 합니다.
4, 장애가 있건 없건 사람의 한 혼(soul)은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장애가 있건 없건 그런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혼(soul)입니다. 그 혼이 반드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기록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본래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장애가 있건 없건 간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주님으로 받아들이면, 그의 혼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일하게 정하신 혼의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면 그 사람은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과 마귀와 함께 영원한 불못의 형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딤전 2:4).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요 3:3,7). 장애인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한 혼을 위해 우리가 믿어야 할 말씀입니다.
5. 그리스도 안에서는 장애인 차별이 없습니다.
(갈 3:28)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나라는 장애인도 그 능력에 맞는 생활(직업, 교육, 가정, 복지 등)을 통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는데요. 법이 생겼다는 것은 법이 있기 전에는 사회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부터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낮아서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장애를 갖고 계신 분들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무언가를 제도적으로 얻으려고는 하지만, 많이 힘든 여건입니다. 장애인도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평범한 권리가 있고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다 해도 교회는 어떤가요?
영적으로 성숙된 성도님이나 장애에 대해 이해가 깊은 목사님이 아니고서는 아직도 많은 분들이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은 세상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떤 교회는 겉으로는 장애인에게 친절을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분들의 마음에서 생각하는 바가 정말로 차별이 없는지, 그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가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지를 말씀하셨는데요.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을 보면 ‘장애인 제외’라는 말씀이 없네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으로서 마땅한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 장애인을 낮게 여기거나 차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악한 죄입니다. 그러면 안 되겠죠!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없습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천적 장애인이나 중도 장애인이나 모두,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장애를 갖게 된 것이나 장애인 가족이라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반감을 갖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그분이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뜻은 항상 선(good)하다고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시 119:39a) “주의 판단들은 선하오니...”
(시 119:66) “내가 주의 명령들을 믿었사오니 선한 판단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하나님이 장애인으로 허락하신다는 것 같은 어떤 일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에 좋은 의도로 나에게 더 좋은 무엇을 주시기 위해서 장애를 허락하셨다고 믿는 것이 올바르고 건전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어떤 사람에게 장애를 허락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이 장애를 허락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장애를 갖게 된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장애라는 범주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은 장애가 없지만,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큰 교통사고가 나면 바로 장애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달라지겠지만, 본질은 그냥 그대로 인격이 있는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에게는 교통사고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은 장애가 없지만, 장애는 어쩌면 내일의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혹시 여러분에게 장애가 닥쳤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장애인이 된 여러분을 보는 시각이 마치 어떤 큰 잘못을 했다거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라는 식으로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어떠실까요? 또는 전염병을 퍼뜨리는 대상 같이 바라본다면 어떠실까요? 우리는 그런 시각을 갖아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는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는 장애나 비장애에 대한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장애 있는 너는 나와 틀리네’라는 식으로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런 분은 성경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릇된 신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장애인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창조된 존재이고, 귀한 혼이며, 그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같은 성도이고 여러분에게 존중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외모로 중히 여기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장애가 있는 분과 가족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사는 장애인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가족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존감을 갖으시고,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의 수고와 힘듬과 어려움을 아십니다. 힘내십시오. 우리에게는 장차 모든 만물이 회복되는 말씀의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장애를 갖고 있었던 나의 가족이 회복된 모습으로 여러분과 함께 그분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장애인과 함께 살아온 믿음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잘 했다.”는 칭찬이 있으시길 기대해 봅니다.
“교회 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이 각 사람을 보는 인식과 같아야 합니다.” (끝)
2020-08-16 1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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