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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성경이 무어라말씀하시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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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내 목회인생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심지어 자식들에게 조차 아비로서 보여 줄 것도 남겨 줄 것도 없다. 그런 면에서 사도바울의 한마디가 내 심금을 울린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11:1)
세상 시각으로 볼 때 성공은커녕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시간은 흘러갔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계획도 많이 세웠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룬 것은 없다. 주님을 만난 이후로 내가 계획하고 꿈꾸었던 대로 해본 일이 없다.
예를 들면 처음엔 돈을 벌고 싶었다. 목사가 된 후에는 성공적인 목회, 다음엔 다른 나라의 여행, 살고 싶은 곳에 정착 등 하나도 내 소원이나 내 계획대로 실행해 본 것이 없다. 이는 내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고 육신 적으로 내 의지가 약하고 계획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끝까지 달려가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13년 전(2001) 수원에서 17년의 목회를 정리하고 인천으로 왔을 때 이곳을 황금어장이라고 생각했다. 전철 역세권에다가 초, 중, 고등학교가 있고 대형마트가 있으며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들이 모여 있는 최상의 주거지역으로서 부지런히 낚시질 하면 많은 고기를 낚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핑계와 이유로 계속 낚시질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작심 3일의 인생으로 살아온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은 나를 싫어버리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매일 새벽 만나주시고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설교원고를 작성하게 해 주시고 말씀증거를 허락하셨다.
만약 내가 구원 받지 못하고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지옥행? 노숙자?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무섭다. 무의도식으로 살아온 내가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정말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한 일이 없어 하나님께 죄송스러워도 주께서 지금까지 너그럽게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나는 목사가 될 자격도 자질도 인품도 학벌도 신앙도 갖춘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경을 잘 못 배우고, 잘못 알고 잘못 전한 일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에서 17년, 침례교회에서 13년을 설교했다.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은 찬양받으소서!!
사실 지나간 장로교회에서의 17년보다는 바른 말씀을 만나고서의 13년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산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형편없는 나를 구원하신 주님은 설교자로 훈련시키시더니 바른 말씀을 주시고 바른 말씀을 공부하게하시고 바른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 이 은혜와 감사를 짧은 언어로 표현할 길이 도대체 없다.
스스로 공부할 줄도 모르는 한 없이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성경교사를 만나게 하시고 오늘까지 배우게 해 주셔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에게 주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그 스승이 바로 이 교회를 설립하고 나에게 강단을 내 주고 2001년 5월 미국으로 떠난 윤성목 형제다. 형제의 육신의 나이는 나보다 20년이나 젊지만 진리 안에서 깊은 통찰력과 타협 없는 올곧은 성품과 말씀을 탐구하는 열정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하리라 본다.
그러한 형제에게 내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형제의 주옥같은 설교와 성경강해는 수많은 성도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한다. 잘못 알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잡아 주고 깨닫지 못한 말씀들을 정확하게 풀어 알게 해 주는 천부적인 은사를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형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와 은사를 아낌없이 나누기를 즐거워한다. 그것이 또한 감사하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봄이나 가을 수련회를 해 왔는데 금년에는 대다수 성도들의 직장 휴가철인 여름에 수련회를 하기로 했다. 거의가 맞벌이를 하는 성도들이 서로 시간 맞추는 일이 어려워 점점 합동 집회를 갖기가 쉽지 않다. 생활이 각박하고 고달파 신앙수련회라는 타이틀이 점점 퇴색되고 적당히 집회도 하고 적당히 쉬기도 하므로 이름도 수련회보다는 수양회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
금년에는 무슨 주제로 수련회를 할까? 고민하다 작년에 결혼한 젊은 부부의 한 자매가 성경공부와 성경 읽는 재미와 더불어 질문을 자주하여 목사를 즐겁게 해준다. 얼마 전에 구약성경을 읽던 자매가 “입다의 딸은 죽었나요? 살았나요?”하고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하는 질문이다.
때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졸기도 하지만 듣는지 듣지 않는지 전혀 표정이 없을 때 목사는 기운이 빠진다. 세월이 가도 성경공부를 해도 질문 한번 없는 성도들은 정말 매력 없다. 그들이 성경에 대해서 궁금증이 없는가? 벌써 성경에 대해서는 통달했는가? 아니면 흥미가 없는가? 질문해도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때로는 내가 성도들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태적으로 듣기만 하고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예의로 아는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정서가운데 살아서 그럴까? “얌전하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와라.”하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훈련 때문일까? 아무튼 때로는 죽은 시체들 앞에서 혼자 몸부림치는 것 같다.
목회자들에게는 섬기는 교회 성도들의 질문도 있지만 다른 교회성도들의 질문도 많이 받고 다른 교회 목사님들의 질문도 많이 받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정리해 둔 것이 없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서는 윤성목 목사님의 허락을 얻어 말씀침례교회의 홈페이지에 있는 “질문과 답변”의 글들을 묶어 제본하여 몇몇 동역자들과 함께 나누고 그 가운데에서 몇 가지를 택해 교재로 쓰고자 한다. 간혹 질문자 가운데에는 황당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때론 말씀침례교회의 “질문과 답변”란을 통해 그 어떤 명설교보다 더 큰 유익을 얻을 때가 많다. 이 제본을 읽는 사람들은 속 시원함과 통쾌함을 경험하리라 생각한다.
여기 윤형제의 “질문과 답변”란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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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거듭난 성도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들을 전달하기 전에 성경 자체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심어주는 일이야말로 기초를 다지는 일이요, 신앙 성장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3에 [기초들이 무너지면 의로운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시11:3) <If the foundations be destroyed, what can the righteous do?>라고 말했듯이 우리의 믿음과 실행의 초석을 확고히 하는 일이야말로 최우선적인 일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초신자 때 성경을 읽으면 질문과 의문이 많이 생깁니다. 특히 성경이 비과학적인 것 같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심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성경을 읽어가다가 자체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듣지 못할 때 성경은 믿음의 책이 아니라 의문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를 읽는데 하루는 과연 지금의 24시간인가?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어떻게 밤과 낮이 존재할 수 있는가? 노아의 방주에는 공룡이 탔는가? 가인은 누구와 결혼했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질문을 해 보았고, 또 많은 질문들을 받아 보았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은 채 <믿기만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질문에 대해 답변해 줄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다 알지 못한다 해도 공부를 해서 가르쳐 주면 될 것입니다. 저도 모든 질문에 다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묻는 질문들에 대해서 답해 드리고자 합니다.
- 출처 -"av1611.net 또는 말씀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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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수련회는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특별한 시간이 될 줄로 안다. 그동안 성도들이 질문은 하지 않았어도 이 제본을 통해서 많은 궁금증을 해소하고 간단명료한 대답들을 읽으며 큰 기쁨을 체험하리라 믿는다. 근 40년을 성경을 읽고 30년을 설교한 나도 목사님의 홈페이지의 “질문과 답변”을 통하여 시원한 청량음료를 마시는 경험을 자주한다.
이런 성경교사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런 형제를 알게 되어 나는 행복하다. 지난 2000년 한 해 동안 수원에서 인천으로 매주 하루씩 공부하러 다니던 때가 참으로 행복했고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추억의 시간들이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이번 수련회가 자유를 누리고 배움의 즐거움과 공부의 기쁨을 맛보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말씀을 따르는 자가 되라.

1. 창세기의 하루는 지금과 동일한 24시간이었는가?
▶ 답변:Yes.
성경은 “밤이 되고 낮이 되니”란 표현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첫째 날, 둘째 날...하며 일곱째 날까지 명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낮에 열두 시간이 있지 아니하냐? 사람이 만일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고](요11:9).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을 12시간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면 밤도 열두 시간입니다. 한때 진화론과 타협하는 절충안으로 창조론적 진화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창조 때의 하루는 몇 년일지 알지 못한다라고 했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루는 24시간이며 창조는 6일 동안 있었던 일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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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양은 4일째 만들어지는데 그 전의 3일 동안의 밤과 낮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Let there be light>.

이 우주에는 태양 외에도 많은 발광체가 있습니다. 심지어 태양보다 몇 백배, 몇 천배 밝은 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별도 있기 전에 빛을 주셨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21:23에 [그 도시에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光體)이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이 빛이 있던 날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에는 태양이 없지만 빛으로 충만합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 하나님이 바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명하시면 빛은 비취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방에서 작업을 하기 전에 먼저 전원을 켤 때, “전원을 켜라”하고 말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음성 감지 장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음성이 발해질 때 창조 행위가 바로 이루어집니다(히11:3).
많은 사람들이 어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둠은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결과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사45:7,시편 18:11참조).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4일째 이후에나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에서 온 지구는 모두 어둠이었습니다. 창세기 1:3에서 온 지구는 모두 빛이었습니다. 창세기 1:4에서 하나님은 어둠과 빛을 나누셨습니다. 지구의 자전은 이때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회전을 하면 밤과 낮은 자동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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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틀째는 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답: 보시기에 좋지 않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틀 째 주님이 하신 일은 물들을 궁창 아래위로 나누시는 일입니다. 이 물은 지구상의 바다가 아닙니다. 궁창이 하늘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위에 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현재 천문학자들에게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이 은하계를 넘어 지구의 바닷물에 2천만 배에 달하는 물층이 존재한다는 내용이 과학 잡지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99년 1월 8일 미국 우주항공국은 98년 발사한 스와스(SWAS) 위성을 통해 은하계의 가장 차가운 곳에서도 다량의 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미국 과학자들이 8일 밝혔다. 美매사추세츠州 하버드-스미소니언 천체물리학 센터의 게리 멜닉 연구원은 이날 텍사스州 오스틴에서 열린 미국 천문학협회 총회에서 "스와스 위성은 은하계 성운에 꽤 많은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고 발표했다... 스와스 위성이 가장 먼저 탐사한 오리온성운에서 나온 이 자료는 이 성운에 지구 바닷물의 2천만 배에 이르는 거대한 양의 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전에 이미 유럽의 적외선 감지 위성도 최근에 은하계에서 다량의 물이 수증기나 얼음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내 왔는데 스와스 위성의 이번 자료는 이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99/01/08 동아일보).
과학자들이 말한 것보다 훨씬 먼저 욥은 이 물 층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궁창 위의 물들에는 리워야단이 살고 있습니다(욥41:31-32). 이곳은 용들의 처소입니다.
둘째 하늘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영적 악들의 거처입니다(엡6:12-high places). 그래서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우주 개발 계획은 전적으로 악한 영들의 역사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늘이 아니라 땅을 주셨고, 대기권까지가 우리의 생활 영역입니다. [하늘과 하늘들도 [주]의 것이로되 그분께서 땅은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주셨도다.](시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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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경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약 6,000년 정도라면 이 우주의 나이와 너무 틀리지 않습니까?
▶ 답: 지구의 나이는 6,000년이 아닙니다.
우주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화론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성경의 창조론은 아주 곤혹을 치르고 궁지에 몰린 것 같습니다. 반면 다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진화론의 허구성이 입증되면서 창조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창세기의 창조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길어도 만년 이내로 결론지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지구의 연대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6,000년이라고 하는 것은 임의의 짐작이며, 추론일 뿐입니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지구의 나이가 태양이나 별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창세기 1:1과 1:3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이지만 성경을 믿는 초신자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구절이 해결되면 다른 많은 의문들이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창 1:1).
이 구절과 연관된 구절은 욥기 38:4-7에 나옵니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明哲)이 있거든 밝히 고하라. 누가 그 치수들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팽팽히 쳤느냐? 그 기초들을 어디에 고정하였느냐? 그 모퉁이돌을 누가 놓았느냐?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38:4-7). 이 때 지은 땅은 창세기 1:2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지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지음받기 전에 지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 소리를 지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45:18에는 완벽한 참조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하늘들을 창조하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친히 땅을 조성하고 만들고 견고하게 하였으되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거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나는 [주]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8). 여기서 “헛되이”(in vain)란 말이 창세기 1:2절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헛되이 창조하지 않은 땅이 1:2에서 헛되이 되어있다면 거기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후에 루시퍼에게 이 땅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스겔 28:13-14은 루시퍼가 바로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다고 말합니다. 루시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자였습니다. 욥기38:4,7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기뻐 소리치는 천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루시퍼는 절대 천사가 아닙니다. 천사장도 아닙니다. 그는 그룹이었습니다. 이런 루시퍼에게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사야 14:12-15에 심판이 임한 이유와 그의 죄악이 나옵니다. 이사야 14:12절을 보십시오. “How art thou fallen from heaven, O Lucifer, son of the morning! how art thou cut down to the ground, which didst weaken the nations! 루시퍼는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보좌"(throne)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사14:13).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죄는 아담이 아니라 아담이 지음받기도 전에 이미 루시퍼에게서 발견됩니다. [Thou wast perfect in thy ways from the day that thou wast created, till iniquity was found IN THEE.](겔28:15).
모든 범죄에는 심판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범죄를 결코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창세기 1:1에서 창조된 하늘과 땅은 1:2에서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3-7은 당시의 물 심판에 대해서 언급해 줍니다. 성경은 [그 때의 세상],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 앞으로 다가 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언급해 줍니다. 이전 세상의 왕은 루시퍼였고, 그의 왕국은 심판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 후반 절부터 물로 뒤덮인 지구에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다시 창조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시편 기자는 이 때 성령께서 하신 역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보내시매 그것들이<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들> 창조되었사온즉 주께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 성경을 지지하고 옹호한다는 과학자들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서 무지를 드러냅니다.
물은 언제, 몇 일째 창조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혼비백산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는 출애굽기 20:11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 주가 하늘(창세기 1:1의 하늘이 아니라 창세기 1:8의 하늘이다.)과 땅(창세기 1:1의 땅이 아니라 창세기 1:10의 땅이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하늘 안에 있는 것--해, 달, 별; 땅 안에 있는 것--동식물들; 바다 안에 있는 것들--어류)을 만들고...](출20:11). 여기에도 물을 만드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물은 엿새 동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과학회의 헨리 모리스 박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여기서 걸려 넘어졌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6,000년이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는 6,000년 정도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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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는데 이 때 지구상에 다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창4:14).
▶ 답: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는 농사를 짓고 양을 칠 정도의 성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나이가 몇 살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100세가 넘어서 이런 일이 터졌는지 30-40세 정도에 살인 사건이 났는지 성경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담과 이브는 창세기 1:28의 명령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였으며 많은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이들 둘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통계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아담이 살아 있을 동안 지구의 인구는 2천만 명이 넘었을 것이며, 아담과 셋이 죽기 전까지 지구의 인구는 최소한 1억 3,600만을 넘었을 것입니다. 가인과 결혼한 여자는 조카였거나 동생이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규례(율법)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인이 보복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아벨의 살인자로 자신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만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한 사람들이 아담 이전에 다른 족속이 살고 있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담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첫 번째 사람입니다(고전15:45). 이브는 모든 산 자의 어미입니다(창3:20). 이 두 구절은 아담 이전의 다른 사람이 존재했다는 주장들이 비성경적인 상상의 소산물임을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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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나님께서 동물, 식물 등 모든 것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는데, 인간은 다양하게 만드시지 않으셨는가요?
▶답: 인간은 한 종류입니다.
오늘날 다양한 피부색의 인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양한 인종을 창조하시지 않았는가? 아니면 아담, 노아의 단일 후손이 이렇게 다양하고 서로 다른 인종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종류에 따라(after his kind) 지으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고로 인간은 다른 종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다른 종류가 있다면 이는 인간이 아니라 변종입니다. 이는 창세기 6장에 나오며, 앞으로 조만간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현재의 모든 인류는 한 피입니다. [또 그분께서 인류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작정하신 때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행17:26).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새로운 한 무리를 이루게 됩니다.
피부색이 다양하고 다른 체형을 유지하는 이유는 환경, 삶의 습관, 음식 등으로 쉽게 설명됩니다. 작은 수족관에서 자란 잉어는 3-4인치 밖에 자라지 못하지만 템즈강에 풀어 놓으면 14-15 파운드의 대형 잉어로 체형이 바뀝니다. 미국에서 자라나는 떡갈나무와 삼나무는 매우 큽니다. 동일 묘목을 일본에서 키우면 3피트 이상 자라지 못합니다.
앵초류 꽃의 자연적인 본래의 색깔은 노란색입니다. 그런데 말똥 거름으로 재배하면 빨간색이 됩니다. 카나리아의 아름다운 노란 색은 그 새에게 매운 양념을 많이 넣은 먹이를 주면 매우 어둡게 색깔이 변합니다. 백인들을 뜨거운 태양 아래 몇 달간 노출시키면 갈색으로 변합니다. 요한 베로 박사의 “색깔과 종족”이란 책에 따르면 “머리카락과 눈의 빛은 개개인의 나이와 종족의 나이에 따라 변하며, 중앙 유럽의 일부 몇 지역에서는 빨간 머리카락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회색빛을 띤 갈색 머리카락이 일반적이다. 살색은 기후에 따라 변한다.”고 기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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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는데 창세기 2:4부터 또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창세기 1장과 모순이 되지 않나요?
▶ 답: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이 세상과 우주의 창조 과정을 차례대로 6일 동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4부터 나오는 내용은 이 세상이 아니라 6일째 사람을 지으시는 과정과 에덴동산의 창조 과정을 기술한 것입니다. [ [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창조하신 때 곧 이것들을 만드신 날에(in the day) 하늘들과 땅의 생성(生成)이 이러하니라.](2:4).
성경은 분명히 “이것들을 만드신 날”(day-단수)이라고 말합니다. 6일째 하루만을 언급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창세기 1:11 이전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모순된다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2:5-6은 지구의 상태가 아니라 에덴동산이 들어설 자리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5-6절의 땅을 9절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 [주] 하나님께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를 그 땅에서 내어 자라게 하시니 그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1장에 창조하신 종류대로의 나무들이 아니라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만 에덴의 동산에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나무와 식물을 만드신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원을 가꿀 때 필요 없는 것들을 없애 버리고,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와서 단장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살게 될 에덴의 동산을 가꾸고 지키도록 환경을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을 예민하게 읽는다면 이 차이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 2:19-20에는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서 즉시 “들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셔서 아담에게로 데려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름을 짓도록 하시기 위해서 들의 모든 짐승(숲의 짐승이 아님)과 공중의 모든 날 짐승들을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의 이 모든 일은 6일째 되는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흔히 하나님이 6일 째 하신 일을 “인간 창조”라고 단순하게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만드신 일”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셋째 날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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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질문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왜 만드셨습니까?
답변 : 사실 이 질문은 모순되는 질문이 아니라 궁금한 사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인간이 미리 죄를 지을 것을 알았을 것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것을 알았을 터인데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죄를 짓게 만들었느냐? 하는 원망과 책임 전가의 본능이 작용하여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는 은행을 털다 잡힌 강도가 재판관을 향해 무엇 때문에 은행에는 돈이 많아서 나로 하여금 강도짓을 하게 했느냐? 하는 항변과 같습니다.
초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왜 만드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갖가지 추측과 억측, 구구한 해석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하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만 말씀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만드시든지 전혀 간섭할 수 없습니다.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자기를 지은 이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겠느냐? 토기장이가 같은 덩어리의 진흙으로 한 그릇을 만들어 존귀에 이르게 하고 다른 하나를 만들어 수치에 이르게 할 권한이 없겠느냐?] (롬9:20~21)
[왕의 눈앞에서 벗어나려고 서두르지 말며 악한 것 가운데 서 있지 말지니 이는 왕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기뻐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니라.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 권능이 있나니 누가 왕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전8:3-4).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께 창조하신 창조 세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 보시기에 좋았으며, 악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31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좀 자유 방임형으로 무질서하게 생겼더라도 그것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물들과 무생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싶은 피조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파리는 왜 있는가? 모기는 왜 있는가? 아니면 병균들은 왜 있는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현명하게 답해야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그런 병균들과 파리나 모기, 독충들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연 생태계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서로 간에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4:35).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왜?”라고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신 “왜 인간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계명조차도 순종하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그렇게 하찮게 여겼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동산의 중앙에 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입니다. 이 중에 금지된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지 생명나무는 아니었습니다. 생명나무를 통해 인간은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나무는 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합니다(계2:7, 22:2, 22:14).
에덴의 동산을 조성하신 하나님을 통해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선하심, 축복은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알아 볼 길이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했다거나 말씀을 믿었다거나 사랑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가늠해 주는 잣대였습니다.
이 시험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높이 세워진 나무가 있으니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를 통해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인간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이는 아담에게 주어진 약속과 동일한 약속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가늠해 주는 잣대입니다.
흔히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에 두지 않았으면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을 일이 없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은 흔히 질문자의 수준을 드러내는데 이는 간통한 남자가 세상에 다른 여자들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하는 것이나 살인자가 가인이 아벨을 죽여 놓고, 아버지가 아벨을 낳지 않았으면 내가 살인하지 않았을 텐데 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무식입니다.

1.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신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시고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 복종의 대상입니다. 자유를 제한하는 법인데 이는 아담이 피조물이요, 권위 아래 있음을 일깨워 주는 잣대 역할을 합니다.

2. 아담은 어린 아이나 철없는 아이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먹으면 안 되는데 먹을 수밖에 없는 죄성이 몸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충분한 사리 분별력과 지혜와 지능을 갖춘 성인이었으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어른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 곁에 불이나 독을 두는 것은 둔 사람의 과실이요,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청년이나 어른 곁에 두고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때는 건드린 사람의 과실이요, 책임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두고 먹지 말라는 명을 내리신 주님에게 과실을 돌리려는 것은 죄인들의 변명이요, 핑계일 뿐입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사이에 두고 주님과 아담의 관계성은 수평이나 대등 관계가 아니라 종속, 복종의 관계가 정립됩니다. 복종 관계를 파괴하고, 그 권위 아래 있기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그것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세금을 내기를 거부함으로써 국가의 공권력과 권위를 무시하고, 저항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법이나 명령을 저항하는 상징적인 행동은 국기를 태울 수도 있고, 통치권자의 초상화를 밟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성을 파괴했던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죄를 지은 후의 비참한 결과를 맛볼 때 항상 존재케 하신 창조주를 원망하고 그 원인을 주님께 돌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과 같은 명령을 단 한 건도 주시지 않았다면 나를 통치해 주지 않고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두심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와 함께 언제나 우리와 관계성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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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창세기 2:17에 따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이는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먹는 날(in the day that thou eastest)에 죽는다고 죽는 날짜를 명시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5:5절에는 [아담의 전 생애는 구백삼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둘은 모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 아담이 먹은 날 누군가 아담을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어린 양'입니다.
2. 아담이 먹은 날 아담 안에는 죽음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죽은 것은 영이었습니다. 930년을 살다가 죽은 것은 몸이었습니다. 혼은 불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아닌 영이 죽었음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犯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반면 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영의 죽음과 몸의 죽음에 대해서 안다면 이 둘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말씀이지 모순이 아니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윌슨의 잠언이란 책에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수십 년간 영구차를 몬 운전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님들이 인도하는 장례 예배를 거의 매일 보았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워들은 성경 구절만으로도 삶과 죽음, 구원과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장례 예배를 마치고 오다가 윌슨 목사님과 운전사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2)고 말씀하셨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하고 윌슨 목사님이 운전사에게 물었습니다. 운전사는 이 말에 너무나 당황해서 “그런 말은 성경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람은 20년 넘게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을 했는데 자신이 죽은 자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가 이 구절을 통해 자신이 죽은 자란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이며, 자기의 죽은 자들이란 몸이 죽은 자들입니다. 아담이 죽어야 하는 날 아담의 몸이 죽지 않은 이유는 '어린 양'이 대신 피 흘려 죽었기 때문입니다(창3:21). 주님은 아담 앞에서 누군가 대신 피 흘려 죽는 모습을 보여 주셨고, 이 양은 다름 아닌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 대속의 죽음이 없었다면 당연히 아담은 그 날 몸이 죽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십니다(계13:8).
아담의 영은 불순종의 영, 공중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르는 영이 되었고- 마귀의 자녀
아담의 혼은 몸에 달라붙어 진토에 굴복하게 되었고 - 육신의 종
아담의 몸은 날마다 썩어 가는 사망의 몸, 죄의 몸, 천한 몸, 약한 몸, 멸망하는 몸으로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몸은 죄의 정욕이 강력하게 활동하는 몸이요, 불법과 불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죄의 종, 사망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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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했는데 어떻게 거인이 나올 수 있습니까?(창6:2,4).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알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이들은 홍수 이전에도 있었고, 홍수 이후에도 있었습니다(이들은 다윗에 의해 모조리 죽는다.-삼하21:22).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요1:12). 그러나 이 아들들은 현재까지 아들로 입양되었지만 실제로 아들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피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년 왕국 동안 그리고 그 이후로 나타날 것입니다.
반면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상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욥기 38:7에 언급된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피조물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예는 아담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38에는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흔히 인용하는 구절 가운데 이사야43:6은 이스라엘 민족을 자녀라고 표현한데서 유래한 것일 뿐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가장 흔한 주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라고 말하고, 사람의 딸들은 불경건한 카인의 후손들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셋의 후예들과 카인의 딸들이 결혼하여 거인을 낳았더라.”라고 기록할 일이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이 결혼해서 거인이 태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천사는 성이 없고,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성경적 주장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30에서 [이는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니라.]하신 말씀 가운데 “하늘에 있는”이란 말을 빼면 안 됩니다. 창세기 6장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에 내려온 천사들(유6)이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천사는 다 남자이며, 날개가 없습니다. 이들은 생식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앞으로 마지막 때에 다시 사람의 딸들을 취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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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하나님은 후회하실 수 있습니까? (창6:6) 제가 듣기로는 하나님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민23:19, 삼상15:29).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땅에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 또 이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며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하되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까지 다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창6:6-7).
사무엘상 15:11을 보십시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주]께 부르짖으니라.] 그러나 곧 이어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강력하신 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후회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이다.](삼상15:29).
이런 구절들을 읽고서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말로 회개 또는 후회라고 번역된 repent에는 일반적으로 잘못, 죄, 오류로 인해 빚어진 결과나 행위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단순히 마음을 돌이킨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다(re/pent)".
하나님은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회개하거나 후회하시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반면 인간들이 행한 악과 죄를 보실 때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데, 거기에 대해서 후회를 하십니다.
사람에게 사용된 repent는 악을 근절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하나님에게 사용된 repent는 “오래 참으심의 끝”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안다면 이 구절들은 모순이 아니라 보충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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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창세기 9:14은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모순이 아닙니다.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창9:14). 성경에 따르면 모든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해 줍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상에서 하늘의 구름들을 볼 때 무지개를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가끔 비가 오고 난 후거나 일몰 전후에만 잠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무지개는 사람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기 위한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비행할 때 아래 구름을 내려다보면 쉽게 무지개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낮에 정원에 물을 뿌릴 때 흩날리는 spray들 사이로도 무지개는 보입니다. 빛이 비추이기만 하면 모든 구름은 그 사이에 무지개를 보여 줍니다. 달빛 속에서도 무지개가 보이며, 밝은 별빛 속에서도 무지개는 관찰됩니다. 지구를 덮고 있는 모든 구름은 항상 무지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보실 때는 24시간 내내 무지개를 보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찍부터 그 사실을 말해 주었고, 과학은 최근에 그런 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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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왜 죄는 함이 지었는데 저주는 가나안이 받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더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창9:22-25).
여기서 성도들이 자주 제기하는 의문은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함이 행한 사소한 실수를 가지고 노아가 무서운 저주를 할 수가 있는가? 와 왜 함이 아닌 함의 자식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매우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다 벗은 채 자는 것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일러 주었을 뿐인데 노아가 일어나서 불같이 화를 내며 저주를 했다면 노아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한 노아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들킨 사실로 인해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아닙니다.
22절에서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라고 말했지만 24에서 노아는 깨고 나서 그 사실을 안 것이 아닙니다. 함이 눈으로만 아버지를 보고 나갔다면 술에 취한 채 자고 있는 노아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노아는 술에서 깨고 나서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간일은 자기에게(unto him)에게 아무 것도 안 한 것이지 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말하는 것은 자기 몸에 함이 무슨 짓을 하고 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몸에 성추행 또는 동성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구절과 구절을 비교하면 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레위기 18:6-7을 펴 보십시오.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 너는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나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그녀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지니라.] 이는 근친상간, 동성연애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노아의 증언과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 7:22에서 함이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었습니다. -망령된 행실.
2. 함은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22). -죄가 아님.
3. 함은 형제들(셈, 야벳)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23). -죄가 아님.
4. 노아는 깨어나서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습니다. 자기에 대해 한 일이 아님. -죄임.
5. 22절과 23절 사이에 함은 술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에게 뭔가를 행했고 노아는 깬 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함은 "노아의 벌거벗음을 드러냈다."고 보는 것은 노아가 잠에서 깬 뒤 자신의 실수(행위)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회개하는 대신 함이 자기에게 한 행위에 대해 저주를 선포한 것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6.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왜 범죄한 함이 저주를 받지 않았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이미 창세기 9:1에서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서 동일한 죄를 보았거나, 미리 앞을 내다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함이 아버지 노아에게 하는 짓으로 보아 함의 아들 가나안도 함과 동일한 죄를 범하였거나 깊이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이후로 성경에서 가난안 족속들이 하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역사는 동일하게 가난안 족속들의 성적 문란, 동성애, 근친상간, 짐승들과의 교접 등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는 노아의 저주가 매우 정당했음을 입증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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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때”를 바꾸시는가? 창세기 8:22, 다니엘 2:21,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밤과 낮, 계절이 영원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다니엘서에는 때와 시기(times and seasons)가 바뀐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바꾸실 수 있습니까? 지난 40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결코 시간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주로 창세가 8:22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수아 때에 약 하루 정도 낮이 길어진 적이 있었지만 밤과 낮이 멈출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태양은 언제나 떠 있었으며 밤과 낮의 길이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결정됩니다. 지구와 태양의 위치 관계에 따라 일출 시간과 일몰 시간에 따라 밤낮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일의 시간 비율을 조절하십니다.
밤과 낮이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멈추었습니까? 창세기 8:22에 따라 캘빈주의자들은 다니엘의 70주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으며(단9:24-27), 적그리스도가 거룩한 성전에 서는 것은 먼 미래의 예언적 성취가 아니라 다니엘의 예언 250년 후인 안티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황폐케 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주님께서 마태복음 24:15, 마가복음 13:14에서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아닌 다가올 사건임을 분명히 지적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다니엘2:21은 창세기와 달리 하나님께서 때와 기한을 바꿀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해답은 무엇입니까? 시간이 멈출 수 있습니까? 없는 것입니까?
‘멈추다(cease)’ 란 단어는 종결하다, 지속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 이 단어는 ‘멈추다’(pause)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단어의 가장 일반적인 용례의 의미는 아닙니다. 태양이 24시간 정도 머물렀을 때는 여전히 낮이었으며 다시 태양이 서쪽으로 움직임을 재개할 때까지 밤이 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식으로 예언적 시간이 멈추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61:2에는 ‘주님께서 받아들이시는 해’와 ‘복수의 해’ 사이에 약 2000년의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단지 콤마(,) 하나로 이런 시간 간격을 나타내는 구절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들이 모순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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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나이 창세기 11:26, 창세기 11:32, 창세기 12:4, 사도행전 17:4,
위의 네 구절을 비교하면 금방 어떤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 그가 죽을 때까지 아브라함이 떠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순례의 길을 떠난 때는 135세가 됩니다. 이는 창세기 12:4절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에 떠났다는 말씀과 위배됩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나이순으로 사람의 이름을 기록했을 것이란 추측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이순으로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아닙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지만 그의 이름이 늘 맨 처음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연령순으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의 아들을 봅시다. 창세기 5:32에서 우리는 [노아는 오백 세가 되어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9:24에 따르면 함은 셋 중에 가장 어리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두 번째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1:10에서 우리는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셈의 나이가 98세란 사실을 봅니다(홍수가 난 후 2년 뒤에 그의 나이가 100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600세 때 홍수가 났으므로(창7:6), 셈이 태어났을 당시 노아의 나이는 502세가 됩니다. 야벳은 노아의 맏아들이므로 노아의 나이 500세 때 태어났습니다. 이는 창세기 5:32에 기록된 순서와 다릅니다. 창세기 12:4과 사도행전 7:4을 볼 때 아브라함이 태어난 것은 데라가 130세였을 때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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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몇 년간 있었는가?
참조 구절: 창세기 15:13-16, 출애굽기 12:40, 갈라디아서 3:17, 출애굽기 6:16-20
이 구절들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는, 연도에 관한 것으로 창세기 15:13에서의 400년과 출애굽기 12:40과 갈라디아서 3:17에 나오는 430년의 모순입니다.
둘째는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에 몇 대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애굽기 6:16-20에 나오는 레위로부터 시작해야 창세기 15:16에 나오는 4대에 맞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삭과 야곱을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4대가 아닌 6대가 되고 맙니다.
첫 번째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됩니다. 창세기 15:13은 아브라함의 씨가 이집트 땅에서 400년간 거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400년간 고통 받는다고만 말합니다. 즉 430년 중에 400년이 고통의 기간입니다. 30년은 요셉이 이집트의 제 2인자로서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평안하게 보내었습니다(창41:41a).
두 번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창세기의 문맥에는 이집트란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먼저 고통의 땅에 대해 언급하며, 그 후에 그들이 섬길 땅이 아니라 섬길 나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고통의 기간에는 이집트뿐만 아니라 가나안에서의 거주 기간도 포함됩니다. 이집트에서 섬기기 시작한 것은 야곱의 아들 레위 때부터이므로 정확히 4대입니다. 출애굽기 6:16-20에 언급된 4대란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온 야곱의 아들 레위가 1대, 그의 아들 고핫이 2대, 암람이 3대, 모세가 4대이며, 모세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출애굽을 이끌게 됩니다.
창세기 15:16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4대가 시작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육일 창조 후 2183년에 죽었고, 야곱이 2168년에 태어났으므로 아브라함은 야곱이 태어 난지 15년 후에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야곱의 아들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고로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때부터 호렙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까지의 전체 기간이 430년이고, 이 430년 중에서 400년은 고통의 기간이었으며, 이 기간은 가나안과 이집트에서의 시간을 다 포함합니다. 30년의 기간은 요셉이 이집트의 제 2인자로서 실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는 레위로부터 시작해서 모세까지 4대이며, 아브라함이 죽은 이후의 4대입니다. 이렇게 하여 모순처럼 보이는 모든 성경구절은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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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딸들, 창세기 19:8, 창세기 19:14-15,
이 구절들은 종종 약혼한 상태는 이미 결혼한 것이나 같다는 주장을 성경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 7:25-28과 연관시켜서 이혼자들을 교회 직무에서 배척하기 위한 본문으로 자주 사용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만약 정혼이 결혼 상태라면 약혼자들은 부부로서의 권리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결혼식은 정혼한 상태가 한참 지난 후에 따로 한단 말입니까? 창세기 19장의 이 두 구절은 정혼, 결혼의 문맥이 아닙니다. 롯에게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이 둘 있었고, 결혼 한 딸들과 사위들이 있었습니다(창19:14). 특히 12절을 보면 천사들은 롯에게 이 도시에 또 다른 아들, 딸, 사위가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들이 있어도 멸망시킬 것인지를 물으면서 열 명에서 멈추었습니다(창18:32). 아브라함은 롯의 식구가 10명은 된다고 생각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천사는 “여기에 있는 두 딸”이라고 말함으로 여기에 있지 않는 딸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결혼한 딸들을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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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은 얼마나 컸을까?

창세기 21:14,16, 18,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빵과 물 한 부대를 취하여 하갈에게 주되 그녀의 어깨에 메워 주고 또 그 아이를 주며 그녀를 내보내매 그녀가 떠나서 브엘세바의 광야에서 방황하더라. ..... 화살이 미치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가서 그를 마주보며 앉았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였음이더라. 그녀가 그를 마주보며 앉아서 목소리를 높여 우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리라, 하시니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 참조할 것
창세기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더라.]
창세기 21:5,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났을 때에 그는 백세더라.]
뒤의 두 구절을 통해 볼 때 하갈이 쫓겨난 시점은 이스마엘이 13-14세 정도였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느낌은 이스마엘은 너무 어려서 하갈이 그의 아이를 등에 업어야 할 정도인 것처럼 보입니다(흠정역 번역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 본문과는 많이 다르다-역주). 하갈은 물과 빵과 아이를 함께 메고 집을 나섰던 것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10대의 소년을 어머니가 등에 지고, 짐들을 함께 어깨에 매단 채 여행했다는 사실에 성경에 모순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14절 말씀을 유념해서 보면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하갈의 어깨에 업고 가게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물과 빵, 아이를 그녀의 어깨에 메게 했다면 “그것들을 그녀의 어깨 위에 두고(putting them on her shoulder)”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그녀의 어깨 위에 두고(putting it on her shoulder)”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물병만을 어깨에 맨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대명사가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역주).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창세기 21:15과 18절은 그녀가 아이를 업고 갔다는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15절에 [...이에 하갈이 그 아이를 떨기나무 아래 두고(cast)](15)란 말이 아이를 업었다가 땅에 내려놓았다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를 떨기나무 아래 두었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창21:18)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갈의 양손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일으켜서 안을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 못마땅한 사람들은 하갈이 여종이었고, 고된 노동에 익숙한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녀는 80-100파운드 이하의 몸무게를 지닌 아이를 거뜬히 일으켜 세우고 들어 올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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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엘 세바는 언제 붙여진 이름인가?
창세기 21:31, [그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가 그곳을 브엘세바라 일컬었더라.] 창세기 26:33, [그가 그 우물의 이름을 세바라 하니 그러므로 그 도시의 이름이 이 날까지 브엘세바더라.]
첫 번째 구절은 아브라함이 판 우물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간에 분쟁이 일어나서 그 우물의 소유권에 대해 합의한 문맥입니다. 두 번째 구절은 이삭의 종들이 판 우물에 대해서 아비멜레과 분쟁이 벌어져서 이삭과 아비멜렉 간에 합의한 내용입니다. 이 두 우물은 서로 다른 우물이거나 이삭의 종들이 아브라함이 판 우물들을 다시 판 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히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브엘세바란 이름의 기원에 관한 설명으로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장소, 우물의 위치 등에 관해 합의했을 그 이름이 브엘세바가 되었습니다. 이삭의 경우에는 우물의 이름이 아니라 도시의 이름이 브엘세바였습니다(23절). 그럼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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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숲 grove/......성경에서 숲은 주로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런 숲을 심었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21:33,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작은 숲을 심고 거기서 주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신명기 16:21,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작은 숲을 심지 말며]
아브라함은 작은 숲을 심어서 하나님을 경배했는데, 신명기에서는 그런 것이 우상 숭배와 연관이 있다고 저주하시며, 금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은 잘 한 일인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벌을 주셔야 하는 것인가요?
아브라함의 작은 숲에는 제단이 없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작은 숲을 심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없습니다. 다만 그 숲이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작은 숲 속에서 우상을 둘 때 주님은 그것을 저주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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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는가?
창세기 22:1, [이 일들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야고보서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라.]
창세기 22:1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야고보서 1:13은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두 말씀 다 맞을 수 있습니까?
‘시험하다’란 말은 ‘힘을 테스트한다.’ 또는 ‘질이나 가치를 측정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tempt)과 시험(try)은 상호 교환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말에는 구별할 단어가 없습니다.
창세기 22:1의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은 단련(try)이였음이 히브리서 11:17에 의해 입증됩니다. 야고보서 1:12에,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시험은 사람을 단련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정욕에 이끌릴 때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약1:14).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도 있습니다(민14: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자신을 열 번이나 시험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말은 약삭빠른 아이들이 부모를 시험하듯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부인했습니다.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정욕이나 악으로 인해 받는 시험(유혹)과 성경이 말하는 시험을 동의어로 생각합니다. 민수기 14:22에 나오는 시험은 분명 악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시험’이란 말이 전부 그런 경우는 아닙니다. 사람은 좋은 것으로 시험받을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분명히 ‘악으로 시험’(with evil)이란 말로 개념을 정확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좋은 것으로 시험받았습니다. 아들을 죽이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는 아들을 죽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시험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낫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19과 창세기 22:5은 증언하기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능히 부활시킬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제 시험에 관련된 문제는 그 어휘적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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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시는가?
답변: 예.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주님을 10번이나 시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이 시험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test, try, tempt, prove 등이 시험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KJV에서는 test란 단어는 없습니다. 흔히 하나님은 사람을 try 하시지만 tempt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무식한 헬라어 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한 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다만 '악으로' 시험받지 않으시고, '악으로'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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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야곱의 밭, 창세기 23: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헷의 아들들이 듣는 데서 에브론이 말한 대로 상인들이 널리 쓰는 돈으로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니라.]
창 33:19, [자기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의 손에서 돈 백 개로 사고]
창세기 50:13,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헷의 아들들이 듣는 데서 에브론이 말한 대로 상인들이 널리 쓰는 돈으로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니라.]
여호수아24:32,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묻었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은 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상속이 되었더라.] 사도행전 7: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돈을 주고 산 돌무덤에 놓이니라.]
창세기와 여호수아의 내용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증언은 약간의 혼란을 줍니다. 일반적인 해석은 스데반이 격정적으로 설교하면서 내용에 혼동이 생겨서 야곱이 산 것과 아브라함이 산 것을 혼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스데반이 감정에 휩싸인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전하는 그의 말은 당연히 성령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땅을 산 것은 부인 사라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3장을 보십시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의 헷 자손들에게 가서 매장지로 쓸 땅을 구입했습니다. 헷 자손들은 아브라함의 요청을 받아 들여 땅을 팔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간청하여 밭 끝에 있는 막벨라 굴도 팔라고 했습니다(창23:8-9). 그래서 밭과 굴이 모두 아브라함에게 팔렸고, 그에 대한 가격은 은 400 세겔이었습니다(16). 거래에 대한 결론이 20절입니다. [그 밭과 그 안의 굴을 헷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소유 매장지로 확정하였더라.](20).
야곱은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밭을 샀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아브라함이 샀던 땅을 다시 매입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땅을 매입한 것입니까? 성경의 언급을 볼 때 분명히 두 개의 다른 땅이 있었습니다. 이 두 땅은 붙어 있는 인접 땅이었습니다. 왜 야곱은 아브라함이 사 놓은 땅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야곱은 자신과 자신의 부인들, 아들들과 며느리들, 그 자녀들의 매장지로 사용하기에는 충분히 넓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둘째, 창세기 23:16에 말한 대로 그 땅은 아브라함이 매장지로 사용하기 위해 매입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의 본래 소유자들에 대해서 잠깐 살펴봅시다.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대로라면 아브라함이 샀던 그 땅의 원래 주인은 헷 족속의 소할의 아들 에브론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땅은 하몰이 아니라 그의 아들들에게서 산 것이라고 합니다. 하몰의 아들들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헷의 후예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서 산 땅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헷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소유 매장지로 확정’(20)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3:10에 따르면 ‘에브론은 헷의 자손들 가운데 거하더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 땅에 영구 거주민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거했음을 보여 줍니다.
23:11에 따르면 에브론은 자신의 땅을 ‘내 백성의 아들들의 눈’ 앞에서 감히 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 백성의 아들들’이 소유권을 주장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줍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그냥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에브론은 그 땅에 살고 있었지만 장기 임대 계약 형식으로 살았고, 여전히 헷의 자손들이 원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5:9-10을 보면 이 문제는 확실히 풀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막벨라 굴에 그를 묻으니라. 이 굴은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으며 마므레 앞에 있었으니 이 밭은 아브라함이 헷의 아들들에게서 산 것이더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묻히니라.](창25:9-10).
헷의 아들들 사이에서 에브론의 땅이 본래 하몰의 자손들의 소유란 것을 확인했다면 모든 문제는 다 풀린 것입니다. 독자들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야곱 사이에 연도가 너무 길어서 하몰이 자신의 땅을 야곱에게 팔 때까지 살아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이 죽을 때 15세였습니다. 야곱이 매매 체결을 한 때는 109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땅을 산 것과 야곱이 땅을 산 시간의 차이는 약 132년입니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판 시점에 하몰의 아들들이 20대나 30대의 나이였거나 약 50대의 나이였다면 그 때의 나이는 180세는 되었을 것이고, 야곱이 그 땅을 샀을 때 하몰이 살아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연대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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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아들의 수, 창세기 25:6, [그 첩의 아들들에게는 선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쪽으로 곧 동쪽 지방으로 가게 하였더라.]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 독생자(韜生子)를 바쳤느니라.] 아브라함과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들로 인해 아브라함은 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1:17에는 독생자(only begotten son)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독생자(only begotten son)"란 의미입니다. 이는 합법적인 아들과 사생아의 차이를 구분 짓는 말입니다(갈4:4-7). 킹제임스 성경에서 ‘Begotten son’은 아버지가 결혼한 부인에게서 난 자식입니다. 성경은 남자마다 한 여자만을 아내로 둘 것을 가르칩니다(마10:6-9).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바로 Begotten Son입니다.
성경에는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고 불리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자(Only begotten Son of God)라고 불립니다(요1:20,3:16,18, 요일4:9).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셨다는 의미일 뿐 결코 하나님의 낳은 아들(begotten son)이라고 불리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독생자란 말은 이삭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됩니다. 이는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생각해 봅시다. 이삭은 기적적인 출생을 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나무를 지고 자기 자신을 희생물로 드리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로 간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기를 희생물로 드리려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러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생자를 기꺼이 희생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부활의 모형으로 돌려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가는데 사흘이 걸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데 삼일이 걸렸습니다. 제물이 드려진 곳은 둘 다 예루살렘 근처였습니다(창22:2). 예표와 실상을 보는 것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히브리서 11:17은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 독생자(獨生子-only begotten Son)를 바쳤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에 순종한 그의 씨에 대한 약속을 받았던 아버지에 의해 드려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위의 두 구절은 전혀 모순이 아님을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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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의 부인들의 이름은? 창세기 26: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니]
창세기 28:9,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자기 아내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창세기 36:2-3, [에서가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또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이요, 아나의 딸인 아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취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바스맛을 취하였더니]
성경에 나오는 에서의 부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브에리의 딸 유딧
엘론의 딸 바스맛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
엘리바스를 낳은 엘론의 딸 아다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은 아나의 딸인 아홀리바마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바스맛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바스맛이 둘입니다. 한 명은 엘론의 딸 바스맛이고 한 명은 이스마엘의 딸 바스맛입니다. 이는 에서의 부인들 가운데 두 명이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이스마엘의 딸이 마할랏과 바스맛으로 두명입니다. 흔히 창세기 36:3에서 엘론의 땃 바스맛이 이스마엘의 딸로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두 명을 한 명이라고 생각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들 가운데 두 명을 아내로 취했다고 한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아마 이스마엘의 딸 가운데 마할랏과의 결혼은 어머니 리브가를 기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창28:8-9). 그래서 그는 후에 그녀의 누이인 바스맛을 다시 부인으로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세 번째 문제는 엘론의 딸이 두 명이란 것입니다. 하나는 바스맛이고 하나는 아다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이 둘은 자매 지간이었다고 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또 하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에서의 부인들 가운데 같은 이름이 있는 관계로 한명의 이름을 애칭이나 예명으로 불렀을 수 있습니다. 바스맛이 둘이었으므로 한 명을 아다란 예명을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필사상의 오류나 모순이란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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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분이 저에게 어린 아이의 구원에 대해서 질문하신 분이 계셔서 간단히 답해 드리겠습니다. 어린 아이는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 성경을 통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성경이 답변한 것 이상으로 논리를 전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범위 내에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태에서 유산하거나 사산한 경우 - 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부터 죽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배에서 나올 때에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욥3:11), Job 3:11, Why died I not from the womb? why did I not give up the ghost when I came out of the belly? 욥은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 것을 후회합니다. 만약 태에서 유산하거나 사산 하는 경우 그 아이가 지옥으로 간다면 욥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나자마자 곧 죽는 경우, -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범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죄악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을 엄히 책망하면서 그 아이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내가 말하기를, 혹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아이를 살려 주실지 누가 알리요? 하였기 때문이거니와](삼하12:22). "But now he is dead, wherefore should I fast? Can I bring him back again? I shall go to him, but he shall not return to me."
만약 아이가 죽어서 지옥에 갔다면 다윗은 슬픔을 그치고 빵을 먹으며 이런 말을 태연하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이가 간 곳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도 그곳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뱃속에 있는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가? 침례인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모태 속에 있는 자기 아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들을 때에 아기가 그녀의 태속에서 뛰노니라. 엘리사벳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눅1:41), " And it came to pass, that, when Elisabeth heard the salutation of Mary, the babe leaped in her womb; and Elisabeth was filled with the Holy Ghost: (Lu 1:41)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즉시로 아기가 내 태속에서 기뻐 뛰놀았도다.](눅1:44) For, lo, as soon as the voice of thy salutation sounded in mine ears, the babe leaped in my womb for joy."(Lu 1:44)
뱃속에 있는 아이는 어른 들이 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태아 교육에 힘을 기울이는 이유 중이 하나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 소리를 들었을 때 엘리사벳 보다 뱃속의 아이가 먼저 반응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경우가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친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아버지는 이 세상의 현자들이 알 수 없는 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계시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어른들보다 훨씬 더 잘 압니다. 아이들은 어떤 면에서 어른들보다 뛰어난 영적 지각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각에 예수님께서 영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심을(hast revealed them unto babes) 감사하나이다. 과연 그러하옵나이다. 아버지여, 그리하심이 아버지 보시기에 좋았나이다.](눅10:21)
예표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어린 아이들을 자주 예로 듭니다. 그들은 선악간의 구별이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의 나이를 몇 살까지로 잡을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참고로 요나서 4:11이 참고 구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물며 저 큰 도시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고(한글로 된 흠정역은 hand를 빼 먹었군요 -discern between their right hand and their left hand; 오른 손과 왼 손을 구분하지 못하고-킹제임스). 오른 손과 왼 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를 선악간의 구별이 없다고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몇몇 정신지체아의 경우에는 20살이 넘어도 오른손과 왼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라고 해서 모두 다 구원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10번째 재앙의 경우에 이집트의 어린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장자는 다 죽었습니다. 이는 선악에 따른 심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어린아이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두 진멸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정복 전쟁을 할 때도 어린아이들을 칼날에서 면제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 혼들을 다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들의 영과 혼은 하나님께서 다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나 육은 아무 유익도 없느니라.-요6:63a"
예수님은 하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14). 어린 아이들은 충분히 하늘의 왕국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인들이 회개한 상태가 바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된 상태와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어린 아이들의 마음 상태는 어른들이 회개한 상태만큼은 깨끗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주님이 말씀하신 어린 아이들은 갓난아이가 아니라 다 큰 아이들이었습니다.

원죄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아이들이 원죄를 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으니 따로 쓰지 않겠습니다. sin 과 sins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요1:29).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내려오는 모든 죄는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느냐고 책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원죄를 타고난 문제는 우리 각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이 죄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담의 원죄로 멸망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결과로 주어지는 거듭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Kingdom of heaven 과 연관되어 있지 Kingdom of God와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구약의 유대인들, 환란 때의 유대인들과 (이들도 거듭남과는 상관이 없다.)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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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란 말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딴지거는 분은 사양합니다. 휴거, 삼위일체란 말도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단어는 상호 의사소통의 범주 내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원죄란 말은 '죄 가운데 태어난'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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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통치기간
질문: 삼하 5:4-5 ; 왕상 2:11 ; 대상 3:4. 29:27 절에 보면 다윗 왕의 통치기간의 6개월이 차이가 납니다. 목사님의 도움을 바랍니다.
Answer: 다윗은 40년간 통치를 했는가? 40년 6개월간 통치했는가?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간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32년 6개월은 예루살렘에서 단독적으로 통치했습니다.
다윗의 말년에 솔로몬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 기간에 함께 통치한 것이 6개월입니다. 이 부분은 겹치는 기간입니다. 왕정국가에서 왕은 죽을 때까지 통치 햇수로 셉니다. 그렇게 하면 다윗은 40년 6개월이 되고, 순수하게 단독 통치한 기간은 40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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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의 각권배열은?
성경의 66권은 어떻게 정해졌고, 책 배열순서와 장, 절을 나눈 것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란 사실만 확립되면 모든 문제는 일사천리로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반면 성경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어떤 성경 공부도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이사야서는 6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이 39권이고 신약이 27권이듯이 이사야는 1-39장까지의 내용이 온전히 구약적이고, 40-66장까지가 온전히 신약적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사야의 저자는 두 명이라고 주장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란 책이 성경의 배열과 책의 권수를 확증해 주는 자체 증거라는 사실을 안다면 아무도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 1장(1:2)은 창세기에서 창조된 하늘들과 땅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장은 율법이 주어진 시내산과 율법에 대해서 언급합니다(2:3). 이는 출애굽기의 내용인 율법을 받은 산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사야 3장은 질병과 치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3:17). 레위기의 부정한 병과 치유에 대한 기록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사야 4장은 이스라엘의 기록된 모든 자라고 말함으로써 민수기의 인구 조사와 연관이 있습니다(4:3).
이사야 5:1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를 부릅니다. 이는 신명기 31:30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온 회중의 귀에 이 노래의 말씀들을 끝까지 말하니라.]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의 각 장은 구약의 각 책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어설프게 읽는 독자에게는 절대로 알려 질 수 없는 이러한 진리는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의 배열순서가 원본보다 탁월하며,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약 성경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사야 40장(40:3)은 마태복음 3:3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1:8은 마가복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2장은 누가복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42:13).
이사야 43장은 요한복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43:12).
이사야 44장은 사도행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44:3)-성령의 임재.
이사야 66장은 요한계시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66:22). 새 하늘과 새 땅(계21:1). 성경은 곳곳에 이런 내적 증거들을 숨겨 놓으셨으며, 이를 찾는 사람에겐 광맥을 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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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을 대신한 침례,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 받는 침례란 없습니다.
그것은 이교도의 풍습에나 있는 일입니다.
고전15:29의 for는 위하여/인하여 둘 중 하나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인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15:29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 봅시다. [그렇지 아니하여 만일 죽은 자들이 결코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그러할진대 그들이 어찌하여 죽은 자들을 대체하여 침례를 받느냐]-고전15:29, 흠정역
Else what shall they do which are 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rise not at all? why are they then baptized for the dead? (1Cor 15:29, KJV).
첫째, the dead-죽은 자(단수)일 경우
단수라면 죽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만약 죽은 자가 전혀 일어나지 못한다면, 죽은 자(예수)를 위해 또는 죽은 자(예수)를 인해/때문에 침례를 받은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겠느냐? 왜 그들이 그 때에 죽은 자(예수)를 인해/때문에 침례를 받았느냐?]- 직역입니다. 부활도 없는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어서 부활하지 못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침례를 왜 받았느냐는 의미입니다.
둘째, the dead-죽은 자들(복수)일 경우
복수라면 이는 ‘죽은 사람들’ 즉 일반인들을 가리킵니다. [만약 죽은 자들이 결코 일어나지 못한다면,/‘부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란 뜻입니다./ 죽은 자들을 인해 침례를 받은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겠느냐? 왜 그들이 그 때에 죽은 자들을 인해 침례를 받았느냐?]-직역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을 인해 침례를 받은 그들]에서 '죽은 자들'은 자기 자신의 옛 사람의 죽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침례를 받을 때 옛 사람이 죽고 장사 지냈다는 의미로 침례를 받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만약 부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었다고 믿고 장사지낸 성도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겠느냐? 왜 그들이(성도들이) 그 때에 죽은 자들을 인해(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옛 사람, 자아) 침례를 받았느냐? 란 의미가 됩니다.
둘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죽었기에 침례를 받았고, 거듭남(부활)이 있습니다.
- 이 일은 물리적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 태어나고 한 번 죽으며(몸, 영)
두 번 결혼하고(몸의 결합, 영의 결합--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두 번 장사 지낸다(침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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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왕국(천년 왕국)' , '하나님의 왕국' , '하늘 왕국'은 어떻게 다른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 가지 종류의 왕국(왕국)이 등장한다. 그것은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과 하늘 왕국(heavenly kingdom)이다. 이 세 왕국은 서로 비슷해 보이고, 또 사람들에 따라서 같은 왕국라고 인식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없다.

1. 하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하늘의 왕국"은 마태복음에만 32번 나오는 용어이다.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3:2).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17). 이 하늘의 왕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가는, 주님이 계신 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하늘의 왕국"을 피상적인 왕국으로 생각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하늘의 왕국은 구약전체를 통하여 예언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의 정치적 메시아 왕국이다. 천년 왕국이라고 하는 왕국이 이것이다.
하늘의 왕국이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하늘의 왕국"이라고 제시된 왕국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예들 들어 마태복음 5장에서 묘사되는 하늘의 왕국과, 10장에서 언급되는 하늘의 왕국복음의 묘사 등을 살펴보면,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이방인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왕국으로 생각하기가 힘들다. 특히 사복음서나 산상설교 등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과 시대 상황,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야 왕국의 생각 등을 살펴보면, 이곳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왕국은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되는 왕국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 전체의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전체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다루는 부분은 주로 "예표"로서 등장하지만, 그분의 통치와 왕국을 다루는 부분은 직접적인 서술로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어떻게 이 땅을 다스리기 원하셨는지, 노아를 통해 어떻게 다스리기 원하셨는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신정 국가로 삼아" 통치하기 원하셨는지, 그리고 메시야를 통해 어떻게 이 지구를 다스리기 원하시는지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의 "왕국"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하늘의 왕국"이라는 특별한 용어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 아니라 실제적인 왕국이며, 눈에 볼 수 있게 이 땅에 세워질 정치적인 왕국이다. 이 왕국은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신정통치의 왕국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이 하늘의 왕국을 완성하시는 분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그들이 이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
하늘의 왕국이 눈에 보이며,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 땅에 속한 왕국으로,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라면, "하나님의 왕국"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왕국으로,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시나 실제적인 몸을 입고 다스리시지는 않는다.
이 왕국에 대한 정의는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왕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왕국이다. 그런데 이 영적인 왕국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왕국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왕국이다. 그리고 이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3,5에서 말씀하신대로 거듭나는(born again)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 왕국에 속하지 않고 또 하나의 왕국, 즉 하나님의 왕국에 속할 수 있다.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이 왕국은 영적 왕국이고, 영이신 하나님께서(요4:24) 이 왕국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이 왕국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의 왕국"은 영적으로 들어가는 왕국이 아니라 몸을 입고 실제적으로 들어가는 왕국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지 "거듭나야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은 다르다. 이 두 왕국에 대한 설명은 서로 같은 부분도 있지만 이 왕국 자체는 서로 다르다. 두 왕국의 묘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또 같은 상황 속에서 언급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이 둘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하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이 같지 않은 것은 하늘(heaven)과 하나님(God)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의 왕국"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왕국의 전파가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개의 왕국, 즉 실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함께 전하셨다는 점이다.

3. 하늘 왕국(Heavenly Kingdom)
이 왕국도 하나님의 왕국과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는 왕국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왕국은 지금 우리가 육신 안에서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왕국이지만, 하늘 왕국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셋째 하늘에 있는 영원의 왕국이다.
이 왕국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들 위에 왕좌에 앉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 이 왕국은 바울 사도에 의해 "낙원"이라고 불리며(고후 12;4)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는 그 왕국이다. 그러나 이 왕국은 결코 "하늘의 왕국"이 아니다. 이 왕국이 하늘의 왕국과 비슷한 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외에는 없다. 이 왕국은 셋째 하늘에 있는 왕국이고, 하늘의 왕국은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왕국을 디모데후서 4:18에서 분명히 "하늘왕국"(heavenly kingdom)이라고 못 박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하늘 왕국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하늘의 왕국이라고 말하며, 심지어 구령할 때에도 "예수 믿고 하늘의 천국가십시오"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성경적으로 이 말은 틀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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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8:1~3, 안녕하세요.. 목사님.. 자주 이곳에 들러 좋은 글을 읽고 갑니다. 문서 선교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사야서를 읽던 중 의문 나는 점이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이사야서 8장 1절에서 3절인데요..
제가 영어실력이 없어서 좀 혼동이 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글번역과 같이 볼 때 조금 이상해보이기도 하는데요.. Isa 8:1-3 (1)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두루마리를 취하고 그 안에 사람이 쓰는 펜으로 마헬살랄하스바스에 관하여 기록하라. (2) 내가 신실한 증인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택하여 증거하게 하였노라, 하시기에 (3) 내가 여대언자에게로 들어가니 그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니라.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Isa 8:1-3 Moreover the LORD said unto me, Take thee a great roll, and write in it with a man's pen concerning Mahershalalhashbaz. (2) And I took unto me faithful witnesses to record, Uriah the priest, and Zechariah the son of Jeberechiah. (3) And I went unto the prophetess; and she conceived, and bare a son. Then said the LORD to me, Call his name Mahershalalhashbaz.
2절의 'I' 는 누구입니까? 한글 번역에는 마치 주님을 뜻하는 것 같구요.. 영문에서는 마치 이사야 자신을 뜻하는 것 같아서요.. 그럼.. 늘 평안하시길 기도드리면서..
이사야 8:1-4절은 북왕국의 멸망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아들의 이름을 마헬살렐하스바스라고 지었는데 이는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그 의미는 ‘속히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18절에 따라 ‘이사야 자신과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표적과 이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아이가 태어나 말을 할 줄 알기도 전에 자식의 이름대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해 멸망했습니다(721 B.C).
이런 헷갈리는 문장을 읽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앞뒤를 반복해서 읽는 것입니다. 대답은 '이사야 '입니다. 이사야가 여대언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주님이 지어 주신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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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사후에 관한 여러 가지 교리가 있습니다만. 궁금한 것은 그러한 교리 중에 거짓과 참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밝혀지지 않은 이러한 거짓과 참들 중에서 어떠한 교리를
어떻게 믿어야 할까하는 고민이 앞섭니다. 아니면, 단순히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믿는 교리에 거짓과 참이 있을진대, 어떤 교리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저는 교단침례교회에 다니다 안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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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광범위하군요. 육신의 죽음 이후를 말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 불신자의 경우-
죽으면 몸은 무덤으로 갑니다. 신자와 구분이 없습니다. 혼은 지옥으로 갑니다. 연옥이나 다른 어떤 중간 단계가 없이 바로 지옥으로 갑니다.(누가복음 16장 참조). 영은 주님께서 회수해 가십니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갑니다.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나와 모두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거니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는 자가 누구이랴?](전3:20~21)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신즉 그것들이 떨고 주께서 그것들의 호흡을 거두어 가신즉 그것들이 죽어 자기들의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0. 호흡을 거두어 가신다는 말씀에 주목!! 주님이 영을 거두어 가십니다. 영과 호흡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분께서 만일 자신의 마음을 사람 위에 두시고 그의 영과 그의 숨을 자신에게로 거두실진대](욥34:14).
신자의 경우 - 몸은 땅으로 갑니다. 혼은 구원 받았기에 주님께로 갑니다. [그분께서 다섯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붙잡은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魂)들이 제단 아래에서](계6:9). 죽임 당한 자들의 혼들이란 말은 몸이 죽은 사람들이요, 혼은 지금 주님의 제단 아래에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왕좌들과 그 위에 앉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인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 (계20:4a). 목이 베였다는 것은 몸의 죽음을 말합니다. 몸은 죽어서 땅(흙)에 있습니다. 혼은 주님 앞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어서 그 몸은 땅에 있었습니다. 몸은 썩어 흙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과 혼은 주님께로 갔습니다. [이는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빌1:23).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영은 주님께로 갑니다. 신자의 영은 이미 주님과 함께 하늘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도의 영은 주와 합하여 이미 한 영이 되었습니다(고전6:17).
질문의 의도에 맞는 답인지 모르겠지만.... 성경이 우리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세히 알고 싶으면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성경신자들의 교회로 가서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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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맡겨야할 짐과 자기 십자가의 차이
질문: 목사님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종일 생각한 것입니다. 십자가와 짐의 차이를 구분이 잘 안 되어서요.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야 되는 것이고, 짐은 주님께 맡겨야 되는데, 지금 벌어지는 것이 주님이 저에게 주신 십자가인지, 주님께 맡겨야 할 짐인지 햇갈릴 때가 많습니다.
답변: 대부분이 크게 오해하는 부분들입니다. 교회들에서 잘못 가르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두 개의 십자가--사실은 하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히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되는데 이제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를 통해 나의 모든 일, 환경, 사건, 길, 염려, 짐 ....등을 다 짊어지십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내가 맡긴 것들을 모두 짊어지십니다. 그것을 성경은 '자기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모습으로 진 십자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우리 안에서 진 것들이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나의 짐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이 지시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내 어깨에 있는데 실은 내 속에 계신 주님이 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살고, 내가 행하지 않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행하도록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의 문제뿐 아니라 내 자신까지도 담당하시도록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교만이요,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나의 죄 짐을 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현재 내 안에 사시면서 나의 모든 것을 짊어지십니다. 내가 주님께 맡기지 않으면 주님은 지실 수 없습니다. 내 홀로 지게 됩니다. 그 때는 정말 죽을 맛이죠...주님이 지시면 나에게는 안식이 있습니다. 여전히 나의 환경은 변한 것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 선교 단체에 있을 때 형제자매들이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모두 고행의 길을 걸었습니다..그것을 자기 부인/자기 십자가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설교자들이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있고, 내가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 이러면서..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하나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모든 문제, 나 자신까지 담당하시는 것이죠. 담당(bear)-- 지다.
주님이 지금도 나를 담당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볼 때는 내가 어려움, 짐, 사건, 일, 염려 등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실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지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안 지셨다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의 신앙은 파산입니다. 평안도 안식도 기쁨도 없고...주여 얼른 지나가게 해 주소서. 없애 주소서...이런 기도만 하게 되고. 금식 들어가고 철야, 새벽기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안 되겠다 싶어 짐을 풀어 주시면...승리했다고 간증해댑니다. 기도하니 되더라고...
사실은 승리한 것도, 해결된 것도 아니고 잠시 유예된 것입니다. 주님은 다음에 다시 그 문제를 다루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동일 문제가 반복되죠. 많은 사람들이 체험하는 부분입니다. 승리한 것, 해결된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설교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설교 중에서 15번 -제자의 길을 들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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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목사님.. 에스겔서를 읽는데 도와주세요, 에스겔서 40장부터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질문을 올립니다. 제가 한글 실력도 이렇게 없는 건지.. -.- 수도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질문을 올려봅니다.
우선
1. /내가/ 본즉 그 집의 바깥에 돌아가며 담이 있고 그 사람의 손에 측량 갈대가 있는데 그 길이는 일 큐빗에 손바닥 넓이를 더한 /큐빗/으로 육 큐빗이더라. 그가 그 건축한 /담/을 측량하니 넓이가 한 갈대요, 높이도 한 갈대라.(겔40:5) 위에서 '일 큐빗에 손바닥 넓이를 더한 /큐빗/으로 육 큐빗' 이란게 ..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큐빗 단위에 손바닥 넓이를 더한 것을 새로운 큐빗 단위로 보고 그걸 기준으로 육 큐빗이란 건가요?

2. 작은 방마다 길이가 한 갈대요, 넓이도 한 갈대며 작은 방들 사이가 오 큐빗이며 안쪽 문의 주랑(柱廊) 곁에 있는 문의 출입 통로가 한 갈대며(겔40:7) '안쪽 문의 주랑' 이라는 건 안쪽에 문이 있고 그 너머에 주랑이 있다는 건가요?
엠파스 국어사전 : 주랑(柱廊)[명사] 여러 개의 기둥만 나란히 서 있고 벽이 없는 복도

3. 그가 또 안쪽 문의 주랑을 측량하니 한 갈대며(겔40:8) '주랑'을 측정하는데 한 갈대밖에(?) 안 된다는 것도 언뜻 상상이 안 되거든요?

4. 그가 또 한 작은 방의 지붕에서 다른 작은 방의 지붕까지 그 문을 측량하니 그 넓이가 이십오 큐빗인데 문과 문이 서로 마주 보더라.(겔40:13) 이건 제 머리로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구조라서요.. 조금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기타 등등.. 거의 에스겔서 40장 이후에 나오는 건물들의 구조에 대한 구절들은 제 머리로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고 매번 읽을 때마다 너무 답답하기만 합니다. 혹시 어딘가 모형사진 같은 거라도 없는지요??
아니면 스케치 같은 거라도.. 아... 도와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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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범죄와 그에 따른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포로가 되어 바빌론 땅에 끌려 왔는지 성경적 이해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회복을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 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인한 소실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신성시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굳게 믿었던 이들에게 이방 군대들에 의해 성전이 불타고 파괴될 수 있는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소실은 마치 교회가 성경을 잃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중에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전에 대한 환상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솔로몬의 성전보다 훨씬 더 나은 성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언약궤가 거하는 지성소가 아니라 주님이 친히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런 성전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이 성전은 포로기가 끝난 후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지은 성전이나 헤롯이 지은 성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는 천년 왕국 때 예루살렘에 세워질 성전입니다. 성전의 모습은 아테네 신전이나 로마의 황실과 같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 양식을 생각하기 쉽지만 직 사각형의 평범한 모습입니다. 방주의 모양이나 성막의 모습이나 성전의 모습이나 다 박스형입니다. 2층 양옥집 모습을 길게 가로로 보시면 됩니다.
에스겔 40:5은 성전의 담의 규격입니다. 6-15까지 내부 구조인데 이 부분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전 전문가들이 그린 상상도의 모습도 모두 다릅니다. 에스겔이 그림 한 장 그려서 넣어 놓았으면 하는 심정이지요.
* 한 갈대=육큐빗, 길이 너비는 모두 한 갈대
* 문의 출입 통로의 너비 = 한 갈대, 다른 문의 출입 통오= 한 갈대
* 작은 방의 길이, 너비= 한 갈대, 작은 방들 사이=오큐빗,
* 안쪽 문의 주랑= 한 갈대
7절부터가 그림이 잘 안 그려지는 부분입니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이 사람들의 주거용 건축물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 문의 주랑= 팔큐빗, 기둥들= 이큐빗, [또 그 문의 주랑을 측량하니 팔 큐빗이요, 그 기둥들은 이 큐빗이라. 그 문의 주랑이 안쪽을 향하였으며 동쪽을 향한 문의 작은 방들은 이쪽에 셋이 있고 저쪽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한 치수요, 이쪽저쪽의 기둥들도 한 치수더라. 또 그가 그 문 입구의 넓이를 측량하니 십 큐빗이며 그 문의 길이는 십삼 큐빗이며 작은 방들 앞에 또한 공간이 있는데 이쪽도 일 큐빗이요, 저쪽도 일 큐빗이며 이 작은 방들은 이쪽도 육 큐빗이요, 저쪽도 육 큐빗이더라. 그가 또 한 작은 방의 지붕에서 다른 작은 방의 지붕까지 그 문을 측량하니 그 넓이가 이십오 큐빗인데 문과 문이 서로 마주 보더라. 그가 또 육십 큐빗 되는 기둥들을 만들되 그 문 주위에 있는 뜰의 기둥까지 /만드니라/. 입구의 문 정면에서 안쪽 문의 주랑 정면까지가 오십 큐빗이며](겔40:7~15).
* 주랑=porch. 이 말은 형제님이 국어사전에서 본 그 뜻이 아니고 아파트 건물에서 '베란다'의 개념입니다. 본 건물에서 달아낸 약간의 너비-한옥으로 치면 처마를 주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인데 이곳 미국에서는 그냥 포치(porch)라고 하는데 한국말로 그게 주랑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몇 장 구해 보았는데 제 각각이군요. 좀 더 검색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게다가 만족스런 답을 드리지 못해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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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김 영균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 받고 있습니다.
여쭈어 볼 말씀은
1. 창1:1의 하늘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범위 또는 상태)
2.창1:6-8 에서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에서 땅에서 나눠진 물은 첫째하늘과 둘째 하늘을 구분 짓는 곳(대기권 끝인지요?)
3.노아홍수 때 쏟아졌던 물은 셋째하늘에 있는 물(바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3.셋째 하늘에 있는 바다는 언제 생겼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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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구분 짓는 것에 대해서, 하늘들 위에 물이 있다는 사실은 시편 148:4에 나옵니다. [하늘들의 하늘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아, 너희도 그분을 찬양할지어다.](시148:4).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은 대기권으로 나누어집니다.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은 물 층으로 나누어집니다.
둘째 하늘 위에 거대한 바다가 있는데 이를 ‘깊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분께서 하늘들을 예비하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으며 그분께서 깊음의 표면에 한계를 정하시고 위로 구름들을 굳게 세우시며 깊음의 샘들을 견고히 하시고](잠8:27~28).
하늘들을 예비하실 때에 깊음의 표면에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왕좌의 정면을 가리시고 자신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경계들을 두어 물들을 둘러싸시되 낮과 밤이 끝날 때까지 하시느니라.] (욥26:9~10).
현재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습니다. [물들은 돌로 숨긴 것같이 /굳게/ 숨겨져 있고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느니라.](욥38:30). 그래서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그대가 그분과 더불어 단단하고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을 펼쳤느냐?](욥37:18).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보좌 아래의 모습이 있는데 ‘수정 같은 유리 바다’라고 표현합니다. [왕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계4:6a). [또 내가 보니 불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는데 짐승과 그의 형상과 그의 표와 그의 이름의 수(數)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의 하프를 가지고 유리 바다 위에 서서](계15:2). 대환란을 통과한 승리자들이 그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깊음의 바다에는 누가 거하고 있는가? 용들이 거하고 있습니다. 리워야단이 사는 곳이 깊음입니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들 가운데 있는 용들의 머리들을 깨드리셨으며](시74:13).
[용들과 모든 깊음들아, 너희는 땅에서부터 [주]를 찬양하라.](시148:7). 이 바다에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다 거하고 있거나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더 다양한 생물들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이 크고 넓은 바다도 그러하오니 그 속에는 느릿느릿 다니는 짐승 곧 작고 큰 짐승이 무수하나이다. 거기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만드사 거기서 놀게 하신 리워야단이 있나이다.] (시104:25~26).
이런 성경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은 ‘물이 몇 일째 만들어졌느냐?’고 물으면 혼비백산합니다. 하늘과 땅(창1:1)이 만들어 질 때 깊음이 만들어졌고 깊음이 땅을 덮음으로(창1:2) 지구는 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이것은 정확한 성경적 사실입니다.
창세기 1:3부터는 이런 상태의 지구를 중심으로 현재 우리가 거하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땅(지구)는 창세기 1:1에서 창조되었고, 창세기 1:2에서 깊음에 잠겨 있다가 창세기 1:6-7에서 궁창을 통해 물이 갈라짐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이는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그들이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벧후3:5). *standing out of water and in the water. 라고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물은 노아의 홍수가 아닙니다. 흔히 베드로후서 3:6, [이로 말미암아 그때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Whereby the world that then was, being overflowed with water, perished : (벧후3:6)란 말씀을 노아의 홍수 정도로 간단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 물은 창세기 1:2의 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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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본 질문에 대한 대답
1. 창세기 1:1의 하늘은 현재 하늘들이 만들어지기 전의 하늘입니다. 단수입니다. 범위라고 하면 땅을 제외한 전부가 하늘입니다. 현재처럼 3층이 아니라 단층의 하늘입니다.
2. 궁창이 하늘입니다. 궁창을 통해 물이 나누어짐으로써 깊음의 물은 둘째 하늘 위에 있습니다.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의 구분이 대기권입니다.
3. 깊음의 창이 열리고...란 표현인데 '깊음'이란 단어를 연구하면 간단히 답이 나옵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4. 셋째 하늘에 있는 물이 아니고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의 물입니다. 물은 창세기 1:2에서 이미 등장합니다. 이는 6일 창조 과정 이전입니다. 성경을 부주의하게 읽는 이들은 창세기 1:1을 대명제 또는 선포로 보고 1:2은 얼버무리고, 1:3부터 논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1의 창조 과정은 욥기 38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을 쓰는 지역 교회를 찾으십시오. 결국 재 창조론에 대한 문제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의견들이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서로 부딪히기도 합니다. 성경은 아는 만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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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과 마곡이란 무엇입니까?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 얼굴을 마곡 땅/의/ 곡 곧 메섹과 두발의 최고 통치자에게로 향하게 하고 그를 쳐서 대언하여](겔38:1-2).
흔히 곡과 마곡을 합쳐서 부르는데 곡은 지명의 이름이나 왕조의 이름이 아니고 ‘사람의 이름’입니다. 2절에 주님이 직접 곡과 마곡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곡은 ‘메섹과 두발의 최고 통치자’입니다. 마곡은 곡의 땅이란 뜻입니다. 달리 성경의 인.지명 사전을 펼쳐 보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얼굴을 마곡 땅의 곡”(2)이라고 적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이들을 향해 얼굴을 들고 대적하는 대언을 하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3절입니다.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오 메섹과 두발의 최고 통치자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3). 다시 한 번 ‘곡’의 정체가 나옵니다. 곡은 민족의 이름도 아니고 나라 이름도 아닙니다. 곡은 파라오처럼 타이틀이 아니고 어떤 사람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미 2절에서 “그를 쳐서”(against him)라고 기록된 것을 봅니다. 곡을 인칭 대명사 him 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이 인물은 메섹과 두발의 최고 통치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자가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어떤 인물일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스코필드 주석 성경에 보면 “곡은 왕을 가리키고 마곡은 그의 나라를 가리킨다.”라고 했는데 이는 현대의 어떤 성경학자들보다 문맥을 정확히 따른 주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곡이 누구인가? 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곡과 마곡에 대한 신약 성경의 언급은 요한 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그 천 년이 다 차매 사탄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고 나가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속이고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하게 하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땅의 넓은 곳으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그 사랑 받는 도시를 에워싸매 불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키고] (계20:7~9).
여기서 곡과 마곡은 두 인물이 아니라 마곡 땅의 곡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 언어적 표현으로 ‘징키스칸과 몽고, 링컨과 미국’이란 식의 표현입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을 앞에 쓰고 그 나라 이름을 쓰는 것입니다. 곡과 마곡은 천년 왕국이 끝날 무렵에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는 민족을 대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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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것은 영이니,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 It is the spirit that quickeneth; the flesh profiteth nothing : the words that I speak unto you, they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요6:63).
#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6). 영과 육을 비교하거나 대조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말의 표현이 주어와 술어가 바뀐 느낌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란 말씀은 '영/spirit'을 살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영을 살리시고 육은 살리지 않는다, 육은 쓸모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거나 그렇게 설교하는 것을 자주 보고 듣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란 말씀은 "살리는 것"이 주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영"이 주어입니다. "영은 ***를 살리며, 육은 아무 것도 살리지 못한다. 육은 무엇을 살리는 데는 유익이 없다. 소용이 없다는 의미지요. "영은 살리며"에서 영(the spirit)을 강조 용법으로 It is....that 사이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It is...that을 빼보면 문장이 눈에 쏙 들어옵니다.
의미를 잘 이해하시고 읽으면 다르게 읽힐 것입니다.
영을 살리다가 아니고, 영이 뭔가를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요6:63)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영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육은 우리를 살리는데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영은 무엇인가를 살린다. 영은 생명을 준다. 육은 아무 것도 살리지 못한다. 육은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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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여덟째인가? 일곱째인가?
이제 다윗은 베들레헴유다의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더니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으며 그는 사울 시대에 사람들 가운데 늙은 사람으로 통하였더라. (삼상17:12)
이새가 자기의 일곱 아들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삼상16:10). 이새는 자기의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심마와 넷째 느다네엘과 다섯째 랏대와 여섯째 오셈과 일곱째 다윗을 낳았으며 (대상2: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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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의 아들은 총 여덟이었습니다(삼상 17:12).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들렀을 때도 아들은 여덟이었고, 일곱 형제가 사무엘 앞을 지나갔습니다. 첫째는 엘리압이고, 둘째는 아미나답, 셋째는 삼마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러 갈 때도 이 셋이 전쟁터로 갔습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셋이라고 나옵니다. 이 순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윗이 막내란 사실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본래 이새의 여덟 번 째 자식입니다.
성경에서 '여덟 번 째'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이런 점에서 새로운 왕조, 이스라엘의 새 시대를 여는 인물이요, 새 언약의 예표가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장차 메시야 왕국의 통치자로 올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상 2장에 이새의 아들들의 명단에는 여덟이 아니라 일곱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일곱 번째 아들로 나옵니다. [이새는 자기의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심마와 넷째 느다네엘과 다섯째 랏대와 여섯째 오셈과 일곱째 다윗을 낳았으며] (대상2:13~15).
그렇다면 이것은 성경의 모순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유난히 첫째, 엘리압과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삼마란 기록의 반복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세 아들이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더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맏/아들/이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삼상17:13). 셋째는 삼마. [이새가 삼마를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삼상16:9). 역시 셋째는 삼마입니다.
넷째부터 일곱째까지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막내 즉 여덟째가 다윗이란 것만 나옵니다. 그런데 역대기상 2장에는 나머지 형제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셋째 아들 "삼마"가 아니라 셋째가 '심마'입니다. 일점일획의 차이입니다. 일점일획의 중요성을 인지합시다. 셋째가 [삼마에서 심마]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삼마는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청년기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셋째부터 여덟째까지 모두 한 칸 씩 당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일곱째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무엘에서는 다윗이 왕이 되기 전의 모습에 중점을 두었고, 역대기는 왕이 된 후의 다윗의 모습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기술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모순이 아니라 성경을 비교해서 읽음으로서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입니다. 만약 "삼마와 심마"가 히브리 발음만 다른 동일인물이라면 형제들 중에 한 명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된 다윗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 일곱 번째입니다. 성경에서 서로 다른 부분은 모순이나 오류가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는 단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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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린도전서 7:36-39 의 his virgin 에 대해
한글 번역이 자기 딸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번역이 궁금합니다.
any man -> he -> his
어떤 사람을 일반 총칭의 he로 받았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 그가 --> 자신의]

답변이 늦었습니다. 저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자기 딸'로 되어 있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약혼녀'라면 결혼해야죠. 약혼은 결혼의 전제 조건이고, 유대인들의 정혼은 곧 결혼이었습니다. 약혼자를 아내라고 부르죠. '네 아내 마리아 데려 오기를 두려워 말라'. 동양에서는 아들, 딸에 대한 혼담의 주관자는 아버지입니다. 특히 유대에서는 더했죠.
과년한 딸이 시집을 가지 않아서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처녀 딸에게도 어려움이 있다면 시집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을 섬기는 것을 택하고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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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과 영들의 몸
눅24:39.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히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靈)들로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막 1:23 그들의 회당에 부정한 영이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를 지르며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아니한 천사들이 타락하여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땅이 더 부패되었던 노아의 시대에서 보듯 천사가 땅에서는 인간의 몸처럼 결혼도 할 수 있는 몸이 있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전 아브라함과 롯에게 나타난 천사들 역시 음식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몸을 보여주는 경우였는데 왜 눅 24: 39 에서 예수님은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하실까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은 천사 같은(히1:14) 존재가 아니라 단지 영만(막1:23) 있는 경우일까요?

아님 마귀들림을 일으키는 부정한 영들도 사탄의 천사들로 하나님의 천사들처럼 땅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람 몸속에 자리 잡고 들어가 마귀 들림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인가요?
아님 사탄의 천사들과 마귀 들림을 일으키는 부정한 영들은 다른 존재인가요?
즉 사탄의 천사들은 지상에서 사람 같은 몸이 있는 영적 존재이나 부정한 영들은 몸이 없이 영만으로 사람이나 돼지 등의 다른 존재의 몸속에 거처를 정해야 하는 영만 있는 존재들일까요?

아 또 말이 나온 김에 추가 확인 질문은 지금 타타루스에 갇혀있는 타락한 천사들과 계시록에서 언급된 앞으로 사탄이 땅으로 쫓겨날 때 함께 하늘에서 내쫓길 사탄의 천사들은 천사는 천사인데 부류가 다른 천사들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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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무서워하고 놀라며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염려하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7-39).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영'을 본 줄로 알았습니다. 즉 몸이 다시 살아난 부활, 죽은 자로부터 일어난 부활이 아니라 몸은 죽은 채로 있고, '영'만 살아나 자신들 앞에 서 계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가복음 16장의 지옥에 간 부자의 혼이 몸의 모양을 지니고, 감정(뜨거움을 느끼고)과 이성적 지각을 가지고(나사로와 아브라함을 알아 봄), 눈, 혀 등의 신체 기관을 모두 가졌듯이, 영 또한 몸의 형태를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옥에 갇힌 베드로가 돌아왔을 때 함께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은 도르가를 향해 "네가 그의 영을 본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올 때 역시 '영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영은 사람의 모습(몸의 형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몸, 혼, 영이 모두 사람이요, 삼위일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몸, 나의 영, 나의 혼입니다. 몸도 나이고, 영도 나이고, 혼도 나입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육신'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한 몸, 약한 몸, 질그릇, 육신의 장막 등으로 묘사됩니다. 장차 부활 때에 입게 될 몸은 동일한 몸이지만 그 재료가 땅이 아닌 하늘에서 났고, 영광스럽고,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입니다.
성도들은 영을 입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입는데 '영적인 몸'을 입습니다. 예수님은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을 입은 채 죽으셨고, 묻히셨으나 '영광스런 몸 즉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 지셨습니다. 영이 아니라 영적인 몸을 입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영'인 줄로 알았지만 주님은 '영'이 아니라 '영적인 몸'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영]은 영적인 몸과 달리 살과 뼈가 없습니다. 나의 영은 내 안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신음하기도 하고, 눌리기도 하고, 격동하기도 합니다. 영은 혼과 마찬가지로 지,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과 뼈는 없습니다. 영적인 몸은 '살과 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4의 섬기는 영들로서의 천사들은 무엇입니까?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靈)들로서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히1:14).
천사들은 영적인 몸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한 우리의 모습 즉 영적인 몸을 입은 모습이 곧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살과 뼈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남성의 모습이며,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천사의 모습은 늘 그렇습니다.

천사들은 싸우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고,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천사론으로 들어가면 길어질 것 같고... 천사들이 입은 영적인 몸은 날개 없이 날 수 있고, 사람의 눈에 보일 수도 있고, 자신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지만 분명히 물리적인 힘과 형체, 기능이 다 있습니다.
영적인 몸을 입은 상태가 되면 그의 인격적 정체성은 '영'이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을 부를 때 우리는 '영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을 부를 때 우리는 '혼들'이라고 부릅니다. 셀 때도 혼이 몇 명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인격적 정체성은 '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부활해서 영적인 몸을 입으면 우리 역시 혼들이 아니라 '영들'로 분류됩니다. 천사들을 '영들'이라고 한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제자들이 말한 [영]은 몸이 없는 상태의 '영'만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영과 영적인 몸을 구분해 주신 것입니다.
부정한 영(마귀들)은 몸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은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들은 몸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몸을 필요로 하고, 사람들이나 짐승들 속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속에서 빙의를 한다거나 신내림은 모두 마귀들린 현상입니다. 접신, 강신, 영매 등도 모두 몸을 원하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몸을 빌려 주거나 점령당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는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되는 것이지 아무 천사(마귀의 천사들)와 같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두번째 질문:
타타루스에 갇혀 있는 천사들과 현재 이 땅에 활동하는 마귀들은 다른 존재입니다. 이들은 갇혀 있기 때문에 현재 이 땅에서 활동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탄(용)과 그의 천사들은 현재 이 땅과 둘째 하늘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high places에 있는" 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계시록에서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과 싸울 때 둘째 하늘에서 쫓겨나 이 땅으로 내려오고, 주님의 지상 재림으로 다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쫓겨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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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창위의 물이 있고 그곳이 '깊음'이고 '유리바다'라는 점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 이 지구위의 바다도 깊음이라고 표현되지는 않는지 생각이 들어 문의해봅니다. 왜냐하면 용들이 있는 곳을 묘사할 때 나오는 구절에서 용들이 궁창 위 셋째와 둘째하늘 사이의 깊음에만 있다면 [용들과 모든 깊음들아, 너희는 땅에서부터 [주]를 찬양하라.](시148:7)에서 왜 땅에서부터 찬양하라고 하는지
그리고 104편 25-26절의 바다가 이 지구의 바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요.
[이 크고 넓은 바다도 그러하오니 그 속에는 느릿느릿 다니는 짐승 곧 작고 큰 짐승이 무수하나이다. 거기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만드사 거기서 놀게 하신 리워야단이 있나이다.] (시104:25~26).
궁창위의 깊음의 바다에서 배들이 다닌다면 재창조된 후 어떤 존재들이 다니는 배인지 모르겠고 이 구절의 앞 구절들에는 궁창아래 땅의 짐승들에 대한 주의 지혜와 부요하심을 언급하며 25절에서 동시에 이 바다도 그러하다고 하면서 27절에서 이 바다의 창조물들이 주께서 먹을 것 주시기를 기다리며 30절에서 그것들이 주의 영으로 창조되었은즉 주께서 지면(the face of the earth)을 새롭게 하신다고 합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보내시매 그것들이 창조되었사온즉 주께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
즉 배들이 다니며 리워야단이 있는 궁창위의 바다의 생물들이 창조 되었는데
왜 이 지구의 face가 새롭게 된다는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의 바다에도 용들이 사는 것이 아닌가 해서요.
(실제로 1970년대 일본 선박이 공룡의 사체를 건져올린 사진을 노아의 홍수 싸이트에서 본 적이 있구요.) 저 하늘 위 깊음에 사는 용은 마귀이나 이 지구바다에 사는 용은 그저 파충류 즉 공룡의 종류인 짐승이 아닌가 해서 말이죠.(이 땅에 뱀들이 있듯이)

그리고 또 이 104편 시편의 전반부에서도 의문점이 드는 것과 연관하여
6절에서 땅이 깊음으로 덮였다고 했는데 <주께서 옷으로 덮는 것같이 땅을 깊음으로 덮으시매 물들이 산들 위에 섰으나>(시104:6)

이것이 첫 창조후의 창세기 1장 2절의 상황이라면 9절에서 이 물들이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시는데 <주께서 경계를 정하사 물들로 하여금 넘어가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104:9)

그러면 노아의 홍수 때 전 지구의 땅이 모두 물에 잠기는 일이 생기므로 6절의 물들이 땅위에 섰다는 것은 노아의 홍수 때 일이 더 타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렇다면 6절의 땅을 덮은 깊음(물들)이 8절에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 그것들을 위하여 기초를 놓으신 곳에 이르렀다면 지구의 바다 깊은 곳도 깊음으로 불리우는 것이 아닌가 해서말이죠.
그런데 특이하게 이 25절의 바다는 물고기라는 표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나옵니다.
이 바다가 지구의 바다가 아니라 궁창 위 바다이면 이것도 재창조 다섯째날 물들이 생명을 낼 때 창조되었을까요? 그곳의 짐승들이 이 땅의 짐승들도 포함하고 있다면 이 땅의 짐승들과 쌍을 이루는 관계라도 ??? 그래서 궁창위의 물속에 짐승이 창조될 때 이 땅의 지면도 새롭게 함께 창조된다고 봐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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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8편을 주석을 하든가 한 번 설교를 하겠습니다.

오늘은 일단 질문하신 내용 중에 [깊음]이 땅의 바다를 지칭하는데 사용되는가? 에 대해서 답변하겠습니다.
이 땅의 바다 속을 '깊음'이라고 표현하는 예는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을 '깊음'을 통과했다고 말합니다.
시106: 9. 그분께서 홍해도 꾸짖으신즉 그것이 마르매 그분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듯 깊음들을 통과하게 하시고
사51:10. 큰 깊음의 물들인 바다를 마르게 하시고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사 속량(贖良)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사63:13. 그들을 깊음 가운데로 인도하되 광야에 있는 말같이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게 한 자가 어디 있느냐? 하셨느니라.

땅의 깊음이란 말도 있습니다.
잠25:3.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같이 왕들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신약에서 한 예를 보겠습니다.
고후11:25. 세 번 몽둥이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을 당하여 한 밤과 한 낮을 깊음 속에 있었으며
깊음이라고 해서 모두 궁창 위의 바다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그동안 밀린 답변들을 하느라 시간이 좀 흘렀습니다.
미진한 부분들(용들, 시편148)에 대해서는 다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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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킹제임스 성경의 'fear'와
다른 역본의 'awe'의 차이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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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e란 단어가 쓰인 예가 세 곳이죠. 아래 구절들입니다.
"...stand in awe..."
Ps 4:4 Stand in awe, and sin not: commune with your own heart upon your bed, and be still. Selah.
Ps 33:8 Let all the earth fear the LORD: let all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stand in awe of him.
Ps 119:161 SCHIN. Princes have persecuted me without a cause: but my heart standeth in awe of thy word.

awe는 경외감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Webster's 1828 Dictionary 정의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AWE, n. aw. [Gr. to be astonished.]
1. Fear mingled with admiration or reverence; reverential fear.
Stand in awe and sin not. Ps. 4.
2. Fear; dread inspired by something great, or terrific.
쉽게 구분이 갈 줄로 봅니다.
fear는 모든 두려움을 다 포함합니다. 한국말로는 겁을 먹는 것입니다. 공포감이 내포됩니다.

현대 역본에서 fear를 awe로 고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 중에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 겁을 먹고, 공포로 말미암는 두려움'은 잘못되었다는 관점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awe 뿐 아니라 fear 해야 합니다.
이 점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단어를 고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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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신문 인터뷰에서 기자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느냐고 묻자 예수님의 족보도 한 명이 빠진 오류가 있다고 답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genealogy)가 아니라 예수님의 세대(generation)란 점입니다.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세대'를 '족보'라고 단어를 변개해 버렸는데 족보와 세대는 다릅니다. 족보는 혈연적 관계를 순서대로 기술하지만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성경은 단 한번도 42 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14대씩 세 번을 분류해서 말하는데, 사람들은 알아서 14x3=42라고 읽어 버립니다.
14+14+14=42라고 읽은 후에는 성경에 언급된 인물들을 아무리 세어 보아도 42명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자, 성경이 기록한 대로 읽어 봅시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세대]라고 했습니다.
세어 보면 Abraham, Isaac, Jacob, Judas, Phares, Esrom, Aram, Aminadab,
Naasson, Salmon, Booz, Obed, Jesse, David.-14명, 정확합니다.

마태는 다윗부터 바빌론 포로기까지 14세대라고 말합니다.
주의할 것은 솔로몬부터라고 하지 않고 다윗부터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셈을 할 때 1부터 3까지, 4부터 6까지..이런 식으로 셉니다.
그러면 1부터 6까지는 3+3=6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빌론 포로기까지라고 하기 때문에 1부터 3까지는 3이요, 3부터 5까지는 3이다란 식입니다. 고로 총 5가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다윗부터 세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후에 세어 봅시다.
"David, Solomon, Roboam, Abia, Asa, Josaphat, Joram, Ozias, Joatham, Achaz, Ezekias, Mannasses, Amon, Josias" 14명이 틀림없습니다.
고로 아브라함부터 세면 28명이 아니라 27명이 됩니다.
성경의 모순이 아니라 성경을 잘 못 읽은 사람들의 오류입니다.

참고할 점.
우리는 열왕기, 역대기를 통해 다윗 왕조의 왕들과 비교할 때 왕들은 총 14명이 넘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3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아하시아(Ahaziah), 요아스(Joash), 아마시아(Amaziah)입니다. 이들은 매우 사악한 왕들인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시되](신29:20b)란 말씀대로 하신 것입니다.
므깃도에서 요시아가 죽은 후(대하35:22-23) 독립적인 유다 왕국은 끝이 났습니다. 그 후에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의 왕들은 이집트와 바빌론에 의해 세워진 왕들입니다.
포로기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14대입니다.
Jechonias, Salathiel, Zorobabel, Abiud, Eliakim, Azor, Sadoc, Achim, Eliud, Eleazar, Matthan, Jacob, Joseph, Jesus. -역시 14명입니다. 성경이 말한 대로 정확합니다.
[And after they were brought to Babylon, Jechonias begat Salathiel; and Salathiel begat Zorobabel;] (마 1:12). ****AFTER***란 말씀에 주목. 한 단어가 중요한 내용을 결정해 줍니다.

* 주의.
성경을 읽을 때 마태복음 1:11,12에 여고니야가 두번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카운팅의 오류가 자주 나옵니다. 마태복음 1:11,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으니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마1:11).
그런데 곧바로 1:12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니야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마1:12)라고 말합니다. 마태는 앞서 다윗까지, 다윗부터라고 반복했듯이 여고니야까지, 여고니야부터라고 반복하지 않습니다. 기준이 여고니야가 아니라 바빌론 포로기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여고니야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부터"라고 말한 세번째에 넣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About, After란 전치사 구분이 매우 명확합니다. 여고니야는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후에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성경이 기록한 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잘못된 기준으로 센 후에 족보가 엉망이다,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정확하다.
마1:17,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모든 세대가 열네세대요(correct!!),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열 네 세대요(Corrcect. 솔로몬부터라고 말하지 않았음. 여고니야까지라고 말하지 않았음),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세대니라(Correct!!). 이로써 성경의 모순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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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가 죽은 땅 vs 산(buy) 땅
:두 개의 피 밭(the field of blood)
마태복음 27:8, "그러므로 이 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하느니라."(마27:8).
사도행전 1:19, "이 일을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으므로 그 밭을 자기들 고유의 말로 아겔다마라 하니 이것은 곧 피밭이라는 뜻이라."(행1:19).

이 둘은 같은 밭인가?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피밭과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피 밭이 같은 것인 줄로 생각한다. 가룟 유다는 배반의 대가로 돈을 받았으나 그 돈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 날 목을 매어 죽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가룟 유다는 땅을 살 시간도 돈도 없었다. 땅을 산 사람들은 가룟 유다가 아니라 수제사장들이었다.
마태복음 27:5-10까지 읽어 보면, [유다가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 이에 수제사장들이 그 은들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 보고(丙皐)에 넣어 두면 율법에 어긋난다, 하고 의논한 뒤에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으니 그러므로 이 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하느니라. 이에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으니 일렀으되, 그들이 값을 매긴 자의 가격 곧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자들이 값을 매긴 자의 가격인 은 서른 개를 취하여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곧 주께서 내게 정하신 바와 같도다, 하였느니라.](마27:5-10).
이 밭이 '피 밭'이라고 불린 이유는 '피 값을 주고 산 돈'이기 때문이었다.
밭의 용도는 나그네의 묘지로 삼기 위함이었다.

자, 사도행전을 보자. 사도행전 1:15-19, [(함께한 사람들의 이름의 수가 약 백이십이더라.) 그때에 베드로가 제자들의 한가운데서 일어나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예수님을 잡아간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에 대하여 성령님께서 다윗의 입 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이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으니 마땅하도다. 이는 그가 우리와 함께 계수(計數)되어 이 사역의 한 몫을 맡았음이라. 이제 이 사람이 불법의 대가로 밭을 사고 거꾸로 떨어져 한가운데가 터지고 창자가 다 흘러나오매 이 일을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으므로 그 밭을 자기들 고유의 말로 아겔다마라 하니 이것은 곧 피밭이라는 뜻이라.](행1:15-19).

베드로는 가룟 유다가 밭을 샀다고 말한다. 이 돈은 배신의 대가로 산 은 30개로 산 돈이 아니다. 마태복음에서 그 돈은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사람이 불법의 대가로 밭은 사고"라고 말한다. 가룟 유다가 수제사장들로부터 받은 은 30개는 돌려주었기 때문에 수제사장들이 토기장이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했다.

베드로는 분명히 가룟 유다가 밭을 샀다고 말한다. 이 돈은 무슨 돈인가? 가룟 유다가 배반의 대가로 받은 돈이 아니라 훔친 돈이다. 요한은 가룟 유다가 평소에 돈을 훔친 도둑이었음을 증언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요, 도둑이므로 돈 가방을 맡아 그 안에 든 것을 가져가기 때문이더라.](요12:6). 가룟 유다는 언제 밭을 샀는가? 그는 빼돌린 돈으로 밭을 사두었다. 그는 돈 가방을 맡아서 비자금을 마련해서 밭을 사두었던 것이다. '불법의 삯'이란 말을 찾아보면 베드로후서 2:15에 나오는데 이는 발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탐욕을 사랑해서 받은 돈이다(민22:7). 가룟 유다 역시 그러했다.

베드로는 지금 가룟 유다가 도둑질한 돈으로 산밭을 말하고 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산밭에서 목을 매 죽었는데 거꾸로 떨어져 창자가 터져 나옴으로 피가 흘렀는데 그런 이유로 '피 밭'이라 불렸다. 같은 '피 밭'이라도 둘은 서로 다른 의미이며, 다른 밭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산 땅에서 자살해 죽었다.

1. 산 사람이 다르다.
2. 구매한 돈이 다르다.
3. 용도가 다르다.
4. 이름이 지어진 이유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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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인가?
최근에 여러 형제/자매님들이 보내 주신 질문인데 오늘에야 정리해서 올립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형상-image의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after our image, after our likeness)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 (image), 하나님의 모습(likeness)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담의 후손 중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는 없습니다.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날 뿐이며, 모태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법 중에' 잉태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종교인들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신성'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인간 속에는 죄성만 존재합니다. 철학자들은 나름대로 어떤 바보 천치 같은 인간 안에도 불성이 있고, 신성이 있고, 선한 본성이 있는데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는 선각자들, 선구자들이 깨닫게 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그리스 철학에서는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각성"이라고 말합니다.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곧 신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베드로는 말하기를 거듭난 성도에게만 divine power, divine nature(벧후1:4)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그 어떤 사람 안에도 신성은 고사하고 '죄성'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형상은 고사하고 [짐승의 형상]만 있을 뿐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창1:26-27).
아담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 4).
[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孀)이시요](골1 15)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히1:3).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게 됩니다.
아담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이는 성선설을 주장하며, 인간의 선함과 위대함을 찬양하고 높여 주는 종교 사기꾼들뿐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9:6,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음이니라.](창9:6)고 하는데 이것은 대 홍수 이후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형상'이란 말은 repent(회개하다, 후회하다)와 마찬가지로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형상은 외적 형상과 내적 형상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간단한 영한사전, 국어사전, 영영 사전 그 무엇을 찾아보아도 간단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상 언어에서도 image라고 하면 외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말과 내적인 성품, 속성을 지칭한다는 점은 상식입니다. 성경적 예도 이와 같습니다.

[이는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고전11: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면 여자는 아닙니까? 이것은 내적인 속성이 아니라 외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외모에 변화가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나서 온 몸이 뒤틀렸다거나 머리에 뿔이 났다거나 없던 꼬리가 생겼거나 사지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며, 저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또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느니라.](약3:9).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similitude.

결론:
아담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다' -맞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외모만 그러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형상을 '모양- similitude'라고 규정했습니다.
형상이란 단어의 뜻만 알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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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 하며/And they said, Believe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thou shalt be saved, and thy house.](행 16:31).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구원은 free(공짜)입니다.
여기서 일부 신자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부분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가족 전체가 구원받는다는 말인가? 그런 식입니다. 가족 중에 가장이나 대표자로 누가 믿는다고 해서 그 가족이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흠정역 성경 최신판에는 이 부분이 제대로 교열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명령은 앞에 주어가 생략된 명령어 구문입니다. 이런 구문은 뒤에 있는 말을 통해 앞에 있는 주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가 생략 구문을 온전하게 푼 것입니다. 성경이 믿으라고 한 주체는 "너"와 "네 집" 모두입니다. 네가 믿으면 네가 구원 받고, 또 네 집이 믿으면 네 집이 구원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32절입니다. [{주}의 말씀을 그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니라.](32). 바울은 간수 뿐 아니라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고, 그들은 모두 다 믿었기에 즉시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33).
간수는 바울이 한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고, 자신이 복음을 들었을 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듣고 말씀을 믿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 집이 함께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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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 성경의 몇 몇 고어들
질문>현대 영어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킹 제임스 성경의 몇몇 고어들을 좀 알려 주세요.
답변> 아래 링크를 보십시오.
http://av1611.biz/1113
제가 성경에 대해서 받은 질문 중 상당수가 어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생긴 것들이었습니다.

예: turtle- turtledove 거북이가 아니라 멧비둘기입니다.
고어는 개정의 대상이 아니라 의미를 익혀야 할 어휘들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성경 어휘를 익히려는 대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현대 영어로 개정, 개역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바른 믿음의 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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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 보면 몇 명의 헤롯이 나옵니다. 누가 누구입니까?

답변:
헤롯은'영웅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헤롯은 흔히 '헤롯 왕조'라 불리는데 4명이 유대 땅을 지배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터라 로마에서 일정한 권력을 쥐어 주고, 세금을 받았던 것입니다.

1.헤롯 대왕.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베들레헴의 어린 아이들을 살육한 사람. 갈릴리의 첫 번째 총독(마2:1-18)입니다. 이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 요셉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트에서 '나사렛'으로 와서 정착했습니다.

2. 헤롯 안티파스. 흔히 분봉왕 헤롯이라고 알려진 사람입니다. 형을 죽이고 형수와 결혼해서 권력을 찬탈했고, 침례 요한에게 여러 차례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자상 생애 사역 동안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렸고, 헤로디아의 꾐에 빠져 침례 요한의 목을 벤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우'라고 부른 사람입니다(마14:1-12; 눅13:32).

3.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대왕의 손자.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둔 사람입니다. 연설을 한 후 신의 음성이란 찬사를 듣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음으로 주의 천사가 쳐서 '벌레들에게 먹혀 죽은 사람'(행12:1-5)입니다.

4.헤롯 아그립바 2세. 총독 베스도와 함께 사도 바울의 변론을 들은 사람입니다(행25:13-26:32).
앞에 두 사람은 복음서에, 뒤에 두 사람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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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장의 바늘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에 해당하는 구절을 이해하는데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걸 보았습니다.
바늘귀가 진짜 바늘의 귀를 말한다고도 하고(불가능) 바늘귀문 이라는 문 이름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하는데...(가능하지만 매우 어려움)
어떤 이해가 올바른건가요? 그리고 혹시 그러한 이해의 근거가 될 만한 구절이 있을까요?

답변. 바늘귀가 맞습니다. 우리말로 바늘의 머리에 있는 구멍을 말합니다.
중국어 성경은 바늘이 통과한 구멍(침공)으로 번역했는데 영어에서는 바늘 눈입니다.
다른 견해는 이렇습니다.
1. 바늘귀는 바늘의 귀가 아니라 '바늘 귀'란 작은 성문 이름이다. 성문이 작아 낙타가 통과하기 어렵다.
2. 바늘귀는 맞는데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다. 아람어로 낙타와 밧줄이 철자가 워낙 비슷해서 필사자들이 오류를 범했다.
모두 성경의 무오성, 완전성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의 이해 방법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이란 표현은 당시 유대 사회의 언어에 있었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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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외양간은 사천개? 사만개?
열왕기상 4:26은 역대기하 9:25을 보면 한 곳은 사만 개, 한 곳은 사천 개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맞나요?

대답: 둘 다 맞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열왕기상 4:26, [솔로몬의 병거를 위하여 말 외양간 사만 개가 있었으며 기병 만 이천 명이 있었고] 26. And Solomon had forty thousand stalls of horses for his chariots, and twelve thousand horsemen.
역대기하 9:25, [솔로몬이 말과 병거를 둘 외양간 사천 개와 기병 만 이천 명을 소유하여 그들을 병거 도시에도 두고 예루살렘에 있는 왕에게도 두니라.]9:25. And Solomon had four thousand stalls for horses and chariots, and twelve thousand horsemen; whom he bestowed in the chariot cities, and with the king at Jerusalem.
이 두 구절은 언뜻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번역자들이 스스로 두 곳을 맞추어 주느라 열왕기상 4:26의 사만 개(forty thousand stalls)를 역대기하 9:25에 맞추어 사천 개(four thousand stalls)라고 바꾸어 버렸습니다. 성경 변개자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척 하지만 언제나 그들이 고치는 곳은 그만큼 자신들의 불신과 무지를 드러냅니다.
본문을 주목해서 읽어 보면 전혀 모순이 아니라 정확한 진술임을 보게 됩니다. 열왕기상은 말들의(of) 외양간이 사만개입니다. 반면 역대기는 말과 병거 둘(horses and chariots)을 위한(for) 외양간이 사천 개입니다. 솔로몬은 사천개의 병거용 말이 있었으며, 각 병거 부대가 총 10개로 구성되어 총 사만개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은 전체 외양간 수를 모두 센 것이고, 역대기는 각 각의 말에 딸린 병거를 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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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시야가 통치한 것은 22세입니까? 42세입니까?
왕하 8:26, 아하시야가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더라. 그가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요,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더라. 26. Two and twenty years old was Ahaziah when he began to reign; and he reigned one year in Jerusalem. And his mother's name was Athaliah, the daughter of Omri king of Israel.
대하 22:2, 아하시야가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나이가 사십이 세더라. 그가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 역시 아달랴요, 오므리의 손녀더라. 22:2. Forty and two years old was Ahaziah when he began to reign, and he reigned one year in Jerusalem. His mother's name also was Athaliah the daughter of Omri.

***참고할 글.
대답: 이 둘은 킹 제임스 성경의 모순으로 회자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경솔하게 성경의 모순을 찾아낸 듯이 의기양양한 이들은 친절하게도 이 둘의 모순을 바로 잡아 주는 무지(無知)를 서슴없이 드러내는데 NIV 성경에는 둘 다 22세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한 곳은 22세이고, 다른 한 곳은 42세입니까? 일단 유대인들이 보존한 원문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랍비들은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곤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인 섭정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 이 당시 20년간의 긴 섭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 해석은 그가 통치한 나이는 22세가 정확하고 42세란 그의 나이가 아니라 오므리 왕조가 시작 된지 42년이란 뜻이란 것입니다. 이 역시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렇게 되면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만 가지고 보겠습니다.
아합은 유다 아사 왕 38년에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22년을 집권했습니다.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은 아합 왕 4년에 유다의 왕이 되었고 당시 35세였으며 25년 간 집권했습니다. 아합은 사악한 왕이어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그의 왕조가 끝날 것을 말씀하셨는데, 아합이 겸손히 행함으로 그의 아들의 때까지 심판이 유예되었습니다(왕상21:29).
아합의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자기 아들을 아합의 딸과 결혼시키고 동맹을 맺었습니다(왕하8:18, 대하18:1, 21:6). 이 일은 여호사밧 통치 9년 경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합은 재위 17년 째 자기 아들 아하시야를 왕으로 삼아 함께 통치했는데 아하시야는 2년 밖에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격자창에서 떨어져 부상으로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왕하1:2). 아합은 아하시야의 형제인 여호람에게 직무를 맡겼습니다. 아하시야는 부상 중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에는 왕이 세 명이나 되었습니다.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입니다. 여호람은 12년간 통치합니다(왕하3:1). 북왕국과 남왕국의 왕 이름이 같다는 점에 주목하라. 우리는 성경에서 수많은 동명이인을 만납니다.

이 해석이 아닐 경우 우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22세의 아하시야- 여호람 12년에 통치시작(왕하 8:25),
42세의 아하시야- 여호람 11년에 통치 시작(왕하9:29).

# 여호람이 병이 나 2년간 누워 있을 때 통치를 시작함. 병이 난 2년 후에 창자가 흘러 나와 죽었는데 예후에게 죽임을 당함.

2. 22세의 아하시야- 여호람의 막내아들(대하22:1)
42세의 아하시야- 여호람의 step son.

그의 어머니의 이름 역시(also) 오므리의 손녀 아달랴더라.(대하22:2). 우리는 여기서 이 둘이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는 다릅니다. 오므리의 손녀 아달랴는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여호람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이 둘의 나이 차이가 20 살입니다. 아달랴는 남편 여호람보다 1살 많은 아들을 둔 상태에서 정략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는 아합의 궁에서 컸습니다.

3. 왕하 10:13에는 아하시야의 형제들이 나온다.
대하 21:17에는 가장 어린 여호아하스를 제외하고는 한 아들도 없다고 말한다.
대하 22:1에는 막내아들 아하시야라고 말한다.

결론: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다. 예루살렘 거주민들은 여호람이 죽자 막내아들을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예후의 손에 모두 죽는다. 이 때 아달랴는 유다의 왕가의 모든 씨를 멸하기 시작했으나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빼내어 ‘하나님의 집에 숨긴 채 6년간’을 길러 다윗 왕조의 씨가 겨우 보존되었다. 먼저 왕이 된 자는 42세의 step son이고, 후에 왕이 된 자는 생물학적 아들이었다.
이 외에도 다른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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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과 부활절의 문제를 설명해 주시길
항상 목사님의 설교와 원고를 잃고 은혜 받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목사님만큼 통찰력을 가지고 계신분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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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싸이트를 검색해서 보십시오.
성탄절. --특강>크리스마스 이야기(1,2)를 보시면 될 듯합니다.
부활절에 대해서는 아직 원고를 올리지 않는 듯합니다.
역시 특강란에 원고와 음성 파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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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브란 이름은 뭐고 하와는 또 뭐죠?
성경을 공부하다 느닷없이 받은 질문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하와'로 되어 있고,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브'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 이름입니다. 동명이인이 아닙니다.
하와는 히브리식 발음이고, 이브는 영어식 발음입니다.
그 뜻은 '모든 산 자들의 어미'입니다.

아담은 처음에 '여자'라고 불렀고 하나님은 그들 둘 모두를 '아담'이라 부르셨습니다. Mr. Adam, Mrs Adam의 기원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둘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타락한 후 '여자'라 부르던 이름을 '이브'라고 불렀습니다.

"하와"라는 말은 "살아 있는 것(생명)"을 의미하는 "하이"라는 단어에 여성형 어미인 "아"가 붙여져서 된 합성어입니다. 헬라어로 번역 될 때 헤우아(Eua)로 번역되었고, 라틴어 성경에는 "헤바"(Heva)로, 영어 성경에는 '이브'(EVe)로 번역했고, 한글 개역은 '하와' 흠정역 성경은 '이브'로 번역했습니다.
정리하면 히브리어 성경-"하와", 헬라어 번역 성경에서는 "헤우아", 라틴어 성경에서는 "헤바", 영어 성경- "이브"입니다.

그냥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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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 1:10의 주의 날(Lord's day)은 주의 첫날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주의 첫날은 The first day of the week입니다. 우리말로 주라고 해서 같은 주가 아닙니다. 주(週)는 week입니다. 주의 날이라고 할 때 주(主)는 구약에서 The LORD, 신약에서 The Lord입니다. 조금도 연관 관계가 없습니다.

계 1:10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을 때에 내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 - 주의 날은 일반적으로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주일날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13:9-10) 보라, 주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로 인한 잔혹한 날이 이르러 그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분께서 그 땅에서 죄인들을 멸하시리니 이는 하늘의 별들과 하늘의 별무리들이 빛을 내지 아니하고 해가 자기 길로 나아가도 어둡게 되며 달이 자기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임이로다.
(욜1:15, 2:1,11,31) 슬프다 그 날이여! 이는 주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라. 그 날이 전능자에게서 나온 멸망같이 이르리로다.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元素)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
(렘30:7) 아아, 슬프도다! 이는 그 날이 너무 커서 그와 비길 날이 없기 때문이니 그 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로다.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주의 날”은 어떤 훌륭한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할지라도 주일날(일요일)이 아닙니다. 바로 “주의 날”은 야곱의 고난의 때인 큰 환란 때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휴거 후부터 주의 날은 시작되는데 하늘과 땅이 불 타버리는 흰 왕좌 심판까지를 말합니다.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을 때에 -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특별한 때, 특별한 변형이 수반된 것이며 누군가의 기적적인 이동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계시록 4:2의 표현도 “내가 즉시로 영(靈) 안에 있었더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요한은 하나님의 왕좌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 안에 있게 되었다”는 말은 “몸 안에 있다”는 말과는 반대로 “몸 안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몸 안에 있는 대신 “영 안에” 있었습니다. 교회 시대의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이 표현은 교회시대에 적용 할 수 없습니다.(고후5:1-10)
그러나 성령은 여러분 안에 있고 여러분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특별한 날에만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다고 말할 때 요한은 A.D.96년경 밧모섬에서 들어 올려져서 “주의 날”인 재림 때로 기적적이고 영적인 이동을 하였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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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에 관한 설교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목사님의 설교를 빠드리지 않고 듣고 있으며 가장 탁월한 말씀으로 진리를 전파하고 계신다고 항상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최근 로마서 4편의 설교는 어릴적부터 궁금하게 생각한 건데 탁월하게 풀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혹시 원고도 구할 수 있는지 문의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 혹시 재정(돈)에 대한 설교는 어디에 있는지 혹시 따로 하실 계획은 있으신지 문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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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로마서 9장 설교 파일은 오늘 저녁 예배 마친 후에 올리겠습니다.
아래 링크 파일을 열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경제관-신앙과 돈
말씀: 예레미야 17:11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과 유다의 파멸에 관한 심판을 전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재앙을 복으로 바꾸는 방법], [기적적인 회생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0-22절, 24-26절이 바로 ‘재앙이 선포된 예루살렘이 화평을 얻고, 승리를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오늘날 믿음이 파산한 성도들에게 한줄기 서광이 임하는 복음이요, 인생의 항로에 뱃길을 돌려주는 돛대입니다. 이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심판이 집행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은혜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우리 주님의 성품은 예레미야를 통해 장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11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경제관, 바른 물질관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는 자고새가 알들을 품되 부화시키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의 날들의 중간에 그것이 떠나겠고 끝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성도들에게 돈 문제만큼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돈만 있으면 그보다 더 편리한 것도 없는 까닭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이요, 복입니다. [오직 너는 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는 그분께서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니....](신8:18)라고 말하며, 잠언 10:22에 [주의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나니 그분께서는 이것에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재물, 모든 소득이 다 주님으로부터 온 복은 아니며, 주님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정당한 소득이 아니면 그 소득은 죄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안식일도 무시하고 일을 했습니다. 안식년도 무시하고 땅을 갈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의 첫 번째 대상은 주님의 말씀보다 돈 버는 일을 앞세워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고, 일을 하느라 바빠서 주님의 왕국의 그분의 의를 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사기 치지도 않았고,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열심히 땀을 흘려서 벌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들이 ‘나의 법을 어기면서 돈을 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5:4, [칠 년째 되는 해에는 그 땅에 안식하는 안식이 있게 할지니 이것은 [주]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네 밭에 씨를 뿌리거나 네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레25:4).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 열심히 돈을 버느라 땅을 쉬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490년 동안 그들은 단 한 해도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가셔서 그 땅이 쉬지 못한 안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러면 너희가 너희 원수들의 땅에 거하는 동안에 그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리리라. 바로 그때에 땅이 안식하며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하며 안식할 때에 그 땅은 안식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 땅이 그 황폐한 동안에 안식하리라.](레26:34-35). 이들이 안식일도, 안식년도 무시하고 땅에서 얻은 소출은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빼앗겼고, 그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 버렸습니다. [이로써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이 성취되어 마침내 그 땅이 자기의 안식을 누렸으니 이는 그 땅이 황폐한 동안 안식을 지키고 칠십 년을 마쳤음이더라.](대하36:21). 오늘날도 유대인들처럼 주님이 주신 원칙과 법을 어기면서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된 성도들은 재물을 바르게 모으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의 두 번째 유형은 의(義)가 없는 소득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돈에는 눈이 없다는 말도 있는데, 그것을 눈 먼 돈이라고 합니다. 이런 돈은 아무리 벌어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일확천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득보다는 실이 많습니다. 재물에도 의(義)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적게 가지고도 의가 있는 것이 많은 소득을 가지고도 의가 없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헛되이 얻은 재물은 설령 많이 모았다고 해도 반드시 줄어들 것이며, 없어지고 맙니다. [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 들 것이나 수고하여 모으는 자는 재물을 늘리리라.](잠13:11). 자신의 수고한 대가 이상을 추구하는 것 역시 헛되이 얻은 재물입니다.

성경은 공정하게 재물을 모으라고 가르칩니다(신25:13-15).
[너는 가방에 다른 저울 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다른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너는 완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네 날들이 길게 되리니](신25:13-15). 불공정 행위로 재산을 모으는 것은 의가 없는 소득이며, 헛되이 모은 재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에 해당합니다.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않는 또 하나의 예는 거짓말, 사기, 과대광고 등으로 재물을 얻는 것입니다.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고 하다보면 얼마나 많은 악성루머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연일 신문에 보도되는 것이 거짓말로 인한 피해입니다. 합작 개발, 기술 이전, 신제품 개발....등으로 주식 가격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죽음을 앞당기는 무서운 죄입니다. [거짓말하는 혀로 보물을 얻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자들이 이리저리 내던지는 헛된 것이니라.](잠21:6).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재물을 모으지 않을 때 그 재물을 스스로 날아가게 해 버리시던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취해 버리게 하십니다.

재물을 모으되 바르게 모으지 아니한 자는 부화시키지 못한 알과 같습니다. 자기가 번 돈이라고 해서 모두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은 헛된 모습 속에서 걷나니 참으로 그들은 헛되이 소동하나이다. 그가 재물을 쌓으나 누가 그것을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39:6). 어떤 사람은 벌기만 하고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죽습니다. 번 후에 쓰려고 하지 말고, 벌면서 써야 합니다. [이는 지혜로운 자들도 죽고 어리석은 자와 짐승 같은 자도 그와 같이 멸망하여 자기 재물을 남에게 남겨 두는 것을 그가 보기 때문이로다.](시49:10)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재물을 많이 모아도 그것은 모두 의인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자손의 자손에게 상속을 남기거니와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13:2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바른 경제관, 물질관을 소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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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돈
처음 교회에 나오면 알게 모르게 신경 쓰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돈 문제입니다.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을 내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경제관을 배우고, 다음 시간에 헌금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돈 문제는 누구에게나 예민한 문제이며, 걸림돌이 되기 쉬운 문제입니다. 돈에 대한 염려는 말씀을 통해 열매 맺지 못하게 합니다. 부(富)에는 속임수가 있고, 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막는 기운이 있습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니 곧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것에 대한 정욕이 들어와 말씀을 숨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요.](막4:18,19).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올바른 재물관, 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물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 같이 마가복음 10:17-25 말씀을 펴 보십시오. 17절,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니] 이 사람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18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물어 보았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3:4).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없도다, 단 한 사람도 없도다...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롬3:10-12). 유대인들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한 것은 네가 나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인정하는 것이냐?란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영생에 대해 질문한 이 부자는 겸손한 사람이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19절에 따르면 삶이나 율법을 준수하는 면에서도 전혀 흠 잡힐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 주님은 이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10번째 계명을 건드리셨습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자들은 모든 것이 풍요롭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적하시는 것은 언제나 그들의 탐심입니다. 이 한 가지 때문에 사실은 모든 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 여러분에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지적하신다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지적하시고 회개를 명하십니다.
계시록 2:4의 에베소 교회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첫 사랑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조금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라.](계2:4). 라오디케아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가난한 교회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가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 부의 개념이 물질적 부의 개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얼마나 벌었느냐 보다, 어떻게 벌었으냐에 관심이 더 많으시며, 어떻게 벌었느냐보다 어떻게 썼느냐에 관심이 더 많으십니다. 한 푼의 재물도 가치있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많은 재물도 헛되이 사용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떼어 가지고 갔지만 그 돈을 한 푼도 가치 있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현명하게 자신의 전 재물을 사용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마가복음14:2-9에 나오는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귀한 나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주님께 드림으로 가장 가치 있는데 사용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4절, [어떤 사람들이 속으로 분개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였느냐?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향해 심히 불평하매](막14:4,5).
사람들은 예수님께 쓰는 돈을 허비(虛費)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값을 치르고 사지 않았으니 소비도 아니고, 낭비도 아닙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쓸데없는데 돈을 쓴 허비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이나, 주님께 돈을 쓰는 것을 허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여인을 가장 칭찬하였습니다(9). 여러분도 주님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가진 것을 허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빕니다. 돈에 대한 마리아의 경제관을 갖는 것이 사람들이 갖는 경제관보다 훨씬 남는 장사이며,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장사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2:43, 44을 보십시오. 주님은 성전 보고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다 보신 후에 오늘의 best giver가 누구인지 선정하셨는데, 그는 다름 아닌 일 고드란트를 넣은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가난하였고, 매우 적은 돈을 넣었지만 주님은 그녀를 가장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보고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이는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궁핍한 중에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3,44).
주님은 양이 아니라 질을 보셨고, 비율을 보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영생을 상속받는 문제를 물으러 온 부자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주님은 그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하늘에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재산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은 꼭 능력대로, 배운 만큼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능력이나 학문은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심해야 할 것은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는 전적으로 주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너는 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는 그분께서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니....](신8:18). 여러분이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복을 얻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절대로 자신의 손이 스스로 부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로부터 얻은 부를 주님이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올바른 경제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0:22에 [주의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나니 그분께서는 이것에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을 열심히 하고도 삯을 못 받거나, 착취당할 수 있습니다. 많이 벌고도 도둑이나 강도를 맞을 수 있으며, 가족 중에 몸이 아파서 다 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고로 모두 변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주의 복을 통해 얻은 부는 이런 슬픔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에 "산골 소녀 영자"라고 완전히 문맹과 동떨어진 채 아버지와 단 둘이 살던 여자를 우연히 방송 기자가 발견해 T.V에 소개를 했습니다. 갑자기 전국적으로 유명해 지게 되었고, 광고 모델로도 나왔습니다. 그 집에 돈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강도가 그 집에 들어 아버지는 목숨을 잃었고, 영자라는 아이는 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복이 주신 부가 아닙니다.
시편 128:1,2절에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가 방법이 나옵니다. 말씀하시기를, [주를 두려워하며 그분의 길들 안에서 걷는 자마다 복이 있나니 이는 네 손이 수고한 것을 네가 먹을 것임이라. 네가 행복하고 형통하리로다.] 누구든지 주님을 두려워하며 걸을 때, 월급이 떼이거나, 사기 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22절 [그가 많은 재산을 가졌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제자로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는 합당하게 화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진 많은 재산과 그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많은 재물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재물을 신뢰하고 매이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자기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넘어 지려니와 의로운 자는 나뭇가지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11:28). 얼마나 비극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이 가진 재물로 인해 생명의 주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각 사람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시고 요구하실 때, 그것이 재물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마태복음 6:20에 말하기를,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 먹지도 녹이 슬지도 않으며 도둑이 들지도 훔치지도 못하나니 이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기 때문이라.] 이 땅에서 재물을 모으는 방법은 많이 듣고,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은 처음 배우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땅의 예금 통장에 쓸 수 있는 돈을 늘려 나가는 것보다 저 하늘에 무엇을 쌓아 나가느냐의 문제를 다룹니다. [또 앞으로 오는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게 할지니...](딤전6:19). 저는 여러분이 모두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도, 모두 가난한 자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부자가 되어도 좋고, 가난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모두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삼가 탐욕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 소유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눅12:15).
혹시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하나님께 구해 보십시오. 그러나, 먼저 부자가 되고 난 후에도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초지일관의 믿음을 겸하여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탐욕으로 구하면 응답이 되어도 문제입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마음에 안고 나올 때 그 우상의 수효대로 응답해 주시기도 합니다(겔14). 이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조국의 많은 교회가 이렇게 타락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탐심이란 우상을 믿음으로 가장했기 때문입니다. 잠언 23:4은 말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일하지 말고) 네 자신의 지혜를 버릴지니라.](잠23:4). 대신 여러분은 필요한 때에 돕는 손길이 되기 위해서 애쓰십시오.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한 일에 부요하고,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십시오. 5절, [네가 어찌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네 눈을 두려하느냐? 이는 재물이 반드시 스스로 날개를 내어 독수리같이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때문이니라.](잠23:5). 이런 경험을 하신 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신실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무죄하지 아니하리라.](잠28:20).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나니 그는 궁핍이 자기 위에 임할 줄을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느니라.](잠28:22).
그리스도인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거나 기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대신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믿음에 부요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서 풍성하고, 성령의 열매로 가득한 그런 삶을 갈구합니다. 디모데전서 6:17,18 [네가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들에게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확실치 않은 재물을 신뢰하지도 말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게 하며 선을 행하게 하며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아하고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라.] 이 땅에서 어떻게 재물을 사용하는가?는 다가올 세상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남 좋은 일 다 시킨다]란 말을 합니다. 이것은 바보란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땀흘려 일하는 것을 가치로 여기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해서 남을 돕는 것을 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이렇게 발전한 것도 모두 성경에 근거한 노동에 대한 가치관이 확립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같이 조용히 지내고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 일하지 않고 교회에만 와서 사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일만 하느라 교회에 오지 않는 것도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성경은 열심히 일할 것을 명령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주님도 더 잘 섬깁니다. 균형을 잃어버린 형제들이 시행 착오를 겪기는 하지만 일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일로 인해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 수입이 자기 입으로 들어오지 않고 몇 번을 날리고, 어디론가 새 나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점차 균형을 잡게 됩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으니](살후3:10). 요한 웨슬리는 "가능한 많이 벌고 가능한 많이 저축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워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지만 모든 필요를 내 손으로 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일을 해서도 채울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나의 손을 통해서, 때로는 남의 손을 통해서 채우십니다. 나의 손으로 채울 수 없는 일들은 모두 남의 손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손을 쳐다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라.](빌4:19).

재물을 얻을 때 우리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첫째, 의가 없는 소득은 바라지 말 것. [적게 가지고도 의가 있는 것이 많은 소득을 가지고도 의가 없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눈 먼 돈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런 돈은 아무리 벌어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일확 천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득보다는 실이 많습니다. 재물에도 의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헛되이 얻은 재물이어서는 안됩니다. [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 들 것이나 수고하여 모으는 자는 재물을 늘리리라.](잠13:11).

셋째, 성경은 공정하게 재물을 모으라고 가르칩니다(신25:13-15). [너는 가방에 다른 저울 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다른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너는 완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네 날들이 길게 되리니](신25:13-15). 불공정 행위로 재산을 모으는 것은 의가 없는 소득이며, 헛되이 모든 재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넷째, 거짓말을 해서 재물을 얻으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고 하다보면 얼마나 많은 악성 루머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연일 신문에 보도되는 것이 거짓말로 인한 피해입니다. 합작 개발, 기술 이전, 신제품 개발....등으로 주식 가격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죽음을 앞 당기는 무서운 죄입니다. [거짓말하는 혀로 보물을 얻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자들이 이리저리 내던지는 헛된 것이니라.](잠21:6).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열심히 일을 하되,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십시오. 히브리서 13:5과 디모데전서 6:6-10을 보십시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3:5). [그러나 만족함이 있는 경건은 큰 이득이 되나니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이 경고에 만족함이 없는 분들은 마음 가운데 경건의 연습을 더 부지런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욥과 같이 재산의 유무가 자신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주님은 더 많은 것을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돈이 많으면서도 자식에게 용돈을 잘 주지 않는 부모를 많이 압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돈을 주면 꼭 엉뚱한데 쓰거나 악한 짓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돈을 유용하게 잘 쓴다는 신뢰만 얻는다면 부모는 마음놓고 돈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7-10).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요, 믿음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마6:24). 하나님과 재물의 신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재물을 신뢰하는 것도 문제인데, 재물을 섬긴다면 그는 우상 숭배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현재 살고 이는 집과 직장과 수입에 만족하신다면 신앙 생활은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더 나은 집과 차, 수입을 추구하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내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배웠음이라.](빌4:11). 더 나은 삶을 찾아 먼 이 곳으로 온 모든 사람들은 다 가슴에 묻어 둔 눈물의 사연이 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타향에서 돈을 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 남은 것은 다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라고 밖에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단 한 순간도 떠나시거나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를 주신다면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 30:7-9을 보십시오. [ Pr 30:7 ¶ Two things have I required of thee; deny me them not before I die: 8 Remove far from me vanity and lies: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feed me with food convenient for me: 9 Lest I be full, and deny thee, and say, Who is the LORD? or lest I be poor, and steal, and take the name of my God in vain.] 누가 말하기를 복은 받기 보다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저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만 막상 은혜가 주어지면 감사와 찬양대신 배교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스라엘은 속박의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곧장 배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게 주리라 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좋은 도시들을 주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집 곧 좋은 물건이 가득한 집을 주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주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를 주사 네가 먹고 배부르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를 잊지 말고](신7:10-12). 받은 바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면 축복이 곧 바로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면 곧 바로 심판이 뒤따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은혜는 받기 보다 감당하기가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를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 것도 탐내지 말라.](출20:17). 남의 물건이든 남의 사람이든 부러워하고 시기해서는 안됩니다. 남의 직업, 남의 집, 남의 능력, 남의 가문, 남의...무엇이라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의 아내/남편, 남의 부모, 남의 자식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탐심은 속히 회개하셔야 합니다. 특히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사람이 부하게 되고 그의 집의 영광이 늘어날 때에 너는 두려워 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가 죽을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며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할 것임이라.](시49:16,17).

마지막으로 저는 "필요와 원하는 것들"을 구분하시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시편23편--양에게 가장 필요한 것. 초장, 물, 목자
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예수 그리스도
죄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끝이 없다.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경제관은? - 이 세상에서 영적인 것을 심고, 다가오는 세상에서 거둔다.
*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두고...(골3:2)
*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마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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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그리스도인

● 김재근(전주 소망침례교회 목사)

말라기 3장 7절부터 12절까지 보겠습니다.
7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심지어 너희 조상들의 날들로부터 너희가 내 규례들을 버리고 떠나 그것들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돌아가리이까? 하였도다.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십일조와 헌물에서 강도질하였느니라.
9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으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
10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먹어 삼키는 자를 꾸짖으리니 그가 너희 땅의 열매를 멸하지 못하리라. 또 너희 포도나무가 때가 이르기 전에 자기 열매를 밭에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12 너희가 심히 기쁜 땅이 되므로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복 받은 자라 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여러분은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제까지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다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습니까? 십일조를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십일조와는 무관하게 살았습니까? 또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죄책감 속에 살았습니까? 십일조 때문에 늘 꺼림직 하게 살았습니까?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교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십일조를 철저히 했더니, 물질축복 받았다는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십일조뿐만 아니라 돈 문제에 있어서도 충분한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일조에 대한 전통적 개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말라기 3장 본문에 근거한 십일조 설교를 한두 번쯤 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심지어는 근본주의 침례교회들조차도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설교하며 ‘압박’할 때면 언제나 말라기 3장을 인용합니다.
본문은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의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8절]. 엄청나게 무서운 말씀이죠. 하나님 말씀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9절]. 왜?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먹어 삼키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꾸짖을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절].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 십일조를 취해 가신다. 예를 들자면, 교통사고가 난다든지, 질병에 걸린다든지, 입원을 한다든지, 분실한다든지, 무슨 재난을 당한다든지 한다.’ 우리는 이렇게 그동안 배워왔고, 이렇게 알고 있으며, 이렇게 설교를 들어 왔습니다.
또 10절 말씀에 따르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물질적인 축복은 기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바쳐서, 나를 시험해봐라.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가득 채워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안하십니까?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나를 시험해 봐라!!
그러니까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 말씀을 믿는 교인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다른 면에는 신앙생활은 모두 엉망인데도 십일조만 철저히 하면, 물질적인 축복이 쏟아지는 줄 알고서 그러한 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러니까 물질축복 받고자하는 성도들은 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먼저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회, 심지어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도 십일조에 관한 의견은 일치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르칩니다. 십일조에 대한 현대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여타 죄에 대해서는 오래참고 인내하시지만, 십일조를 안 하는 죄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징계하시고 보응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안했더니 우환(憂患)이 닥쳤다.’ 또 하나님께서 다른 선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으시지만,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크게 보상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가르침에 세뇌된 교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프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역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더니만, 그렇게 되는구나.’ 라고 쉽게 단정 짓습니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안 하더니만! 쯧쯧.’ 하며 철저하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교인들은 자기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책망합니다. (어라, 저 집사는 왜 저럴까?)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를 하지요. (어, O 집사, 이리 와보라고. 십분의 일을 떼서 반드시 드려야 해.)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한 자신의 모든 소유에서 철저히 십일조를 드린 사실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소유의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하나님, 축복하실 때 좀 감안하세요!’
성경에 따라서 십일조 문제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조한다면 교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돈! 좋잖아요. 교회로 돈 많이 가져오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십일조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정확한 진리를 제시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현실적인 도움은 있을지언정 각 성도들의 영적 삶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은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다
성경 앞에서는 이제까지 내가 뭐라고 생각하고, 뭐라고 믿었고, 뭐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던지 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날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건 안하는 사람이건 수많은 교인들이, 십일조를 강조하건 강조하지 않건 대부분의 목사들이 차분하게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을 찾아가며 공부할만한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인과 목사는 그냥 어디서 배우고 들은 대로 가르칩니다.
십일조(tithe)라는 용어와 십일조에 대한 설명 및 그 내용과 원칙은 기본적으로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십일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는 8번만 나옵니다. 32번은 구약에 있습니다(창14:20; 레27:30-32; 민18:24,26,28; 신12:6,11,17;14:22-23,28;26:12; 대하31:5-6,12; 느10:37-38; 12:44; 13:5,12; 암4:4; 말3:8,10).
신약성경에는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누가복음 18:12에서 세 번 나오고, 나머지 다섯 번은 전부 히브리서 7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중에서 어느 구절도 그리스도인에게 십일조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십일조는 교리적으로는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교회의 신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에 십일조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 외의 위대한 사도들이 신약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한 말할 때, 왜 십일조라는 단어를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사도들은 헌금의 의무를 설명하면서 아무도 ‘십일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한 번이라도 기록했으면 간단했을 텐데.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교회 시대에 아무 효력 없는 구약의 율법을 되살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드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진리라고 해서 아무런 구분 없이, 시대의 구분도 없이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그대로 하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건 이단이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진리라고해서 아무것이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와 바른 영적 사귐을 맺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거짓 교사가 됩니다. 이 시대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이단들의 가르침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이 방언(성경의 방언은 전부 외국어)을 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방언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시대는 지금과 맞지 않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증인들이 왕국 복음을 전하고 다니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단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국 복음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단입니까? 지금 이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해서 적용을 잘못한 것입니다. 신유(神癒)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신은 사도 직분을 계승 받았다고 한다면 우린 그를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직분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잘못됐지요? 그 사람들이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창고! ‘스토어하우스’(storehouse)입니다. 창고!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십일조를 쌓아놓는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창고는 구약시대 성전에 딸린 건물이었습니다. 봉헌한 물건들을 성전에 딸린 창고에 쌓았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8절을 보기 바랍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취할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이 레위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우리 하나님의 집의 방들로 가져다가 보고 집에 둘지니.
지금은 돈을 은행에 보관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행이라는 단어도 모르셔서 십일조를 창고에 두라고 하셨겠습니까? 성경에는 ‘은행’이란 단어가 분명히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 23절!
성경대로 하면 십일조는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교회마다 창고를 마련해서 거기에 갖다 넣어야 합니다. 은행이 아닙니다. 예배당도 아닙니다. 창고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곡식이나 가축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말해 봅시다.
많은 부작용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의 수입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솔직하게 시인하셨습니다. ‘아! 그 사람이 십일조를 내야지 교회가 운영되는데 왜 안 낼까!’
돈 있는 교인이 십일조를 내야지만 교회가 운영될 수 있다는 단순한 계산에서 또 성경에 십일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또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도 있고, ‘복을 쏟아 부어 주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십일조를 독려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물론 교회는 운영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운영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 돈은 교인들의 손에 의해서 충족됩니다. 그런데 목회자에게는 교회 운영을 걱정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무리를 목양하라고 사람을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그 설교자에게 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라고 일꾼들을 세우시지 교회의 운영을 걱정하라고 세우시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는 반드시 잘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운영은 주님과 올바른 사귐을 갖고 있는 성도들의 성실한 ‘헌금’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마음에는 없는데 억지로 하거나, 율법에 근거해서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지만 물질축복을 받는다고 강조해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사람은 기뻐할지언정 하나님은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목회자로서 나에게 맡겨진 사명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교회 운영이요? 이 교회는 여러분들의 교회니까, 교회 운영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좀 걱정해 주십시오. 나는 교회 운영에 대해서 걱정하는 목사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 목적이 왜곡되면 신자들이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일과 교회에서 헌금을 모으는 일이 주님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에서가 아니라 “무서움과 두려움! 또 이렇게 안하면 우환(憂患)이 닥칠 것 같은 마음! 더욱이 말라기 3장을 보니까 십일조 떼먹은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정말 무섭다. 또 십일조 해야지 물질축복을 받는다 하니까” 하는 동기에 의해서 되기가 십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 3장의 내용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볼 때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았을 때 당장은 이익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영적 삶에는 별로 유익을 끼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손상을 끼칩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데 정말 기쁨과 자원함과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것과 이것을 안 드리면 사업이 망할 것 같고 교통사고가 날 것 같고, 병에 걸릴 것 같고, 그러한 마음에서 드리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엄청납니다.
십일조와 할례의 근거는 동일하다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할 의무사항으로 강요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다든지, 유대인들의 모든 명절 즉 유월절이나 장막절을 지키라 한다든지, 아니면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든지, 부정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든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는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일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신약교리로 가르치는 교회나 목사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아, 이건 율법이 아니다! 물론 율법에도 있지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은혜의 시대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십일조를 배운 거다. 율법 시대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율법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도 모세의 율법과 상관없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반드시 드려야 한다. 그래서 율법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만 한다.’
정말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같은 이유로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행했듯이 율법 이후 시대인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창세기 17장 24절). 율법 이전에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할례도 받아야합니다. 십일조도 드리면서, 율법 이전에 받은 할례도 다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안디옥 교회의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신자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사도행전 15장 10절) 그들은 자신들도 메질 못하고 조상들도 지질 못했던 멍에를 새롭게 복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부담시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자, 보세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이 두 가지를 행했는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하고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안 해도 된다는 그러한 원칙은 누가 정한 것입니까?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할례도 받고 십일조도 했는데 십일조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해야 되고 할례는 하면 안 되고 그런 원칙은 도대체 누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습니다. 175년을 사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창세기 14장에 딱 한 번 있습니다. 175년 동안에 단 한 번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통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십일조 생활을 착실하게 했기 때문에 물질 축복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가지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물론 십일조를 강조하는 모든 목사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각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을 걱정하고 주님과의 올바른 사귐에 대해서 걱정하기 때문에 착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라고 강조하는 목사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드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강조함으로 신자들에게 의무 조항으로 놓는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성경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연구하지 않은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개 그냥 들은 내용, 책에서 읽은 내용,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죠.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불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어떤 100m 선수가 죽을힘을 다해 가지고 9초 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실격일 수 있습니다. 실격인 경우에는 금메달을 못 땁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의 트랙으로 왔다 갔다 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죽을힘을 다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법일 수가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도의 십일조 생활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십일조 생활을 했을까요? 십일조에 대한 기록 대부분은 모세의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과 야곱은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 한 번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들에게는 십일조가 강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자유의사가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율법 하에서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반드시!! 안 하면 큰일 납니다. 레위기 27장 30절 말씀을 보십시다.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
의무사항으로써의 십일조는 성막을 관리하며 레위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적으로 정해진 세금과 같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신정(神政)국가에서 살았습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곧 헌법(憲法)입니다.
모세의 율법아래에서 십일조는 오늘날 국민의 의무조항인 세금(稅金)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거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 십일조를 삼키는 자가 되는 것이며 저주를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는 한 가지 종류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십일조는 몇 종류가 있습니다. 매년 내는 십일조가 있고, 또 삼년마다 한 번씩 내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먼저는 레위 지파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두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민수기 18장 24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 곧 그들이 주께 거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상속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상속 재산을 갖지 못하리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럼 그걸 누가 갖습니까? 레위 사람들이 갖습니다. 레위 사람들! 그들은 상속받은 땅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로 드린 것을 가지고 먹고살았습니다. 또 한 구절 보겠습니다. 신명기 14장 22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당시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고 일 년에 한 번 수확을 하면 십일조는 어떻게 했을까요? 반드시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해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게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고 삼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28절을 보세요. 신명기 14장 28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삼년이 끝날 때마다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자, 그러면 삼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용도가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돌보기 위한 십일조가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6장 12절을 보면 ‘the year of tithing’ 즉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정해져 있습니다. 삼년에 한 번씩.
아모스서 4장 4절에도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십일조입니다.
개역성경에서 왜곡된 십일조
그런데 십일조를 많이 거둬드리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아모스서 4장 4절에 삼년 뒤에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말씀을 읽고는 깜짝 놀랍니다. ‘어, 십일조를 삼 년 뒤에 내라고! 이거 말도 안 돼!’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했을 까요? 성경을 뜯어 고쳤습니다. 개역성경이 뭐라고 뜯어 고쳤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삼일마다 십일조를 내라고 성경을 뜯어고쳤습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불결하게 손질을 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현금(現金)으로 드릴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출의 십일조를 드릴 때 그것은 레위 사람, 나그네, 고아, 과부들에게 주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를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드려야할 전체 양은 대략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23%입니다(가축의 십일조, 매년 소출의 십일조,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 등).
만약에 당신이 성경에서 정한 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려한다면 수입의 23%를 드려야 됩니다. 무지에 의해서든 불신에 의해서든 자신이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잘 해 주시고 물질 축복을 해 주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은 그들이 지금 십일조에 관해서 착각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내 수입의 철저하게 1/10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23%를 내야지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또한 구약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입니다. 유대인들은 소산과 소출에서 십 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십일조 드릴 것을 따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건지는 것은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린다. 이 가축들은 십일조다.’ 이렇게 따로 분리해 놨는데 이것들을 팔게 될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이 경우 십일조로 정해 놓았던 곡식이나 가축을 돈으로 바꿨더라도 당연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7장 31절을 보면 이런 경우에는 원금에다가 5분의 1을더하여 십일조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하에서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에는 10분의 1 즉 10%가 아니라 12%입니다. 왜냐하면 5분의 1을 더하도록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금으로 십일조를 드릴 때는 12%를 드려야 합니다.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제가 오늘 정답을 드리겠습니다. 수입의 12%가 철저한 십일조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1로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 신자가 자신이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물질 축복 하셨다고 한다면 성경과 어긋난 주장입니다. 철저한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12%입니다. 현금(現金)일 경우에는 12%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의식
십일조를 받는 사람도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7장 5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시 읽어봅시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하는 명령을 받았으나
모세의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입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해야 할 의무 조항으로 여긴다면 동일한 이유에서 할례나 안식일이나 유월절이나 장막절이나 짐승 희생제 등도 지켜야 합니다. 또 십일조를 받은 뒤에는 의식이 뒤따라옵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거제헌물(Heave offering)이라고 해서 그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께 높이 들어 올려서 바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민수기 18장 24절). 지금은 그런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돈 밝히는 목사들이 십일조 봉투를 높이 들고서 공개적으로 이름 부르며 기도하는 의식에도 나름대로의 성경적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누구 집사님 십일조 헌물 하셨습니다.’ 정말 구약에서 레위 사람들이 시행했던 거제 헌물과 똑같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분명히 가르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 현재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수입의 12%를 드립니까? 아니면 23%를 드립니까? 당신의 수입에서 정확하게 10%를 정말 드릴 수 있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것의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은행에 돈을 맡겼더니 이자가 붙었습니다. 그 이자의 십일조는 어떻게 하십니까? 친구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았는데 십일조는 하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이익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누가 감히 나는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 응답을 해 주실 것이며 물질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것은 투자(投資)일 뿐입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투자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투자했으니까 나에게 10배로 돌려주십시오!’ -사실 이것이 순복음 교회의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므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초등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율법에게 종노릇을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자유와 기쁨을 빼앗아가고 의무와 규범만을 남깁니다. 여러분이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정말 자유와 기쁨을 줍니까? 아니면 의무와 규범만 남았습니까? 십일조라는 주제가 여러분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모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그 율법의 요구사항이 명절에 대한 것이든, 유월절이든, 장막절이든, 십계명을 지키라는 요구이든, 짐승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이든,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라는 요구이든,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 시켰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많은 성도가 자기 소유의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몽땅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을 봅시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과 영,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소유물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의 요구사항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요구할 자격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세금을 강요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이 올바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에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십일조의 법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말라기 3장에 근거한 십일조,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 신앙의 자유가 없이 규범으로만 존재하는 십일조, 이런 것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야호 해방이다. 해방! 십일조 안 해도 되는구나. 속 시원하다.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십일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설교가 의미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하면서도 십일조라는 법에 얽매여서 돈 문제에서 자유로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 조문인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조상들도 감당하지 못했고 우리도 감당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멍에를 다른 성도들에게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자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얽어매는 속박의 멍에를 감히 누가 성도에게 얹어 놓는단 말입니까?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신정국가에 살던 유대인에게 정해진 세금(稅金)입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에 십일조란 단어가 8번 나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 레위 사람들이 받았던 십일조를 합쳐서 5번,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 3번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십일조는 전부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드렸던 십일조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누가복음 18장 12절 -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신약 성도의 드림은 율법에 의해 규정된 강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안 하면 재앙이나 우환이 닥친다.’ 이런 말은 애들 장난보다도 못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것을 떼먹고, 하나님 것을 강도질하고도 여러분이 멀쩡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이런 식으로 성도들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드림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드림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9장 7절을 봅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성경을 정확하게 읽읍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율법은 마지못해서라도 하게 하지만, 복음은 자진해서만 하게 합니다.
‘나는 10분의 1로 정했어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10분의 2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저... 나는 20분의 1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30분의 2로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니까요.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십일조를 안 드리면 우환이 생길 거야, 우리 애가 아플 거야.’ 이런 헌금은 마지못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고귀한 사역, 그 놀라운 일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아무도 강요해서도 안 되고 강요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입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돈에 대해서도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십일조를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자유함 속에서 자발적으로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신약성경은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10분의 1이 될 수도 있고, 20분의 1이 될 수도 있고, 10분의 2가 될 수도 있고, 5분의 1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믿음에 따라서 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대로 자발적이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10분의 1을 최소 수준으로 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10분의 1을 나의 최소 수준으로 정합니다. 그건 내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나처럼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자기가 구약의 율법에 따라 10분의 1을 철저하게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도들에게는 더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고, 어떤 성도들에게는 덜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고 예는 될 수 있지만 모두에게 적용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 조문에서 이미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한단 말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얼마를 드릴지는 전적으로 자신과 주님과의 문제입니다. 혹시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거든 기도하세요.
‘주님, 나의 삶이 이렇고, 나의 수입이 이렇고, 나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얼마만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반드시 정답을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 돈에 대해서조차도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자
바울 서신에서 성도들이 범할 많은 죄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꾸짖고 있지만 십일조 안 한 것에 대해서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네가 십일조 떼먹었으니 너는 저주받았다!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도 네가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차원이 다릅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명령으로 가르치며 ‘반드시’라는 조항으로 가르친다면 초대교회에 있었던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물질을 드림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앙의 자유 안에서 결정될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유지하거나 성별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좋다. 내가 모세의 율법대로 철저하게 난 23%를 드리겠다.’ 이렇게 율법에서 규정한 대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너는 특별대우다, 너는 보너스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모세의 율법조항인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십일조라는 한 항목만 행합니까? 율법을 다 실행해야 합니다. 신자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의 어떤 조항을 지킴으로 믿음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다 인간적 수고를 더해 보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일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때 할례가 논란의 핵심이 되었듯이 오늘날 십일조가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음을 알았다면 아마 성경을 바꿔서 기록했을 것 같습니다.
보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십일조를 드리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시리라. 내가 십일조를 행하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어떻습니까? 느낌이 팍 옵니까? 초대교회 때 할례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아브라함의 할례를 예로 들어서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파들은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들어서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할례가 무효화 됐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십일조가 무효된 것을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또한 구약에서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은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 직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10분의 1만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 딱 떼어드리면 나머진 땡입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됩니까? 신약성도의 드림은 각자의 재량권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과의 영적인 사귐 가운데서 결정될 문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몇 퍼세트를 드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10분의 1만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드림에 동기는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제적인 법조항이 없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 사역하면서 한 번도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모금을 해서 가난한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을 봅시다.
그런데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에 때문에 움직여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운영을 걱정한다는 핑계로 구약성경의 율법조문을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당장은 유익이 있을지 모르나 각 사람이 주님과 올바른 사귐 속에서 건전하게 영적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돈에 대해서, 십일조에 대해서는 율법에 끌려 다니고, 무척 부담스럽게 노예생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 율법 아래로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끌고 가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성경의 본을 따라 스스로 10분의 1을 정해서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십일조라는 그 조문, 율법조문의 오용(誤用)이 얼마나 잘못된 적용이고, 비 성경적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면 뭔가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뭔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함에 이르렀으니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여러분에겐 복음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을 봅시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사랑을 우리가 행함으로 모든 율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율법의 요구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섬기겠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며 살겠습니까? 사랑이신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 돈에 대해서도, 십일조에 대해서도 주께서 가르치신 본에 따라 사랑의 동기에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모세의 율법으로 되돌아가 자유를 잃어버리고서 부담스러운 속박에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십일조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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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윗과 솔로몬은 후궁이 많나요?
안녕하세요? 평소 궁굼해서요
왜 후궁이 많은지요? 정욕이 강해서? 바람끼? 아님 하나님의 뜻인가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답변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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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질문이라고 생각만 하고 답변할 생각을 못한 채 한 주가량 지나 버렸습니다. 늦게나마 답변을 올립니다.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이들 중에 구약의 다윗이나 솔로몬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몰몬교 교인들 역시 이들을 '모델'로 삼아 일부다처제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구약의 많은 이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이란 뜻은 아닙니다. 성경의 위인들이 한 행위라고 해서 모두 성경적이거나 진리에 근거한 바른 일이란 뜻은 아닙니다. 술 취한 노아를 보고 술을 마시는 것을 성경적이라 할 수 없고, 아들을 얻기 위해 아내의 말을 따라 '하갈'을 취한 아브라함이 정당화될 수 없듯이 아내를 많이 둔 다윗과 솔로몬의 행동이 성경적인 것아 아님은 당연한 일입니다.

일단 성경을 펴 봅시다.
주님은 [이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에 대해 바울은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5:31)라고 합니다. "그들이 한 육체=그 둘이 한 육체" 주목하십시오. 창세기의 '그들'이 에베소서에는 '그 둘'이라고 말합니다. 고로 남편은 한 아내를 두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우리 주님 역시 이 구절을 들어 이혼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하시매](마19:5-6). *그 둘이 한 육체. 그 셋이나 넷이 아닙니다.
말라기 2:15, [주께는 영(靈)의 여분이 있었으되 주께서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것은 주께서 경건한 씨를 구하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 영을 조심하여 결코 어려서 취한 아내를 대적하며 속임수를 행하지 말지니라.](말2:15). 주님은 '오직 하나'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한 여인을 아내로 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솔로몬, 르호보암 등은 왜 그렇게 많은 아내를 취했습니까?
다윗과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품에 주고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을 네게 주었느니라. 만일 그것이 너무 조금이었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삼하12:8)고 하십니다. *네게 주었느니라.
왕실에는 왕이 있고, 왕비가 있고, 후궁이 있고, 처녀가 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은 왕이었습니다. 두 곳을 펴겠습니다. 시편45:9, [왕의 귀한 여인들 가운데는 여러 왕의 딸들이 있으며 왕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시45:9). 아가서 6:8-10,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며 처녀는 수도 없이 많으나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는 오직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를 낳은 여인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딸들이 그녀를 보고 축복하니 참으로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녀를 칭찬하는구나. 아침같이 찬란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위엄 있는 여자가 누구인가?](아6:8-10).
이들은 왕실의 구성 요소들로 등장하는데 전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분류를 통해서 이런 분석이 가능합니다.
1. 율법 이전 시대에 구원받은 이들을 왕비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2. 반면 율법 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신랑의 친구들'로 분류됩니다.
3. 침례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언급했습니다.
4. 교회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은 '오직 하나 뿐이로구나.' 라고 말하는 신부, 아름답고 위엄 있는 여자로서 신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언제나 단수입니다.
5. 반면 대환란 때 구원받는 유대인들은 '처녀들'로 나옵니다(마25).
6. 율법 시대에 구원받는 이방인들은 후궁들로 분류되고,
7. 대환란 때 구원받는 이방인들은 '손님'으로 분류됩니다(마22).

이런 진리를 예표하는데 사용된 예가 다윗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다윗의 예를 들어 일부다처제를 하겠다면 율법 시대의 왕정 아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왕이라고 해서 무조건 아내를 많이 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해 왕이 될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는 자기를 위해 아내를 많이 두어서 마음이 돌아서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해 금은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17:17).
다윗과 달리 솔로몬은 이 말씀을 거역하고 아내를 많이 두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에게 아내들 곧 왕비 칠백 명과 후궁 삼백 명이 있더니 그의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왕상11:3).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는 배교였습니다.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 숭배자로 전락했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분열케 한 장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르호보암이나 기타 왕들이 아내를 많이 구한 것은 자기 정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딸인 미갈을 아내로 얻은 후로 사울 왕의 정적이 되어 유랑 생활을 하면서 왕이 되기까지 다윗은 다양한 사연으로 여러 아내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아내를 얻는 것은 여인들을 구제하고 보살피는 목적이 강합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아내로 얻는 것이 그런 예입니다.
밧세바를 아내로 얻게 된 것은 정욕으로 인함이 시작이지만 자신의 죄로 인해 우리야를 죽게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아내로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가정 내의 불화, 후계 구도로 인한 다툼, 형제간의 갈등, 반역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습니다. 아내를 많이 얻은 것이 성공이나 행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신명기 17:17에 따라 아내를 많이 두지 않는 것이 더 성경적인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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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평소 궁굼해서요..
안식일과 주일은 다른지요?
안식교도 정통 기독교인지요? 아니면 무엇이 다른지요?
좋은 답변으로 바른 신앙생활 하는데 도움을 주시면 고맙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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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집트나 바빌론, 앗시리아 등은 안식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표적입니다.
*출31:13,17, 겔20:12,20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변개하거나 개정해서 교회에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셨지 '안식일'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일은 주의 첫 날이지 주의 날이 아닙니다. 이 둘은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다가올 일들의 그림자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다음 글들을 참고하십시오.
제목을 클릭하시면 문서가 열립니다.

1.2006/08/08 이스라엘과 안식일
2.2006/08/01 주일, 안식일, 주의 첫 날
3.2005/07/16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4.2005/06/04 안식일, 주일, 주의 날 대해서
5.2005/05/26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메시아닉 유대교, 안식교 등 안식일 준수를 주창하는 교회는 저주의 복음, 마귀적인 교리를 가진 거짓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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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새벽기도회 아닌가요?
안녕하시죠? 평소 고민이되서요

1.예수님이 새벽기도 했다고 모두 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어려서 시골교회는 전도사님이 새벽4시 종치고 4시 반에 시작했지요 지금 우리는 새벽? (아침)5시? 5시반? 6시?에..

세상풍파에 휩쓸려 인본주의 세속주의, 물질 만능주의에 물든 인간중심의 새벽기도 ..가짜 아닌지요? 차라리 혼자 집에서 하는 것이 조을듯..

2.주일예배도 어릴 때는 오전 ,밤 7시,7시30분에 요즘세태는 오후 2시,3시로 변경..
편의주의, 인간중심의 예배시간이라면 이것 또한 차라리 집에서 편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신앙생활, 특히 기도생활의 도움 주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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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회는 새벽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심야이든 언제 해도 상관없습니다. 진짜, 가짜란 것이 없습니다. 기도의 시각은 항상(always), 언제나(any time)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새벽에 기도하든, 저녁에 기도하든 상관이 없기 때문에 참이냐? 가짜냐? 판단할 것이 못됩니다.
아래 글은 저희 교회에서 한 새벽 기도에 관해 전한 말씀입니다.
참고해 주십시오.

예배에 관해서는 인간 중심적 예배를 지양하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경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배 시각 역시 자유롭습니다.
주의 첫날(일요일)에 모이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예배 시각은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중에 몇 번이나 모이든 몇 시에 모이든 그것 역시 각 교회에서 자율적으로 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이란 말이 있어서 성경을 통해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유대 왕조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21:12절에,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에 심판을 집행하며 학대하는 자의 손에서 노략 당한 자를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행위가 악하므로 나의 격노가 불같이 나가서 태우리니 능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21:12 ).
바빌론의 군대가 밖을 포위하고 이제 곧 예루살렘은 죽음과 역병이 온 도시를 휩쓸고 도시는 불탈 것입니다. 그런 중에 "너는 아침에 심판을 집행하며"라고 한 것은 심판을 집행하는 일은 늦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이란 주의 말씀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판단(심판)은 다 의로우며"라고 할 때 그 판단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를 밤이라고 하고, 아침 6시부터 낮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침에 만나를 내려 주셨고, 성도들은 아침에 나가서 양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아침에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사33:2).
주님은 아침에 성도들을 깨우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우리는 매일 아침 주의 신실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애3:23). 오늘날 올빼미 족이 많고, 새벽 문화가 아닌 저녁, 심야 문화가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새벽을 깨우는 새벽 문화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새벽에 공의를 내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거하시는 [주]는 의로우사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신의 공의를 빛으로 내어오시며 쇠하지 아니하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3:5).
왕이 아침 일찍 일어나 심판을 하고, 학대받는 자들의 손에서 백성을 건져내는 일은 주님이 원하시는 금식이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아침에 주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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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형 인간(II)
렘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렘3:23).
주의 긍휼은 새벽마다 새롭습니다.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아침마다"-매일 아침- 새롭습니다. 매일이란 말은 지속성인데 이것을 성경은 신실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보시고(visit-방문하시고) 순간마다 연단하시나이까?](욥7:18). 하나님이 방문했을 때 성도가 자고 있으면 주님은 자신의 은혜를 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긍휼을 보이시고, 새벽에 만족하게 하십니다. [오 새벽에 주의 긍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시90:14). 주님은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 주시듯이 아침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주님은 아침에 만나를 거두게 하셨는데, 해가 뜨면 녹아 버렸습니다(출16:21).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읽음으로 영적 양식을 취해야 합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낮에 일터에서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태워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향은 기도를 예표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태우되 등잔들을 정비(整備)하면서 그 위에 향을 태울 것이며](출30:7). 우리는 새벽에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에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결코 대낮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읽고, 아침에 기도함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위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주님을 섬겼습니다.
아침은 헌신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은 성전에 봉헌 헌물을 아침에 드리게 했습니다. [제단 위에 있는 불은 그 안에서 계속해서 타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또 번제 헌물을 그 위에 가지런히 놓고 화평 헌물의 기름을 그 위에서 태울 것이며](레6:12). 우리의 헌신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를수록 좋습니다. 헌신의 능력은 새벽에 주어집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성전 문을 열고,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그들이 하나님의 집 사방에 머물렀으니 이는 그들이 책무를 맡아 아침마다 그 집의 문을 여는 일을 하였음이더라.](대상9:27). 주를 섬기는 것은 매일 아침이어야 합니다.
아침은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새벽에 부활한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들이 늦잠 자고, 자기 할 일 다하고 동굴로 갔다면 그들은 결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은 주님과의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주는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오며 고난의 때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되시옵소서.](사33:2). 이것이 바로 새벽 기도의 효과입니다.
아침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 아침은 주의 신실하심, 긍휼을 새롭게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에 단 한번, 단 몇 차례만 주의 은혜를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맛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이는 새벽에 주를 만난 대언자의 증언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애3:23). 주님은 아침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거하시는 [주]는 의로우사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신의 공의를 빛으로 내어오시며 쇠하지 아니하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3:5).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침에 주님이 공의를 빛으로 내어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바른 판단력은 새벽에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새벽보다 정신이 맑은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침에 성도들을 깨우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우리는 모두 새벽을 깨우고, 새벽에 기도하고, 찬양하고, 헌신하고, 헌물을 드리고, 모임으로 발길을 옮겨야 합니다. 영적 지식은 새벽에 가장 많이 주어집니다. 영적 깨달음은 새벽에 기도하고 성경 읽을 때 많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이른 새벽에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시/ 한가운데 계시매 그 /도시/가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도우시되 이른 새벽에 도우시리로다.](시46:5).
오전 11시 예배에도 제 때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신 상태가 틀려먹었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은혜를 받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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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정역에서 '흠정'이란 무슨 뜻인가요?
흠정이란 "황제가 손수 제도나 법률 따위를 제정하던 일. 또는 그런 제정"을 말합니다. 흠정하다- authorize; establish
예: * 흠정의 authorized[established] by the king; compiled by royal order
* 흠정역 성경. the Authorized Version (of the Bible); the King James Bible : * 흠정 헌법
* a constitution granted by th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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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장에서 3가지 질문 창세기 11장은 불신자와 성경에 능숙하지 못한 어린애들이 많은 질문을 쏟아 내는 곳입니다.

첫째, 바벨탑을 건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어떻게 탑이 하늘에 닿게 지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새가 하늘을 날고 구름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전혀 이해하기 어렵지 않는데 탑이 하늘에 닿게 짓는다는 것이 왜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20M도 안 되는 교회 첨탑을 가리켜 하늘 높이 쌓았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말해 하늘을 저 은하계나 하늘의 처소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창세기의 기록 내용의 진실성에 흠을 내고자 하는 자들에게 킹제임스 성경은 안전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4절 "And they said, "Go to, let us build us a city and a tower, whose top may reach unto heaven."
-->may reach란 조동사 may입니다. 원문에는 없는 이 말이 킹제임스 성경의 위대성을 말해 주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이죠. may는 가정, 추측, 허가를 나타내기 때문에 언어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은 함 족속이 바벨탑 건설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둘째. 7절에 가면 성경을 조금 읽은 사람의 질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신데(고전14:33), 어떻게 언어를 혼란시키셨는가? 란 질문입니다.
답 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실 때, 땅에 충만하고 흩어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모여 살자는 것은 일단 언약을 정면으로 거슬리는 것입니다. 지면에 흩으시는 일은 신약의 사도행전에서도 계속됩니다.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을 때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흩으셨습니다.
인간들은 연합하고 단결해서 무엇인가를 건설하겠다고 하지만 그들의 구상은 악하며(창6:5,8:21) 연합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기 때문에 언어의 혼란을 통해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혼란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어의 혼란을 통해 인간을 흩으셨지만 '순수한 언어'를 돌려주실 것입니다(스바냐3:9). 이때 순수한 언어를 주신 이유는 "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게 하기 위함입니다."(스바냐3:9)

셋째. 함의 자식 가나안에 대한 노아의 저주입니다. 유교 문화에 젖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호소력 있는 질문입니다.
노아가 술이 취해 벌거벗고 있었는데 함이 들어와 그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깨어나서 함도 아닌 함의 자식을 저주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논리입니다.
성경을 차분히 읽어 보면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잘못은 함이 했는데 카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은 9:1에서 함을 포함한 자식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저주할 수 없습니다. 함이 한 일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고자질한 죄가 아닙니다. 9:24에서 노아는 술에서 깨어 작은 아들(함)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알고서(자기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몸에 뭔가 이상한 짓을 한 것이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함의 죄는 아버지의 몸에 동성연애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벌거벗음의 용례는 모두 섹스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의 죄 못지 않게 큰 죄는 성적 타락, 즉 씨와 관련된 죄입니다. 씨를 혼잡 시키는 것-주로 사탄의 역사임-에는 반드시 저주와 심판이 있습니다. 함이 지은 죄가 씨와 관련된 성적 범죄였기에 하나님은 함의 씨(후손)를 저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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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다윗은 왜 에봇을 가져오게 해서 기도했습니까?
답변: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여기로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비아달이 에봇을 거기로 다윗에게로 가져오매(삼상30:7).
사울이 사무엘을 대신해 제사를 드린 것처럼 다윗이 에봇을 입고 제사장 직분을 대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비아달은 블레셋의 침공으로 '에봇'만 챙긴채 그일라에 있는 다윗에게 달려왔습니다(삼상23: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로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자기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삼상23:6).

백성들은 다윗을 대적하고 돌로 치려하고, 다윗은 전쟁을 위해 주님께 묻기 위해 아비아달이 가져온 '에봇'을 가져오게 해서 그것을 자신 앞에 두고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책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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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 번제인가, 천 개의 번제 헌물인가?

이 부분에 대한 답변은 제가 직접 하는 대신 성경 번역 문제와 더불어 좋은 답변 글이 있어서 그것을 올립니다.
답변: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후에 지혜와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고 해서(왕상3:4, 13) 요즘 한국 교회에서는 일천 번제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골자는 천일 동안 매일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바치고 기도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성경에 근거한 것일까?
과거에 다니엘이 21일 동안 금식했다고 해서(단10:2-3) 지금 교회마다 ‘다니엘 작정 21일 새벽기도’를 하고 있고 또 부흥회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예수님이 40일 금식했으므로 자기도 40일 동안 금식해서 능력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선 적이 있는데 이제 또 여러 무지한 목사들이 무지한 양떼를 ‘일천 번제’로 끌고 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로몬은 결코 천일 동안 번제를 드리지 않았다.

개역: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3:4)
흠정역: 왕이 기브온에서 희생물을 드리려고 거기로 갔더니 그것은 큰 산당이더라. 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번제 헌물 천 개(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리니라.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간 이유는 그 당시 그곳의 산당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곳의 산당만이 유일하게 천 개의 번제 헌물을 일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 천일 동안 매일같이 번제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성경과도 맞지 않고 이치에도 맞지 않다. 어떻게 왕이 왕좌를 버리고 떠나서 근 3년 동안 번제만 드릴 수 있었겠는가?

솔로몬의 기사를 가지고 천 번 번제를 드렸다고 해석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개역성경의 공헌이 지대하다. 개역성경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헌물을 제사로 처리해서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여기 나오는 ‘burnt offering’은 원래 ‘태우는 헌물’이다. 하나님께는 ‘태우는 헌물’ 즉 ‘번제 헌물’을 드리지 ‘번제’ 즉 ‘태우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경우 ‘burnt offering’ 대신 ‘burnt sacrifice’라는 말이 사용되곤 했는데(레1:3, 9, 10, 13, 14, 17 등 18 곳) 이것은 곧 ‘태우는 희생물’을 뜻한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다 번제라고 번역했고 그래서 개역성경으로는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린다는 개념을 찾기 어렵다. 그 결과 솔로몬의 기사에서도 태우는 희생물 천 개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천 번 드린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이런 희생 헌물에 대해 아주 쉽고 명쾌한 답을 준다. 죄를 지으면 ‘죄 헌물’(sin offering)을 드리고 법을 어겼으면 ‘범법 헌물’(trespass offering)을 드리며 하나님과 화평하기를 원하면 ‘화평 헌물’(peace offering)을, 자원해서 드리기 원하면 ‘자원 헌물’(freewill offering)을, 음식을 드리고자 하면 ‘음식 헌물’(meat offering)을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개역성경은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낙헌 예물’, ‘소제’ 등으로 어렵게 만들었으며 또한 ‘자원 헌물’을 빼고는 모두 ‘헌물’이라는 말을 없애고 전체를 뭉뚱그려 제사로 바꾸어서 원래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속건제의 ‘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원 헌물’의 경우 개역성경은 레위기 22장 21절과 23절에서 ‘자의로 드리는 예물’ 혹은 ‘낙헌 예물’이라고 해서 헌물의 개념을 살렸는데 사실 다른 모든 경우에도 이렇게 했어야만 했다. 영어 성경의 경우에는 NIV, NASB 등 부패된 역본들도 모두 ‘헌물’(offering)을 살리고 있다. 아마도 이 사례 역시 중국 성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offering’을 제사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되며 그래서 제사장 계급이 일천 번제를 드리라고 강요해서 무지한 성도들의 돈을 착취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흠정역: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네가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회개하고 성경을 알아야 이런 무지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중세 천주교의 암흑시대가 우리에게 닥칠 것이다. <출처: keep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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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이전에 인간이 있었나요?
몇 몇 종교 단체에서 아담 이전 족속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그들이 주로 근거로 삼는 것은 가인이 누구와 결혼을 했겠는가? 도시를 건축했는데 그 때 도대체 몇이나 되었기에 그게 가능한가? 등에서 추론한 것입니다.
추측과 추론, 상상력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바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성경은 ‘아담을 첫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이 첫 사람이라면 이전에 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그분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행17:26a).
성경은 인류가 ‘한 피’라고 말합니다. 다른 종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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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뱀과 어떤 신체적(성적) 접촉이 있었는가?
이 질문은 다음 구절로 인해 파생된 질문입니다.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 그는 저 사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형제를 죽였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그를 죽였느냐? 자기 행위는 악하되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요일3:12). *who was of that wicked one….저 사악한 자에게 나서(한킹).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고후11:3).
이 두 구절에서 여자(이브)는 뱀과 어떤 신체적 접촉이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추측이나 추리할 수 있는 어떤 구절이 아니라 분명한 구절로 헛된 상상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이브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창4:1). 성경은 아담이 자기 아내를 이브를 알매 이브가 수태했고 ‘가인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이 때 여인은 ‘마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가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담이란 사실을 확증합니다.
같은 킹제임스 역본이지만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카인같이 되지 말라. 그는 악한 자로부터 나왔으며 …](한킹, 요일3:12a)라고 번역함으로 마치 가인이 악한 자에게서 난 것처럼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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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이브 곁에 있었습니까?
창세기 공부를 하다 보면 흥미있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아담은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때 곁에 있었습니까? 란 질문입니다. 이 질문 역시 ‘추론’이 많이 개입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창3:6b). *her husband with her(KJV). 우리말로 ‘함께한 자’란 의미는 공간적 거리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논란이 있지만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her husband with her”(KJV)는 '곁에 있는 남편, 함께 있는 남편’이란 분명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브가 뱀과 대화를 나눌 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는 순간에는 분명히 곁에 남편 아담이 있었습니다. 전혀 논란이나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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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날들에 대해서 묻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날/day>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날 (the day of God)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그 때를 말한다. 우리가 고대하고 열망하는 날이다. 천년 왕국이 끝나면서 지구가 불로 타버리고 영원세계로 이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다(고전15:24~28. 벧후3:8~13. 계21:1~5)
[그때에 끝이 오리니 곧 그분께서 모든 치리와 모든 권세와 권능을 물리치시고 왕국을 하나님 곧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때라.](고전15:24)

2. 구원의 날들 =현 시대.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3. 그리스도의 날 (the day of Christ)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확신하노라.](빌 1:6).
[너희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며 그리스도의 날까지 신실하고 실족거리가 없는 사람이 되며](빌 1:10).
[생명의 말씀을 제시하나니 이로써 나는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지 아니하고 헛되이 수고하지 아니한 것에 대해 그리스도의 날에 기뻐하리라.](빌 2:16).
우리는 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는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고후5:10).
4. 주의 날, 대환란 때를 말한다.
주일이 아니다. 주의 날은 대환란 기간이다.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마24:21).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완전히 아느니라.].(살전 5:2).

5. 주의 날. -천년 왕국이 끝난 후를 말한다. 대환란과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벧후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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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아버지는 왜 둘인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마1:16).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눅3:23).

두 사람의 아버지를 갖는 일은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 친 아버지와 장인을 말한다. 장인을 아버지로 부르고, 사위를 아들로 맞는 것은 동양 사회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태복음은 다윗 왕의 계보 즉 왕가의 계보를 다룬다. 왕가의 계보는 다윗-솔로몬-르호보암....요셉으로 이어진다.
누가복음은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담으로부터 창조 세계 안으로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함을 알려 주는 것이다. 흔히 모순이라 불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누가복음에는 다윗에서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에서 나단으로 이어지며 마리아의 계보를 추적하는 것이다.
주님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여자의 씨가 나실 것임을 말씀하셨다(창3:15). 고로 여자의 씨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부터 시작되고(눅3), 아브라함의 씨요 다윗의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마1:1).
문제는 마태복음에 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을 자식이 없는 자, 자기 날들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하라. 그의 씨 가운데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렘22:30). *여고나, 여고니야, 고니야, 여호야긴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여고니야는 마태복음 1:11에 등장한다.
예수님은 결코 여고니야의 씨가 될 수 없다.
동정녀 탄생은 다윗의 씨이면서도 여고니야의 씨가 아닌 사람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이 마리아가 아닌 요셉의 족보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이 마리아의 족보라면 마리아는 다윗의 씨이면서 여고니야의 씨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예수님은 다윗의 씨이고, 여자의 씨이다.
마리아가 여고니야의 씨라면 여자의 씨인 예수님 역시 여고니야의 씨가 된다.
마리아는 다윗의 씨이지만 여고니야의 씨가 아니다. 마태복음에는 4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의 씨에 대해 말해 주기 위해서다. 여자에게 태어나는 남자를 보여 준다.
누가복음에는 여자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야곱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면 야곱이 요셉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헬리(Heli)가 요셉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헬리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마리아와 세베대의 부인이 된 여자(마27:56, 요19:25)가 바로 헬리의 딸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기업을 물려 줄 아들이 없을 때(민 27:1-11, 36:1-12),
사위는 결혼 후에 가계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였을 때, 모세의 법에 따라 헬리의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족보에 합법적으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친 아버지 야곱과 장인 헬리의 아들이 됨으로써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다윗의 씨요,
다윗 왕의 왕위를 모두 물려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의 기록 형태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begot)이다.
누가복음의 기록 형태는 누가 누구의 아들*X is the son of Y로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에서 성령의 지시로 “데려와 아내로 삼은 뒤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계보는 마리아의 계보였으며 요셉의 이름은 물려받은 기업에 기인하여 기재되었고, 마태복음의 계보는 멸문한 ‘다윗의 자손’ 요셉의 계보이다.
예수님의 육신은 분명히 다윗의 씨에서 나셨다!(롬1:3, 딤후2:8).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롬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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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는가?
지하에 있는 존재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 우주적 사건입니다. (빌 2:10, 킹흠정)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세 부류의 존재를 봅니다. 장소, 공간적 개념으로 성경은 하늘, 땅, 땅 아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땅 아래 있는 것들....지옥에 있는 영들과 혼들을 다 말합니다.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골1:16).
여기에는 두 부류만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 땅 위, 땅 아래 있는 것들을 포함. (in earth)
(골 1:20, 킹흠정)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화평을 이루사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즉 내가 말하노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느니라.』- 여기에도 두 부류입니다. 땅에 있는 것들- 땅 위, 땅 아래 있는 것들을 포함. (in earth)

땅 아래에는 누가 있는가?
1. 감옥에 있는 영들
[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가 몇 안 되니 곧 여덟 혼이라.](벧전 3:19-20).
이들이 누구인지는 달리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날들에....불순종하던 자들'인데 사람들(혼들)이 아니라 '영들'입니다. 성경에서 부정한 영들이나 영들이 나올 때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훗날 심판석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고 시인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2. 죽어 있는 사람들.
[이런 까닭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6) .
'죽어 있는 자들'이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만 말하는 것인지
지하 세계에 있던 구약 성도들을 다 포함하는지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이들에게는 '복음이 선포'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하에 있던 구약 성도들(아브라함의 품에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고,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 '정죄'를 선포하셨습니다. 저주 받은 자들이 저주를 받는 이유를 지옥에서 예수님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지하 낙원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옥 간 부자가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지옥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온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셨고, 지옥에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을 보았고,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서 그들을 모두 첫 열매로 데려 가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엡 4:8, 킹흠정)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지하 낙원은 지금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이유는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육신으로는 모두 사람을 따라 죄의 삯인 심판을 받았습니다.
영으로는 모두 살림을 받았습니다.
지옥에 있는 혼들에게 구원이 있을 수 있다(Second Chance)는 것은 성경을 뜯어 고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해석입니다.
저는 성경의 어떤 특정 구절이 다른 구절에 제시된 진리를 무너뜨리거나 파괴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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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의 '옥'은 휠라케라는 말로 감금된 곳을 뜻하는 말입니다.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 시대 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가 겨우 여덟명이라고 비교해서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구원의 대상자가 '사람'이란 점에서 천사들이나 다른 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벧전3: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씀은 노아 홍수 이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벧후2장5-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성경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어지는 '의'입니다.
아담에게 주셨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에 대한 언약과 '가죽 옷에 대한 언약'이 노아 당시의 인류에게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유월절 양', '번제의 희생제물'등을 통하여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았듯이 노아홍수 이전의 사람들도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도록 언약이 주어져 있었고, 그 의를 전파했다고 봐야합니다. 그런데 노아를 통하여 이 복음이 전파되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노아의 가족만 구원을 받고 나머지는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사도가 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극심함 핍박과 멸시를 하고 있지만 '의'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증거함으로서 성도들에게 참된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참고) 창8:20-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희생제물로 번제를 드림으로서 장차 오실 메시야 언약을 가진 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혹하는 이들의 말에 속지 말고 분별하기 바랍니다.
벧전4:5절의 말씀이 영적으로 산자와 죽은 자를 뜻하는 것이라면 6절의 '죽은 자들'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로서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구원의 기회를 허용하는 의미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5절의 말씀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될 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뜻을 거스리고 악을 향해 치달렸던 그 사실을 사실대로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도들은 하나님을 따라 살았던 것을 고백하고 축복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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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벧전3:19,20에 나오는 "감옥에 있는 영들"은 말 그대로 [영들]입니다. 사람들은 '혼'이라 불리지 '영'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노아 이전에 이 땅에는 사람들만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죽은 이들은 사람들 외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고 이들을 '감옥에 있는 영들'이라 부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악한 영들, 유혹하는 영들, 부리는 영들이 사람이 아니듯 벧전 3:19,20절에 나오는 영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천사들을 영들이라 부릅니다(시104:4, 히1:7). 영적 존재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다서에도 심판 받은 영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 (유 1:6).
님이 말한 지옥에 간혼들, 사람들은 벧전4:6입니다.
참고로 님은 영들을 [구원의 대상자가 '사람'이란 점에서 천사들이나 다른 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 본문 어디에도 구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선포했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혀가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포하신 것입니다(빌2:10,11).
요한계시록 5:13에는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창조물들]이 "왕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토록 있으리로다,"(계 5:13)고 외칩니다.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창조물들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님의 주장: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씀은 노아 홍수 이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님의 상상력에 꾸며낸 소설입니다. 노아를 통해 선포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옥에 있는 영들"이 아니라 그 당시 땅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을 비교해서 성경이 스스로 해석해 주고 의미를 풀어 주는 대로 믿고 아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본문에도 없는 말씀을 더해서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아주 못된 버릇입니다. 주의해서 말씀을 보시고 말씀이 말하는 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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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도의 부활의 몸은?

[50.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51.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 52.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53. 그분의 부활 후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0-53).
여기서 핵심은 몸의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었을 때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무덤은 영, 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무덤은 죽은 몸(육신)을 묻는 곳이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무덤의 권세를 깨는 영적 사건이었습니다.
구약 성도들의 묻혔던 무덤이 열렸고 거기에 누워있던 죽은 몸(시체)이 일어난 것입니다.
부활이란 '죽은 몸, 죽었던 몸'이 일어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계에서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몸은 부활의 몸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살던 우리 몸이 죽은 후 그 죽은 몸, 무덤에 묻혀 있는 몸이 부활의 몸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지상에 살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 몸이었습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그의 죽은 시체를 미가엘이 하늘로 옮기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며 논쟁할 때에 ...](유9).
우리의 몸 역시 땅에 묻혔다가 그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일어납니다. 장차 부활 때에도 무덤이 열리고 묻혔던 바로 그 육신의 몸이 일어납니다.
이미 몸은 흙으로 돌아가 형체는 흔적도 없겠지만 분명히 다시 살아나는 것은 '죽었던 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죽은 몸, 지금 입고 있는 육신이 죽고 나서 이 몸이 일어나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 묻힌 몸은 그대로 있고 구원 받은 성도의 영과 혼에 새 몸을 입혀 버린다면 그것은 '환생'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52절에 "잠든 성도들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혼이나 영이 아닙니다. 죽음은 몸이 잠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무덤이 열렸습니다. 잠든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강시'들의 출몰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열린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의 몸은 삼일 동안 그대로 있다가 주님이 부활하실 때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53절을 보십시오. [그분의 부활 후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53). 마치 영화나 만화, 전설이나 신화에서나 보는 듯 한 장면이 실제로 역사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지하로 내려가셔서 지하 낙원(아브라함의 품)에서 그들의 혼을 사로잡아 올라오실 때 그들은 영광스런 몸을 입게 되었습니다. *엡4:8-10
부활의 몸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몸과 동일합니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그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
(눅 20:36)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부활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
부활의 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습니다. 정확히 같은 형상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지금 계시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3:2).
만약 오늘 주님이 오시면 과학 수사대나 검시관들이 2-3일 전에 죽은 자의 무덤을 뒤져 본다 해도 뼈 한 조각, 썩어 흙이 된 살 한 점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지상에 살았던 그들의 몸이 무덤에 묻혔지만 모두 일어났고 무덤에서 나오면서 주님이 주신 새 몸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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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하늘로 들림을 받았는가?
오늘 교회에 갔다가 "엘리야의 승천"에 관해 묻는 이가 있었다.

필자가 추천하는 글은 이것이다. 에녹과 엘리야는 어디에?
열 페이지짜리 영문으로 된 아주 쉬운 글이다.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부정하는 모든 논리가 들어 있다. 아래 내용은 그 중의 한 문단이다. 이런 구절을 볼 때 교회 성도들이 단번에 진실의 겉포장을 한 거짓임을 알알 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왕하2:11 그들이 여전히 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보라,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나타나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으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라.
이 사건은 여호사밧 왕 때 발생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여호람왕에게 편지를 썼다.
대하21:12 대언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네 아버지 여호사밧의 길들과 유다 왕 아사의 길들로 걷지 아니하고
여호사밧 시대 때 엘리야가 승천했다면, 어떻게 그 다음에 왕이 된 여호람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가?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한 것이 아니고 지상의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왕상18장에 보면, 하나님이 엘리야를 땅의 다른 곳으로 옮기셨음을 알 수 있다.
이런...이런...엘리야는 하늘로 들림을 받았는가?
어릴 때 주일학교 노래, 찬송가를 통해 이미 엘리야이 승천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 간 것이 아니다'란 말은 벼락, 천둥 같은 소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막연히 아는 지식과 자신이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확신하는 지식은 완전히 다르다. 막연한 지식은 성경으로 치고 들어오는 마귀의 사역자들을 당해 낼 수 없다. 참고로 위에 필자가 제시한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글을 보라. 소화할 자신이 없는 이들은 skip하는 것이 좋다.

엘리야의 승천을 부정하는 무리들이 주로 인용하는 구절은 이것이다. 마귀나 이단이나 거짓 사역자들, 거짓 교사들은 성경을 인용하다. 킹 제임스 성경을 인용하는 무리들도 있는데 이들은 항상 '원어, 원문'을 들먹인다.
자, 말씀을 보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요3:13). -당연하다. 사람은 누구도 하늘에 올라 갈 수 없다. 아무도 올라가지 못했다.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들림 받아(끌려 올라간) 간 것이다. 모세는 죽은 후에 옮겨졌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and so death passed upon all men.
아멘. 언제 사망이 모든 사람 위로 지나갔는가? 아담 안에서 그러했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죽었다. 이 구절이 육체적 사망만 의미한다면 "살아서 휴거되는 크리스천들"은 아무도 사망이 임하지 않게 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히9:27).
성경에는 두 번 죽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 엘리야는 대환란 때 지상에 내려와 죽게 된다. 모세는 이미 한 번 죽었지만 또 죽는다.
나사로를 비롯해 여러 사람은 두 번 죽었다. 반면 한 번도 안 죽는 사람도 있다. 살아서 들림 받는 성도들이다. 말씀을 볼 때 항상 예외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보라.

자, 엘리야 문제를 보자.
[8.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취하여 둘둘 말아 물들을 치매 물들이 여기저기로 갈라지고 이로써 그들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가니라. 9. 그들이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그분께서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구하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의 영이 두 배나 내 위에 있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10. 그가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그렇게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그렇게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11. 그들이 여전히 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보라,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나타나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으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2:8-11).
엘리야의 말년 즉 승천 직전의 사역은 열왕기상 1-2장에 잘 나온다.
엘리야는 북왕국의 대언자였다. 이 때 남북 왕국은 여호사밧과 아합이란 걸출한 왕이 서로 연합하여 혼인을 통한 혈연 동맹, 전쟁을 함께 하는 군사 동맹을 맺었던 시기였다. 엘리야의 사역 기간에 북왕국의 왕은 아합-아하시야-여호람이 통치하던 시대이다. 엘리야는 아합의 멸망을 대언했고, 아하시야의 죽음을 선포했고 그 이후 여호람이 통치하는 것을 보았다. 엘리야는 북왕국의 왕들에 대해서만 대언한 것이 아니다. 남왕국의 여호사밧 왕의 아들 '여호람'의 죄를 지적하고 그에게 글을 보내어 죽음을 대언했다.
[대언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네 아버지 여호사밧의 길들과 유다 왕 아사의 길들로 걷지 아니하고](대하21:12). 성경에 의심을 품는 이들은 언제나 성경이 틀렸을 수 있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질문1. 엘리야는 승천했는가? 그렇다. 하늘로 올라갔다(왕하1:11).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자, 모든 역본들의 표준이며, 히브리어 원문을 오해하는 이들을 바로 잡아 주는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보자. [...and Elijah went up by a whirlwind into heaven.]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의해 올라갔다(went up) ---->하늘 속으로(into heaven). "up...into"에 주목하라. 어디서 많이 본 기억이 나지 않는가?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행1:11). *this same Jesus, which is taken up from you into heaven,...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한 것이 아니면 예수님 역시 하늘로 올라 간 것이 아니다! 엘리야는 "하늘 속으로 올라갔다." *went up into heaven.

질문2. 엘리야가 승천한 시점이 여호사밧 왕 시절인데 어떻게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에게 글을 보낼 수 있는가?(대하21:12).
이는 엘리야 승천 시점의 오해이다. 자신들 마음대로 엘리야의 승천 시점을 잡아 놓고 성경이 틀렸다고 우쭐댄다. 자신이 뭔가 독특한 진리를 계시 받은 것처럼 우쭐거리기도 한다.
북왕국의 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 이미 남왕국 왕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 이년이었다. 남북 왕국의 왕 이름이 같다. 이 때 남왕국의 왕이 여호람이지만 여호사밧과 공동 통치를 하던 시기였다.
[이처럼 왕이 엘리야가 말한 주의 말씀대로 죽고 그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이년에 통치하니라.](왕하 1:17).
엘리야는 남왕국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 위에 오른 뒤에도 북왕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남왕국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북왕국의 여호람보다 먼저 왕위에 올랐다. 글을 써서 보내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BC 898년에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고(공동통치), BC 897년에 북왕국의 여호람이 왕위에 올랐다. 엘리야는 이 후에 승천을 했고, 유다왕 여호람에게 글을 보낸 것은 승천 이전이었다.
많은 이들이 왕하 1:17을 무시하고 엘리야의 승천 시점을 남왕국 여호람 왕 이전으로 당겨 버리고 성경의 오류라고 말한다. 자, 다시 말씀을 보라.
[이처럼 왕이 엘리야가 말한 주의 말씀대로 죽고 그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이년에 통치하니라.](왕하 1:17).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는 것이 뭐가 모순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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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의 심판- 양과 염소

마태복음 25장을 교회 시대의 성도들의 구원과 심판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매우 많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오류는 예상 외로 심각하다.

(마 25:31-34)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 중에 모든 거룩한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들을 자기 앞에 모으고 목자가 염소들로부터 자기 양들을 갈라내듯 그들을 일일이 분리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편에 두되 염소들은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마 25:41)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본문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도 아니다.
천사들의 심판도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민족들의 심판이다.
누가 심판하시는가? 사람의 아들이. 언제 심판하시는가?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중에 모든 거룩한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심판 받는 대상은 누구? 모든 민족들을 자기 앞에 모으고. 여기서 구원 받는 자들이 천년 왕국의 시민이 된다!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간다.'
심판의 근거는? 심판의 근거는 대환란 중에 주님의 형제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른 판단(심판)이다. 구주를 믿었는가? 율법을 지켰는가? 등이 아니다.
민족들의 심판이라고 해서 중화 민족, 한 민족, 몽고족, 일본 민족 등 이런 식으로 단체로 구원 받고 게르만족, 앵글로 색슨 족은 단체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판은 아니다. 중동의 모든 민족은 다 염소로 분류되어 지상에 아랍 족속은 다 사라지고, 아프리카 족속은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식은 아니다.

*민족은 개개인의 신원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심판에 대한 대언은 요엘서 3장에 이미 나와 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은 이 말씀이다. (욜 3:1,2) [보라, 그 날들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올 그때에 내가 또한 모든 민족들을 모아 여호사밧 골짜기로 데리고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상속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과 변론하리라. 그들이 이스라엘을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 버리고 내 땅을 나누었으며]
(욜 3:12-14) [이교도들은 깨어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방의 모든 이교도들을 심판하리라.너희는 낫을 대라. 수확할 것이 익었도다. 너희는 와서 밟으라. 포도즙 틀이 가득 차고 독이 흘러넘치며 그들의 사악함이 크도다.주의 날이 판결 골짜기 안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무리, 많은 무리가 판결 골짜기에 있도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지 자신이 세워둔 교리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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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결혼, 이혼, 재혼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성경의 이혼 사유

1. 음행 : 율법은 이렇게 말한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릴 자는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줄지니라, 하였으나](마 5:31). 이스라엘은 이 율법에 따라 행하면 된다. 단 주님이 오실 때까지만 이 규례를 따르고 주님이 오신 후에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구약의 율법과 주님의 가르침이 다를 때 크리스천은 언제나 구약의 율법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 가르침을 받아 실행해야 한다.
이혼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며 또 누구든지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 (마 5:3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 하시니라.](마19:9).

2. 사별(롬7:2-3). -재혼 가능
[남편 있는 여인이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에 의해 그에게 매여 있으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자기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런즉 만일 그녀가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부라 불릴 터이나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그녀가 그 법에서 해방되나니 그러므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간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7:2-3).
[아내는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법에 의해 매여 있으되 자기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되어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시집 갈 수 있거니와 오직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7:9).

3. 유기
욥의 아내처럼 욥을 떠나는 경우이다. 신앙의 문제로 크리스천인 아내나 남편을 버릴 때 이혼이 성립한다.
불신자와 살고 있는 경우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떠나거든 떠나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그런 경우에 속박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혼자 지내거나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나 재결합, 재혼 가능(고전7:9).
[그러나 그녀가 떠나거든 결혼하지 말고 지내든지 아니면 자기 남편과 화해하라...](고전7:11).
크리스천인 남편이나 아내가 불신자인 아내나 남편은 신앙적인 이유로 버리는 것은 불가하다(고전7:12-14).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령하노니 명령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주시니라. 아내는 자기 남편을 떠나지 말라.](고전 7:10).
[...또한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1).

성경의 결혼
1. 같은 멍에를 매라.
즉 주 안에서만 결혼하라는 것이다. [..오직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7:9).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고후6:15-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후6:14).

2. 음행하지 않기 위해 결혼하라(고전7:2).
결혼의 중요 목적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3. 성경이 말하는 결혼이란 결혼식이 아니라 '몸과 몸의 결합'이다.
결혼이란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엡5:31).

결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오직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7:9)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후6:14)고 합니다. 경제적 이유, 장래 비전, 외모를 취하는 등으로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주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은 음행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둘지니라.] (고전 7:2). 결혼은 남녀의 정신적 결합이 아니라 '육체적 결합'입니다(엡5:31). 이 점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혼한 순간부터 남자와 여자의 몸은 상대방이 주장합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아내가 하느니라.] (고전 7:4). 서로를 속여서 권리를 빼앗지 마십시오(고후7:5). 부부란 둘이 결합하여 한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신실하십시오.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이혼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까?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이 음행으로 연루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이혼남, 이혼녀가 수두룩합니다. 너무나 쉽게 이혼합니다. 교회는 이혼한 이들이 모여 다시 재혼을 하기 위한 만남의 장소와 여건을 제공해 줍니다.
성경은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거늘](마19:6)고 말씀합니다.
자, 그런데 사람들은 이혼을 결심할 때 이런 저런 핑계와 변명을 만듭니다. 성격 차이, 가치관 차이, 경제적 이유, 더 나은 삶의 비전을 위해서,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서 등등으로 시작해서 "본래부터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베필이아니었다" 등등입니다. 처음에는 실수였고, 실패였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것은 이혼 사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따로 정해 두신 짝을 찾자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이혼 사유는
첫째, 음행(마19:9)
둘째, 사별(롬7:1-4)
셋째, 신앙적인 이유로 버림 받는 경우입니다(고전7:15).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떠나거든 떠나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그런 경우에 속박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저는 목회자로서 배우자의 "폭언과 폭력, 술취함(알콜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전혀 일을 하지 않음" 등의 이유로 이혼 상담을 할 때 가장 난감합니다. 이혼하지 말고 감당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이혼하라고 하기에는 성경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크리스천이면 이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가능합니다.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성경적 원칙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이혼을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사역을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재혼에 대해서
1. 성경은 이혼을 했더라도 재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아내에게 매여 있느냐? 벗어나려 하지 말라. 네가 아내에게서 놓여 있느냐? 아내(다른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전7:27). 미국에는 몇 번씩 이혼하고 재혼한 목사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단에서 이혼, 재혼 등에 대해서는 아예 입에 담지도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오히려 이혼하자마자 곧 재혼을 권장하고 자기 교회에 혼자인 사람들이 많다고 중매를 서 주겠다는 웃지못할 일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자는 아내에게 대하여 간음하는 것이요,](막10:11). 사별 외에 어떤 사유로 이혼을 했다면 재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재혼은 간음입니다.

사별한 사람들끼리 재혼은 가능합니다.
사별한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 처녀와 결혼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 외에는 간음입니다.

2. 성경은 이혼 한 후에는 결혼(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거든 결혼하지 말고 지내든지 아니면 자기 남편과 화해하라. 또한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라.] (고전 7:11). *그냥 지내든지 or ...화해하라(재결합).
헤어진 배우자가 현재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간음입니다. [그런즉 만일 그녀가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부라 불릴 터이나...](롬7:3). 이혼은 재혼의 빌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재혼) 하기 위한 이혼이 간음이듯이 이혼한 후에 결혼하는 것 역시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혼 한 후에 홀로 살다 전 남편(아내)가 죽으면 재혼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법에 의해 매여 있으되 자기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되어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시집 갈 수 있거니와 오직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전 7:39).

이혼한 여자(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니라.](마5:32). 필자가 아는 목사님 중에는 세 번이나 결혼한 분이 있습니다. 전 부인들이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이혼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혼 당한 남자가 왜 자꾸 결혼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간교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미국식이니 한국식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문화, 풍습의 문제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성경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 하시니라.](마19:9).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눅16:18).
지금 수많은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결혼, 이혼, 재혼을 멋대로 자행합니다. 교회에서 이혼과 재혼을 하는 일은 온 교회가 간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이런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누군가를 소개해 달라는 것에 동조하지 말고, 누군가를 먼저 소개해 주는 어리석은 죄를 짓지 마십시오. 현실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이혼과 재혼을 결정하는 일은 주께 범죄하는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혼 상태에 있는 분이라면 혼자 지내든지 재결합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재혼을 계획하고 있다면 주 안에서 행하되 간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숙지하시고 자녀들과 친지, 친구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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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무엇인가?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요1:17). 이 말씀에 따르면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고 진리는 은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통해 온 진리는 무엇입니까?
혹자는 '진리'는 율법이라고 말하며 무지와 오류를 서슴없이 드러냅니다. 메시아닉 유대인이라는 거짓 유대인들을 비롯한 율법 외눈박이들은 모두 다 율법에 끼워맞추는 것 외에 볼 줄 아는 것이 없는 고로 진리는 율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율법=진리. 이 공식에 맞추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구도자가 아닌 전도자로서 진리를 알고, 진리를 공부하고(딤후2:15), 진리를 행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기뻐하고, 진리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우리가 선포하는 진리, 공부하고, 알고, 말하고, 기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1. 성령은 진리이시다.
[...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요일5: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옵니다.

2. 구원의 복음이 진리이다. 복음은 우리를 낳은 진리의 말씀이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였고 ...](엡1:13).
*복음의 진리 -골1:5, 6, 딤전2: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복음'이 왔습니다. 예수님 없는 구원의 복음은 없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창조물 가운데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인함이니 이 소망은 너희가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들은 것이라.](골1:5).

3.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예수님 자신이 친히 진리로 오셨습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 자신이요,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예수님과 함께 왔습니다.

4.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시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7).
아버지의 말씀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입니다. 주님은 장차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말하게 될 신약 성경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전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지만 마지막 날들에는 오직 한 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말씀하십니다(히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아버지의 말씀이 '새 언약'입니다.

5. 주의 법은 진리이다.
[주의 의는 영존하는 의요, 주의 법은 진리이니이다.](시119:142).
주의 법은 모세의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다 주의 법입니다. 율법=진리.
구약 성경 전체가 다 주의 법이다. 시편, 대언서 역시 주의 법이다. 잠언이나 전도서 역시 진리의 말씀들이다. *잠22:21.
(전 12:10) [전도자는 애를 써서 받아들일 만한 말씀들을 찾았는데 여기 기록된 것은 올바른 것이요 곧 진리의 말씀들이로다.] 전도서에 기록된 것은 진리의 말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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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모세의 율법" 으로 아는 사람과 진리는 성령,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아는 것은 성경을 깨닫는 깊이와 너비가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요4:24)는 말씀에서 '진리=율법'이란 단 한 가지 밖에 모르는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따라 주님을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율법을 따라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율법 자구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롬7:6). 그래서 성경에서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고 말할 때 '진리=성령, 복음의 진리,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은혜와 진리라고 할 때 '진리'는 구원의 복음이요, 성령이시요, 아들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받아 말씀하신 아버지의 말씀임을 분명하고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많은 이 때에 부지런히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여 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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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아심과 예정의 차이

구원 예정론이 비성경적인 캘빈주의 교리임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한 성도가 '미리 아심과 예정'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해 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누가 구원받을지, 구원받지 못할지 다 아시는데 그것이 예정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해석해야 하는가? 그런 질문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전지하심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미래를 미리 아시고 말씀하신다.
미리 아심에 근거해서 주님은 말씀을 주시고 기록하신다.
예언이란 미리 기록된 역사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정확하게 예언이 성취된 사건들을 확인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확신한다.

주님은 예정의 하나님이시다.
예언은 주님의 예정 즉 마스터 플랜을 듣고 믿음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 예정론을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라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 선택과 같은 영옂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정은 미리 정하심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매우 간단한 질문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실 때 그가 범죄할 것을 미리 아셨는가? Yes.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실 때 그가 범죄하도록 미리 정하셨는가? NO.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사람이 범죄할 것을 미리 아셨지만 결코 범죄하도록 예정(미리 정하심)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예정하셨다면 범죄의 책임은 아담이 아니라 주님께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주님은 미리 아셨는가? Yes.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주님은 미리 정하셨는가? NO.
미리 아심과 예정(미리 정하심)의 차이를 구분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아담이 범죄할 것을 주님이 미리 아셨다면 그 피할 방법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경고를 주셨다. 미리 아셨기에 경고를 주셨고, 사람은 그 경고를 받아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의를 할 때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배반을 미리 아셨기에 경고를 주셨다. 베드로는 주의 경고를 받고 마음을 낮추고 주의를 기울였다면 얼마든지 과오를 피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미리 정하신 일이라면 사람이 노력한다 해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피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미리 아시기 때문에 말씀을 보내신다. 대언자를 보내신다. 선생을 보내신다. 경고를 발하신다. 하지만 듣지 않고, 주의 말씀을 거절하고 무시함으로써 그 경고를 피하지 않는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다.
주님이 죄인들이 거부할 것을 아시면서도 보내신다.
주님은 죄인들이 거부하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선악간에 분별하라고 하신다.
택하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 앞에 구원의 복음을 제시하신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이다. 이 일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이 예정이다. 반면 누구는 받아들이도록 예정하시고, 누구는 거부하도록 미리 정해졌다는 것은 사악한 마귀의 교리이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도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미리 정해 놓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어떤 이는 반드시 믿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것도 아니다. 믿고 믿지 않고는 각자가 선택하도록 해 두셨다. 주님께서 이 땅의 사람들 가운데 누가 구원 받을지 미리 아실 수는 있지만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사회를 보자.
모든 법규는 예정론이다. 무슨 죄에는 벌금이 얼마인지, 형벌이 무엇인지 미리 정해 놓았다. 정해진 것은 범죄자, 범법자들이란 대상이다. 하지만 누가 범죄자가 되도록 미리 정해 놓은 것은 아니다. 미리 법규를 가르치는 것은 범죄를 예방하고 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경은 이와 같다. 불신자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은 정해져 있다. 이것은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 즉 예정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경고를 준다. 피할 길을 알려 준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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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휴거는 한 날에 일어나는 동시 사건인가요?
질문.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부활 성도)과 성도들의 공중 들림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있습니까?
답변. 그렇습니다.
환란 통과론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성도들의 휴거가 동떨어진 사건으로 말합니다. 부활 성도와 휴거 성도는 *함께* 들림 받습니다. 공중에서 함께 주를 만나며 주와 함께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살아 있는 성도-휴거 성도)가 그들(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공중 재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교회 성도가 공중으로 채여 올라갈 때 죽은 자들로부터 먼저 일어난 자(부활 성도)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땅이 아님) 주를 만납니다. 부활과 휴거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나는 순간에 한 날 한 시각에 일어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이 땅에 살아 있던 성도들(교회)은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납니다.
재림은 주님께서 자신의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오시는 것인데 '자신의 성도들'이란 이미 공중으로 함께 들림 받았던 성도들(부활, 휴거)을 말합니다.
Jesus came to his people. -초림
Jesus comes for his people. -공중 재림
Jesus comes with his people. - 지상 재림

성도의 부분 휴거, 대환란 통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몸의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과 산 자가 모두 합해서 한 몸입니다. 둘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오려면 먼저 주님께로 들림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함께 공중으로 채여 올라갑니다. 동떨어진 사건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이들에게는 대환란 통과란 속임수는 틈을 탈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먼저 들림 받지 않으면 그분과 함께 올 수 없습니다. 고로 대환란 통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속이는 자들 중에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유1:14) 같은 구절에서 주님과 함께 오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부활 성도들이요, 휴거는 주님께서 부활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무지와 오류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함께 구름들 속으로 들려 가며(살전4:16), 마지막 나팔 소리에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과 살아있는 성도가 모두 다 변화됩니다.
(고전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본문은 분명히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 있는 성도의 변화(휴거)가 함께 있음을 말합니다. 이 둘은 별 개의 다른 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날 한 시에 일어나는 동시 사건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대환란 전 휴거의 진리를 분명히 확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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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죽지 않았습니까?
이전에 필자가 쓴 글 중에 "엘리야는 하늘로 들림을 받았는가?"에 대해 '에녹' 관련 부분도 올려 달라는 요청이 있어 간략하게 씁니다. 이전 글 참조.2010/02/03 - [질문과 답변] - 엘리야는 하늘로 들림을 받았는가?

질문: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것입니까? 다른 지역으로 옮겨진 것입니까?
답변: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성경을 믿으면서도 에녹의 승천에 대해 의심과 불신을 품는 이들은 성경 난독증 환자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환란 통과, 환란 후 휴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에녹의 휴거는 몹시 못마땅한 성경적 예표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에녹이 대환란을 예표하는 대홍수 이전에 들림 받았다는 것은 교회의 휴거의 모형이 되기 때문에 이 진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합니다.
아래 구절들은 에녹이 죽었을 것이라는 사람들이 주로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 다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에녹은 죽지 않았다고 합니까?

자, 그럼 본문을 보겠습니다.
(창 5:21) [에녹은 육십오 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창 5:23)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
에녹이 승천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어딘가로 옮겨진 것이라면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 오년 + 알파(옮겨진 후의 삶)여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녹의 전 생애가 365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이 땅 어딘가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더욱 분명합니다. 히브리서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므로"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11: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그들이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
에녹이 신약의 빌립이 광야로 옮겨진 것처럼 옮겨졌다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란 말은 전혀 쓸데없는 말입니다. 에녹이 이 땅에서 죽었다면 그의 전 생애는 365년이 아닐 것은 자명합니다.
만약 에녹이 하늘이 아닌 다른 지역 어딘가로 옮겨졌다면 "더 이상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 역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어딘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 성경 자체 본문의 증거를 봅시다.
창세기 5장에는 사람 이름이 나오고 몇 년을 살며 누구를 낳았고 몇 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이 하늘이 아닌 지상 어딘가로 옮겨졌다가 죽었다면 그는 몇 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런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이를 통해 조금의 국어 실력만 있어도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에녹과 같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질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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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부정한 짐승은?
질문.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란 무엇입니까?
답변. 희생 헌물에 사용된 짐승과 그렇지 않는 짐승입니다.
율법주의자들 중에 노아의 때에 이미 레위기의 음식 규례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 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딤전 1: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노아의 때에는 모든 사람은 다 초식이었습니다. 육식 자체가 없었으므로 먹어야 할 고기와 먹지 말아야 할 고기 음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규례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음식 규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육식은 노아의 홍수가 끝난 후에 허락된 것입니다(창9:4).
모세의 율법은 시내 산에서 출애굽 때에 모세가 받은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희생 헌물에 사용될 짐승과 그렇지 않는 짐승입니다. 희생 헌물이 기준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받은 후에는 음식 규례가 기준입니다.
(창 8:20-21) [노아가 주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날짐승 중에서 취하여 제단 위에 번제 헌물을 드렸더니 주께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시고...]
말씀을 나누어서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모순이나 어려움이 없지만 그렇지 않는 이들에게 말씀은 언제나 실족하는 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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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가요?
질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가요? 아니면 우리 속에서 나는 것인가요?
답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 속에서 나지 않습니다. 행위에서 나지도 않습니다. 믿음의 창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옵니다.
에베소서 2:8,9절을 봅시다. (엡 2:8-9)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that)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그것은(it)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Not of works, lest any man should boast.
한국어로는 "믿음, 은혜, 구원"이 모두 명사형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 어순대로 읽으면 '그것'은 구원이 됩니다. 한국어 어순으로는 그것이 자연스럽게‘구원’인 것처럼 보이지만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보면 that, it은 지시 대명사이기 때문에 "are saved"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로(by grace)란 말은 문장 맨 앞에 있기 때문에 쎄미콜론(;) 다음의 that은 바로 앞의 명사인 faith를 받습니다.
혹자는 that이 앞 문장 전체를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which is로 받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복된 일이요, 구원의 필수 요건이지만 본문의 요점은
1.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란 것이요(8).
2. 그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9).
은혜가 너희 자신이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란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음을 자신에게서 나는 정신력, 의지력, 신념, 정신 상태 등으로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의 정의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자신에게서 나지 않고, 행위에서 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 종교성, 의지입니다. 믿음은 의지력이나 정신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고전12:9).-은사.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난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요.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롬10:17).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믿음을 주는, 산출하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믿음이 자랍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믿음은 크고 강해집니다.
믿음은 행위에서 나지 않습니다. 무슨 선한 행위, 의로운 행위, 금욕과 고행 따위의 종교적 행위, 율법을 지키는 그런 행위에서 믿음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율법주의자는 믿음이 무엇인지 몰라 고민하다가 “율법준수가 믿음의 시금석”이란 헛된 깨달음에 도달해서 열심히 율법을 지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거기서 믿음이 나옵니까?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행위는 믿음에서 납니다.
믿음은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약 믿음이 자신에게서 나거나 행위에서 난다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 자체가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에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 쓸데없는 걱정들.
때로 자신이 믿는 교리가 훼손되거나 문제가 될 것 같아 진리를 왜곡하는 경건한(?) 거짓말쟁이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선물이라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선물'을 받지 못한 것이란 논리가 성립할까봐 걱정을 하느라 성경이 말하는 바를 왜곡하거나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알고 믿는 교리의 훼손이 두려워 말씀을 기록된 대로 직면하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속은 자들입니다.

구원의 말씀, 구원의 은혜는 모두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각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그것을 받는가? 아닌가?는 각자의 선택이요 결정입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받아 들이면 믿음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Faith= believe (in/on) + words of God" 이런 공식이 성립합니다. believe, receive는 말씀을 듣고 각자 판단해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고, faith는 그 선택, 결정에 따른 하나님의 선물이요말씀이 자라나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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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해석--------댓글쓰기
아니 그런 황당한 소리를...
믿음이 선물이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 탓이 아니라 하느님 탓이 되지 않나요? 믿음이 주어져서 믿는 이라면 그 믿음이 무슨 상 받을 만한 일인가요?
아브라함도 "그가 믿으니" 이를 의로 여겼다고 성경엔 되있지 않던가요?
믿음이라는 칩을 머리에 꼽아주었다면 그는 당연 믿겠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받을 행위인가요? 쇠로된 로보트도 그런 "믿음 칩" 꼽아주면 아브라함보다 더 잘 믿을 텐데... 정말 황당하신 해석을 하시는 군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안던가요?
믿음이란건 스스로가 노력하고 궁구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니 그걸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 아닌가요?
만약 하나님이 선물로 믿음칩을 머리에 꼽아 주시는 것이라면, 당연 그 사람은 믿음을 가질 것인데,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까?
아니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믿음칩을 꼽아준 인간이 믿음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기뻐하실까요?
자신이 프로그램한 믿음 칩이 잘 작동하니까 기뻐하시나요? 헛참 입니다. 믿음 칩 못 받은 사람은 뭡니까? 그거 없으니 당연 못믿는 건데 뭐가 잘못됬나요? 믿음 없어도 그사람 책임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 하느님 책임이 지요...왜 그 믿음칩 안꼽아 주셨냐구요... 이렇게 항변하면 하느님도 할말 없는거 아닙니까?
그러니 위의 본문과 같은 멍청하고 생각 부족한 설명은 정말 황당한 것이고 정말 답답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그런 황당한 해석을 하는 것은 혹세무민과 무었이 다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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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주장은 성경이 거짓이란 말인가요?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성경은 거짓 증언이 아닌 진리입니다.

1.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 믿음의 성령의 열매이다.
3.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저자)이시다.
4.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이시다.
5. 믿음은 말씀을 통해 온다.

자, 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죠?
제가 보기에는 님의 머리나 마음이 황당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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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선물이란 구절은 위의 본문에서 인용되어 있습니다.
해석이 아닌 인용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해석이라고 하면 안되지요.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지요.
그럼,

the dust -------------
저도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을 쓰지 않았던 지나간 때에는 믿음(believe)과 믿음(faith)을 구분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더랬지요.
아마 황당한 해석님께서도 이 부분을 아직 깨닫지 못하셔서 그러신 듯 합니다.
believe와 faith는 엄연히 다르며 목사님 말씀대로
"Faith= believe (in/on) + words of God" 공식이 성립합니다.

황당한해석-----------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지요.
구원이란 것은,
죽은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요?
조그마한 믿음을 나타낸 것에 대해 엄청난 상, 즉 영생을 주시니 이야말로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고 사랑이 아닐가요?
어느 누가 그런 엄청난 것은 줄 수 있나요? 이 영생은 착한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이므로서 얻는 선물이라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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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선물이라면 구원의 근거가 되는 믿음도 선물이지요. 믿음이 선물이 아니라면 구원 역시 선물이 될 수 없지요. 지식이 부족하면 상식이라도 좀 가집시다.
하나님의 선물은 다양합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사랑은 최상의 선물입니다. 사랑이 선물인데 믿음은 선물이 아니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느 분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지 모르겠군요.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4:7).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인 줄 모르는 크리스천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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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수신 대상은?
질문.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쓴 글인가요?
답변. 유대인(믿지 않는 유대인)과 크리스천(믿는 유대인)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세대주의자들 가운데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유대인들만'(only for JEWS)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이며 신약의 이방인 크리스천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맞지만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믿는 유대인들은 이방인 크리스천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크리스천이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은 수신인, 즉 대상이 나와 있습니다.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하노라.]
사도 바울의 교회 서신서와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야고보는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믿는 자들로만 구성된 지역 교회가 대상이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구원받은 이방인 지역 교회를 대상으로 쓴 글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직접 자신의 발로 각 도시마다 널리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게 복음을 전했다면 야고보는 평생 예루살렘 교회에 있으면서 널리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서신(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1. 각 도시의 회당들(유대인-믿지 않는)
2.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유대인-믿는)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나니 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은 것 같이 너희도 너희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것들로 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 2:14).
당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회당들(불신자)은 전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지 않았습니다.
(갈 1:22) [그리스도 안에 있던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유대의 교회들, 예루살렘 외에도 유대인 교회들이 있었다!
야고보서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신자, 불신자 포함)에게 편지를 보낸 것인데 유대인 중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이든 믿지 않는 유대인이든 그들은 '조상들, 율법'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란 틀 안에서는 신자, 불신자가 모두 구분이 없이 다 유대인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 대상을 봅시다. 1:1-2절입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히 1:1-2).
조상들이 누구이고,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대상이 히브리인입니다. 히브리인들을 위한 구령 책자라고 보면 됩니다. 바울이 매주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러 설교를 할 때 그는 구약 성경을 펴서 그 글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말씀, 관습 등에 익숙하지 않는 이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책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들입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전도 설교를 한 유명한 내용은 사도행전 13장에 잘 나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거할 때에 그들을 높이시며 거기서 그들을 높으신 팔로 데리고 나오시고 광야에서 약 사십 년 동안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며...](행 13:17-41).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구약의 역사, 율법, 예언을 관통하는 장문의 설교를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시작과 거의 같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석 달 동안 유대인들에게 강론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말하며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들을 강론하고 설득하되](행 19:8).
결과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굳어져서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무리 앞에서 그 길을 비방하니(행 19:9).
우리는 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와 가르침, 강론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 회당에서는 구약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으므로 바울이 자기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 기록들을 인용하여 그들과 토론하며 설명하고 주장하여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났어야 한다 하고 또한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 하니](행 17:1-3).
3주에 걸쳐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구약 성경기록들을 인용하여 그들(유대인들)과 토론하며 설명하고 주장했습니다. 듣는 사람이 구약에 능한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전도 방식이 전혀 통하지도 먹히지도 않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십시오.
[그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불신자 이방인을 대상으로),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내가 지나다니며 너희가 섬기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글이 있는 제단을 발견하였나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행 17:22-23).
전도 대상에 따라 전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에 정통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글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믿는 이(크리스천)도 있고, 믿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믿는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쓴 서신이 아닙니다.
야보고서와 히브리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서신입니다. 예언적으로는 대환란 때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와 히브리서는 이방인 교회들이나 믿는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당대의 유대인 회당들(불신자가 주류이고, 신자가 소수),유대인 교회들(신자가 주류)에 전해진 서신입니다.
바울 서신이 이미 거듭난(믿는) 이방인 크리스천들(교회)을 대상으로 한 서신이라면 야고보서와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서신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은 *유대인 회당, 유대인 교회들 모두를 말합니다. 불신의 유대인들에게는 경고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확신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야고보서와 히브리서가 불신자 유대인과 믿는 유대인들 모두를 대상으로 한 서신입니다. 야고보서와 히브리서 속에 있는 불신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들을 거듭난 신약 교회 신자들에게 교리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모든 글들이 다 거듭난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 속에는 "불신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준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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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와 필레오
지난 주일에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Samuel Gipp 목사님의 '질문에 답하여'란 책 부록에 실린 글로 답변합니다.
간단한 대조표를 통해 '원어를 외치는 자들의 무지와 허무'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JOHN 21:15-17 - AGAPE vs PHILEO
I - Comparison: How Jesus used AGAPE and PHILEO.
A 1. Luke 11:42 the love of God
A 2. John 5:42 the love of God
P 3. Matt 10:37 He that loveth father or mother
A 4. Rev 3:9 to know that I have loved
P 5. Rev 3:19 As many as I love
P 6. Matt 23:6 love the uppermost rooms
P 7. John 12:25 He that loveth his life
A 8. Luke 11:43 ye love the uppermost seats
P 9. John 5:20 the Father loveth the Son
P 10. John 16:27 the Father Himself loveth you, because ye have loved me
하나님의 사랑에도 필레오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II-Comparison: How other New Testament writers used AGAPE and PHILEO.
P 1. II Tim 3:4 of pleasures more than of God
A 2. John 11:5 Jesus loved Martha
P 3. John 20:2 the other disciples whom Jesus loved
P 4. I Cor 16:22 If any man love not the Lord
A 5. Rom 5:8 But God commendeth his love
A 6. I Cor 16:24 My love be with you all
A 7. II Tim 1:7 of power, and of love, and...
P 8. Rom 12: 10 one to another with brotherly love
A 9. II Thes 3:12 abound in love one toward another
P 10. Titus 2:4 women to be sober, to love their husbands
A 11. Eph 5:28 So ought men to love their wives
A 12. I Peter 2:17 Love the brotherhood
P 13. Heb 13:1 Let brotherly love continue
P 14. Titus 3:4 and love of God our Saviour
A 15. I John 2:5 in him verily is the love of God perfected
아가페와 필레오가 구분 없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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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크리스천도 마귀 들릴 수 있는가요?
답변. 예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함을 우리가 아노니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매 저 사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하느니라.] (요일 5:18).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저 사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참으로 놀라운 주의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크리스천은 절대 마귀 들릴 수 없다는 근거 구절로 사용됩니다. 근본주의 진영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마귀는 구원 받은 사람을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데 어떻게 마귀에 들릴 수 있는가?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불신자만을 공격하고, 삼키려 하는 것입니까? 마귀의 공격 대상은 구원 받은 크리스천입니다. 마귀가 자신이 건드릴 수도 없는 사람을 향해 불화살을 날리고,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크리스천은 마귀와 대적해야 합니다(약4:7, 벧전5:9).
마귀는 성도들을 향해 불화살을 날립니다(엡6:16).
마귀가 크리스천을 건드리지도 못한다면 빛의 갑옷,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 교의 성도로서 구원 받은 크리스천이었지만 그 마음이 사탄으로 충만했습니다(행5:3).
디모데전서 3:6을 보면 [초신자는 아니 되나니 이것은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서 마귀의 정죄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딤전 3:6)고 말합니다. 초신자는 불신자가 아니라 분명히 구원받은 크리스천입니다. 마귀가 크리스천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밀까불듯이 갖고 놀 수도 있고, 정죄할 수도 있습니다.
초신자는 마귀의 정죄에 빠질 위험이 있다면 초신자가 아닌 교회의 감독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위대한 주의 사역자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감독은 반드시 밖에 있는 자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하리니 이것은 그가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딤전 3:7). 교회의 감독, 장로, 목사의 직분에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마귀의 올무에 빠지는 예는 허다합니다. 누군가 올무에 걸려 보았다면 꼼짝 달싹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마귀들릴 수 있습니다. 사역자들은 성령의 검인 말씀을 가지고 올무에 걸린 자들을 구출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부터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딤후 2:26).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바로 마귀 들린 자입니다. 크리스천들 중에는 마귀 들린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깨어 있으라.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요한일서5:18에 마귀가 건드리지 못한다고 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사람, 거듭난 속사람, 새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
pris
목사님 그런데 마귀의 공격이나 올무에 사로잡힌 것(taken captive)과 마귀가 그 사람 안에 내주하는 것(possed with, or wtih an unclean spirit or hast an unclean spirit)즉 보통 협의의 마귀 "들림"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나듯 마귀의 영이 사람 안에 들려 있으면 그냥 마귀에 사로잡혀 올무에 갇힌 마귀에 눌린 사람들과는 다른 특징 즉 마귀의 능력과 특성이 나타나는 특징이 보이는 경우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아는 것 (성경에서 마귀 들린 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것이나 혹 가정한다면 전혀 외국어를 배우지 못한 어떤 사람이 마귀 들린뒤 외국어를 구사한다거나..)
그리고 그사람의 인격이 아닌 다른 인격이 말하는 것들 말이죠. 그런 협의의 마귀들림, 즉 부정한 영이 사람의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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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보면 간단합니다.
성경에서 '마귀에게 사로잡혔다'(hath, possessed)는 말은 마귀 들렸다는 말입니다.
(막 3: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 하였기 때문이더라.]-마귀를 가졌다(hath)는 말입니다.
(눅 8:36) [그것을 본 자들도 마귀들에게 사로잡혔던 자가 어떤 방법으로 고침을 받았는지 그들에게 말하더라.] *possessed
포로로 사로잡힌 것은 약간 의미가 다르지 않는가? 그런 질문인 듯합니다. *captive.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습니다. "삼킬 자"-정복을 말합니다. 실제적인 예로 아나나이와 삽비라는 그 마음에 "사탄"이 가득했습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딤전1:20).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마귀들린 자를 말합니다. 성령이 그러하듯이 마귀 역시 '영'이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마귀가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마귀들림으로 인한 질병, 방언, 예언, 환상, 체험 등을 할 수 없겠지요.

내주하는 마귀
http://av1611.net/399

그럼,

pris -------------
예전에 잠언 16장 2절 말씀을 보고 생각했던게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깨끗하나 주께서는 영(靈)들을 다시느니라.
All the ways of a man are clean in his own eyes; but the LORD weigheth the spirits.
한 사람(a man)의 여러 길들에서 여러 영들이(the spirits) 관여한다면 부정한 영들이 관여하는 일들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었죠. 저는 마귀들림이 다 같은 종류가 아니기에 이들을 세분해서 말해야 하지 않나 생각되는 것이 성도 간에 의사소통할 때 서로 오해할 수도 있고 또 각기 마귀의 영향을 받는 것에 따라 대처방법이 달라보여서요. 흔하게들 "마귀들렸다"라고 말할 때는 그 의미가 그리스도인이라도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거나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히는 실제로 비일비재한 상태가 가능한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에 나오는 "마귀들림"같은 possessed된 마귀들림이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한가하는 질문아닌가 해서 말이죠.
한 10년 전 연세대 정신과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서 넓은 의미의 마귀들림을 세가지로 세분해서 설명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지요.
그중 가장 심한 상태의 마귀들림은 possessed 나 hath로 표현된 경우로 마귀 들린 사람의 인격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또 다른 어떤 악한 영이 동시에 상주하는 경우로
사람의 몸을 좌지우지하면서 괴롭히기도 하고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닌 마귀의 놀라운 능력들을 나타내 보이는데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그 악하고 부정한 영에게 직접 명령을 하여 마귀가 나가게 하잖아요. 이럴 때 '축사'라고 하겠죠.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마귀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기에 "마귀 들림'이라고 하겠지만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possessed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귀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상태로 이런 경우 회개나 징계가 필요하지 '축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듯이 말이죠.
아마도 이런 두번째 종류의 마귀들림을 연세대강의에서 구분은 "oppressed"로 했는데 이 영어 단어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신자라면 사탄을 숭배하는 사람들같은 경우와 마약 도박중독등의 경우로 설명을 했던 것 같고 세번째의 구분의 경우는 예수님의 십자가 행을 반대하는 베드로의 상태 같은 경우로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잠언 16장 2절에 해당하거나 또는 속아서 방언을 하거나 성령체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딤후 2:26같은 경우도요.
그래서 질문자가 만약 첫번째의 가장 협의의 "마귀들림"에 대해서 물을 때 딤후 2:25절처럼 온유함으로 일깨워서 회개하게 해야하는 '마귀의 포로로 사로잡힘'과는 좀 구별을 하고 싶어서요.
또 연세대 세미나의 주된 목적은 아마도 일반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정신병(미친증세가 있는 자)을 마귀들린자로 생각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환자를 기도원등에서 축사한다며 환자를 잡는 불상사를 바로잡기위한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 4:24, 킹흠정) 그분의 명성이 온 시리아에 두루 퍼지니라. 그들이 모든 병든 사람 곧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사로잡혀 앓는 자, 마귀 들린 자(those which were possessed with devils), 미친 증세가 있는 자( those which were lunatick), 마비 병 환자들을 그분께 데려오니 그분께서 그들을 고치시매 위 말씀처럼 마귀들린자와 미친 증세가 있는 자가 같을 수도 있겠지만 따로 있는 것이기에 말이죠.
실제로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 어떤 청년이 심한 조울증이 있는데 그 청년을 위해 목사님이 저녁에 특별기도회를 한다고 하니 대번에 성도들이 "오늘 목사님이 마귀를 쫓아낸데.."라고 오해를 하기도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개역이나 NIV는 미친증세가 있는 자를 간질하는 자로 바꿔버렸는데 연세대 정신과 선생님들은 그 당시 KJV를 보았네요^^.
그 강의에서 그러면 왜 이시대에서는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처럼 마귀에 possessed 된 경우들이 흔하지 않을까라는 것에 대답도 있었는데 골로새서 2장 15절 말씀으로 추정을 하시더군요.
마귀들림을 일으키는 부정한 영들과 정사와 권능들이 어떻게 상관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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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들렸다는 개념 또는 현상을 아주 좁게 '광기적인 행동이나 비정상적인 신체적 이상 증세'로 생각하거나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5장이나 9장에 나오는 그런 예들이 지금 크리스천에게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런 각도에서 보신 듯합니다.
마귀들렸다는 것은 마귀적인 생각, 행동을 하는 것까지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오순절, 은사주의 교회 내에는 마귀들린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자신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귀들이 들린 실제적인 예이죠.
교회 내에서 마귀들을 불러들이고, 충만케 하는 일은 매우 흔합니다. 입신, 방언, 환상, 이상한 말을 듣는 것. 등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posession까지 갑니다. 소위 말하는 '기도원'에 가보면 마귀들린 자들이 너무 많지요.
*마귀들림과 미친 증세(정신병)은 엄연히 구분해야 합니다. 증상이 비슷하다고 해도 원인이 완전히 다르지요.
제가 아는 크리스천 중에 계속 편두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꾸준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가 '마귀들린 것'에 대해 말하자 상당히 당혹해 하는데 결국 반신반의하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법을 말해 주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권면했는데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면서 깨끗이 나음 받은 일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마귀들렸다, 자신 안에 마귀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수치나 모독으로 여기고, 아예 가능성 자체를 배제함으로써 마귀를 대적하거나 싸우지 못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목회자들 역시 성도들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기도합시다.' 정도로만 응답하는 예가 많습니다.

* 마귀들림을 통해 심신미약(의지력 상실)이 된 경우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우울중, 그러다 자살로 이어지는 순환고리가 있습니다. 분명히 크리스천이 맞는데 마귀의 정죄, 올무에 빠져서 대인기피, 심신미약의 증세를 보이다 어느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 예도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 마귀에게 사로잡힘(마귀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제가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이듯 마귀는 오류의 영입니다. 오류의 영에 이끌리고 인도 받는 것 역시 마귀들린 것입니다. 이런 마귀는 신학교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지요.
*크리스천도 마귀들릴 수 있는가? 이렇게 물어 보면 간단하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분명히 크리스천이라면 마귀들릴 가능성이 적거나 거의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전혀 가능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Neither give place to the devil.](엡4:27)고 말합니다. 여기서 '틈'이 바로 "장소"(place)입니다. 마귀가 거할 공간, 장소를 내어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 속에 들어와 거할 틈(장소)를 노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정복되면 그(정복한 자)의 노예가 되느니라.](벧후2:19). 크리스천이 이런 저런 이유로 마귀에게 정복(장소를 내어 주고 점령당하는 것) 당하고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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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에 possessed 된 경우 말고도 많은 정신과적 육체적 질병들이 마귀의 영향으로 올텐데 possessed된 경우가 아닌 다른 질병들의 경우엔 어떻게 마귀를 대적해서 병이 떠나가게 할 수 있는지 그리스도인이자 의사로서 더욱 궁금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마귀적인 생각이나 명령에 regist하는 것인데 이것을 병에 대해서는 어떤식으로 대적해야 하는지 목사님의 편두통 환자의 경우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편두통을 일으키는 마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라는 명령도 포함되나요? 복음서 등에 나오는 마귀에 possessed된 경우는 불신자나 신자나 누구나 봐도 마귀들렸다는 진단이 쉽지만 편두통처럼 어떤 육체적 증상으로 오는 경우엔 어떤식으로 쉽게 진단을 할 수 있는지부터가 어렵군요.
비성경적인 생각이나 마귀들의 교리에 속고 있는 것은 진단이 쉽고 뭐 방언이니 입신 환상 이런 것들은 오히려 성경적으로 대처하기가 어렵지가 않은데 (딤후 2:26처럼) 아니 답을 알기에 고민이 안되는데^^.
우울증이나 망상등 정신과적인 병들과, 정신과적 질환까지는 아니더라도 타고난 성격 기질 등으로 해서 더 더욱 어떤 마귀적인 생각들 마귀의 올무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또 육체적인 증상들을 보이는 편두통처럼 물리적인 의학적 진단방법이 없이 증상만으로 진단을 내리는 병들의 경우 다 마귀들렸다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성경적 진단을 해야 하는지 실제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마귀를 대적하는 매뉴얼이 있다면 일단 처음에 마귀를 내쫓는 것을 행해보고 효과가 없으면 의사의 치료를 받게 보낸다 뭐 이런식의 처방이 가능할까요?
가족중에 평소 피해의식이 있는 성격으로 어느날 남편의 외도를 경험한 뒤 의부증이라는 망상까지 발전한 분이 있었습니다. 나름 환자분께 이성적으로 설명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는데 정신과에서 약물치료를 시작하니 너무 깨끗이 좋아지더군요.
심신 미약한 우울증등도 정말 그 자살이 분명 마귀의 사로잡힘에 의한 것으로 저도 생각하기에 그 연약한 사람의 상태와 무관하게 쉽게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칠 수 있기를 원해봅니다. 그동안 나름 혼자 이리저리 많은 고민을 하다 전도서 2:17 말씀으로 위안을 받고 그냥 살고 있었죠^^
전도서 2:17 또 내가 지혜를 알기 위해, 미친 것과 어리석은 것도 알기 위해 내 마음을 주었으나 이것도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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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경우에 의사에게 가야할 환자가 교회나 기도원으로 가거나 기도와 금식에 전념하고 장로들에게 믿음의 기도를 부탁해야 할 일을 병원과 약만 닭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의사로서는 매우 간단합니다. 찾아오는 환자를 두 가지 모두의 경우를 상정해서 약을 처방하고 동시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미국의 크리스천 의사들을 인터뷰한 생생한 간증들이 적힌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천 의사들 중에 자신의 환자를 돌볼 때 두 가지 경우를 다 상정해서 치료와 동시에 기도하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고, 마귀를 물리치는 일을 함께 수행하면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대할 때 당연히 병원으로 가서 진단받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치유를 받도록 권고하며, 동시에 마귀를 물러가도록 하는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사역하면서 그런 경우를 몇 차례 경험했습니다. 마귀의 존재와 마귀 들림을 인정하고 주님께 긍휼을 구하며 도움을 구하고, 마귀를 대적함으로 간단히 나은 예가 많습니다. 이것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신유'와는 전혀 다른 성경적 치유입니다.
병의 치유는 믿음의 기도로, 마귀의 올무에서 풀어주는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가능합니다. 병자에게 의사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의사로서 이 점을 생각하면서 치료에 임하면 회복률이 훨씬 더 많을 것임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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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감사합니다. 결론은 항상 간단한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던 것인데 완전히 의식적 습관적으로 진리가 몸에 배게 하기 위해 다시 정리 및 질문을 하겠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은 다 넓은 의미의 마귀들림(엡2:2)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리스도인들도 수시로 마귀에게 틈을 주고 말씀의 칼로 바르게 대적하지 못하는데 말이죠.
성도가 하나님을 항상 인식하고 성령충만하게 사는 것 못지않게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항상 정글에 있는 것처럼 울부짖는 사자가 덤빌 가능성을 미리 조심해야 하듯 항상 깨어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도(마귀의 역사들) 인식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의 마귀에 possession된 경우는 항상 그 마귀의 인격이 드러나 직접 그 마귀의 영에게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갈 것을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질병의 형태로 나타난 그 개별 인격이 드러나지 않는 마귀들림의 경우엔 겉으로 마귀들림인지 명백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의사이든 목회자이든 두가지 가능성을 다 생각해서 치료를 해보아야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질병에 대한 성경적인 대처인 야고보서 말씀들대로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사실 제일 궁금한 것은 단지 질병으로만 드러나고 마귀가 인격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 경우 우리는 확실히 마귀들림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는데 그 상황에서 기도가 아닌 마귀를 대적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그 있을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을 악한 영에게 " 악한 영이 있다면 물러가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막9:29의 마귀에 possession된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영에게 직접 꾸짖어 쫓아주셔놓고는 이런 종류는 "내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령하라"라고 하는 대신 "오직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다" 하셨군요.
말씀과 기도 금식 말고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치는 다른 방법이(그 영에게 명령하는 것등)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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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기 전 우리는 모두 마귀의 자녀들(요8:44, 요일3:10)이었습니다. 진노의 자녀, 불순종의 자녀, 공중 권세 잡은 통치자(마귀)를 따랐고, 그들 안에 활동하는 영을 따랐습니다. *the spirit that now worketh *in* the children of disobedience)-among이 아니고 in입니다.-엡2:2. 세상 사람들 안에는 마귀의 영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은 성도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6장이 영적 전투를 다루는데 마귀의 실체, 정체, 간계, 속임수, 올무 등을 모르면 아주 위험한 상태입니다.
약4:7, 벧전5:8에 "마귀를 대적하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에게" 명령했습니다.-헹16:18.
대적하라. Resist입니다. 저항하는 것이죠. 말씀을 가지고 믿음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이나 음란한 생각, 탐욕과 같은 마음과 정신 뿐만 아니라 편두통이나 우울증이나 조울증이나 양극성 장애나 뭐든지 주의 말씀을 가지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대적하면 마귀는 도망갑니다(약4:7).
믿음이 이깁니다.
앞으로 환자를 대할 때나 상담할 때나 전도를 할 때나 심지어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그들 안에 마귀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명령)하십시오. 대신 내 안에는 성령님이 강력하게 임하시고 일하시도록 구하십시오. 놀랍도록 분명한 차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론이 신학 이론이 아닌 현실의 삶 속에서 치열한 크리스천의 영적 전쟁임을 체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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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보증 또는 상실에 대해 묻습니다.
질문: 구원 받은 성도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까?
답변: 없습니다. 성도의 구원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귀, 죄, 사람, 천사들,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증과 안전에 대한 교리는 대부분의 교회, 교파들에서 부정하는 성경적 진리입니다. 안식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성결교, 정통 유대교, 메시아닉 유대교, 로마 캐톨릭, 감리교 등 주요 교단, 교파들이 한 결 같이 구원의 보증에 대한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구약적 교리나 대환란 교리를 신약 성도에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은 구원의 영원한 보증과 안전을 부인합니다.

구원의 보증에 대해 자주 듣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서 정리합니다.

구원 받은 후 내가 어떤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이는 흔히 하는 질문이면서도 매우 심각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후에도 구원을 잃을까봐 불안해한다면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닌 마귀의 역사입니다. 자살을 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가? 살인과 간음을 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 성경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므로 행위로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딛3:5).
구원은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2:8,9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8-9).
어떤 죄가 우리의 구원을 빼앗을 수 있다면 구원을 능히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어떤 위대한 인물도 죄를 짓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지만 쉽게 죄에 무너졌습니다.
노아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의인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구약의 3대 의인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죄를 지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는 출애굽의 영웅들이며, 믿음의 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죄를 지었습니다. 삼손은 정말 죄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의 영웅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롯입니다. 그는 어떤 믿음의 본도 보여 주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년은 술에 취해 두 딸 사이에 자식을 낳았지만 신약에서 그는 “의로운 롯”이라고 불립니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후 죄를 지었고, 외식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원 받은 후 크게 다투고 싸웠습니다. 바울은 구원 받은 후 직접적인 하나님의 뜻을 고의로 세 번이나 거역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들을 허다하게 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인 죄로 즉사(卽死)했지만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혹자는 이들이 지옥에 간 것으로 판단하고 싶어 합니다. 크리스천이 고의로 땅 값 일부를 속인 죄로 지옥에 간다면 고의로 외식한 자, 위선, 거짓말 한 자들은 다 지옥행일 것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구원받은 형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나 교회사에서나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주위 환경을 통해서도 구원은 절대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23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의 행위에 따른 보상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하나님의 의(義)를 충족시켰으며, 죄 값을 다 지불했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롬5:18).
여기서도 선물이 주어지는 이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의 의(義),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 말미암아 값없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 선물을 거부하지 않는 한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값없이 주신 선물을 어떤 이유로 빼앗아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조건(삯)이지 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점진적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이 아닙니까? 어떻게 단숨에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구원은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지 과정이 아닙니다. 성장과 성숙은 과정이지만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이는 모태에서의 육신적 출생과 마찬가지로 영적 출생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바로 일어납니다. 구원을 완수해 나가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이유는 변개된 성경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 너희가 {주}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흠정역 성경. as a newborn babe.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3) 개역 성경. like a newborn babe "새로 태어난 아기들처럼(같이)"-태어난 아기가 아니다.
변개된 성경은 구령의 원수이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악한 씨를 뿌립니다. 또 다른 구절은 빌립보서2: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work out your own salvation). 너희 안에서 일하사 (For it is God which worketh in you)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일하여 드러내라(work out)는 말은 내 안에 이루어진 구원을 “표출하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영적 생명의 출생이며, 새로운 탄생입니다(요3:3, 벧전1:23).
거듭난 자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단절되거나 파기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요일3:2).
[너희가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힘입어, 아바, 아버지, 라 부르짖느니라](롬8:15).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계성, 친함이 멀어 질 수 있고, 껄끄러워 질 수 있습니다. 이는 친교의 문제이지(fellowship), 관계성(relationship)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것도, 누구도 아들이란 사실을 부인하거나 바꿀 수 없듯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변할 수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政事)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우리를 능히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할 것임이니라.](롬8:38-39).
사망-타살이든 자살이든. 천사들-마귀의 천사들, 정사들이나 권능들-타락한 영들, 이단 종교들, 정치권력이나 그 무엇(누구)도 구원을 빼앗을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점을 분명하게 확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2중 잠금 장치로 철저히 지키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마귀, 죄, 나 자신 등 그 누구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요10:28-30).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서 구원을 빼앗을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될 것입니다. 마귀나 죄나 나 자신도 하나님 보다 크거나 강하지 않습니다.

마귀나 다른 어떤 것이 우리의 구원을 빼앗을 수 없다면 나 자신이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나요? 예를 들어 자살을 하든지, 성령님을 모독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래도 구원은 안전합니다. 마귀를 비롯한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있는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듯이 나 스스로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올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3:5).
하나님께서는 "결코(NEVER)"라고 말하심으로 어떤 경우에도 구원은 상실되거나 잃을 수 없음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주님은 “결코...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in no wise)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일단 예수님께 나아 왔다면 주님은 자살이든 신성모독이든 어떤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이유를 들어 나를 쫓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IN NO WISE(결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살이든 살인이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동일합니다. 이는 죽이는 대상이 남이냐? 자신이냐? 뿐입니다. 자살은 지옥행! 이란 교리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일 뿐입니다. 마가복음 3:28-29은 초신자들이 매우 어려워하는 구절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의 아들들의 모든 죄와 그들이 범하는 신성 모독은 다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벌(永罰)의 위험에 처하게 되느니라, 하시니](막3:28,29).
이 구절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 이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마귀들렸다고 배척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시는 이적들을 현장에서 듣고 보면서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고 말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마귀의 사역이라고 말하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으며,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면 현재 이 지상에서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현장에서 보고,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일서에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요한일서 5:16,17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짓는 것을 보거든 간구할 것이요, 그러면 그분께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들로 인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나니 이로 인하여는 그가 기도하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느니라.](요일5:16,17).
사망에 이르는 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망은 육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 그대로의 죽음이지, 의미를 확대해석해서 지옥이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사망은 지옥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다가 죽기도 하고, 병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육신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끊으실 것입니다(롬8:13). 바울 사도는 성도들 가운데 몇 명은 사탄에게 넘겨 그 몸을 멸하도록(사망)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가 같이 모일 때에 내 영도 함께 있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체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4-5).
이는 모두 육체의 죽음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구원받은 성도의 몸을 병들게 할 수 있고, 죽일 수도 있지만 혼과 영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구원을 잃어버릴 것 같은 구절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구절들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는 성경에서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책입니다. 마태복음은 교회가 아직 태동하기 전인 구약적인 상황을 다루면서 신약 성경을 열고 있습니다(구약과 신약의 과도기). 사도행전은 교회가 막 태동할 무렵 유대교에서 이방인들을 포함한 기독교로의 전환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은 사도행전 10장에서, 그 교리가 확정된 것은 사도행전 15장에서입니다(유대교와 기독교의 과도기). 히브리서는 교회 시대에서 환란 시대를 접어드는 과도기적 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바울 서신서의 교리와 일치할 때 우리의 교리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 시대의 교리가 아닌 환란 시대의 교리입니다. 예를 들어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마24:13).
여기서 끝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환란의 끝입니다.
[형제들아, 혹시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IN DEPARTING) 자가 하나라도 있지 아니할까 조심하라.](히3:13).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 나가면(falling away)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히6:4-6).
이 구절들은 현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뼈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肢體)이기 때문이라.](엡5:30).
주님과의 유기체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구절들은 모두 대환란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시대의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은 너무나 확실하며, 절대 변경되거나 떨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의 어떤 뼈가 “나는 몸에서 떨어져 나가야겠다.”하고 스스로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제(지금-NOW)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다 지체라.](고전12:27).
우리는 주님과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 조직체가 아니라 생명의 관계요, 유기체입니다.
만약 처음에는 믿었다가 나중에는 믿지 않는다든가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해 버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설마 이런 사람마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불교로 개종하여 승려가 된 예도 있습니다. 선교단체의 신실하고 열심 있는 형제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통일교로 빠져 든 예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면, 후에 이를 번복한다 해도 주님은 그의 구원을 번복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딤후2:13). 믿지 아니하여도...정말 엄청난 말씀입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증, 안전은 우리가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보증하시고, 성령께서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참된 자유와 평강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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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믿지만 구원 받지 못하는 자?

질문: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들 중에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까?
답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한 가지는 마태복음 7:21-23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에 여러 사람에게 이 부분에 대한 동일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행15:1-5). 할례를 받지 않는 자,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유행했던 믿는 유대인들의 거짓 교리요, 이단들인데 오늘날도 메시아닉 유대교란 이름으로 여전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칭 유대인들은 율법준수를 주장하지만 율법을 통한 구원은 워낙 말이 되지 않는 것임을 알기에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거나, 받은 구원을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기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대표적인 근거 구절로 마태복음 7:21-23, 히브리서 6:4-6절 등을 자주 사용합니다.
자, 말씀을 봅시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마 12:50)
이 구절들은 행위 구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음+행위"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사람들의 견해를 제쳐두고 일단 성경을 펴 봅시다. (막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던 자들이 외쳐 이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던 무리들이 바로 전 날에는 예수님을 주여,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행하시는 권능, 표적, 이적, 기적들을 몸소 보고 체험하면서 그분을 "주여,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 "주여, 주여"라고 불렀지만 그들은 결코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 6: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
(요 6:40) [나를 보내신 분(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 것이니라.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아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적,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볼 때 그 분을 '주여, 주여'라고 불렀지만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예수님을 향해서는 아무도 "주여, 주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도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 다 떠났습니다(요6:67,68). 채찍에 맞으시고, 머리에 가시 채를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이는 아무런 행위 없이도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 편강도의 “주여”가 진짜 “주여”입니다.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율법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창기들, 세리들을 보십시오.
[그 둘 중에 누가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첫째 아들이라,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마 21:31)
세리들과 창녀들이 행한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것입니다. 세리들이나 창녀들이라고 해서 바리새인들과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행한 '아버지의 뜻'은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은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면 아버지의 뜻을 행한 자이므로 아무런 율법의 행위 없이 누구나 "주여, 주여"하는 것으로 충분히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2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마귀를 쫓아 낼 수 있습니까?
[요한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는데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나이다.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그를 막았나이다, 하거늘](막 9:38)
이 구절은 사도들 외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런 능력을 행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일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과시하고 자랑합니다. 은사주의, 오순절 계통의 많은 사역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주술사로 양성 받는 사제들, 훈련받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점치는 영을 받은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외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 7:23)
주님은 주여, 주여, 라고 외쳤지만 결코 복음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 기독교란 종교를 가졌던 사람들을 향해 "내가 결코 너희를 알지 못하였노라"(과거 시제)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때는 알았다가 지금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한 때는 구원을 받았다가 구원에서 떨어진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아예 구원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오해해서 구원 받은 후에 행위(선한 행위, 율법 준수 등)가 없어서 구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주장대로, 믿고 싶은 대로 읽지 말고, 기록된 대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신자들도 주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표적과 이적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참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불신자들 안에도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도 주님의 능력을 직접 듣고 보고 맛보고 체험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질환과 질병 들린 사람들을 다 고치신 예가 많습니다(마12:15, 눅4:40, 9:6). 마귀 들린 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온 이스라엘에 보내 동일한 사역을 하셨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일, 능력, 표적을 보고 믿으라고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군중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배 불리 먹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불치의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하나님의 왕국=성령 안에서 의, 기쁨, 평강.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으로 믿고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주님께 직접 또는 사도들을 통해 병을 고침 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귀들이 쫓겨났지만 여전히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속에는 하나님의 왕국,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 임했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병이 낫고, 눈을 뜨고, 마귀가 쫓겨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은 눈을 뜬 후 주님을 만나 "내가 그 분을 믿고자 하나이다.....내가 믿나이다."란 고백을 한 후에 비로소 구원 받았습니다. 문둥병자 10명은 모두 병을 고침 받았지만 여전히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병이 나은 것에만 만족하고 그만입니다.

이들이 바로 히브리서 6:4-6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히6:4-6).
이 말씀은 결코 구원 받은 크리스천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한 번 빛을 받은 것이 아니라 빛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으며 이미 빛의 자녀들입니다. 히브리서 6:4-6절은 오늘날 구원 받은 크리스천에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표적과 권능을 체험한 유대인들이 그분을 고의적으로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떨어져 나가면"(falling away)란 말씀은 나무에서 가지가 잘려져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인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주여, 주여, 라고 외치다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함으로써 잘려버린 것을 말합니다. 올리브 나무의 비유(롬11)는 이 상황을 완벽하게 보여 줍니다. 대환란 때 지상에는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고 체험하면서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법입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몸과 살과 뼈에 속한 지체들"로서 떨어져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고전 12:27)
[우리는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들이니라.](엡 5:30)
구원 받아 주님의 몸의 일부가 된 크리스천이 어떤 이유로 떨어져 나가 버리면 예수님은 온 몸이 불구요, 반신불수가 된 중증 장애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 히브리서 6:4-6절은 많은 이들이 대상과 세대를 정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오늘날 교회에 적용함으로 자주 오류를 범하는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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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언제입니까?

질문. 예수님은 언제 부활했습니까?
답변. 주의 첫날입니다. *early the first day of the week.

예수님 죽으심과 부활을 계산하는 이들 중에 예수님의 부활한 날은 토요일 즉 안식일이란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수요일에 돌아가셨다면 3일 밤, 3일 낮 동안 땅의 심장부에 계셨다가 안식일에 부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안식일 준수를 주장하는 이들(안식교나 메시아닉 일부) 중에 안식일에 부활했다는 헛된 말을 하는 이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이들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계산이나 주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주의 첫날에 일찍 일어나신 뒤에 전에 친히 몸속에서 일곱 마귀를 내쫓아 주신 마리아 막달라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시니라.](막 16:9) 주의 첫날에.
성경은 명백하게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글자만 읽을 줄 알면 됩니다. 이는 전혀 논란이나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은 주의 첫날에 일어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무덤으로 온다 해도 아무도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없었고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에 주님은 무덤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이들은 무덤에 묻힌 주님을 찾아 가야 하지만 주의 첫날에 주님께 나아오는 이들은 주님께서 그를 만나러 오십니다.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마리아 막달라와 다른 마리아가 돌무덤을 보러 갔는데](마 28:1)
이 말씀은 안식일(율법, 구약, 유대교)이 끝나고 주의 첫날(복음, 신약, 그리스도)이 밝아 오는 역사적 순간을 문학적로 묘사하는 위대한 성경 구절입니다. 아직도 안식일이 끝나지 않아서 여전히 어둠 속에 거하며, 주의 첫날이 밝아 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밤이 끝나야 아침 해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 올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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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전입니까? 후입니까?
질문: 여자들이 향품과 기름을 산 것은 안식일 전입니까? 후입니까?
답변: 안식일 전입니다.
누가복음 23:54-56절을 보십시오.
[그 날은 예비일이며 안식일이 다가오더라. 갈릴리에서부터 그분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를 따라가서 그 돌무덤과 그분의 몸을 어떻게 두었는지 보고 돌아가서 향품과 기름을 예비한 뒤 명령에 따라 안식일에 안식하더라.](눅23:54-56).
-여자들이 안식일 전에 향품, 기름을 예비했습니다.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마리아 막달라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그분께 기름을 바르려고 이미 향품을 사 두었더라.](막16:1). *And when the sabbath was past,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alome, had bought sweet spices, that they might come and anoint him.(막16:1).
-여자들이 향품을 산 시점은 안식일이 지나서가 아니라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had bought) 것을 가지고 주님의 무덤을 간 것입니다.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향품을 사더라(샀더라)" 고 성경을 고쳐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 역시 안식일 전에 여자들이 향품을 샀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안식일이 지나서 산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지난 것은 과거형이고 향품을 산 것은 과거 완료형(과거 이전 시제)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 전에 물품을 사두었다가 주의 첫날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막16:2).
흔히 두 개의 안식일을 설명할 때 누가복음에서는 여자들이 안식일 전에 향품을 샀고,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서 향품을 예비했다고 설명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6:1에서 앞부분인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라고만 읽었지 산 시점이 안식일 전(had bought)임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달리 대부분의 역본은 안식일 이후에 샀다고 말합니다.
안식일(安息日)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爲)하여 향품(香品)을 사다 두었다가 (개역)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개정)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공동)
<예수께서 부활하시다> 안식일이 지나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표준)
다음날 저녁,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나가서 시체에 바르는 향료를 샀다. (현대어)
안식일이 끝난 저녁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료를 사 두었다. (현대인)
변개된 성경 역본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한글 킹제임스 성경까지 그대로 이들 역본을 따라 갔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후,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살로메가 좋은 향료를 샀으니 이는 주께 와서 붓고자 함이더라. (한킹)
이와 달리 킹제임스 성경과 흠정역은 정확히 번역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마리아 막달라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그분께 기름을 바르려고 이미 향품을 사 두었더라. (흠정역)
And when the sabbath was past,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alome, had bought sweet spices, that they might come and anoint him. (KJVI)

율법에는 유월절과 초실절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명절 안식일은 본래 무교절의 첫날 즉 15일입니다.
정리하면
3월 14일 저녁이 유월절 밤이고,
3월 15일이 무교절 첫 날로 명절 안식일입니다(레23:7).
3월 16일은 매주 안식일입니다.
3월 17일은 주의 첫날이며 초실절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월절을 무교절 명절 속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유월절을 무교절 첫날로 삼아 '큰 날'로 불렀고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하자면 큰 날은 3월 15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유월절을 무교절 속에 포함시켜서 유월절을 무교절의 첫 날이요, 큰 날인 안식일로 지킨 예가 복음서마다 나옵니다. 유월절을 무교절의 첫 날로 실행한 예들을 공관 복음 전체에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17, 막14:1, 눅22:1). 그래서 레위기에 따라 3월 15일이 아닌 유월절인 14일이 큰 날로서의 안식일이 되고, 3월 15일은 무교절의 첫날입니다. 이 날은 아무 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율법에 명하고 있습니다.
3월 16일은 매주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이 끝난 주의 첫날(초실절)에 무덤에 갔다가 이미 잠든 자들의 첫 열매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신 주의 첫날은 초실절입니다. 초실절은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날은 이미 확증되어 있는 고로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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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로 죄를 지으면?
질문. 구원 받을 수 없는 죄가 존재합니까?
답변.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사람이 짓는 모든 죄, 불법, 불의, 허물, 범법은 다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피가 씻지 못하는 죄, 제거하지 못하는 죄란 없습니다. 사람이 정죄 받아 지옥으로 가는 것은 간음, 살인, 불효, 도둑질, 신성모독, 탐심 등의 죄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의 죄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히 6:4-6).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히 10:2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맛본 자들이...." - 발람이 그런 사람에 해당합니다. 그는 성령 충만을 경험한 이방인 대언자였습니다. 발람은 빛을 받았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았습니다. 주의 영이 임해서 성령님께 참여한 자였습니다. 주의 천사를 대면해서 보았고, 전능자의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보았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공생애 당시에는 이런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주님을 저주하며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는 주를 못 박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성령의 임재를 눈으로 보면서, 표적과 증거를 보면서도 주를 부인하고 복음을 배척한 자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성령, 말씀, 능력, 표적, 증거 등이 수두룩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믿기 싫어했고,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히브리서 6:4-6, 10:26절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6:4-6절은 과거의 그런 유대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예언적으로 대환란 때는 더 많은 표적들이 행해질 것입니다. 천사들이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런 때에 말씀과 성령을 충분히 체험하면서도 주를 부인하는 자들은 구원 받지 못합니다. 이미 구원 받은 크리스천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26은 복음을 알고 이해하면서도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들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이지 구원 받은 성도들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할 희생물은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이 오실 떄까지, 자신이 죽을 때까지 회개하고 구원 받을 기회는 열려 있습니다.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무지로 인해 죄를 짓든, 고의로 죄를 짓든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고의로 죄를 지었습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고의로 아버지를 속이는 죄를 지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고의로 요셉을 죽이려 했고 팔았습니다.
유다나 르우벤은 고의로 죄를 지었습니다.
모세는 고의로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여러 차례 고의로 죄를 지었습니다. 무지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의로 죄를 지었습니다.
탕자는 고의로 죄를 지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아비의 아내를 취한 패륜아도 있었는데 '모르고, 우연히, 실수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누구나 다 아는 '고의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이 구절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패륜아가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죄를 지었다며 적극적으로 패륜아의 죄를 변호하기도 합니다. 크리스천이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죄인 줄 몰랐다고요?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도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며, 다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보증을 부인하고 싶은 이들은 패륜아의 '구원'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너무 놀란 나머지 '패륜아'는 무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있었다는 식으로 자기의 무지와 완악함을 슬쩍 변명합니다. 이들의 뻔뻔함은 도를 넘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로 누구도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죄의 권능이 결코 주님의 권능보다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생명은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소유입니다. 누가 그것을 빼앗거나 스스로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파선한 자들, 믿음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느니라.](딤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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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더 낮은 부분이란?
질문. 에베소서 4:9에 나오는 "땅의 더 낮은 부분"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변. 지하의 지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엡 4:8-9).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고, 땅에서 사역을 마치신 주님께서는 땅의 더 낮은 부분인 지옥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슬쩍 왜곡해서 '땅의 더 낮은 부분'이란 무덤 정도로 여기거나 그냥 이 땅(지구)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성경 주석이나 해설 성경을 보면 쉽게 이런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성경 신자들은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읽고 이해합니다.
1.위로 올라가는 것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2. 땅의 더 낮은 부분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땅의 더 낮은 부분"입니다. 지구는 땅이지 땅의 더 낮은 부분이 아닙니다.
3.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란 부분에서 "descended...into the lower parts..." 말합니다. "땅의 더 낮은 부분 속으로"란 말입니다. 이는 지하의 지옥을 말합니다.
4. 주님께서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 간 분명한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려가지 않으셨다면 지하 낙원(아브라함의 품)에 있던 혼들은 여전히 지금도 지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하늘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5.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이 땅에 살아 있는 어떤 사람들을 저 하늘로 사로잡아 이끌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에베소서 4:9의 말씀에서 "땅의 더 낮은 부분"은 지하의 지옥이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불신에 가득 찬 기독교인들, 하나님의 말씀을 뜯어 고치려는 성경 변개자들이 아니라면 기록된 대로 읽고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지옥으로 간 사실은 다음 말씀들을 통해 확증됩니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 12:40).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행2:27).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느니라.](행2:31).
[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벧전3:19).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분의 혼이 지옥에 갔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몸은 요셉의 돌무덤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분의 혼은 지옥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혼들을 이끌어 올리셨습니다.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대부분의 한글 성경 역본들은 "땅의 더 낮은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현대 영어 역본들은 번역이 아닌 자신들의 해석을 번역인 것처럼 속이고 있습니다.
(What does "he ascended" mean except that he also descended to the lower, earthly regions? (NIV)
Notice that it says "he ascended." This means that Christ first came down to the lowly world in which we live. (NLT)
Now the expression "he ascended," what does it mean but that he also descended into the lower regions, that is, the earth? (NWT) - 여호와 증인들의 성경.

오늘날 크리스천들 중에는 번역과 해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입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NIV, NLT, NWT는 번역이 아닌 "해석"입니다. 혼자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 중에는 자신이 깨닫거나 해석한 내용에 맞추어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고쳐야 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오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기록된 말씀을 더하거나 빼거나 고치는데 자기 사역자들을 사용하여 진리를 대적하고 부패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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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요?
질문: 하나님은 아벨을 죽인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도리어 보호하셨는가요?
답변: 가인은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은 "창세기 강해"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등 성경에는 짝을 이루면서도 극과 극이 되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음 글을 함께 참고하여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기 바랍니다.
1. 가인과 아벨은 아버지가 같습니다(아담).
이스라엘과 교회 역시 아버지가 같습니다(하나님, 아브라함).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2. 가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아이이며, 처음 난 자입니다(창4:1).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이브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가인은 주께로부터 얻은 첫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의 처음 난 자입니다.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나의 처음 난 자니라.](출 4:22). 가인과 이스라엘은 둘 다 장자요, 주님으로부터 났습니다.

3. 가인은 땅을 가는 자였고(창4:2), 땅과 관련된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땅을 가는 자였고, 땅을 받았습니다.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영원히 주리라.](창 13:15). 이스라엘은 조상들처럼 순례자가 아니라 지정된 땅에 뿌리 내리고 정착했습니다. 교회는 정착할 땅이 없으며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

4. 가인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희생물(어린 양)을 거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희생물을 배척했습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요1:11).

5. 가인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바칠 희생물을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그러했습니다(롬9).

6. 가인의 희생물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드린 희생물은 주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행13:39).

7. 가인은 형제를 돌보고 다스릴 특권이 있었습니다(창4:7). 이스라엘은 온 세상 민족의 머리가 되어 다스릴 특권이 있었습니다(신28:13).

8. 가인은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로부터 머리와 꼬리와 가지와 골풀을 끊으실 터인데](사 9:14).

9. 가인은 자기 형제를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살인자였습니다. [...그들은 의로우신 분의 오심을 미리 보여 준 자들을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나니](행7:52).
10. 가인은 자기 형제를 시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를 시기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시기한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행위는 악하되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요일3:12). 이스라엘이 교회를 시기하고 죽이려는 것은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교회는 의롭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은 가인의 죄를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 책임을 물으셨습니다(행2:22-23).

12. 가인이 흘린 피는 가인을 대적하여 증언하고, 이스라엘이 흘린 피는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증언합니다. [이에 온 백성이 응답하여 이르되,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오리이다, 하니라.](마27:25).

13. 가인과 이스라엘은 둘 다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해 저주를 받았습니다(렘24:9).

14. 가인과 이스라엘이 거하는 땅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창4:12, 레26:34-35).

15. 가인과 이스라엘은 둘 다 그들의 죄로 인해 도망하는 자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창4:12, 신28:65).

16. 가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그렇게 말합니다(슥12:10).

17. 가인은 자신의 죄의 결과로 땅에서 쫓겨났습니다(창4:14). 이스라엘 역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18. 가인과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셨습니다(창4:14, 호1:9).

19. 가인은 죄로 인해 자기를 찾는 모든 자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란(창4:14) 생존의 위험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죄로 인해 땅의 모든 민족이 그를 대적하고 죽일 것이란 생존의 위험을 안고 삽니다(신28:66).

20.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누구나 가인을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누구나 이스라엘을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21. 하나님은 누구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이스라엘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22. 가인을 죽인 자는 주님으로부터 엄중한 심판-일곱 배의 보복-을 받습니다(창4:15). 이스라엘을 저주하거나 박해하는 자, 죽이는 자는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습니다(창12:3).

23.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도시를 건설했습니다(창4:17).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세계 어디서나 함께 모여 사는 집단생활,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24. 가인의 영적 아버지는 사악한 자입니다(요일3:12). 이스라엘의 영적 아버지는 마귀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요8:44).

창세기 4장의 가인은 이스라엘을 완벽히 예표하는 모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교회, 크리스천)의 모형입니다.

※ 주의할 점.
예표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진리를 배우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예표를 모든 면에서 100% 일치 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임은 분명한 진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처럼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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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와 종말론
질문: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 것인가요?
답변: 사람들의 추측일 뿐 성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답변 글로 "소망 침례교회-김재근 목사"님의 아래 글로 대신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종말론과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
신문에 근거해서 종말론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태복음 24장 32절에서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내용을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 체계에서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휴거와 재림의 시기를 규정함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종말 사건의 시점을 1948년이라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림의 시기를 알면 휴거의 시기도 알 수 있다는 종말론자들이 꼭 인용하는 구절이 마태복음 24장 32절과 33절이다. 자, 그 어떤 신학적 편견 없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읽고서 이해해 보자.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것의 가지가 아직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나니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아직 연하고 잎사귀를 내는 것이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라는 아무런 객관적 증거가 없다. 이러한 소식을 알리는 신문이 없다면 마태복음 24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가?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으로 무화과나무를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경에 있는 사실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성경에서 뽑아내서 현실세상에다 적용하게 되면 심각한 오류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이단이 사람들을 속일 때 사용하는 성경해석 수법이다. 성경에 있는 사실들을 아무렇게나 끌어내서 현실세상에다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무화과나무 잎사귀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또한 여름이 재림과 종말을 가리킨다고 무엇을 근거로 말할 수 있겠는가.
32절 문맥은 결코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 아니다. 계절이 변하는 징후를 포착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예수님 말씀은 단순히 이런 의미이다.
마태복음 24장과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신 구절을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21장 29절, 30절을 살펴보자.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 체계에서는 거의 인용하지 않는 구절이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그것들이 싹을 내면 너희가 보고 이제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너희 스스로 아나니
휴거와 재림의 시기를 예측할 수 있다는 종말론자 가운데 누가복음 21장을 인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는 마태복음 24장처럼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모습을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적용하는데 방해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무화과나무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확실하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나무”는 각각 어떤 나라의 건국인지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올리브나무, 종려나무, 가시나무, 포도나무, 전나무, 소나무, 뽕나무, 상수리나무, 삼나무... 이 나무들도 싹을 내면 여름이 다가오는데 오직 무화과나무만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고 다른 나무들은 그냥 나무란 말인가. 성경을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게 오류 없이 해석하는 방법은 단어를 공평하게 이해하며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호와의 증인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무화과나무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모든 나무가 싹을 내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그 지역 사람들은 다 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요점이다.
<!--[if !support Empty Paras]--> 즉, 계절이 변할 때도 나무들을 통해서 시간이 흐르는 징조가 있듯이 주님의 재림에도 반드시 그 징조가 먼저 있을 것이란 말씀이다. 무화과나무가 핵심이 아니라 무화과나무를 포함해서 모든 나무의 생장이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를 보내듯이 재림 때에도 그 때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표적이 있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24장 전체 내용이 이것과 관련된 말씀이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일은 이스라엘 국가 수립과 관련이 없다. 둘이 같은 사건임을 연결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태복음 24장 33절도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읽게 되면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잘못 이해하도록 만드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 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 체계에서는 휴거와 재림의 시기를 규정하기에 급한 나머지 33절의 ‘이 모든 일들 all these things’을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일로 설명한다. 종말론과 관련된 대부분의 잘못된 가르침은 성경해석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독해력’의 부족에 기인한다.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문맥과 맥락을 파악해야만 가능하다. 마태복음 24장을 1절부터 읽게 되면 33절에서 말하는 ‘이 모든 일들 all these things’이 무엇을 말하는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리에다가 말씀을 맞추지 말고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읽고 확인하는 과정을 연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 all these things 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2절]

“또 너희가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들을 터이나 주의하여 불안해하지 말라. 이 모든 일들 all these things 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6절]
“이 모든 것 all these things 은 고통의 시작이니라.” [8절]
<!--[if !support Empty Paras]--> <!--[endif]-->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
33절의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들, 즉 재림 때의 표적과 종말의 표적을 말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나무들에 변화가 있듯이 재림 때도 마찬가지란 말씀이다.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면 재림의 때가 코앞에 이른 줄 알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리라.
34절에서 “이 세대”란 표현 때문에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이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는 근거를 제공한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종말의 기점으로 설정했으니 거기서부터 재림과 휴거의 시기에 대한 계산이 이루어진다. 또 예수님께서 ‘이 세대에 성취되리라’고 말씀하셨기에 ‘한 세대’의 길이만 알면 재림과 휴거의 시기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if !supportEmptyParas]--> 그래서 많은 종말론자들이 한 세대가 얼마나 지속될지를 찾기에 분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 세대가 70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2018년이 재림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세대가 100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2048년이 재림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풀기 위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러는 사이 청중들은 서서히 불안해지고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휴거의 시기를 규정하게 되면 사람들은 점점 비정상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32절, 33절과 마찬가지로 34절을 해석하는데도 매우 중요하고도 단순한 성경해석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어휘와 세상의 어휘를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이 같다고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세대 generation”가 세상에서 사용하는 X세대, 세대차이, 실버세대, 세대교체, 부모세대, 자식세대... 등에서 말하는 세대와 동일하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치 개역성경에 나오는 ‘동방’이란 단어를 ‘동방의 아침의 나라, 코리아’에 연결시키는 오류와 같은 오류다. 이것은 이단들이 하는 짓이다. 성경어휘는 먼저 성경 안에서 그 뜻과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에서 ‘동방’은 동쪽을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세대”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으면 인터넷이나 국어사전, 온갖 주석서 따위를 뒤적거리지 말고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에서만이라도 세대 generation 가 기록된 구절을 찾아서 읽기만 하면 누구든지 쉽게 성경에서 말하는 “세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1:1; 3:7; 11:16; 12:34,39,41-42,45; 16:4; 17:17; 23:33,36; 24:34) 이 부분은 독자들이 반드시 직접 찾아서 읽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해야만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하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의 세대는 시간적 개념이 들어있지 않다. 성경의 세대는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로 이루어진 사람들 무리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하시면 ‘독사들의 새끼’ 즉, 그 자식들을 말한다. 성경의 세대는 현재 세상이 사용하는 세대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if !supportEmptyParas]--> 마태복음 24장 34절에서“이 세대”는 표적만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를 말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아담에 속한 세대가 있고, 그리스도께 속한 세대가 있다. 교회는 “선택된 세대(a chosen generation)”라고 베드로전서 2장에서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4장의 사건들은 1948년에 살아 있던 사람을 기준으로 ‘한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은 죽이며 돌로 치는 세대 즉, 이스라엘 민족을 꼭 집어서 말하는 것이다. 결국 마태복음 24장의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대나 선택된 세대가 당할 일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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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 All these things 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태복음 23장 35-36절]
객관적이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본문 독해나 신문에 근거한 종말론체계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에게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겠다.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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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을 안 하면 이단인가요?
질문.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안하면 이단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들이 캐톨릭의 분파요, 아류임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그들은 매주 자신들이 믿는 바를 고백합니다. 그 중 하나가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믿사옵나이다."란 부분입니다. 정말 개신교인들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나요? 전혀 아닙니다.
거룩한 공회는 영어로 Holy Catholic Church입니다.
성도란 살아 있는 크리스천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캐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봉헌한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중보, 성자들의 중보를 믿는 캐톨릭 교회의 헛된 교리를 개신교회에서 그대로 들여와 사용하는 것입니다.
일부 개신교회에서는 '공회가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를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말이 꼭 로마 캐톨릭, 천주교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을 고수할 것을 정당화합니다. 이는 속임수입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순복음, 성경교 등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매주 자신들이 자기 입으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평생토록 외쳤다면 그는 비록 개신교회에 있지만 캐톨릭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 캐톨릭 신자입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모든 개신교회는 캐톨릭 교회의 일부 또는 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는 캐톨릭은 물론이요. 개신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전혀 노선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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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혼, 재혼에 대해
질문. 그리스도인의 결혼, 이혼, 재혼에 대해서 간략하게 성경적 원칙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참조: 성경의 결혼, 이혼, 재혼
결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오직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7:9)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후6:14)고 합니다. 경제적 이유, 장래 비전, 외모를 취하는 등으로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주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은 음행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둘지니라.](고전 7:2).
결혼은 남녀의 정신적 결합이 아니라 '육체적 결합'입니다(엡5:31). 이 점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혼한 순간부터 남자와 여자의 몸은 상대방이 주장합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아내가 하느니라.] (고전 7:4). 서로를 속여서 권리를 빼앗지 마십시오(고후7:5). 부부란 둘이 결합하여 한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신실하십시오.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이혼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까?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이 음행으로 연루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이혼남, 이혼녀가 수두룩합니다. 너무나 쉽게 이혼합니다. 교회는 이혼한 이들이 모여 다시 재혼을 하기 위한 만남의 장소와 여건을 제공해 줍니다.
성경은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거늘](마19:6)고 말씀합니다. 자, 그런데 사람들은 이혼을 결심할 때 이런 저런 핑계와 변명을 만듭니다. 성격 차이, 가치관 차이, 경제적 이유, 더 나은 삶의 비전을 위해서,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서 등등으로 시작해서 "본래부터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베필이아니었다" 등등입니다.
처음에는 실수였고, 실패였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것은 이혼 사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따로 정해 두신 짝을 찾자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이혼 사유는
첫째, 음행(마19:9)
둘째, 사별(롬7:1-4)
셋째, 신앙적인 이유로 버림 받는 경우입니다(고전7:15).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떠나거든 떠나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그런 경우에 속박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저는 목회자로서 배우자의 "폭언과 폭력, 술취함(알콜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전혀 일을 하지 않음" 등의 이유로 이혼 상담을 할 때 가장 난감합니다. 이혼하지 말고 감당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이혼하라고 하기에는 성경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크리스천이면 이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가능합니다.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성경적 원칙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이혼을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사역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재혼에 대해서
1. 성경은 이혼을 했더라도 재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아내에게 매여 있느냐? 벗어나려 하지 말라. 네가 아내에게서 놓여 있느냐? 아내(다른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전7:27). 이곳 미국에는 몇 번씩 이혼하고 재혼한 목사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단에서 이혼, 재혼 등에 대해서는 아예 입에 담지도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오히려 이혼하자 마자 곧 재혼을 권장하고 자기 교회에 혼자인 사람들이 많다고 중매를 서 주겠다는 웃지 못할 일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자는 아내에게 대하여 간음하는 것이요,](막10:11). 사별 외에 어떤 사유로 이혼을 했다면 재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재혼은 간음입니다.
사별한 사람들끼리 재혼은 가능합니다.
사별한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 처녀와 결혼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 외에는 간음입니다.

2. 성경은 이혼 한 후에는 결혼(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거든 결혼하지 말고 지내든지 아니면 자기 남편과 화해하라. 또한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라.] (고전 7:11). *그냥 지내든지 or ...화해하라(재결합).

헤어진 배우가 현재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간음입니다. [그런즉 만일 그녀가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부라 불릴 터이나...](롬7:3). 이혼은 재혼의 빌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재혼) 하기 위한 이혼이 간음이듯이 이혼한 후에 결혼하는 것 역시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혼 한 후에 홀로 살다 전 남편(아내)가 죽으면 재혼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법에 의해 매여 있으되 자기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되어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시집 갈 수 있거니와 오직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전 7:39).

이혼한 여자(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니라.](마5:32). 필자가 아는 목사님 중에는 세번이나 결혼한 분이 있습니다. 전 부인들이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이혼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혼 당한 남자가 왜 자꾸 결혼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간교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미국식이니 한국식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문화, 풍습의 문제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성경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 하시니라.](마19:9).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눅16:18).
지금 수많은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결혼, 이혼, 재혼을 멋대로 자행합니다. 교회에서 이혼과 재혼을 하는 일은 온 교회가 간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이런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누군가를 소개해 달라는 것에 동조하지 말고, 누군가를 먼저 소개해 주는 어리석은 죄를 짓지 마십시오. 현실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이혼과 재혼을 결정하는 일은 주께 범죄하는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혼 상태에 있는 분이라면 혼자 지내든지 재결합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재혼을 계획하고 있다면 주 안에서 행하되 간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숙지하시고 자녀들과 친지, 친구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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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영감론이란 무엇입니까?

질문. 이중 영감론이란 무엇입니까?
답변. 킹제임스 성경의 무오성, 완전성을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해 학자들이 지어낸 말입니다. 이중 영감론, 다중 영감론.
대부분의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크리스천 그룹들은 성경의 무오성, 완전성, 축자 영감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이라고 말할 뿐 자신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 성경"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Which Bible?
대개 그들이 말하는 성경은 최초의 원본(자필원본) 또는 필사본(원문)입니다. 최초의 원본이란 그 성경은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본은 소멸, 소실되었고 원본을 그대로 베낀 필사본들이 존재합니다. 신약의 많은 필사본들은 서로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번역본에는 영감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고로 지구상에는 완전 무오한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이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최초의 자필 원본과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를 빗대어 '이중 영감론'이라고 강하게 비난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본일 뿐이란 것입니다.
요약하면,
1. 킹제임스 성경은 정확한(accurate) 번역본이다. 그러나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2. 킹제임스 성경은 탁월한 번역이지만 원본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3. 킹제임스 성경은 잘 보존된 성경이긴 하지만 영감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영감이 있다고 말하면 그는 "이중 영감"을 주장하는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 수호자를 자처하는 D.A 웨이트,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 등의 주장이 이와 같습니다. 타협책을 강구하면서 주장을 약간씩 수정하긴 하지만 핵심 주장은 위와 같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성경에 대한 믿음(특히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믿음) 은 한 마디로 성경 불신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최초의 자필 원본에 주어진 하나님의 영감이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믿을 때에 학자들은 원어 연구, 필사본의 연구 등을 통해 새로운 학설이나 이론이나 다른 주장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 오역 등을 자주 지적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영감을 믿는 근본주의자들 중에 몇 몇 타협론자들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영감, 완전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학계에서 몰매를 맞거나 몰상식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킹제임스 성경의 불완전성이나 영감이 없다고 말하면 성경 신자들 사이에 배교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간교한 속임수가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 자체가 영감을 통해 주어진 것은 아니다."와 같은 주장입니다. 매우 간교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the inpired word of God)이 아니고 "영감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given by inspiration of God)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딤후3:16). 모든 성경 기록=최초의 원본 only(근본주의자). 모든 성경 기록=최초의 원본, 킹제임스 성경(성경 신자들).
필자는 성경론을 말할 때 이 구절을 자주 생각합니다.
제가 이십 몇 년 전 원본과 번역본 특히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고민할 때 받은 말씀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완전성, 무오성, 영감 등에 대해 깊이 고심하며 주께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성경 문제는 저의 신앙생활 뿐 아니라 인생의 일대 전환을 가져올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몇 권의 책이나 사람들의 주장에 쉽게 동조할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며 판단을 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요 14:9).
빌립이 주님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했듯이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여, 우리에게 최초의 원본"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아직도 킹제임스 성경이 주의 말씀인 줄 알지 못하느냐? 킹제임스 성경을 본 자는 최초의 원본(주의 말씀)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최초의 원본을 보여 주소서, 하느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최초의 자필 원본과 동일한 주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킹 제임스 성경은 영감으로 주어진 주의 말씀이란 사실"만 굳게 붙드십시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방패입니다. 주의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며 또한 성령의 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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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대한 간단한 Quiz
Quiz #1- 성령.
• 성령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행2:33).
• 하나님은 누구에게 성령을 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요7:39).
• 성령을 받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통해서입니다(갈3:2,5).
•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 성령을 부어 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딛3:6)
• 성도들은 언제 성령을 받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는 순간에 받습니다. 믿고 나서 한 참 후에 따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믿을 때 선물로 주어집니다.
• 성령은 어디에 거하십니까? 믿는 자들의 몸 안에 거합니다(요14:17). 고전3:16,17.
• 성령은 언제까지 거하십니까? 영원히 거하십니다(요14:16).
이와 달리 가르치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만약 구약 성경을 펴서 이와 달리 말한다면 신약과 구약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무지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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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입니까? 야훼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말할 때 '여호와( יהוה)는 잘못된 발음이고, '야훼'가 정확한 발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공동 번역 성서에서 야훼를 도입했고, 순복음 교회 조** 목사님이 설교단에서 강력하게 '야웨, 야훼'를 선포하면서 '야훼 표기 개역 성경'이 따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전에 캐톨릭은 공식적으로 이런 발표를 했습니다. "교황청의 지시로 한국 캐톨릭은 더 이상 야훼를 사용하지 않고 주님, 주 하느님으로 번역하기로 했다. 천주교 성가 가사 등의 대대적인 수정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무슨 사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야훼를 한국 교회에 소개한 후에 홀로 뒤로 유유히 빠지는 모습입니다.

야훼란 표기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19세기의 히브리 학자 '빌헤름 게제니우스'(1786-1842)가 나름대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연구하여 "야훼'로 호칭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을 받아 들여서 현재는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여호와인지 야훼인지 아니면 야후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가 학자들의 견해나 입장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몇 백 년, 몇 천 년을 써왔다 하더라도 학자들의 견해나 주장이 바뀌는 순간 다 바뀝니다. 성경이 기준이 아니라 학자들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요, 보존된 완전한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을 가진 사람은 이 문제는 전혀 오해나 갈등,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여호와"라고 표기되어 있는 고로 그것으로 끝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 나와야지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성경이 바뀌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성경적 기준에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미 확증된 표기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인 사람들에게 의심, 논쟁, 주장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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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네 장로가 누구입니까?
질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스물 네 장로가 누구입니까?
답변. 구원 받은 크리스천입니다.

사도 요한이 들림을 받아 하늘에서 본 것들을 기록하는데 그 중에 '왕좌 둘레에 스물네 자리가 있고, 그 자리들 위에 앉은 사람들'이 바로 스물네 장로입니다.
[또 그 왕좌 둘레에 스물네 자리가 있고 내가 보니 그 자리들 위에 스물네 장로가 흰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그들이 머리에 금관을 썼더라.](계 4:4)
지상에서는 대환란이 있는데 저 하늘에는 '스물네 장로가 주님 곁에' 있습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썼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경배합니다. 자신들이 쓴 관을 왕좌 앞으로 던졌습니다(계4:10).
자, 그들이 누구인지는 학자들의 견해나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성경 자체에 그들이 누구인지 나옵니다. 계시록 5:9을 보십시오.
[그들(스물네 장로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께서 그 책을 취하시고 그 책의 봉인들을 열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으며] (계 5:9)
스물네 장로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구속하신 사람들은 바로 신약의 크리스천들입니다. "모든 족속, 언어, 백성, 민족 가운데서 구속"하셨다고 말함으로 이들은 '구약 성도나 이스라엘'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 크리스천들임이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약 성도들은 대환란 이전에 들림 받아 하늘에 있다는 분명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24라는 숫자에 주목해서 구약과 신약 각 열 둘, 이스라엘과 이방인 각 열 둘 등의 해석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24라는 숫자가 아니라 본문에 이들이 말하는 자신들의 신원,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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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때, 저녁 때, 해질 때가 몇 시입니까?
서늘한 때, 저녁때는 몇 시?
[그들이 그 날 서늘한 때에 동산에서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주 하나님 앞을 떠나 동산의 나무들 가운데 숨으매](창 3:8)
오늘날 우리는 매일 시와 분, 심지어 분초를 따지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몇 시 몇 분이란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시가 많이 나옵니다. 구시, 세시, 여섯 시와 같은 시각이 나오지만 구약 성경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 '저녁 때, 해질 녘, 밤중에, 서늘한 때'와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아담은 서늘한 때에 동산 나무들 가운데 숨었다고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표현보다 '몇 시에?'라고 그 시각을 알고 싶어 합니다.
주님은 저녁때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럼 저녁때가 약 몇 시부터를 말하는 것입니까?
서늘한 때는 일반적으로 오후 3시-6시까지를 말합니다.
저녁때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아담이 숨었던 시각은 해가 질 때쯤의 시각입니다.
제가 만난 어떤 분은 성경에 나오는 '저녁'이란 말이 몇 시를 가리키는지 알고 싶어 1년을 고민하다 결국 유대인들을 만나 물어 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3시란 것을 알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성경을 스스로 풀어 줍니다. 고민할 것도 유대인들에게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이 성경의 진리를 뒷받침하거나 확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도움이 되는 구석도 있지만 성경은 언제나 성경 스스로 푸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합니다.
[오직 주 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네가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 곧 저녁에 해 질 때에 거기서 드리며](신 16:6).
여기 보면 저녁이란 시각 개념이 "저녁=해질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일반적으로 저녁때라고 하면 '해질 때' 를 말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의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 3시부터 준비해서 6시 이전까지 마쳤습니다. 그래서 3-6시까지를 서늘한 때, 저녁때라고 표현합니다.
유대 시각은 저녁이 밤과 동의어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란 말은 밤 시각을 말합니다. 오후 6시부터 아침 6시까지입니다.
[아론은 회중의 성막 안 곧 증언의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서 계속해서 그것을 정비할지니 그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레 24:3).
이런 것은 문맥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아래 구절들은 저녁때가 해질 무렵이 되기 전 시각임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저녁때에 물로 몸을 씻고 해가 진 뒤에 진영에 다시 들어올지니라.](신 23:11)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매달았다가 해 질 때에 곧 명령하여 그들이 그의 사체를 나무에서 내려 도시의 성문 어귀에 던지게 하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이 날까지 남아 있느니라.](수 8:29)
[그 날에 싸움이 더 커졌으나 이스라엘 왕이 자기 병거에 남아 저녁때까지 시리아 사람들을 막다가 해가 질 무렵에 죽었더라.](대하 18:34)
예수님은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고 6시가 되기 직전에 무덤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녁때에 돌아가셨고, 밤에 무덤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아담이 동산에 숨었던 시각. 에덴에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시기 위해 양을 잡았던 시각과 일치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어린 양을 잡도록 명령하신 그 시각이 저녁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채 십자가에 못박혀있던 그 시각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았던 그 시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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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4-5절 질문입니다.
질문. 창세기 2:4-5절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답변. 개역이나 기타 성경을 보지 말고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을 보면 됩니다.
*주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유사 킹제임스 성경이니 이 구절을 읽어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래 설명은 창세기 강해에서 발췌했습니다.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들며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이 이러하니라. 그때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며 단지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 2:4-6).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And every plant of the field before it was in the earth, and every herb of the field before it grew: for the LORD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t a man to till the ground. But there went up a mist from the earth, and watered the whole face of the ground.] (창 2:4-6).
The LORD GOD이 주어입니다. 목적어는 셋입니다. the earth and the heavens. every plant of the field, every herb of the field. 문장 구조가 파악되지 않으면 제대로 번역,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놀라운 진리의 보화가 있습니다.
1, 하늘과 땅의 세대들
이 부분이 영어 킹 제임스 성경과 우리 말 성경의 어순이 완전히 바뀌는 관계로 절과 절을 1:1로 대응하거나 비교하면 완전히 오역이나 틀린 것처럼 보입니다.
흠정역4절과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비교해 보십시오. 상호 대응이 되지 않습니다. 4-6절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문장이 됩니다.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보면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이 이러하니...”(4)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늘들과 땅의 세대(단수)가 아니라 “세대들”(복수)이란 표현을 봅니다.
세대들(generations)은 무엇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아담의 세대들이라고 하면 아담에서 나온 아담 이후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노아의 세대들(창6:9)이라고 하면 노아에서 나온 노아 이후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기에만 세대들이란 단어는 12번이나 나오는데 예외 없이 언급된 세대의 이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을 창세기 1:1 이후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들과 땅’을 말합니다.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이전에 있던 하늘과 땅에서 나온 것들이기에 “세대들”(generations)이 됩니다. 이는 오늘날 창조 과학자들이 Young Earth(젊은 지구)이론을 주창하며 창조의 진리를 수호하고 변호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성경에 대한 무지만 드러낼 뿐입니다.
성경은 이전 세상, 현 세상, 다가올 세상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습니다. 현 세상은 노아의 홍수 때부터가 아니라 “창세기 1:3부터 천년왕국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이전 세상은 물로 멸망했고(창1:2), 현 세상은 불로 멸망하게 됩니다(벧후3:10-12).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은 곧 창세기 1:1과 하늘과 땅이 물로 멸망하고 재창조를 거쳐 하늘들과 땅이 되었음을 증언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실 때 만드신 것들은 이미 창세기 1장에서 다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들의 초목이나 채소나 나무를 모두 다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창조의 맨 마지막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성경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기초 상식에 해당합니다.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들며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날에”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저는 교회에서 이 구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개역 성경을 보면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창2:5,개역한글)라고 말하는데 이는 킹 제임스 성경 본문과 정반대입니다. 들에는 초목이 있었고, 밭에는 채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창조의 셋째 날에 들의 초목과 나무를 땅에서 나게 하셨습니다(창1:11-12). 그러다 보니 성경은 모순된다, 엉터리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 아니라 문서를 여기저기서 편집했다는 등등의 가설과 추측과 억측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드셨습니다. 주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들의 모든 초목은 존재합니다. 들의 모든 초목은 자연 발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만드실 때 만드셨으므로 존재하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주님께서 한 날에 채소를 만드셨습니다. 채소가 자라기 전에 주님은 땅에 채소의 씨앗을 심거나 뿌린 것이 아니라 채소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도 믿기 어려운 구절도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채소나 나무의 씨앗을 만들어서 땅에 뿌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땅에 씨를 뿌리신 후에 경작할 사람이 등장하면 그 때 그것들이 자라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장 과정을 배제하고 셋째 날에 곧 바로 채소와 나무를 만드셨고 만드신 것들이 들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이나 산에서 풀과 채소와 나무를 봅니다. 그것은 모두 땅에 있기 전에, 땅에서 자라나기 전에 주님이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진리요, 성경이 말하는 창조 신앙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창2:5, 개역)라고 함으로써 창세기 1장에서 이미 만들어진 초목과 채소, 나무 등이 이 땅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함으로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현대역본들은 들에 초목이나 채소, 나무가 없었다고 기록하는데 킹 제임스 성경은 주님께서 “만드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둘은 같은 사건이지만 정반대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어느 성경이 바른 성경이며 참 하나님의 말씀인지 쉽고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주님은 초목을 만드셨고,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한 날이 있습니다(창1:11,12).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아니라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나 사막에 불과한 땅이 되고 맙니다. 틀린 성경에서 진리가 나올 수 없고, 진리가 없는 곳에 바른 믿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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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댓글쓰기
generations of Heavens and of earth... 복수인 것은 두개의 of 에 걸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Gap theory를 입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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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뒤에 "Heaven과 earth"가 둘이기 때문에 generation이 복수가 된 것이 아니고 "generation"이 두 번이기 때문에 복수인 것입니다. 단, 복수의 문제는 수식어의 갯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generation(생성 세대)이 둘이상이면 generations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단수가 됩니다.
고로 재창조를 '입증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입증한다.'가 맞습니다. 다만 기록된 대로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generations의 용례를 모두 찾아보면 문법적인 지식이 전혀 없어도 진리를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말씀이 말씀을 풀기 때문입니다.
*generation은 뭔가로부터 generated 된 것입니다.
아담에 의해 generated 된 사람이 아담의 세대들입니다.
노아로부터 generated된 사람들이 노아의 세대들이죠.

그럼 '하늘로부터' generated 된 것은? 하늘들입니다.
하늘로부터 나온 하늘들이 '하늘들의 세대들'입니다.

땅으로부터 generated된 것은? 땅입니다.
땅으로부터 땅이 나왔으면 '땅의 세대들'입니다.

하늘에서 현재의 하늘이 나왔고, 땅에서 현재의 땅이 나왔습니다.
창세기 1:1의 하늘과 땅에서 지금의 하늘들과 땅이 나왔다는 말씀입니다.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지요?
기록된 대로 믿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믿고 싶은대로 이해하지 말고 기록된 대로 이해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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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댓글쓰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에서 뒤의 when they were created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제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generation of Jesus Christ는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예수님이 시작이 되는 세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경우는 바로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의 시작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잘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제가 보기에 그 세대들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것들 즉 하늘의 별들 및 땅위에 거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다 지칭하는 뜻이 더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generatio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family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논란이 될 것 같으니 저는 여기까지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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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논란거리가 아닙니다.
논란을 만들지 마시고 오류를 깨닫고 고침 받으시면 됩니다.

1.gene(씨, 인자)-->generate(산출하다.)-->generation(생성, 세대)
-->regeneration(중생).
Generation means "....generated by someone/something"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generation입니다. 우리말로 세대로 번역되어 *dispensation과 비슷하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2.아담의 세대는 아담으로부터 generated된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세대는 예수님으로부터 generated된 사람들이죠. 님이 말한 family 는 누구에 의해 generated가 된 것이 가족이죠. 님이 이해하는 군집(host)이란 뜻이 아닙니다.

*Generation의 사전적 의미
Generation (from the Latin generāre, meaning "to beget", [1] also known as procreation in biological sciences, is the act of producing offspring. --낳는 것, 생산하는 것입니다.

3. 그럼 하늘의 세대는? 하늘로부터 generated된 것이 아닌가요?
땅의 세대는? 당연히 땅으로부터 generated된 것이죠. 달리 해석이나 논쟁이나 논란이 있을 수 없지요. 다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기록된 말씀에서 나온 진리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고 하기 싫은 사람들은 본문이 뭐라고 말하든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뜻하는 다른 의미, 뜻을 찾아내어서 그것이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저도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님, 킹 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읍시다.
굳이 generation을 'host, family' 등으로 변개 시켜 가며 믿을 필요는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에서 교리가 나오고 해석이 나와야지 자신이 이미 세운 교리, 지식에 근거해서 본문을 재해석하는 논지는 성경 신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님의 주장을 보겠습니다.
주장1. "generation of Jesus Christ는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예수님이 시작이 되는 세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대/시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generated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장2. 바로 하늘들과 땅의 세대들의 시작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잘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 원어나 어디에도 시작을 뜻하는 단어, 암시조차 없습니다.

주장3. 또한 제가 보기에 그 세대들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것들 즉 하늘의 별들 및 땅위에 거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다 지칭하는 뜻이 더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generatio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family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 님이 보기에 그런 것입니다.

처음 하늘과 땅(창1:1)에서 현재의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나왔다", generated되었다는 뜻입니다. 6일 창조 이전에 하늘과 땅이 있었고, 땅 위에 물이 있었고, 어둠이 있었고, 깊음이 있었습니다. 만약, 님의 주장대로라면 물은 몇 일 째 창조되었나요? 어둠은? 깊음은? 하늘, 땅은 몇 일째 창조되었지요?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기 전에 이미 창조되어 있었습니다. 고로 하늘과 땅의 generations란 기록이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부합하는 것입니다. 물이 언제 창조되었는지만 생각해 봐도 쉽게 오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님의 견해는 부패된 역본들의 해석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 신학교나 주석서 등에 다 나오는 내용인고로 님께서 따로 말씀하시거나 의견을 개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은 원어 성경이나 부패된 역본이 아닌 '킹제임스 성경'에 근거한 진리만 논합니다.
주신 의견은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모두 그동안 창조 과학이나 젊은 지구론 등의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딤전6:20)을 피하고 진리의 말씀 그 자체에 눈을 뜨고 관심을 가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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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댓글쓰기
너무 많은 예가 성경에 있지만 한 구절만 언급하고 가겠습니다.
Psa 24:6 This is the generation of them that seek him, that seek thy face, O Jacob. Selah.
여기의 generation은 뒤의 them과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generation of 형태를 띄면 무조건 뒤의 generated된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한 창 5:1의 book of generations of Adam은 아담을 포함한 모든 세대들을 언급하고 있지 아담을 제외한 것이 아닙니다. 문맥을 읽어보세요.
generation of Jesus 는 예수님의 세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한 씨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the book of generation of Jesus는 예수님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이제 그분 안에 있게 된 우리를 말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부터 28장까지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갈 3:29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씨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씨라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씨인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불립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예수님의 generated 된 세대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세대입니다.
나의 견해가 부패된 역본들의 해석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수많은 킹제임스 성경을 써온 미국과 영국의 신학자들이 나와 동일한 견해를 견지해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또한 너무 억지 논리를 펴시지 마십시오. 누가 땅과 빛과 물이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모릅니까?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이 정말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씁니다. 만일 gap theory가 사실이라고 해도 현재의 하늘은 처음 하늘에서 generated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땅도 마찬가지 입니다. 앞으로 올 변화될 세상은 regeneration으로 불립니다.
마지막으로 oxford사전에 generation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됨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beget의 의미로만 해석한다는 건 편협 되었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 these가 무엇을 뜻하는 지를 먼저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3절의 all his work이 적당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generation이 사용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분이 produce한 결과입니다. 저는 옥스포드 사전 2.a.에 기록된 정의에 따라 해석해본 겁니다.
딤후 2:24~25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말아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스스로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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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내용입니다.
이런 논쟁은 피차 피곤하지요.
gene이 없이 generate가 있나요?
generate가 되지 않고 generation이 있을 수 있는가요?
generation이 없이 regeneration이 있나요?

손에는 킹제임스 성경이 있지만 마음에는 부패한 역본들이 들어 있는 듯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창세기 2:4을 한 번 보겠습니다.

- 세대(:KJV, 흠정역).
- 대략(개역)
- 내력(개정, 한킹)
- 일(표준, 현대어)--->님의 주장. *all his works.
이렇게 해석하는 순간 generations란 킹제임스의 순수한 말씀 속에 든 모든 영적 정보가 파괴되어 버립니다.
- 내용(현대어)-->님의 주장. *company, hosts. *generation이란 말씀 속에 든 고유한 의미가 다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 순서(공동)
또 다시 generation이란 단어, 의미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니 생략하겠습니다. generation은 generic connection이 없이는 쓸 수 없는 말입니다.
님의 주장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란 말씀에서 하늘들의 세대들을 하늘들의 작품들, 군상들, 일들로 이해하신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하늘들을 만드셨습니다.
땅에서 땅의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저는 관계성을 본 것입니다.

기본적인 의미에서 파생된 의미가 나오고, 다양한 뜻이 나옵니다. 파생된 의미를 기본 뜻으로 잡아서는 안 됩니다. 무리, 사람들, 군집, 가족, 작품, 열매 등의 다양한 의미는 기본적인 뜻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예로드신 시24:6의 '주를 찾는 세대'든 독사의 세대든 음란한 세대든 의로운 세대든 generation은 generic 연관성을 지닌 무엇(사람이든 사물이든)입니다.
generated가 안되면 generation은 없습니다.
아담의 세대라면 당연히 아담을 포함하지요.
아담에서 파생하니까요. 아담이 씨가 되는 것이죠.

하늘과 땅의 세대라면 당연히 첫째 하늘과 땅을 포함합니다.
첫째 하늘에서 하늘들이 나오고, 땅에서 땅의 모든 것이 나온 것 아닌가요?
예수님의 세대 역시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세대는 예수님으로부터 generated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gene이시고,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generated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세대가 아니지요.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성된 것입니다.
포함한다는 말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님이 말씀하신대로 generation이 사용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분이 produce한 결과"란 님의 말씀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works, host, company, family 등과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하늘들의 세대는 하늘과 연관된 무엇입니다.

아담의 세대는 그분께서 아담을 통해 만드신 작품이고,
예수님의 세대는 그분께서 예수님을 통해 만드신 작품이고,
지금 있는 하늘의 세대는 그분께서 하늘(창1:1)을 통해 만드신 작품이고,
땅의 세대는 그분께서 땅(창1:1)을 통해 만드신 작품이란 말입니다.

창세기 1:1의 하늘과 땅에서 하늘들과 땅, 모든 것들이 나왔기에
창세기 2:4에서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란 말씀은 정확무오하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하늘과 땅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regeneration이 아니죠. 거듭남, 중생도 마찬가지죠.

generation이 '작품, 결과'가 아니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가적인 뜻입니다.
창2:3의 all his works가 바로 창2:4의 하늘과 땅의 세대들입니다.
이 세대들은 창1:1을 통해 하나님께서 generate 하신 것이란 말입니다. 하늘에서 하늘들이 나오고, 땅에서 현재의 땅이 나왔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성경적인 말을 generations이란 한 단어로 풀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준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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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님은 창1:2의 물이 몇일째 창조된 걸로 알고 계신가요? 그냥 알고 계신다기에 물어 보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강의한 창조 과학자에게도 제가 물어 본 것입니다. 만약 아시면 창1:2의 '어둠, 깊음'은 언제 창조되었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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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주장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권면하신 말씀대로 제가 주의 종으로서 "다투지 않고,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스스로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더불어 님도 일깨움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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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나 염소 중에서 그것을 취하고
염소들 중에서 양을 취하라?

질문. 유월절 어린 양은 염소들 중에서 취할 수 있습니까? 출12:5, 신16:2을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입니다. 양과 염소는 전혀 다른 동물입니다.

[너희의 어린양은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라. 너희는 양이나 염소 중에서 그것을 취하고. Your lamb shall be without blemish, a male of the first year: ye shall take it out from the sheep, or from the goats:] (출 12:5)
이 구절은 많은 해석이 난무하는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갑작스런 염소의 등장 때문입니다. 주님은 잡아야 할 어린 양은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이라고 분명히 규정해 두셨습니다. 염소, 나귀, 소, 비둘기 등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현대 역본들 중에서는 "양이 없거든 염소 중에서 그것을 취하고"(현대인의 성경)로 번역이 아닌 사적 해석을 해 놓은 것도 있고, 양이나 염소 중에서 아무 것이나 취하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희생물로 소, 양, 염소가 사용되지만 주님께서 특별히 지정한 헌물에는 지정된 것만 사용됩니다. 어린 양, 속죄 염소, 붉은 암송아지 등은 사람의 사정에 따라 임의로 바꿀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2:5에서 "염소 중에서 그것을 취하고"란 말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 됩니다. '그것'은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인 어린양입니다. 양들 중에서 양을 취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염소 중에서 '그것'(어린양)을 취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떼를 칠 때 양과 염소를 함께 쳤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느냐? 오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하니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거늘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노니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 보고 내게 다시 소식을 가져오라, 하며 이처럼 그를 헤브론의 골짜기에서 보내매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창 37:13-14).
야곱의 아들들은 양떼를 쳤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들이 양 떼를 먹이는 곳을 찾아 갔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원하건대 그들이 그들의 양 떼를 먹이는 곳을 내게 말해 주소서, 하매] (창 37:16). ---양떼를 먹이는 곳,
형들은 요셉을 팔아 버린 후에 요셉이 죽은 것처럼 아버지를 속였는데 무엇으로 속였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염소 새끼를 죽여 그 옷을 피로 적시고는] (창 37:31).
요셉의 형들은 양이 아니라 '염소 새끼'를 죽였습니다.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먹였고, 한 우리에 넣었고, 그것들을 양떼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는 닭장 속에 닭과 오리가 함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한 곳을 더 봅시다.
야곱은 라반의 양떼를 쳤다. 양 떼 속에는 늘 염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무엇을 네게 주랴? 하매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나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온 양 떼를 두루 지나가며 거기서 점 있는 것과 얼룩진 가축과 양 중에서 갈색 가축과 염소 중에서 얼룩진 것과 점 있는 것을 다 가려내리니 그런 것들이 나의 품삯이 되리이다.] (창 30:31-32).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되게 벌려 놓으매 야곱이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창 30:36).
야곱이 먹인 라반의 양 떼에는 양과 염소가 같이 있었습니다.
양떼 속에는 염소가 포함됩니다. 창세기 31장에는 야곱의 양떼만 계속해서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염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창31:38).
그러므로 출애굽기 12:5은 "너희의 어린양은 일년 된 수컷으로 흠이 없어야 할지니라. 너희는 그것(어린양)을 양들로부터 취하거나 염소들로부터 (어린양을) 취할지니라."입니다.

신명기 16:2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는 양과 염소 떼나 소 떼에서 취하여 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 희생물을 드리되] (신 16:2).[Thou shalt therefore sacrifice the passover unto the LORD thy God, of the flock and the herd, in the place which the LORD shall choose to place his name there.] (신 16:2).
너는 양과 염소 떼나 소 떼에서 취할 것이 무엇입니까? '유월절 희생물'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어린양'이지 염소나 소로 어린양을 대신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필요할 때 양과 염소를 분리했습니다.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자기 앞에 모으고 목자가 염소들로부터 자기 양들을 갈라내듯 그들을 일일이 분리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편에 두되 염소들은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 유월절 어린양으로 양이 없으면 염소를 취하라가 아닙니다.
● 양이나 염소 중에서 아무 것이나 취하라가 아닙니다.
● 염소로 양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문자 그대로 정확히 '어린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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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요?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성경적 용례부터 살펴봅시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그분을 믿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롬 8:14).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롬 8:19).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지금 계시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요일 3:1-2).
대소문자, 단복수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The Son of God- sons of God,
The Spirit -spirits,
God-gods,
The Son-sons,
The Devil-devils,
The Christ- christs,
The Prophet-prophets
The Angel- angels
The Apostle-apostles...
이런 예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구약의 경우를 봅시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첫째, 천사들입니다.(욥1:6,2:1,욥기38:7)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 38:7).

둘째,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왕이 응답하여 이르되, 보라, 내가 보니 결박이 풀린 네 사람이 불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데 그들이 아무 해도 입지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도다, 하더라.](단 3:25). (The Son of God.)

셋째,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나의 처음 난 자니라. 내가 네게 말하노라. 내 아들을 가게 하여 나를 섬기게 하라. 그가 가는 것을 네가 거부하면, 보라, 내가 네 아들 곧 너의 처음 난 자를 죽이리라, 하라, 하시니라.](출 4:22-23).
[그러할지라도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으리니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곧 거기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리라.](호 1:10).

넷째, 첫 사람 아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느니라.](눅3:38).

그렇다면 창세기 6:2,4에 나온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창 6:2)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창 6:4).

이 부분에서 많은 주석가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 놓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담은 제외입니다.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창세기 6장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이 있기 훨씬 이전이므로 이스라엘도 제외해야 합니다. 신약의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그럼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경우 밖에 없습니다. '천사들'입니다.

원어 연구나 사람들의 견해, 해석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 없이 주의 말씀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창세기 6:2,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중에 하나는 천사들(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과 결합하여 자식을 낳을 수 있는가? 란 의문, 불신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어디에도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하다!'는 가정을 두고 성경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은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고 그들이 '거인들'이었습니다. 거인은 문자 그대로 골리앗과 같이 몸이 큰 거인을 말하는 것이지 비유적이나 상징적으로 위대한 사람, 유명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좀 안다는 사람들 중에 마태복음 22:40, 마가복음 12:25을 인용하여 천사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활 때에는 그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은 사람의 딸들을 취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마귀의 천사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이라고 분명히 나옵니다.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 (유 1:6).
이로써 창세기 6:2,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는 완전히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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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의 천사?
질문. 욥기 1:6, 2:1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답변. 천사들입니다.

재질문. 그럼 이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입니까? 마귀의 천사들입니까?
첫번째 질문과 답변은 매우 쉽습니다.
대화가 이루어진 장소가 하늘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욥기 38:7을 연결하면 간단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 38:7)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천사들'인지 '마귀의 천사들'인지 묻는다면 좀 달라집니다.
[이제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주 앞에 보이려고 왔는데 사탄도 그들 가운데 오니라.](욥 1:6).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주 앞에 보이려고 왔는데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와서 주 앞에 자기를 보이니라.](욥 2:1).
어느날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주 앞에 보이려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는지 정기적으로 자신을 보이기 위해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자기를 보이려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그들 중에 사탄도(also) 왔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among, also란 단어입니다. 사탄은 그들과 함께(with) 온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among) 왔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 속에(가운데) 사탄이 있었다고 한다면 뭔가 어색합니다.
하나님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십니다(삼상4:4, 삼하6:2, 왕상19:15, 대상13:6, 시80:1, 사37:16).
주님은 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심판 때에 서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로운 자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니](시1:5). 사람들도 죄인과 의로운 자는 철저히 구별되며 죄인들이 의로운 자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듯이 사탄이 주의 거룩한 천사들 사이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욥기 1:6, 2:1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 누구의 천사인지 가린다면 '마귀의 천사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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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1:28-31절의 첫째와 둘째에 관하여
질문 : 마태복음21:28~32절을 보면 한글개역과 개정은 첫째, 둘째 아들이 바뀌어 있습니다. 킹제임스나 여러 번역들에는 첫째가 돌이켜 왔고 둘째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있는데 개정과 개역은 첫째는 돌이키지 않고 둘째가 돌이켜 왔다 이렇게 번역되어있습니다.
사실 야곱과 에서, 이스마엘 이삭 모두 둘째에게 복이 돌아가잖아요? 성경 전반적으로 첫째보다 둘째에 주님께서 역사하심을 많이 봅니다. 굉장히 중요한 구절임을 느껴서,,,어느 것이 옳은지,,왜 또 이렇게 번역됐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교회 Guest Book에 보혈이란 닉네임을 사용하신 분이 주신 질문입니다.

답변 : 먼저 본문을 봅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첫째에게 가서 이르되, 아들아, 오늘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는 그 뒤에 뜻을 돌이켜서 갔고 그가 둘째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매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고는 가지 아니하였느니라.](마21:28-30).
질문과 답변은 31절에 있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첫째 아들이라,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 (마 21:31).
본문의 핵심은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은 '말'로 Yes, No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Yes, No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세의 율법을 따라 안식일이나 절기 준수, 음식 규례, 십일조, 성전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1.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2. 아버지의 뜻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은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것.-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것이니 곧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 것이니라.](요 6:4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요 6:29).

입술과 말로만 "주여, 주여"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율법대로 하겠나이다. 행하리이다. 다 지키리이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의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침례인 요한의 증언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에게서 침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더라.](눅7:30).
창기와 세리들은 말로나 행위로나 주의 율법을 지키는 일을 거부했지만 그들은 침례인 요한의 증거를 듣고 회개의 침례를 받았고, 복음이 선포될 때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논점은 여기까지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과 같은 식으로 대입하거나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과 크리스천으로 대입해서 둘째가 회개하고 주의 뜻을 행한 것으로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 구조와 맞아 떨어지고 옳다고 생각하는 분들 중에 킹제임스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둘째는 처음에는 주의 말씀을 듣고 거부했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이 되는데 성경에서 언급되는 둘째들, 즉 아벨, 이삭, 야곱, 교회, 크리스천들은 처음에 주의 말씀을 듣고 곧 바로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거부했다가 후에 믿은 것이 아닙니다. 고로 이들을 그렇게 대입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본문이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해석이 나와야지 해석에 맞추어 성경(단어)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본문을 바꾸어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첫째는 당시의 창녀와 세리들이고 둘쨰는 당시의 종교인들(바리새인들, 서기관, 율법사들, 장로들)입니다. 그럼 문제는 매우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본문을 잘못 파악하고 성경이 틀렸다거나 다른 번역이 옳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이와 다른 성경이 틀린 것입니다.

바른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이해가 쉬운 방향으로, 해석에 맞추어 성경 본문을 뜯어 고치는 짓을 합니다. 성경 신자라면 그러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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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나님의 어린 염소로다!
질문. 유월절 희생물로 "양이나 염소 중에 1년 된(미만) 수컷"을 희생물로 취해도 되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염소로다!"란 말이 성립됩니까?
대답. 출애굽기 12:5절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질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린양을 취하라'고 하셨지 '떼'(flock)를 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의 어린양은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라. 너희는 양이나 염소 중에서 그것(어린양)을 취하고](출 12:5). flock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flock 에서 어린양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미 저희 질문과 답변란에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지만 반복된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먼저 이 글을 참조해 주십시오. <양이나 염소 중에서 그것을 취하고>

부패된 역본들은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 양과 염소 중에서 아무 것이나 취하라.
2. 양이 없으면 염소 중에서 취하라.

흠정역을 사용하지만 해석이 잘 안 되는 분들은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3. 양이나 염소는 같은 (가축) 떼이므로 상관없다(?).
이 주장을 하는 분들이 근거 구절로 잡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만일 그의 헌물이 떼 곧 양이나 염소 떼에서 취한 태우는 희생물이면 그는 흠 없는 수컷으로 가져다가] (레 1:10). flock= lamb, goat. -태우는 희생물(번제 헌물)로 사용되는 동물.

이것은 '유월절 양'이 아니라 '번제 희생물'입니다.
태우는 희생물은 양이나 염소 아무 것이나 수컷이면 됩니다.
자원 헌물도 마찬가지로 양이나 염소 아무 것이나 됩니다(레22:19).
범법 헌물은 양이나 염소 떼에서 아무 것이나 가능하며, 양을 가져오지 못할 경우 비둘기를 가져 오는 것도 가능합니다(레5:6).범법 헌물로 비둘기를 취해도 된다고 해서 "양=비둘기"라고 할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희생 헌물은 주님께서 문자 그대로 명시해 주셨습니다. 헌물은 사람이 임의로 제정하지 못합니다.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모든 헌물에는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신 헌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양이라고 한 것은 양, 염소라고 한 것은 염소, 소라고 하면 소를 취해야 합니다. 양이나 염소라고 하면 둘 중에 양이나 염소를 선택해서 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종류, 년 수, 색깔, 성별을 지정하시면 그 역시 문자 그대로 따라야지 멋대로 필요에 따라 해석하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 신자들 중에서도 태연스럽게 1,2번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께서 유월절 희생양은 분명히 '양'이라고 지정해 주셨습니다. 떼(flock)는 양 떼, 염소 떼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염소를 드려도 된다고 본문을 슬쩍 변개해서 해석인양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월절 규례를 읽다가 갑자기 번제 헌물이나 죄 헌물, 범법헌물, 자원 헌물에 관한 성경 구절을 끌어 와서 해석을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양은 염소가 아니고 염소는 양이 아닙니다.
번제 헌물로 떼(flock=양떼 또는 염소떼) 중에서 양이나 염소를 취하라는 말씀을 유월절 어린 양은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라는 구절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 떼 중에서도 가능합니다(신16:2).
이 구절로 양이나 염소가 다 된다면 염소 뿐 아니라 소도 됩니다. [그러므로 너는 양과 염소 떼나 소 떼에서 취하여 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 희생물을 드리되] (신 16:2). 유월절 어린 양은 "양 또는 염소 또는 소"가 되어 버립니다. *flock, herd.
본문을 볼 때 '목적어'를 유념해서 보십시오. 출애굽기 12:5의 목적어는 '어린양'입니다. [너희의 어린양은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라. 너희는 양이나 염소 중에서 그것(어린양)을 취하고](출12:5). 글자만 읽을 줄 알면 됩니다. 주님은 희생물의 종류(이름), 상태, 년수, 성별을 명시적으로 지정해 주셨습니다.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해석을 믿지 말고 성경 기록을 믿는 것이 옳고 안전합니다.
만약 몇몇 성경 해석가들의 주장대로 양이 염소(양대신 염소, 양 또는 염소, 양이나 염소)라면 주님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염소로다!"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어린 염소가 되신 예수님(?)"- 참 웃지 못 할 일이지만 현재 교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 참고로 부탁드립니다.
때로 독자들 중에 이 싸이트에 있는 답변 내용이 다른 교회, 목회자, 명망 있는 학자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반복적인 질문(확인을 위해서, 시험을 하기 위해?)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한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과 다르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과 다르다...이런 식입니다. 그 분들 중에는 제가 존경하고 같은 믿음의 사람, 같은 성경을 사용하는 분들도 있지만 제가 그 분들과 모든 부분에서 정확히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성경을 사용하더라도 성경을 이해하는 깊이와 정도가 다르면 해석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각자 주님께 받은 말씀의 빛, 성령의 조명의 강도에 따라 같은 구절이라도 해석이나 설명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 점을 깊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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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들에게 드리는 희생물
질문. 죽은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는 마귀들에게 드리는 희생물인가요?
답변. 예, 그렇습니다.

"제사는 전통 풍습이다. 조상은 우상이 아니다." 등의 논리로 기독교인들 중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캐톨릭은 제사를 엄격히 금지했다가 교리가 바뀌어 제사를 허용하며 '위령 미사'를 드리고, 각 가정에서 어떻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설이나 한가위는 조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고, 조상과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해야 할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입니다. 교회는 죽은 조상들이 연옥단련을 마치고 천국에 올라 영원한 복을 누린다고 믿습니다. 본당에서는 설과 한가위의 명절에 돌아가신 할머니, 부모나 형제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합동위령미사를 지냅니다. 또한 가정에서는 정성껏 차례음식을 준비하고 차례를 지내어 조상에게 효도의 마음을 표시합니다."
-천주교 명절과 제사 예식 중에서 발췌-

덕분에 장로교를 비롯한 개신 교회들이 성경 말씀이 아니라 조용히 캐톨릭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습니다. 조상 제사는 윤리나 예의범절, 전통으로 내려온 풍습이 아니라 가신 숭배, 조상신 숭배입니다.
죽은 조상에게 드리는 희생물은 조상신에게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조상신은 삼신(천신, 지신, 인신) 숭배와 더불어 ‘조상신’을 섬겼습니다. 대부분의 종가 집에서는 조상단지를 모셨고, 가신을 섬겼습니다. 제사는 유교적 윤리가 아니라 종교적 의식이요, 가신 숭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이 아니라 가신, 조상신, 삼신 등에게 드리는 희생물이 제사입니다. 추석, 설 등에 드리는 제사는 모두 마귀들에게 드리는 희생물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들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리나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곧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너희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신들, 새로이 일어난 새로운 신들에게 드렸도다.](신 32:17).

교회들 중에서 차마 제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추도식을 하도록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는 제사의 본질을 알지 못한 무지로 속은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이라 불리는 헛된 행실에서 구속 받았고 더 이상 행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벧전 1:18)
마귀들에게 희생물을 드리는 크리스천이 없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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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좁은 길
질문. 구원의 문은 좁습니까? 구원의 길은 좁고 협착합니까?
답변. 예, 좁고 협착합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을 뿐 구원이 어렵다, 힘들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너무나 단순하고 쉽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구원의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은 쉽지 않다, 구원은 어려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시한부 종말론자, 환란 통과론자, 구원의 보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외치는 주장합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이런 말은 상당히 위협적이기도 합니다.
자, 성경 말씀을 봅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마 7:13-14).
이 말씀은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렵다, 힘들다는 말씀으로 적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는 구원 받은 이들이 끝까지 견뎌서 저 하늘에 올라가는 사람이 적다는 식의 해석 역시 본문의 오해요, 오류입니다. 하나님도 성경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라 "많고 적고"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일은 인간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렵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재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선을 행하거나 덕을 쌓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누구나 초청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마11:28). 주님은 반복해서 "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다, 원하는 자는 다 오라고 하십니다. 다(all)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계22:17).

주님 자신이 문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니라.](요 10:7).

주님 자신이 길이십니다.
[나는 길이요...](요14:6).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히 10:19)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문이시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이 본문의 요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어렵다, 믿기가 어렵다, 구원이 어렵다는 말씀이 아니라 '적다'고 말씀합니다. 구원,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고, 믿음이란 방법 외에 없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몇 백, 몇 천 가지의 방법과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무엇을 믿든, 무엇을 하든 그 끝은 사망의 길이요, 지옥이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인데 멸망하는 방법은 한 가지를 제외한 전부입니다. 그래서 넓은 문, 넓은 길입니다.

자, 묻습니다. 사람이 구원 받고자 하면 구원의 길, 구원의 문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유일한 길이요, 문입니다. 그 분을 믿는 것 한 가지 뿐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 찾는 이가 적다.
사람이 지옥으로 가고자 한다면 멸망의 길, 멸망의 문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무엇을 해도 멸망으로 자연스럽게 인도됩니다. 사람이 살면서 아무 것이나 무엇을 해도 그 길은 멸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문은 멸망의 통로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넓은 길, 넓은 문: 찾는 이가 많다.
복음을 믿고 구원 받은 이들에게 이 구절을 인용해서 "성도들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극소수의 믿는 자들, 선택 받은 자들만 들림 받고 나머지는 대환란을 통과해야 한다거나 많은 이들이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식의 가르침은 본문을 완전히 오도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14은 믿지 않는 자들이 구원의 "유일한 문이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좁은 문, 좁은 길)를 찾는 이가 적다는 말씀이지 구원이 어렵거나 힘들다는 말씀이 아니며,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이 저 하늘에 들림 받는 일이 어렵거나 힘들다는 말씀은 더욱 아닙니다.
교회 내에 그런 가르침을 은근히 설파하는 이들에게 말씀을 보여 주고 책망하고 바로 잡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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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자만 구원 받나요?
질문. 계시록3:5에서 "이기는 자"는 주님께서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럼 '진 자'는 지워 버리시는 것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기는 자는 예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 그리고 믿음입니다. 그럼 진 자는 믿지 않는 자들, 마귀, 마귀에게서 난 사람들(불신자들), 입니다.

다음 설명을 유념해서 보시고, 반복해서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참 신자만 구원 받는다, 이기는 자만 들림 받는다." 등등의 교리는 매우 오랫동안 교회 내에 스며든 누룩입니다. 구원의 보증을 반박하거나 뒤엎고자 들이미는 구절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기는 자 곧 그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5).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계 3:5).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 한해서 생명책에서 이름을 삭제하지 않으시고, 승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름을 삭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강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구원의 안전, 보증, 약속의 말씀이 어떤 이들에게는 위협, 불안, 공포를 야기하는 말씀이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럼 이기는 자가 누구입니까?
신학자들, 원어를 들먹이는 사람들의 견해는 접어 두고 일단 주의 말씀을 통해 정의해 봅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이기신 분입니다(요16:33).
세상을 이기셨고, 마귀를 이기셨고, 사망을 이기셨고, 지옥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2. 하나님은 심판의 때에 모든 심판에서 다 이기십니다(롬3:4).
3. 주님은 성도들에게 승리를 선물로 주십니다. 승리는 구원과 마찬가지로 '선물'입니다. 구원, 영생, 성령이 선물이듯이 승리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7).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그분을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고후 2:14).
4. 크리스천은 승리자입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보다 더 크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요일4:4).
5. 하나님께 난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당신 안에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성령, 예수 그리스도, 믿음, 구원, 영생....너무 많습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6.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요일 5:5).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인가? 그것만 분명히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성도, 크리스천)은 이기는 자입니다.
현 시대의 크리스천은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았듯이, 승리를 선물로 받아 '이기는 자들'입니다. 크리스천은 기본적으로 사망을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세상을 이깁니다. 크리스천을 가리켜 성경은 "성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분의 형제, 친구,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스도의 대사, 그리스도의 신부, 지체" 등등으로 말하는데 표현은 달라도 모두 동일한 대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기는 자"는 믿는 자, 크리스천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기는 자는=믿는 자는=성도는= 크리스천은....이렇게 대입됩니다.
고로 이기는 자는 주님께서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지 않는다는 말씀은 지극히 당연한 약속이며, 오히려 강력한 구원의 안전과 보증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크리스천은 구원 받은 자이며, 사람들의 눈에 행실이 별로 의롭지 못하더라도 의로운 자요, 거룩해 보이지 않아도 거룩한 자요, 역겹게 구는 자들로 보여도 씻음 받은 자요 정결한 자라고 말하듯이 매일 패배자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성경은 그를 '이기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행위, 성품, 인격, 삶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 씻음 받은 자, 거룩한 자, 정결한 자, 선한 자로 이미 확증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크리스천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육신, 죄, 세상에 휘둘리며 산다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란 말씀에 대해 성경적 정의, 개념을 분명히 잡으십시오. 자기 자신이 기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의 기준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새로운 창조물이듯이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승리자입니다. 모든 기준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교회 내에 스며든 거짓 교사들이 참으로 많은 때입니다. 기록된 말씀 대신 말씀을 뒤틀어 추측과 가정으로 펼치는 논지는 정확히 기록된 말씀을 펴서 답변해 주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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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구원 받은 사람?
질문. 지옥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 있나요?
답변. 지옥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딱 2명 있습니다.

역사상 지옥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딱 2명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구원 받은 사람: 요나, 예수 그리스도.

1. 예수님.
[나를 향하신 주의 긍휼이 크사 주께서 내 혼을 가장 낮은 지옥에서 건지셨나이다.](시 86:13).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행 2:27).
주님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지옥을 지으신 분도 주님이시며 주님이 지옥에서 나오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2. 요나.
[이르되, 내가 내 고난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내가 지옥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욘 2:2).
요나는 자기 민족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으로 "죽음, 지옥, 부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마12:40-41).
이 외에 지옥에서 건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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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회적 회개?
질문. 크리스천은 구원 받을 때 단 한번만 회개하는 것이 맞나요? 이 문제로 전에 서울의 한 성서 침례교회가 두 개로 쪼개졌습니다.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그렇지 않습니다.
단회적 회개만 인정하는 구원파 및 일부 성서침례교회 이단들에 대해 우리는 성경을 펴서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회개-버리고 돌이키는 것, 떠나서 돌이키는 것이다.

논점.
회개하면 죄인이 되므로 구원을 못 받는다. "한번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죄가 실제로 전혀 없어지므로 온전한 의인이 되어진다." 회개는 일생에 단 한 번이다. 이것은 중생(구원)의 개념이다! -구원파, 일부 성서 침례교회의 교리적 주장.

성경적 예와 말씀을 봅시다.
욥은 회개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니라.] (욥 42:6).

다윗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했다. 삼하24:10, 대상21:8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센 뒤에 그의 마음이 그를 찌르므로 다윗이 주께 아뢰되, 내가 행한 일로 인해 크게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이제 간청하옵나니 주의 종의 불법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삼하 24:10)

에브라임은 회개했다.
[내가 돌이킨 뒤에 확실히 회개하였고 내가 교훈을 받은 뒤에 내 넓적다리를 쳤나이다. 내가 어린 시절의 치욕을 짊어졌으므로 부끄럽고 참으로 당황하기까지 하였나이다, 하였도다.] (렘 31:19). 18절을 겸하여 읽어 보라.

주님의 징계를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에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회개하고 너희 자신을 돌이켜 너희 우상들을 떠나라. 너희의 모든 가증한 것에서 너희 얼굴을 돌리라.](겔 14:6).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심판하되 각 사람을 그의 길대로 심판하리라. 회개하고 돌이켜서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라. 그리한즉 불법이 너희를 황폐하게 하지 아니하리라.](겔 18:30).

이것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범죄 할 때마다, 징계를 받을 때마다 해야 하는 반복적인 것이다! 회개가 믿는 형제들 간에도 반복적이란 사실은 우리 주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하거든 그를 꾸짖고 그가 회개하거든 그를 용서하라. 그가 만일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범법하고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돌아와 이르기를,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그를 용서하라, 하시니라.](눅 17:3,4).

크리스천들은 구원 받은 후에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고후7:10).

성경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에 대한 경고한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 가운데서 낮추실까 염려하며 또 죄를 짓고도 자기가 범한 부정한 일과 음행과 색욕을 회개하지 아니한 많은 자들로 인하여 내가 슬퍼할까 염려하노라.](고후 12:21)

죄를 깨닫게 함으로 '회개'를 돕는 것은 말씀 선포와 성경 교육의 주요 사역이다.
[스스로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딤후 2:25).

회개가 필요한 교회들-
회개가 단회적이라면 교회는 회개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들에게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하라."고 명령하신다.
계2:5, 2:16, 2:21, 22, 3:3, 3:19

주님은 회개하도록 책망하고 징계하신다.
크리스천들이 스스로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고 말씀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을 때 주님은 '책망하고 징계하시는데' 이는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계3:19).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한다. 주님은 하루 일곱 번씩 일흔번씩이라도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크리스천은 죄인이란 말을 쓰면 안 된다느니 자백은 하되 회개는 해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주장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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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영 ------ 댓글쓰기
정확하지도 않는 말로 다른 교단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구원파의 설교를 들어보면...
회개는 2종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1) 죄인이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깨닫고 구원받기 위하여 돌이키는 것, 즉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눅24:47) 생명을 얻는 회개(행11:18)...막1:15, 행2:38, 3:19 등
2)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용서를 구하는 것(계2:4-5)... 이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됨, 이렇게 구분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어떤 교단을 구체적인 사례로 드셔서 말씀하시려면 정확히 확인해보시고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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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침례교회 성도가 제게 질문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니 제게 뭐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그 교회(교단?)가 그런 교리가 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 교회에서 목사님이 출타시에 설교하는 그런 형제가 그렇게 제게 말해서 그러려니 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일부 성서 교회"라는 말을 넣은 것입니다.
질문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답변은 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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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하지 말라니
질문. 주님께서 누가복음 10:4에서 제자들에게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답변. 아래 설명을 읽으십시오.

먼저 본문을 봅시다. [돈주머니나 짐 보따리나 신을 가지고 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고 어느 집에 너희가 들어가든지 먼저 이르되, 이 집에 화평이 있을지어다, 하라.] (눅 10:4,5)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 몇 가지 수칙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고’(눅10:4)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길에서 문안하지 말라는 것은 ‘호의나 신세’를 지고자 하는 그런 부탁을 염두에 둔 인사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0:4,5은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제자들이 길에서 “우리는 지금 복음 전도 여행 중입니다, 선교 여행 중입니다, 주의 사역을 위해 보내심을 받아 가는 중입니다...” 이런 식의 문안 인사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단기 선교를 떠나는 사람들이 몇 달 전부터 이런 문안 인사를 하면서 은근히 기부, 헌금, 후원을 기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전적으로 주님만 신뢰하고 가라는 것이지요. 길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안녕하세요?’와 같은 인사조차 말고 뻣뻣하게 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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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당한 아브라함?
질문. 아브라함은 땅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답변.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반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생전 아무도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 주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까?

다음 두 구절을 보십시오.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영원히 주리라.](창 13:15).
[또 그분께서는 그 땅 안에서 그에게 발 디딜 만큼의 상속 재산도 결코 주지 아니하셨으나...](행7:5).
만약 사람에게 이생이 전부라면 아브라함은 주님께 약속을 받았을 뿐 평생 한 뼘의 땅도 받지 못한 채 죽었으므로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삶이 전부인고로 주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것이 되고, 그들은 속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생전에 아브라함이 기거하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산 175년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히 삽니다. 아브라함은 부활했습니다(구약 성도의 부활). 아브라함은 주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모두 소유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죽어 없어진(사라진)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저 하늘에 주와 함께 있습니다.
75세에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와 175세에 그 땅에서 죽었던 아브라함은 100년 동안 한 평의 땅도 받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 파기, 소멸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살아 계시고, 아브라함 역시 살아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영생, 부활을 확증해 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산 자의 하나님’이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대로 땅을 ‘영원히’ 소유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약속은 이 땅에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유효하지만 주님의 약속은 영원히 유효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부활, 산 자의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생전에 땅을 받지 못함으로 도리어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고한 보증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 그 유효 기간은 육신의 생명, 이생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매](마 22:32).
[그분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사람이 그분을 향해 사느니라, 하시니라.] (눅 20:38).
아래 구절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머무르라.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게 복을 주리라. 내가 이 모든 지역을 너와 네 씨에게 주고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행하며](창 26:3).
[또, 보라, 주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주니 곧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니라.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주리니](창 28:13).
[네 씨가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지며 너와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창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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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준비하라?
질문. 주님께서 누가복음 22:35-38에서 제자들에게 돈, 짐 보따리, 칼을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이전에 한 말씀과 정반대입니다. 왜 돈과 짐 보따리,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답변. 아래 설명을 읽고 이해하십시오.

누가복음 22:35-38절입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주님의 명령으로 전도 여행을 다닐 때 제자들은 돈이나 옷, 지팡이, 칼 등이 전혀 필요치 않았습니다.
주님이 필요를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부족함이 없는 공급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목전에 둔 지금은 정 반대로 그런 것들을 챙기라고 하십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현재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자들은 주님 없는 날들을 보내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아무리 말해 주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잠시 후면 잡혀 죽게 되는 시간이 되었음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전에 체험했던 그런 체험을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당장 그 날 밤에 주님이 체포되는 것을 목격하고, 곧 죽게 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칠 것이고, 언제 체포될지 몰라 숨어야 합니다. 먹고 입을 것을 걱정해야 할 판입니다. 지금까지 아무 것도 없어도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주님 없는 날들을 보내야 합니다.
부활을 믿었다면 3일만 견디면 되지만 부활도 믿지 않으니 이들은 주님의 잡히심부터 죽으심, 그 이후의 날들에 모든 것이 다 필요합니다.
옷, 짐 보따리, 돈, 칼 ....모두 필요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앞으로 몇 일간 겪을 일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이제 돈주머니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짐 보따리도 그리하고 칼이 없는 자는 자기 옷을 팔아 하나를 살지어다.] (눅 22:36)

제자들이 필요한 것
1. 돈주머니 – 전도 여행 때와 달리 음식을 사 먹어야 한다.
2. 짐보따리 – 옷가지를 비롯한 물품들을 스스로 충당해야 한다.
3. 칼- 자기 보호, 방어를 위해 칼이 필요하다. 예수님 없는 그들의 날은 위험과 공포 그 자체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칼을 준비해서 누구를 상하게 하거나 전쟁을 치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고, 칼의 사용을 금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 기독교를 칼의 종교, 제국주의 종교, 정복의 종교로 이해하거나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떤 목회자들은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비유로 봐야 한다, 난해 구절이다 등등의 말을 합니다. 아주 쉬운 구절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분명히 알려 주고, 그들의 불신으로 겪게 될 일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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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가 도둑입니까
질문. 가룟 유다가 도둑입니까?
대답. 예
"12 사도의 스승은 하나님이셨고, 12사도 중 하나는 마귀였다!"란 말은 정확하게 성경적 진리입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이면서 ‘도둑’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친히 부르시고 택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전직(前職) 도둑이었다가 부름 받아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던 제자 시절 돈을 훔치는 현직 도둑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12사도 중 회계 담당자로서 돈 가방을 맡았는데 공금을 유용해 ‘자기 밭’을 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요, 도둑이므로 돈 가방을 맡아 그 안에 든 것을 가져갔기 때문이더라.] (요 12:6).
유다는 도둑이다.
유다는 돈 가방을 맡아서 그 안에 든 것(돈)을 가져갔다.
그럼 그는 그 돈을 어디에 사용했습니까? 자기 땅을 샀습니다. 부동산 투기? 노후 대비?
[이제 이 사람이 불법의 대가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한가운데가 터졌고 그의 창자가 다 흘러나왔으므로] (행 1:18).
누가 밭을 샀습니까? “이 사람이‘(가룟 유다) 밭을 샀습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면서 헌금을 사적으로 착취했습니다. 자신이 산 밭에 자신이 거꾸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 밭은 유다가 예수님을 판 대금인 은 서른 개로 산 것이 아닙니다. 그 돈은 되돌려 주었고, 수제사장들이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매장지로 사용했습니다(마27:6).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링크 글을 참고하십시오. *두 개의 피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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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어린 애와 결혼할 수 없으시다?
질문. "주님은 어린 애와 결혼할 수 없으시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답변.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이다(벧전2:2). 그래서 누구나 성장이 필요하다(벧후3:18). 그런데 이 진리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이란 진리에 대입해서 갓 거듭난 크리스천이나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천은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없다는 기괴한 논리를 전개하는 이들이 있다. 전에 필자에게 이런 주장을 하던 메시아닉 신자가 있었는데 어제는 지방 교회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적 진리를 언제나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다. 교회 내에서는 문자적 해석이 필요한 것은 영적으로 이해하고 영적인 진리는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부류가 있다.

성경의 예를 보자.
니고데모는 영적 거듭남을 몸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물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성령의 생수를 우물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에게 그 물을 주어 더 이상 물 길러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님께 부탁했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육신의 살과 피로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의 살과 피를 줄 수 있는가? 하며 반문했다.
사두개인들은 여러 형제와 결혼한 여자는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물었다.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누룩을 빵의 누룩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빵을 가져 오지 않는 문제로 의논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영적으로 무지하고 눈 먼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영적으로 갓난아이들과 결혼할 수 있는가? 이런 무지한 질문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과 교회의 결혼" 을 세상의 남자와 여자가 몸과 몸이 결합하는 결혼으로 생각함으로 주님은 "어린 애와 결혼할 수 없다."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오류의 논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침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자신이 결혼할 신부만을 데려가시는데 어린 애는 결혼할 수 없으므로 제외된다는 기상천외한 말이 나온다. (메시아닉, 지방 교회 등).
크리스천 개개인이 그분과 결혼한다면 신랑 한 명에 신부는 몇 백만, 몇 천만이 가득 찬 일대 다수의 합동결혼식(?)이 되는가? 예수님은 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할 뿐이다(고후11:2). 예수님에게는 '정결한 한 명의 신부'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께 속한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는 내가 너희를 순결한 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한 남편에게 너희를 정혼시켰기 때문이라.] (고후 11:2).
단 복수를 유념해서 보라. 너희를 (복수)-한 처녀(단수). 한 남편(단수), 너희를 정혼(복수).
주님은 한 처녀를 신부로 맞이하신다. 교회는 그분의 신부이다. 교회는 성도가 몇 명이든, 나이가 몇이든, 구원 받은 연수가 몇일이 되었든 모두 "한 몸"이다. 모든 크리스천은 일찍 구원 받았거나 갓 구원 받았거나 한 몸이요, 한 처녀이다. 어린 성도는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주님과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은 영적 진리를 육신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는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나이까?” 란 질문보다 더 무식한 말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문에 현답을 줄 수 있도록 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각 사람이 서로 지체이니라.](롬 12:5).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고전 10:17). 성도들이 몇 명이든지 한 몸이다. 갓 거듭난 사람은 이미 한 몸에 참여한 자이다.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전 12:12-13). 한 몸에 들어오지 못한 크리스천은 없다!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어제 구원받았든 오늘 구원 받았든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이다. 고로 '주님은 어린 애와 결혼할 수 없으시다.'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는 자들에게 바른 깨우침을 주도록 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은 몸과 몸이 결합하는 결혼이 아니라 ‘영과 영’이 결합하는 결혼이다. 고로 다시 태어난 지 하루가 된 성도이든 40년이 넘은 성도이든 주님과의 영적 결합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듯이, 거듭난 사람이 아무리 어려도 그가 주님의 신부가 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주와 결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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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목사는 다른 직분입니까?
질문. 감독과 목사는 다른 직분입니까?
답변. 같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감독, 장로, 목사(자)는 정확히 같은 직분입니다.
목사(Pastor)란 말은 성경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주님께서 지역 교회에 선물로 준 사람들이 있는데 ‘사도, 대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엡4:11)입니다. 성경에서 목사란 말보다 더 자주 사용되는 말은 ‘감독’입니다.
사도직은 감독직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사도직을 일컬어 베드로는 “그의 감독직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행1:20)라고 말합니다. 사도=감독입니다.
사도들은 초대 교회에서 감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지역 교회에 장로들을 선임했습니다. 집사는 회중의 성도들이 선출했습니다. 식탁을 섬기는 행정직, 봉사직을 집사들에게 위임하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습니다. 감독은 교회의 행정을 총괄하는 직분이 아니라 말씀 사역과 기도에 전념하는 직분입니다. 감독은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의 직분이지 집사의 역할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지역 교회들의 장로들을 불러서 당부의 말을 전하면서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의 교회 곧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먹이게 하셨느니라.](행20:28)고 말합니다. 장로=감독자입니다.
하나님은 감독들에게 교회를 먹이게 하셨습니다. 양들을 먹이는 일, 목자의 역할은 정확히 감독의 직무입니다. 목사와 감독은 다르지 않습니다.
자, 주목해서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라고 하십니다. 감독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 교회 목회자들이 자신이 주께 받은 사명, 소명으로 여기는 설교, 성경 공부, 양들을 돌보는 일이 모두 ‘감독자’로서의 직무입니다. 감독은 결코 교회 행정이나 치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었습니다. (빌1:11). 감독은 목사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디도서 1장에는 감독의 자격 요건을 다룹니다(딤전3: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딛1:7). 감독=하나님의 청지기.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는 이들이 감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딤후4:22 뒤를 보십시오. 디도는 크레테 사람들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이 역시 킹제임스 성경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도서 3:15 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혼의 목자요 감독이십니다(벧전2:25).목자=감독이란 뜻입니다.
오늘날 신약 교회에서 ‘목사’라 칭하는 목자의 역할, 직분은 정확히 감독의 역할과 직분입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벧전 5:2).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이것은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직분으로 주신 것입니다. 감독이 할 일은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목자들을 감독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사도였고, 자신을 장로라 불렀고, 감독이었고, 양들을 먹이는 목자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목자)라고 말하는 직분은 성경에서 말하는 감독을 일컫습니다.
이런 감독직을 사모하는 이들은 딤전3장, 디도서1장을 유념해서 보아야 합니다.
지역 교회에서 목사 따로 감독 따로 각각 세운다는 말은 비성경적입니다. 감독은 교회의 치리를 맡고, 목사는 설교와 성경을 가르치는 직무를 맡는다는 말은 감독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감독이 양들을 먹이고 돌보고 주의하고 감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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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인도에 갔나요?
질문. 예수님이 12살 이후로 인도에 갔다는 말이 있던데 무슨 말입니까?
답변. 어떤 소설가가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아기일 때 이집트로 간 적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12살 이후로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가 30세에 갑자기 등장함으로 18년간 예수님이 인도나 티벳이나 기타 어떤 지역으로 여행했을 것이란 추정은 매우 흥미 있고 인기를 끈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 본 성도라면 12세 이후 30세 이전에 예수님은 나사렛에 거하신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칠 때 고향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 하지 아니하느냐? 그의 동생들은 야고보와 요세와 시몬과 유다라 하지 아니하느냐? 그의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 모든 것을 얻었느냐? 하고] (마 13:55-56).
나사렛 사람들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일컬어 목수의 아들이요, 그의 어머니가 마리아란 사실과 그분의 형제 관계를 다 알고 있습니다. 어릴 때 집을 나가 18년간 외지에 있다가 돌아왔다면 이런 증언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지혜를 들은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늘 자신들과 함께 있었기에 “그런데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 모든 것을 얻었느냐?”고 외친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있던 그가 어디에서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는가? 란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12세 이후 30세 이전에 나사렛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마13:57절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입증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분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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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의 원문이 히브리어나 아람어일 가능성은 없나요?
질문. 신약 성경의 원어는 헬라어(그리스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나 아람어일 가능성은 없나요?
답변. 주님은 히브리어, 아람어를 사용하셨지만 신약 성경은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원본, 원어가 아람어란 주장을 신학 용어로 “Aramaic primacy”라고 합니다.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Aramaic_primacy
필자의 집 앞에 아람어를 쓰는 크리스천 집안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셨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누구나 언어적 민족적 자부심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유대인들은 신약 성경의 원문은 히브리어라고 주장하고, 무슬림들은 아람어라고 주장하고, 서구 기독교는 헬라어라고 주장합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에는 아람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아람어 단어
* 탈리타 쿰(Ταλιθα κουμ) 또는 달리다굼
* 에파파타(Εφφαθα)
* 아바(Αββα) 또는 압바
* 라카(Ρακα) 또는 라가
* 맘몬(Μαμωνας)
* 라보니(Ραββουνει)
* 마라나 타(μαρανα θα)
*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Ηλει Ηλει λεμα σαβαχθανει)
또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욧과 티틀(ἰῶτα ἓν ἢ μία κεραία) (일점일획으로 번역)
* 고르바나스(κορβανας) 또는 고르반
* 호산나(ὡσαννά)

아람어 이름
* 보아너게스(Βοανηργες) 또는 보아너게
* 케파스(Κηφας) 또는 게바
* 토마스(Θωμας) 또는 도마
* 타비타(Ταβειθα) 또는 다비다
당시 유대 땅에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라틴어가 모두 사용되었는데 일반 생활 언어로 아람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본래 성경의 언어였습니다, 아람어는 바빌론 포로 70년을 거치면서 돌아와 일상 언어가 됩니다. 포로기에서 돌아온 세대들은 모국어인 히브리어에 어려움을 겪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아람어가 완전한 일상 언어로 자리 잡습니다.
알렉산더의 영향으로 헬라어는 오늘날 영어처럼 공식 외국어로 일상화됩니다.
로마 병사들은 라틴어를 썼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에 라틴어는 공문서에 사용되는 공식 언어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적힌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이란 말은 그리스어(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눅23:38, 요19:20). 그래서 유대인들 뿐 아니라 당시 그곳을 지나가는 외국인들이라도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사도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까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일부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라고 주장합니다.
무슬림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아람어라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헬라어라고 주장합니다.
사본의 수나 증거 자료들에서 헬라어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 부분은 신앙적 영역이 아닌 객관적 자료요, 역사적 증거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를 확증합니까? 사본학, 원문 등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논쟁은 늘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럼 원문이니 사본 구경조차 해 보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가지고 논쟁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성경 자체 본문을 들고 답해 주면 됩니다.
주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헬라어 알파벳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신약에서 주님은 자신을 헬라어로 계시하시고 기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알렙과 타브요...”(히브리어 알파벳)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람어 이름에 관한 자료 출처: 위키피디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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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련 ---------댓글쓰기
전체 주장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맨 마지막에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주장은 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도 어떤 설명을 할 때, 지금처럼 전체 문장을 한국어로 써놓고 그 중간에 ABC를 이야기할 때가 있잖아요. 한국어 자모를 배운 기억보다 영어 알파벳을 처음 배운 기억이 더 생생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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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Yoon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설득력이 떨어지면 뭐가 가장 설득력이 있을까요? 설교나 글을 쓸 때 주의 말씀을 근거로 한 주장보다 더 설득력 있는 자료나 증거가 있을 수 있는지요? 적어도 성경을 믿는 신자라면 어떤 자료나 학설보다 주의 말씀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님도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방문해 주시고, 조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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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댓글쓰기
예수님이 나는 알렙과 타브로 말한 것을 기록자가 알파와 오메가로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왜냐면 예수님은 분명히 아람어로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헬라어의 알파는 말하지 않았을테니까요....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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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아닙니다. 생각은 자유지만 근거를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공생애 기간 땅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흔히 주님께서 땅에서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란 말은 추측입니다. 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셨고 일부 아람어 단어를 몇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신약 성경 기록은 사도들에 의해 헬라어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공생애 동안에 아람어로 말씀하셨다면 "알렙과 타브"로 말씀하실 수 없지요. 그것은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입니다. 요한에게 계시를 보여주실 때는 지상에는 이미 이스라엘이란 국가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주님은 정확히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주실 때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자체의 기록된 증거입니다. 영어로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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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 하마쉬아흐 ---------댓글쓰기
오늘날 우리가 읽는 신약성경은 헬라어 원본이 아니지요.(신구약 나누는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위에 멜기세덱님이 말씀하신 것에 한 표를 던집니다.
유대인 예수님이 헬라어로 말씀하신 것이 더 이상하지 않나요? 히브리어,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당시 신약성경이 쓰여 질 때가 로마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번역이 헬라어로 바뀐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듯싶어요.
또 하나 신약이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증거는 예루살렘에 있는 박물관에 히브리어 신약 원본이 있습니다. ^^ 박물관장 왈, 신약(새언약, 브릿 하다샤)성경이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지 묻는 자가 거의 없다고 ... 그러면서 보여주시더랍니다. 성경 본문에 근거를 두는 것, 맞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문화를 참고하여 봐야겠지요.
ex)헬라어로 율법은 노모스인데, 신약에 등장하는 모든 율법이 다 노모스가 아닌 토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싹 다 노모스로 번역해놨으니 완전 이해도 안가고...어렵기만 하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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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신, 구약을 나누는 일은 웃기는 일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하신 일이죠. 주님이 친히 '새 언약'을 체결하셨고 그 이후는 신약이죠. 아직도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 중에는 구약 속에 살고 있고 그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위에 멜기세덱님에게 한 표를 던지신다면 님은 신약 원본이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고 해야지요. 그런데 님의 주장은 히브리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신없는 사람들의 정신없는 주장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신약 성경이 있을 수 없지요. 크리스천들은 사도행전 7장에서 예루살렘에서 모두 쫓겨나 버렸고 신약 성경은 히브리인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방인 교회,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 교회에다 아무도 알아 볼 수 없는 히브리어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면 정신이 돈 것이죠. 로마 교회에 보낸 로마서를 히브리어로 써서 보내고 갈라디아 교회, 빌립보 지역의 교회에 히브어로 된 편지를 써서 보냈다는 생각 자체가 웃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인 한 명 없는 이방인 교회에 히브리어로 된 서신(성경)을 써서 보냈다? 그런 발상이 웃깁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어 원본은 원본이 아니라 마태복음 단 한 권인데 중세 스페인의 유대인 랍비들이 로마 캐톨릭으로 개종하든지 그 지역을 떠나든지 하라는 왕의 명령에 개종을 거부하기 위해 신약을 부득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 때 사용한 성경인데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공격하는 소재로 가끔 사용합니다.
오늘날 댁과 같은 분들이 압도적인 사본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믿고 싶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지요. 증거도 상식도 안 맞는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마음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쓰신 것이 아니라 훗날 사도들이 기록했습니다. 고로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습니다. 사도들이 유대 땅에서 아람어를 사용했다 해도 로마 교회에 보내는 로마서를 아람어로 쓸 이유는 전혀 없지요 . 당시 보편 언어였던 헬라어로 쓴 것입니다.
말씀하신 토라나 노모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는 law, 한국어로는 법으로 다 통합니다. 어려울 것도 이해 안 가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혼란한 사람들은 자국어에도 혼란을 느끼면서 원어 타령을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알렙과 타브가 아니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번역이 아니라 사도 요한에게 직접 그대로 한 말씀입니다. 작은 곳에서 진리를 확증할 수 있는 장치가 성경 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자체 증거...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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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댓글쓰기
언제나 그렇듯이 명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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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대하여라 함은?
질문.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말씀을 설명해 주십시요.
답변. 아래 설명이 있습니다. 차분히 읽고 정리해 두십시오.

주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9-11).
죄에 대한 책망은 주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죄라고 책망하십니다(요16:9).
의에 대한 책망은 주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사람들이 더 이상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 본문을 보십시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요 16:10).
왜 세상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을 못 봅니까? 주님께서 이방 땅으로 이민을 떠난 것입니까? 죽어서 묻혔기 때문입니까? 어딘가로 은둔해 버리신 것입니까? 왜 사람들이 주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입니까? 그분은 죽었고 묻혔지만 살아나셔서 하늘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상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완수하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죄인은 하늘로 갈 수 없습니다. 죄인은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정죄 받아 죽으셨던 분께서 다시 살아서(부활) 하늘의 아버지께로 가셨다면 그 분은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의로운 분이란 증거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이시란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고 저주 받았지만 친히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하나님의 ‘의'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이 아니라면 죽어서 지옥에 머물지 결코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셨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심으로 그분의 의를 증언해 주시고,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로부터 내려다보리로다.](시 85:11).
진리이신 분께서 부활을 통해 땅에서 솟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분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하늘로부터 내려다보십니다. 부활하사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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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쟁이들이 맞추는 운명, 미래는?
질문 :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운명 특히 세상에서 말하는 팔자라는 개인의 인생이 갖고 있는 운명이 있습니까? 없다면, 어떻게 점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몇 십 년 후 을 맞출까요? 있다면, 그렇다면 애쓸 필요도 ...그리고 불쌍하게 팔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 없습니다.
인생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점치는 자들이 사람들의 앞날을 예언하고 운명을 맞추는 것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언자들, 종들을 통해 뜻을 계시하시듯, 마귀는 마귀의 사역자들, 종들을 통해 사람들을 속이는 일을 합니다. 점은 마귀의 사역 중 하나입니다.

‘운명’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말, 인간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이 아닙니다. 굳이 ‘운명’이란 말을 쓴다면 그 운명은 사람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자는 지옥으로 가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신자는 하늘로 가도록 정해졌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지옥으로 갈지 하늘로 갈지는 각자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지옥, 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 의와 불의, 법과 불법, 선과 악"을 우리 앞에 두시고 우리에게 "택하라"고 명령하십니다(신30:19, 사7:15). 주님이 정해 주신 것이 있고, 그것들을 우리가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선택에 따른 결정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이 날 택하라 "(수24:15).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려니와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 -선택.
"...이로써 악을 거절하며 선을 택할 줄 알리니..." (사7:15,16).

※ 운명론-점쟁이들의 출현.
한국 기독교, 교회, 목회자들이 예언이나 기타 사람들의 과거나 미래를 점치듯이 말하고 그것이 딱 맞아 떨어짐으로 자신의 신령함, 영권 등을 보이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는 점치는 영에 사로잡힌 것이지 성령의 은사가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남의 미래, 운명 등을 말하려는 이런 노력은 한국 기독교의 뿌리, 바탕이 무속이란 강력한 증거입니다.
성령의 선물인 대언의 은사는 정확히 성경의 증언과 일치합니다.

1. 모든 크리스천들 안에서는 대언의 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대언의 영이니](계19:10).

2. 모든 크리스천들을 대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벧후1:19).

3. 모든 크리스천에게는 대언의 책이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계22:18).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율법과 증언에게 구할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사8:20).
가끔 아니면 자주 점쟁이들이 용하게도 사람의 길흉화복을 맞추는 예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참으로 간단합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대언자들이 있고, 마귀의 영을 받은 대언자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녀들에게 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공중 권세 잡은 자로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왕국)의 길흉화복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막으시거나 허락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왕국이 여기에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요18:36). 주님께서 “지금은...”이라고 하십니다.
현재 이 세상의 통치자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권능과 그 왕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내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리라.] (눅 4:6).
마귀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동양학이나 무속,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언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과 계획을 계시하듯이 마귀는 자기 종들(점쟁이, 마술사, 신접하는 자, 무당, 영성주의 기독교인 목사, 부흥사 등)을 통해 그런 일을 합니다.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마귀 역시 마귀의 사역자들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마귀의 일꾼.
마귀는 표적, 능력, 기적 등을 일으킬 수 있으며 택함 받은 자녀들까지 미혹합니다마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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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는 주님입니까?
질문. 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는 주님입니까?
답변. 예, 그렇습니다.

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실 때 '주의 천사'로 드러나셨습니다.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여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니라.] (창 16:10). “주의 천사가....이르되. 내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라고 해야 할 부분에서 '내가...'라고 합니다.
[주의 천사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말하되,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데리고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을 결코 어기지 아니하리니](삿 2:1).
주의 천사가 말하기를,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내가....내가..."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천사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절은 구약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천사장이 아니라 '주의 천사'입니다. 천사장은 '미가엘'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살전416).
잘 보세요. 주께서 천사장의 음성과 함께....내려오십니다. 천사장은 미가엘입니다.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며 논쟁할 때에 감히 그에게 욕설로 비난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르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 원하노라, 하였느니라.](유 1:9). 이 구절에 주목! 주님은 천사장 미가엘이 아닙니다. 주의 천사는 천사장이 아닙니다. "천사장 미가엘도.. 내가"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라고 합니다. 천사장 미가엘은 주의 천사가 아니고, 주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의 천사는 주님 자신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주의 천사'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장차 있는 본래의 모습 그 자체로 나타나십니다.
주의 천사가 주님 자신임을 계시하는 구절은 매우 많습니다.
[기드온이 그가 주의 천사임을 깨닫고는 이르되, 슬프나이다. 오 주 하나님이여!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주의 천사를 보았나이다, 하매](삿 6:22) .
여기도 주목해서 보세요.
[그러나 주의 천사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매 이에 마노아가 그가 주의 천사인 줄 알고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으나] (삿 13:22)
마노아는 주의 천사를 보았다고 말한 후에 곧 바로 '하나님을 보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천사는 주 하나님 자신입니다.
여호수아 앞에 선 천사가 바로 주의 천사입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이루셨던 분 주의 천사인데 그 분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육신하기 전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국 주의 천사란 뜻은 주님이란 뜻입니다.
The God, -gods, The LORD- lords, The Spirit-spirits, The Angel- angels, The Son of God -sons of God, The Apostle -apostles, The Son of man-sons of man. The King –kings, ....이런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주의 천사가 주님이신 것은 증명이 되었고, 천사장 미가엘이 주님이 아닌 것도 성경이 스스로 입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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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올리브 나무(롬11장)는 누구인가요?
질문. 로마서 11장의 좋은 올리브 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인가요?
답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로마서 11장의 좋은 올리브 나무를 '이스라엘 민족'으로 해석하거나 설명합니다. 성경 신자들의 주석에도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성경 기록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모두 무시하는 해석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상징(예표)하는 세 종류의 나무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1. 주님은 좋은 올리브 나무이며, 이스라엘은 '불이 타고 꺾인 올리브 나무'입니다(렘11:16).
2. 주님은 참 포도나무이며, 이스라엘은 '텅 빈 포도나무'입니다(호10:1).
[이스라엘은 텅 빈 포도나무요, 자기를 위해 열매를 맺는 나무로다.](호10:1).
3.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입니다(막11:13, 21).
우리 주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면서 올리브 나무는 좋은 나무라 하시고, 포도나무는 텅 빈 나무라 하시고,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하시는 것은 서로 짝이 맞지 않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주님은 동일한 대상에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되 같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주님은 일구이언하시거나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다르게 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참 포도나무가 주님 자신이듯, 좋은 올리브 나무 역시 주님 자신입니다.
올리브 나무이든 포도나무이든 무화과나무이든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나무는 좋은(good), 참(true)이란 말을 넣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입증됩니다.
로마서 11장의 좋은 올리브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대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 속에 들어와 '유대인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 하듯이 유대인들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증언은 창세기 12장에서부터 나옵니다.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민족,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므로](행3:25). 베드로는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어떻게 복을 받는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네 씨"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지 결코 유대 민족(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오늘날 유대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메시아닉 유대인'이란 이단 종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 속으로 들어와 유대인(이스라엘)이 됨으로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체 신학(replacement theology)이 교회가 유대인을 대체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이라면 메시아닉 유대교는 교회가 유대인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잘못된 가르침(포함신학-inclusive theology)을 선포합니다.
그들의 그릇된 주장이 로마서 11장의 올리브 나무의 비유의 오해와 오류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올리브 나무는 이스라엘이고 이방 교회(크리스천)는 유대인 속으로 접붙임을 받은 가지란 것입니다. 교회는 유대인이란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그리스도의 가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요15:5).
좋은 올리브 나무=예수 그리스도,
좋은 올리브 나무의 가지= 믿는 유대인(본래의 가지)+ 믿는 이방인(접붙임 받은 가지)
본래의 가지(natural branches)란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백성, 자기 형제란 뜻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본래 얻었던 지위와 신분, 특권은 꺾여 버립니다. 그것이 꺾인 가지란 뜻입니다. 접붙임 받은 가지는 본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으나 믿음으로 그분의 백성, 형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좋은 올리브 나무가 예수님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네 씨 안에서"의 네 씨는 예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되고 맙니다. 그리되면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이 꺾인 것이 아니라 올리브 나무 자체가 꺾인 것이므로 지난 2000년 동안 역사적으로 이방인들은 아예 접붙임 받을 대상 자체가 사라지고 없어져 버립니다. 어떤 가지라도 가지는 나무에 접붙임을 받지 뿌리에 접붙임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스라엘(유대인)의 넘어짐과 일어섬과 아무런 상관없이 좋은 올리브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로서 열매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복, 영적인 특권을 계속해서 공급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길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좋은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서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 신성한 권능을 부여 받아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거기에는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바바리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시느니라.] (골 3:11).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은 유대인들을 잘 대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란 민족적 지위와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와 대체하려는 시도는 잘 분별하고 배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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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가요?
질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가요?
답변. 야곱의 생물학적 아들, 헬리의 법적 아들입니다.
참고할 글<요셉의 아버지는 왜 둘인가?>

먼저 성경 본문을 봅시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마 1:16)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눅 3:23).
마태복음에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다.”라고 기록합니다.
도대체 누가 맞는 것입니까?
둘 다 맞습니다. “낳았다와 ....의 아들이다”란 표현은 정확히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야곱은 요셉의 생물학적 아버지입니다. 친부(親父)입니다.
“낳았다”는 생물학적, 유전적 관계입니다. -
“아브라함을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낳고....”란 표현은 생물학적, 유전적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따라 야곱은 요셉을 낳은 생물학적 아버지, 친부입니다. 다른 가능성이 없습니다.
“...아들이다”란 말은 반드시 생물학적, 유전적 관계일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의 아들”이란 표현은 다양합니다. 성경에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나 생물학적 아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1. 양자-입양됨, 법적인 아들, 양아들.
2. 사위-son in law.
3. 복음으로 낳은 아들(바울과 디모데)-영적인 관계성.
다윗은 이새의 아들이며 동시에 사울의 아들입니다. 사울이 “내 아들 다윗아...”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십시오(삼상25:16,26:17, 26:21, 26:25).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낳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아버지이지만 다윗을 낳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의 방법으로 기록하면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가 되고 누가복음의 방법으로 기록하면 '다윗은 사울의 아들이요'가 됩니다. 이 둘은 모순이 아닙니다.
누가 복음에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헬리의 양자이거나 사위입니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둘 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단하게 마태복음에 나온 ‘야곱’은 요셉을 낳은(begot) 아버지이고, ‘헬리’는 요셉을 입양했거나 사위로 삼은 아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이므로 사위로서의 아들임은 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도 사위를 아들로 삼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 둘은 모순이나 오류가 아니라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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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하려 한다니?
질문. 사도 바울이 도달하려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답변. 더 좋은 부활입니다.

빌립보서 3: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빌3:11). 부활은 어떤 사람의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다 마지막 나팔 소리에 다 부활합니다. 부활은 크리스천의 복된 소망이요, 산 소망이요, 영광스런 소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dead)은 천년 왕국이 끝난 시점에 있습니다.
그럼 본문에서 바울이 도달하려 한다고 말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하는 ‘더 좋은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자기들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고문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히11:35).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고문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박해, 죽음 등을 온 몸으로 감당했습니다. 바울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부활 즉 ‘더 나은 부활’에 도달하려 함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긴 수고와 그분과 함께 받은 고난에 따라 그 영광이 다릅니다.
성경은 부활에 대해 그 영광이 각자 '서로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들의 영광이 다르니 이 별과 저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40-41).
성도들의 부활한 몸의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성경은 '다름'을 말하며 부활이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 ...](고전15:42). 42절의 “...이와 같으니라.”는 말씀은 40-41절에 나오는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영광이 다르며...다르니...다르도다.”란 말씀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알고,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했던 것은 어찌하든지 ‘더 나은 부활’에 도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링크 된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저 하늘에서도 차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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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질문: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변: 너무나 자주 받는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 그럼 불임녀는? 구원의 다양한 의미를 알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와 본문의 오독과 오해에서 빚어지는 난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어려운 구절도 난해 구절도 아닙니다. 단 바른 성경이 중요합니다.
딤전2:13-15을 보십시오.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어지고 그 뒤에 이브가 지어졌으며
14 또한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거하면" 그녀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으리라.(흠정역)
15절은 이해를 돕기 위해 KJV 어순대로 보겠습니다.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구원을 받으리라, 해산함으로,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계속해서-꾸준히:continue in)거하면"
성경 해석의 기본은 성경 본문을 순서대로 정확하게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15절을 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접속사로서 14절을 받습니다. 즉 "여자가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란 말입니다. 15. Notwithstanding she shall be saved in childbear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구원을 받으리라 ...in childbearing.]-KJV.
여자가 마귀에게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구원을 받습니다. 자신이 속고 남편을 속임으로 범법을 유발했고, 실족케 했고, 범법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이브)가 그러했듯이 우리는 누구나 그런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이브-여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오.
15. Notwithstanding she shall be saved in childbear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구원을 받으리라 ...in childbearing.]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she shall be saved by faith/ by grace..."이렇게 해 버리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런데 "...she shall be saved in childbearing" 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죄에서의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childbearing이란 "of or relating to the process of conceiving, being pregnant with, and giving birth to children"의 전 과정(시간, 기간)을 말합니다. 여자의 몸 속에서 40주간의 임신 기간과 출산까지를 "childbearing"이라고 합니다.
"in childbearing"이란 일반적으로 40주(weeks)의 임신 기간과 출산(해산)의 모든 시간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in"은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입니까?
1. "여자가 마귀에게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던 것"에서의 구원입니다(14).
여자가 임신, 출산으로 마귀의 속임수로 범법 가운데 있었던 것,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구원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은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구원을 받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임신과 출산은 주님께서 범죄한 여자에게 선포하신 심판을 몸으로 수행한 것입니다.
창세기 3:16에서 주신 주님의 심판은 여자에게만 주신 것으로 "임신은 시작이요, 출산은 완료"입니다. 아이가 태를 열고 나온 순간 childbearing에 관련된 심판의 말씀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2. childbearing이라고 했으니 좀 더 깊이 이에 관련된 구절을 보겠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고통과 수태를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통 중에 자식을 낳을 것이요, 또 너의 열망이 네 남편에게 있으리니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
주님은 여자에게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수태를 크게 더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여자는 고통 중에 자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출산의 고통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성경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고통입니다. 출산은 모든 여자, 특히 임신한 여자에게 위험, 두려움, 고통을 줍니다. 임신한 순간부터 아이가 태에서 나오는 그 순간까지 언제나 불안하고 위험한 순간입니다. 태어날 때는 엄청난 출산의 고통이 따릅니다. 산고의 고통은 누구나 다 아는 말입니다. 심지어 죽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속아서 범죄한 여자에게 주신 심판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남자들이 전혀 겪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서 받는 구원이 무엇인지는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이 구원은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그녀가 아님)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계속해서, 꾸준히-continue in:KJV) 거하면"입니다. 여자는 속아서 범죄했지만 남편과 더불어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거하면 "마귀의 속임수와 창세기에서 주님이 명하신 출산의 고통이란 심판(저주, 형벌)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조건문(if)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이"(여자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 둘 다...). 여자가 "in childbearing"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여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1.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2. 남편은 아내와 지식에 따라 동거해야 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벧전3:7).
3.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남편에게 배워야 합니다(딤전2:11).
만일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고전14:35a)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계속해서-KJV) 거하면...."-부부가 결혼해서 이렇게 하면 더할 나위없는 영적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에게 결혼과 부부 생활, 임신과 출산은 에덴에서 여자가 주님께 받은 고통이 아니라 주의 선물이요, 은총이요,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in childbearing(수태+출산에서) 구원을 받으리라 "이란 뜻입니다. 크리스천 부부가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계속해서 거하면 그녀는 수태함으로 '죄로부터'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더해 주신 "수태(임신)+출산"의 고통/슬픔/두려움/불안/공포 등등에서 구원 받습니다.
참조. 성경은 수태에 관해 여자에게 내려진 심판에 대한 구원만 언급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물인 빵을 먹는 남자의 심판에 대한 구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남자가 손수 일을 해서 빵을 먹고 남을 돕는 일은 '에덴의 심판/저주'가 아니라 수고의 열매는 '복이요, 특권'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일은 노역이 아니라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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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질문. 주 예수의 날에 영이 구원 받는다(고전5:5)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변.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5:5).
성경은 사람이 영, 혼, 몸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의 존재임을 분명히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자신의 모습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은 영은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다시 태어남(born again), 새롭게 태어남(new born),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요3:7)고 하신 말씀은 거듭남, 영의 출생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을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벧전2:2)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2. 혼은 구원 받는다고 말합니다.
혼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습니다. 믿음의 결말이 혼의 구원입니다. 성경의 증언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믿어서 혼의 구원에 이르는 자들에게 속하느니라.](히 10:39).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이는 너희가 너희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벧전 1:9).

3. 몸은 변화를 받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부활을 통해 새로운 몸을 입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를 받게 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고전15:51,52).
이것은 미래에 있을 일입니다. ‘변화되리라...’고 미래형으로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때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게 만드시리라.](빌3:21). ‘만드시리라.’는 말씀 역시 미래형입니다.
몸은 거듭나지 않습니다. 혼은 거듭나지 않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영입니다. 영과 혼과 몸은 완전히 서로 다른 부분입니다. 글자가 다르고 단어가 다르고 뜻이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셋이 한 사람을 이룹니다.
구원이란 말은 영, 혼, 몸에 다 사용됩니다.

1. 몸의 구원은 질병, 죽음, 재난, 기근, 전쟁, 위험 등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란 말씀은 병에서 구원입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했을 때 구원은 ‘물’에서 건져 달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위험에 놓였을 때 거기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몸의 구원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늘 사용되는 말입니다. 맹인이 주님께 받은 구원은 그의 시력을 받은 것입니다(눅18:42). 주님께서 어떤 병든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하실 때 그 여자는 병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난파된 배에서 바울은 도망치려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머무르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27:31). 배에 머물지 않으면 바다에서 몸이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죄에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몸의 구원은 구약과 신약에서 계속 사용됩니다.

2. 혼의 구원은 지옥의 정죄, 형벌, 저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사람은 혼의 구원을 받습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엡2:8).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2:21, 롬10:13). 여기서 구원은 모두 혼의 구원을 말합니다. 복음 전파의 핵심은 '혼의 구원'입니다.

3. 영의 구원은 이미 거듭난 신자가 죄를 범하여 주의 징계나 심판으로 몸이 죽게 될 경우 주 예수의 날에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활하며 '새 몸, 영광스런 몸,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징계, 심판, 형벌로 신자가 이 땅에서 몸이 죽게 될 경우 은혜로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신자는 몸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다고 해서 혼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이 소멸되거나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후 육신을 따라 살며, 신성모독하고, 음행하고 이런 저런 죄로 인해 죽을 경우(롬8:13) 주 예수의 날에 그의 영은 어떻게 됩니까? 구원 받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주님께 회수된 불신자들의 영과 달리 새 몸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구원의 보증, 안전이라고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죄를 지어 죽게 되었을 때 그의 구원도 잃어버리는 것으로 아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자기 아비의 첩과 음행하고도 회개치 않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성도를 향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불신자보다 악한 행위를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 약하고 병들고 잠든(죽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많도다.](고전11:30). 이렇게 죽은 성도들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어떻게 됩니까? 몸의 부활과 더불어 그의 영은 온전하게 됩니다.
“영의 구원”이란 거듭난 영이 죄로 인해 받은 몸의 정죄, 심판, 사망 등과 전혀 상관없이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범죄한 성도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 중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는데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준 것은 그들이 배워서 신성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20).
사도 바울이 사탄에게 몸을 멸하도록 넘겨 준 성도는 비록 죄로 인해 죽게 되어도 다시 태어난 그의 영(속사람, 새사람)은 주 예수님의 날에 다른 모든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여 새 몸을 입게 됩니다. 이것이 영의 구원입니다. 구원 받은 죄인은 죄로 죽어도 주 예수의 날에 새 몸을 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불신자의 죽음과 비교해 보십시오. 불신자들의 몸이 죽을 경우 그의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전12:7). 신자의 영이나 불신자의 영이나 모두 주님께 돌아갑니다. 신자의 몸이나 불신자의 몸은 모두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이 주 예수의 날에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맞이합니다.
신자의 영은 그가 죄로 인해 약하고 병들어 죽었다 할지라도 주 예수의 날에 구원 받습니다. 불신자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받지 못합니다. 불신자들은 비록 영이 주님께 돌아갔지만 그의 몸은 천년왕국이 끝날 때까지 부활하지 못하며, 새 몸을 입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영은 주 예수님의 날에 부활한 몸속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이것이 '영의 구원'입니다.
고린도전서 5:5에서 말하는 영의 구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시고 구원은 영이나 혼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영이나 혼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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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댓글쓰기
아멘.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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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엽 -----------댓글쓰기
이 글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교회(거듭난 사람들)안에 있었던, 자기 아버지의 아내랑 잠자리를 같이 하려 했던 자는 성도가 아니라, 거듭나지 않은 자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자식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잠입시켜서 주의 몸인 교회를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악하게 비취게 하여 교회나 세상이나, 세상이나 교회나 똑같다. 라고 알도록 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합니다.
주 예수님의 날에 그 영이 구원받는다는 말은 몸이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파울이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려 한 이유는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 사탄에 의해 죽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죄의 삯인 사망이라는 정죄를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정죄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이 주 예수의 그 날에 구원받게 하려한다는 말은 그의 영만 주님께로 귀속된다는 말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은 입지 못하고 영으로써만 천상에 존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는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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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Yoon
I don't think so. 성도가 맞습니다.
야곱의 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아내)와 잠자리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르우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거나 지옥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몫(장자권, 상속, 유업)만 빼앗겼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맏아들인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그는 맏아들이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그의 장자권이 이스라엘의 아들인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더라. 계보는 장자권에 따라 계수할 것이 아니니라.] (대상5:1)
고린도 교회의 성도 가운데 있던 죄인 역시 그러합니다.

1.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짓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 뿐 아니라 대언자, 사도들도 죄를 짓고 님도 죄를 짓습니다. -님의 오류입니다.

2. 영의 구원은 영이 하나님께 귀속되는 것이다?
-신자의 영 뿐 아니라 불신자의 영도 모두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고로 님의 주장대로라면 '영'의 구원이란 말은 의미 없는 말입니다. '그의 영만 주님께 귀속된다'는 말은 영의 구원이 아닙니다. 모든 불신자의 영은 다 주님께 귀속되기 때문입니다. -님의 오류입니다.

3. 죄의 삯인 사망은 불신자 뿐 아니라 신자들도 몸이 죽습니다. 고로 님의 주장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님의 오류입니다.

4. 천사들은 영으로서 '몸'이 없다?
-천사들은 하늘에 속한 몸, 영적인 몸, 영광스런 몸이 있습니다. 부활한 성도들은 저 하늘에서 천사들처럼 됩니다. 천사들은 몸이 없는 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님의 오류입니다.

윗글에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님의 생각이 오류인 듯합니다. 자신의 틀린 잣대로 바른 것을 재어서 판단하면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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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사슴 --------댓글쓰기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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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a ---------댓글
영에 대한 잘못된 이해 ㅡ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에게 있던 영이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요3:5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때에 죽었던 영이 살아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겐 영이 있지만 믿지 않는 자에겐 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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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Yoon
오해라고 말한 님의 오류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겐 영이 있지만 믿지 않는 자에겐 영이 없습니다."-님의 이런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세상에 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다 영이 있습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영이 없다는 그런 말은 님의 추측이나 생각이지 성경의 증언이 아닙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로도 사람들 속에는 사람의 영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과 증언을 살펴봅시다.
1. 영이 없는 사람은 없다. 신자든 불신자든 영이 없으면 그의 몸(육체)은 죽은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약2:26).

2.사람의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 하나님께 대해 죽었다는 것이지 영이 없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사람 속에 있는 영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a. 사람의 영은 병약함을 지탱한다.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함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잠 18:14).
b.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이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로서 배 속의 모든 부분을 살피느니라.](잠 20:27).

3. 사람은 죽을 때 그의 영이 하늘로 올라간다. [누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느냐?](전 3:21).

-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속에 영이 있다.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고전 2:11).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이란 말씀을 보라.

***모든 사람에게 영이 있었다는 성경의 증언****
-광야의 백성들은 모두 영이 있었다.
[마음에 감동을 받은 모든 자와 영으로 자원하게 된 모든 자가 오고 그들이 회중의 성막 작업과 그분을 섬기기 위한 모든 것과 거룩한 의복들에 쓰도록 주의 헌물을 가져왔으니](출 35:21)
-이방 왕들에게도 영이 있었다.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시리아 왕 불의 영을 움직이시고 또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의 영을 움직이시매...](대상5:26).

-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게도 영이 있었다(대하36:22). 주님은 그의 영을 움직이셨다. 불신자나 이방인들에게도 모두 영이 있었음은 성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욥기 20:1-5, 시편 34:18; 78:8, 잠언 11:13, 에스겔 13:3, 학개 1:14, 말라기 2:15,16, 마태복음 26:41, 누가복음 1:47.
자기 생각이나 추측을 의지하지 말고 성경을 찾아 확인하고 판단하기 바랍니다. 자신의 오류를 가지고 남을 오해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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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일 --------댓글쓰기
사람이 육신이 죽으면 영과 혼이 갈라집니까? 믿는 자는 그 영혼이 낙원에 가고 믿지 않는 자는 그 영혼이 음부에 가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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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Yoon
위에 본문에 관련 구절들이 다 있으니 성경을 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는 몸이 죽을 때 영과 혼이 낙원(셋째 하늘)으로 갑니다. 불신자들은 영은 하나님께로 혼은 지옥(음부가 아니고)으로 갑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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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독신을 권장합니까?
질문. 성경은 크리스천들에게 독신을 권장합니까?
답변. 아닙니다. 예외적인 경우에 독신이 나은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결혼하지 못한, 또는 하지 않는 크리스천들 중에 독신을 주창하고 옹호하는 이들이 흔히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염려 없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께 속한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할까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에 속한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또한 아내와 처녀 사이에도 차이가 있나니 시집가지 않은 여자는 주의 일들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여자는 세상의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고전 7:32-34).
별로 주님의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주를 위해 독신으로 있는 것처럼 이런 구절을 인용할 때면 참 우습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합니다. 캐톨릭 사제들은 이 구절을 독신 성직에 대한 금과옥조로 여깁니다. 캐톨릭 교인들 중에도 이 구절이 성직자 독신 규정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성직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독신 장려나 추천, 권면의 구절이 아닙니다.
그럼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장가가지 말고, 시집을 가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의 감독, 목사, 장로들이 될 사람들은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는 명령입니까?
고린도전서 7장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은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은 목사(성직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감독의 자격 요건은 디모데전서3장과 디도서 1장에 나오는데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신실한 자녀들을 두고, 집안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독신으로 교회의 감독이 되는 것은 반 성경, 비성경적입니다.
사역자(목사, 주교-bishop)에 대한 자격 요건은 반드시(must)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져야 하고, 자녀들(아이들-children)을 가져야 합니다.
감독(bishop)의 자격 요건을 규정한 말씀은 딤전 3장과 디도서 1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must)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딤전3:2). 감독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나옵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을 모든 위엄으로 복종시키는 자라야 할 것이며 (남자가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딤전 3:4-5).
디도서에도 감독의 자격 요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감독으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 규정한 명령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망 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거나 제멋대로 한다는 비난을 받지 아니하는 신실한 자녀들을 두었으면 임명하라.] (딛 1:6).
때로 성직자는 독신이어야 한다는 구절로 문맥과 관계없이 성경 구절을 뽑아내는 이들은 성경 왜곡자에 불과합니다. 성직자는 결혼해야 성경적입니다. 바울과 같이 순회 설교자(사역자)가 아니라면 교회의 감독은 반드시 결혼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할 때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말하노니 그들이 나처럼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으니라.] (고전 7:8)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이란 어떤 연유로 결혼 적령기, 꽃다운 나이를 지난 사람들을 말합니다(고전7:36). 이들은 결혼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결혼해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안 해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정욕이 불타오르고 억제할 수 없다면 결혼해야 합니다(고전7:9).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결혼할 의지가 있고 원하면 '그렇게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고전7:36)고 말합니다. 이혼, 사별, 버림받음, 결혼할 나이가 지난 크리스천들 중에서 결혼할 의지가 없다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고전7:37).

2. 이혼한 사람들입니다.
사별이 아닌 이혼한 사람은 그냥 지내야 합니다(고전7:11). 사별한 사람은 그냥 지내든지 재혼하려면 주 안에서만 하라고 합니다. 주변에서 결혼(재혼)을 강요하거나 권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편과 이혼한 남(여)자들에게 다시 재결합은 권할 수 있지만 재혼은 권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을 수는 없고 아버지께서 그것을 주신 자들만 받을 수 있느니라. 모태에서부터 그렇게 태어난 고자들도 있고 사람들이 고자로 만든 고자들도 있으며 하늘의 왕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자들도 있나니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받을지어다, 하시니라.](마 19:11-12).
선천적 성불구자, 내시 또는 질병 등으로 성불구가 된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들은 마음속에 성적 욕구, 음욕이 불타지 않아야 하며, 결혼할 의사가 없으며 주를 섬기고자 하는 결심을 한 사람들은 바울처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결혼하는 것보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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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원, 시작은?

교회의 기원에 대한 갖가지 견해와 설이 있습니다. 교회란 용어의 혼선,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구절들부터 보겠습니다. 사적인 해석이 아니라 본문 그 자체를 보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해 봅시다.

1. 교회는 구약부터 존재했다.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던 그 천사와 또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던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들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행 7:38). 스데반이 언급한 광야의 교회로써 이스라엘 회중 자체가 교회입니다. 모세를 대언자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회중으로 하는 ‘국가 교회’의 모델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정일치 국가로서 종교가 곧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외교, 사법을 모두 통제합니다.

2. 교회는 예수님 당시(공생애 사역 기간)에도 존재했다.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무시하여 듣지 않거든 교회에 그것을 말하되 그가 교회의 말도 무시하여 듣지 않거든 너는 그를 이교도나 세리같이 여기라.](마 18:17).
당시 이스라엘은 헤롯이 세운 성전이 있었고 도시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어느 도시에나 서기관, 율법사, 제사장,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정기적으로 회당에 출석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교회는 성전이나 ‘회당’이란 주장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교회’라고 언급하셨습니다.

3. 교회는 이방인들에게도 있었다.
[교회 물건을 탈취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여신을 모독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여기로 끌고 왔느니라.](행 19:37). 여기서는 "아테네의 신전"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교회란 간판을 보고 들어간 건물에 불상이 놓여 있고 승려들이 목탁을 두드리는 그런 장면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을 여행해 보면 거의 모든 불교 사원의 이름이 교회입니다.
반면 사원(temple)이라고 적혀 있는데 알고 보니 침례교회인 곳도 수두룩합니다. 무슬림 사원도 교회입니다. 힌두교 사원도 교회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 연속해서 몇 개의 교회 건물들이 있습니다. 침례교회 옆에 있던 어떤 교회의 이름이 독특해서 무슨 교회인가 보았는데 힌두교인들의 사원이었습니다.
이상에서 교회란 의미는 종교 체제를 지닌 ‘모임’이란 뜻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구약 시대에 교회가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에는 교회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런 의미의 교회는 여신 다이아나를 섬기는 그리스의 아테네에도 교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교회’란 말은 위의 세 가지 경우와 전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하셨는데 크리스천이 정의하는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주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성전이나 회당이 교회라면 주님은 “내가 ....세우리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도시마다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I will build my church".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교회는 무엇입니까?

•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말합니다.
이 교회는 주님이 피를 흘리시기 전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 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의 교회 곧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먹이게 하셨느니라.](행 20:28)

•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온 교회를 말합니다(행1:5, 고전12:13).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너희가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서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까지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순절에 믿는 자들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기 전까지 성령에 의해 한 몸 안으로 들어온 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전 12:13)
크리스천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예수님이 머리시오, 그분의 몸 된 교회, 그 분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 성령 안으로 들어온 교회는 주님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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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아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질문 :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아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왕하24:17에서는 여호야긴의 숙부로 나와 있고요.
대하36:10에서는 여호야긴의 형제로 나와 있습니다.
답변 : 요시야의 아들로서 여호야긴의 숙부입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아들 맛다니야가 왕이 되면서 개명된 이름으로서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의 형제 시드기야"가 아닙니다.
두 명의 시드기야 : 요시야의 아들: 요하난, 여호야김(엘리야김), 시드기야(맛다니야), 살룸(여호아하스).-요시야의 아들 넷 중에 세 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특징은 모두 이름이 개명된 것입니다.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왕위 계승), 시드기야(왕이 못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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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입니다.
[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하난과 둘째 여호야김(엘리야김)과 셋째 시드기야(맛다니야)와 넷째 살룸(여호아하스)이요,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의 아들 여고니야(고니야)와 그의 아들 시드기야더라.](대상 3:15-16).
족보가 아주 명쾌하게 나옵니다.
이 기록은 마태복음 1:11과 다른데 요시야의 아들들은 마태복음에서 모조로 빠졌습니다. 요시야-여호야김-여고니야로 이어지는데 마태는 기록하기를,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여호야김이 주의 말씀을 듣고 펜 칼로 찢어서 모두 화로에 던져 넣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을 찢어 불태우는 왕은 자신의 이름이 빠지는 보응을 받았습니다.
자, 역사를 잠깐 봅시다.
요시야가 이집트의 파라오느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백성들은 그의 넷째 아들 살룸(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으나 파라오느고는 그를 이집트로 잡아가고 엘리아김을 왕으로 앉히면서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해 줍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잡혀 갑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이 또 다시 바빌론에 반역을 하자 느부갓네살은 그를 바빌론으로 끌고 가면서 그의 '숙부'(형제-?)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습니다.
질문은 시드기야가 숙부인가? 형제인가? 란 것입니다.
답은 숙부입니다.
숙부 시드기야의 이름은 개명된 것이고 본래 이름은 '맛다니야'입니다. 형제 시드기야는 본명입니다. 성경은 맛다니야를 왕으로 삼아 시드기야로 개명했다고 나오므로 이 시드기야는 '숙부'가 분명합니다.
[바빌론 왕이 또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그의 숙부 맛다니야를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더라.](왕하 24:17).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 왕이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는데 그는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이 유다 땅에서 왕으로 삼은 자더라.](렘 37:1).
요시야의 아들: 요하난,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 시드기야)
자, 역대기하 36:10을 보십시오.
[그 해가 다 지나갔을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주의 집의 좋은 기구들과 함께 여호야긴을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시드기야를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릴 왕으로 삼았더라.](대하36:10).
질문의 핵심은 숙부를 형제라 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입니다.
이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있는가? 장인을 아버지라 할 수 있는가? 란 문제보다 더 간단합니다. 얼마든지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형제는 친형제만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왕하24:17, 렘37:1을 통해 대하36:10을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반대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형제 시드기야는 본명이 시드기야였으므로 맛다니야가 개명된 것이란 다른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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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질문 : 히9:22절 보면 율법을 좆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음즉 사함이 없느니라.. 했는데 "거의"라고 쓴 이유가 피말고도..가난한 사람은 곡식을 빻아서도 제사를 드려서 그런 거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거의"라는 것이 헬라어로는 오직, 유일하게, 이것뿐 이라고 하고 그러네요..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세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 "거의"(almost)는 말 그대로 "거의"입니다. "모든"(all)이나 "오직"(only)이 아닙니다. 정결케 되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어떤 것은 물로 씻음으로, 어떤 것은 분리(격리)를 통해, 어떤 것은 피를 통해 정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죄 사함의 문제나 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것은 분리를 통해, 어떤 것은 부정한 것을 제거함으로, 어떤 것은 물로 씻음으로 정결하게 됩니다. 심지어 문둥병자가 정결하게 되려면 피로써가 아니라 완전히 문둥병이 온 몸을 덮어 살갗이 하얗게 되면 '정결하다'고 합니다(레13:13,17).
모든 것이 100%다 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로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라고 할 때 "모든"이 아닌 "거의"라고 한 것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기록된 대로 보면 됩니다. 헬라어가 기준이 아닙니다.
창세기 35:2. 자기들 가운데 있던 우상들을 버림으로 정결하게 했습니다.
레위기 15:13. 몸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살을 씻음으로 정결하게 했습니다(유출이 있는 자).
레위기 17:15. 부정한 음식을 먹는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함으로 정결하게 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피로써 정결케 되지만 그렇지 않는 것도 있기에 "모든", "오직"이 아닌 "거의 모든"이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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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소멸시키지 말라?
질문.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라는 말씀을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개역: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흠정역: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
KJV: Quench not the Spirit. *Holy Ghost가 아닙니다.
직역하자면 "성령을 끄지 말라. or (열정, 의지, 감정 따위를) 식히지 말라." 입니다.
이 부분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입니다. 흠정역은 성령이 인격이므로 소멸될 수 없다는 뜻에서 '억누르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령에 대한 오해,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입니다.

Quench에는 '억누르다'는 뜻이 없습니다.
불을 끄는 것, (불)타오르는 감정을 식히는 것 등이 Quench입니다.
감정, 기분, 열정, 의욕을 싸늘하게 식혀 버리는 것이 Quench입니다.
성경 자체 내에서 Quench의 용례(민11:2, 삼하14:7, 시104:11...)를 보십시오.
"that thou quench not the light of Israel."(삼하21:17).
"Quenched the violence of fire"(히11:34).
Quench의 정확한 성경적 용례입니다.
"Quench not the Spirit."고 한 말은 번역의 문제보다는 이해의 문제입니다.
성령은 크리스천들 안에서 떠나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영이든 성령이든 믿는 자의 육신이 죽기까지 우리 속에 거합니다. 누군가 성령을 소멸시킬 수 없듯이 전능하신 성령을 억누를 수 있는 무엇도 없습니다.
주의 영은 자유로운 영이십니다. 매이거나 억눌림을 당할 수 없습니다.
성령에 quench(끄다)란 단어를 쓴 것은 성령의 속성 때문입니다.
영은 '등불'입니다. 사람의 영이나 하나님의 영이든 영은 등불로 묘사됩니다.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 12:35).
[그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4:5). 일곱 등불=일곱 영. 영은 등불로 표현됩니다.
"Quench Not" the Spirit(살전5:19). "성령(등불)을 끄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인격성, 신격을 쓸 때 King James Bible은 Holy Ghost를 씁니다.
Holy Spirit(the Spirit)은 그분의 속성,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령은 등불처럼 우리 안에서 빛이나 기름처럼 꺼질 수 있고, 타오를 수 있고, 채워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한 나머지 기록된 말씀의 분명한 어휘적 의미와 정의까지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변개자들이 KJV 성경을 공격할 때 흔히 들이미는 것 중의 하나가 성령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신데 He/His를 써야지 어떻게 it/its를 쓸 수 있느냐? 소문자를 쓸 수 있느냐? Quench란 말을 쓸 수 있느냐? 등입니다. 이는 무지의 소산입니다. 성령의 사역, 속성을 드러낼 때는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자,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Be filled" with the Spirit(엡5:18). 성령으로 채움(충만)을 받으라.
"Quench Not" the Spirit(살전5:19)과 정반대의 구절입니다.
성경의 짝을 맞추어서 읽어 보면 본문의 의미가 명료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성도는 자신 안에 성령으로 채움(충만)을 받아야 합니다(엡5:18). 성도는 죄로 인해, 불순종으로 인해 자신 안에 성령을 소멸(끄지) 말아야 합니다(살전4:17).
성령을 소멸(quench)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령님을 멸절한다, 죽인다, 없애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성도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활동, 능력, 빛 비추심 등에 관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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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 때에 눈이 온다?
질문. 잠언 25:13에 '수확 때에 내린 차가운 눈'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답변. 아래 설명을 보세요.
As the cold of snow in the time of harvest, so is a faithful messenger to them that send him: for he refresheth the soul of his masters. (KJVI).
"the cold of snow"-눈의 추위, 눈의 차가움.
신실한 사자(使者)는 그를 보낸 자들에게 마치 수확 때에 내린 차가운 눈 같으니 그는 자기 주인들의 혼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흠정역).
수확 때에 눈이 내리면 농부에게 신선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혼을 짜증나게, 힘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말로 "내린"이란 번역이 의미를 많이 와전케 한다. 한국의 어떤 킹제임스 번역본은 "수확이 지나서 내린 눈"이라고 한다. 본문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스라엘의 들판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에 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높은 산에는 일찍부터 눈이 내리고 늦게 까지 눈이 있다. 특히 헬몬산은 만년 설산이라 불릴 만큼 눈이 많다. 헬몬산의 눈이 녹아내리는 물은 갈릴리 호수에까지 내려온다!
늦가을 수확 때 즈음에는 이미 헬몬산에는 눈이 내린다. 들판에는 비가 산에는 눈이 되는 것이다
수확 때에 내린 눈이 바람을 타고 일꾼들의 이마에 닿을 때 그 신선함, 시원함을 생각해 보라. 본문이 말하는 '눈의 차가움, 눈의 추위'란 바로 그런 것이다. 레바논의 눈도 마찬가지이다. 들판에는 비가 내릴 때 산지에는 눈이 내리는데 그 눈으로 인해 들판에 부는 공기는 '신선함' 그 자체이다.
'the cold of snow'-직역하면 눈의 추위, 차가운 눈이지만 '봄의 햇살, 가을 햇살'과 같은 그런 시적 표현이다. 더위와 땀을 차갑게 식혀주는 그런 눈을 말한다.
[사람이 들의 바위에서 나오는 레바논의 눈을 버리고 떠나겠느냐? 다른 곳에서 나오는 흐르는 찬물을 버리겠느냐?](렘18:14)
이곳 LA에는 눈이 없다. 필자는 이곳에서 10년 이상 눈이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늘 눈을 볼 수 있다. 한 시간 이내의 높은 산들에는 늘 눈이 있다. 지금도 눈이 있고, 가을에도 눈이 있다. 들판에서 운동을 하든 일을 하든 차가운 눈으로 인해 불어오는 시원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수확 때의 '눈의 차가움/추위'가 일꾼들에게 주는 시원함은 신실한 사자들이 자기 주인들에게 혼을 시원하게 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수확 때에 들판에 내린 눈을 생각해서 본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외로 많다.
이 본문에 대해서 '눈의 추위, 차가움, 시원함'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의 번역을 보자.
개역과 개정역은 '눈의 차가움'이 얼음냉수로 바뀌어 버렸다.
충성(忠誠)된 사자(使者)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秋收)하는 날에 얼음냉수(冷水)같아서 능(能)히 그 주인(主人)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개역)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개정)
표준역, 현대인의 성경은 '시원한 냉수'라고 한다.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표준)
충성스러운 사절은 그를 보낸 사람에게 무더운 한여름의 시원한 냉수 같아서 자기 상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현대인).
현대어 역은 '얼음물'이라고 한다. 믿음직스러운 심부름꾼은 뜨거운 추수철에 곡식 거두는 일꾼들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얼음물처럼 그 주인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준다. (현대어)
수확 때에 내리는 차가운 눈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해 아예 성경 본문 자체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본문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해 가능한 단어로 아예 바꾸어 버리는 것은 번역이 아니라 변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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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나 독주를 사서 마시라?
질문. 포도주나 독주를 사서 마시라?
답변. 독주가 무엇인지 보시면 됩니다.
[네 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즙이나 독주 등 네 혼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고 거기서 주 네 하나님 앞에서 너와 네 집안이 먹고 기뻐할지니라.](신14:26).
독주라고 번역된 말은 strong wine 이 아니라 strong drink입니다.
wine이란 말이 포도즙, 음료, 포도주가 다 되듯이 strong drink란 "독한 음료"로 술, 약, 발효물, 쓸개즙 등 자극성 음료가 다 포함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독주는 "알코올"(독주, 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맛이나 향에서 자극성 있는 음료를 말합니다. 현대 영어에서는 일반적으로 알코올이 들어가는 음료가 독하기 때문에 strong drink를 독주로 통용되지만 알코올 성분이 전혀 없는 '진한 커피'도 strong drink입니다. 식초를 비롯한 산성 음료나 잠을 깨우기 위해 먹는 강장제 종류들 중에도 strong drink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강한 자극성 음료가 모두 strong drink입니다.
주 하나님 앞에서 '독주'(술)을 마시는 규례는 없습니다.
[너나 혹은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니 그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레 10:9). -술 금지(제사장, 레위인들). 크리스천은 모두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벧전2:5). 고로 술을 조금 마셔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마시지 말라'에 해당합니다.
[그는 포도즙과 독주로부터 자기를 구별하고 포도즙의 식초나 독주의 식초를 마시지 말며 어떤 포도즙도 마시지 말고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라.](민 6:3).-나실인. 나실인은 자신을 주님께 헌신, 구별한 사람입니다. 크리스천은 주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고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출애굽의 40년 광야 생활에서 '광야 교회'라 불리는 회중들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빵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즙이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은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신 29:6). 술이 허용되거나 합당하다면 백성들은 술을 마셨겠지만 40년 동안 마시지 않았습니다. 회중들이 하늘에 내려 온 만나를 먹는 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를 보십시오.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주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술을 마시라는 시험을 받은 레갑의 아들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리라. 우리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아들들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렘 35:6). [우리가 이와 같이 우리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한 모든 일에서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의 아내들과 우리의 아들들과 우리의 딸들이 우리의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고](렘 35:8). 레갑의 아들들은 대대로 평생토록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종교인들, 캐톨릭 신자들, 육신적인 크리스천들은 술을 마십니다.
구약에서도 백성들 뿐 아니라 타락한 제사장들은 술을 마셨습니다.

1. 술의 효능-조롱하게 하고 날뛰게 하는 것이다.
[포도주는 조롱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날뛰게 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그것들로 말미암아 속는 자는 지혜롭지 아니하니라.](잠20:1).-주님께서 이런 것을 마시라고 하셨단 말인가?

2. 술은 왕들, 통치자들에게 합당하지 않다. 크리스천은 모두 왕같은 제사장들이다! [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마시는 것이 통치자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잠 31:4).

3. 독주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망하려는 자들, 마음이 무거운 자들.
[독주는 망하려는 자에게 주고 포도주는 마음이 무거운 자들에게 주라.](잠 31:6). 크리스천들은 망하려는 자인가? 마음이 무거운 자들인가? 항상 기뻐하라. 주를 기뻐하라. 그러면 포도주가 필요치 않다. 술이 좋은 것은 아니더라도 허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따르는 이들에게 화(저주)를 선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되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따라가 마침내 포도주로 붉게 된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용감하게 포도주를 마시며 독주를 섞어서 마시는 힘센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사 5:11,12).
하나님의 백성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신 결과는 무엇인가? -잘못하고 길(진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잘못하며 독주로 인하여 길에서 벗어났도다. 제사장과 대언자도 독주로 인하여 잘못하고 포도주에 잠기며 독주로 인하여 길에서 벗어났도다. 그들이 환상에서 잘못을 범하며 재판에서 걸려 넘어지나니](사 28:7).

4. 신약 성도들에게 직접 주시는 술에 관한 명령이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이 말씀은 술을 마시되 "술에 취하지 말라"가 아니라 "술을 취하지(마시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성도들 중에는 교묘하게 "술에 취하지 말라"고 조사 "에"를 넣어서 읽습니다.
신명기 14:26의 독주는 한국말의 독한 술이 아니라 strong drink('강한 음료, 진한 음료')입니다. 자극성이 강한 음료들을 사서 마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술을 사서 마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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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눅23:4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And 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o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눅 23:43)
이 구절은 안식교를 비롯한 많은 이단들이 킹 제임스 성경의 오류를 지적할 때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들의 주장은 '오늘'이란 단어의 어순을 바꾸어 "진실로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이란 말이 뒤가 아니라 앞으로 당겨야 말이 된다는 것이다. 영어 킹 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콤마(,) 한 개의 위치 차이이다.
[And 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o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눅 23:43)-안식교를 비롯한 이단들의 주장.
[And 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o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눅 23:43)- 주의 기록된 말씀, KJV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어가는 회개한 강도에게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라고 오늘이란 말하는 시점을 강조했을까? 아니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며 죽음 이후에 그가 언제 낙원에 갈 것인가를 강조한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강도는 주님이 못 박히신 그 날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간 것이 맞는가란 의문에서 출발한 질문은 결국 본문의 내용을 부정함으로 결론을 내 버린다.
강도는 주님이 못 박히신 그 날 혼이 지옥으로 갔는가?
연옥? 셋째 하늘? 아니면 어디로 갔는가?
회개한 강도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낙원'으로 갔다. 회개했고 믿었으니 당연히 낙원으로 갔다(눅16:22). 회개하고 믿었으니 지옥은 가지 않았고, 캐톨릭이 말한 것처럼 연옥으로 가지는 않았다. 문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날 부활하시기 전까지 하늘로 가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강도가 주님과 함께 못 박힌 그 날 죽어서 낙원으로 갈 수 있었는가? 말이 되지 않는다....그런 식이다.
안식교도들의 주장대로라면 회개한 강도는 그 날 죽어서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혼의 수면을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주님과 한 날 죽은 그 강도는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갔다고 말씀한다.
낙원은 지하 아브라함의 품을 말한다.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천사들은 그의 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는데 구약성도들의 혼이 모두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품은 셋째 하늘이 아닌 지하에 있었고 지옥과 깊은 구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볼 수 있었던 장소, 공간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회개하고 주를 믿음으로 죽어서 그곳으로 갔다.
삼일 후 부활 후 주님은 낙원에 있던 혼들을 취해 하늘로 올라 가셨는데 현재 낙원은 저 하늘에 있다. 고후12:4, 계2:7
낙원의 위치 설정을 처음부터 하늘로 잡아 둠으로 자신의 무지를 성경을 살짝 고침으로 해결하려 한다. 간혹 믿는 자들 중에는 성경을 차마 고치지는 못하겠고 대신 단어의 의미를 고쳐서 해석하려 한다. '오늘'은 '오늘'이 아니라 요즘이니 어떤 미래의 특정한 날이 아닐까 그런 식이다.
우리는 단 한 글자, 콤마 하나라도 고쳐서 읽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완전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신학에 성경을 뜯어 고치지만 성경의 절대성을 믿는 이들은 성경에 따라 자신들의 생각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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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에게도 감정이 있는가?
질문. 마귀에게도 감정이 있는가?
답변. 있습니다.

하나님, 천사, 마귀, 사람, 동물은 모두 영이 있습니다.
영은 이성, 지각, 감정, 의지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마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두려워했습니다(막5:7).
마귀들은 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떱니다(약2:19).
마귀가 여자에게 진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계12:17).
마귀였던 가룟 유다(요6:70,71)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겼으나 후에 제사장들에게 자신의 잘못(죄)을 고백하고 자살했습니다(마27:3,4). 이는 마귀가 인격적인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지만 그가 무인격, 무의지, 무식, 무지, 무정한 존재는 전혀 아닙니다. 마귀는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그분이 주이심을 자백할 것입니다(롬14:11, 빌2: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니라, 하시니라. 그분께서는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셨더라. 그는 곧 열둘 중의 하나로 그분을 배반하여 넘겨줄 자더라.] (요 6:70-71).
신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마귀라는 주님의 신실한 증언(요6:70,71)을 믿기보다 마귀가 어떻게 자신의 행위를 슬퍼하고 자살할 수 있을까? 라며 자기주장과 신학을 더욱 신뢰하며 주의 말씀(성경)을 부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시고 죽임 당할 수 있었듯이 마귀는 얼마든지 자신의 행위를 슬퍼하고 후회하고 때로 이를 갈고 두려워하며 빌고 간구하며 자살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지, 정, 의를 지니고 있으며 슬퍼하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대적하고 사람들을 속이고 신자들을 삼키려 하며 때로 죽이기도 하는 인격적 존재입니다.
기록된 성경보다 자신의 판단과 예단을 신뢰하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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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홍 --------댓글쓰기
주를 배반한 유다가 주께서 정죄 받으신 것을 보고, 뜻을 돌이켜 은 삼십 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되돌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한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은전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나가서 목매어 죽은 사건에서(마 27:3~5)....
영어 repented가 "뜻을 돌이켜" 또는 "스스로 후회하다"로 번역 될 수도 있지만 그 단어의 또 다른 뜻에는 "유감을 갖다." 라는 뜻도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유감이란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인데 만약에 가롯유다가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라 해도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넘긴 죄에 대해서 미안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도 인격체이기 때문이라는 목사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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눔바는 여자인가? 남자인가?
골로새서 4:15을 보면 바울은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성경은 특이하게도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들어 초대 교회 여성 지도자, 여자 목사의 예를 듭니다. 초대 교회의 여성의 지위를 언급할 때 마다 나오는 인물이 "눔바"라는 여자이다. 눔바는 프리스길라, 리디아, 순두게, 뵈베 등과 같이 교회 여성 지도자였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눔바는 여자 이름이고 눔바스(Nymphas)가 남자 이름이란 것입니다. 이름으로 성별을 검사하고 확증할 수 있는가? 여러분의 주위에 남자 중에 여자 이름에 사용되는 글자를 사용하는 예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여자들 중에 이름만 들었을 때 남자 이름인 자들도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눔바와 그녀의 집이 아니라 "눔바와 그의 집"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his/her란 한 단어의 차이를 통해 눔바는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고, 초대 교회 여성 지도자요 여자 목사로 추앙받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자, 본문을 비교해 보자.
골로새서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 (흠정역) Salute the brethren which are in Laodicea, and Nymphas, and the church which is in his house. (KJVI).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兄弟)들과 눔바와 그 여자(女子)의 집에 있는 교회(敎會)에 문안(問安)하고 (개역)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개정)
리오디게아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눔바와 그 여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문안하여 주십시오. (표준)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녀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현대인)
Greet the brethren who are in Laodicea and also Nympha and the church that is in her house. (NASV)
Give my greetings to the brothers at Laodicea, and to Nympha and the church in her house. (NIV)
Please give my greetings to ou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at Laodicea, and to Nympha and those who meet in her house. (NLT)
Give my greetings to the brothers and sisters in Laodicea, and to Nympha and the church in her house. (NRSV)
Give my greetings to the brothers at Laodicea and to Nympha and to the congregation at her house. (NWT)
놀랍지 않는가? 딱 한 권의 성경만 눔바가 남자라고 말하고 나머지 모든 역본은 눔바를 여자라고 말합니다. 둘 다 맞을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성경이 있습니다. 이는 사본에서부터 그러합니다. 원문이라 불리는 사본들에 차이가 있습니다.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이 나올 때 최종 권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눔바가 현대의 성경학자들이 여자 이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남자였으며 교회의 감독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자는 교회의 감독이 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는 2000년 대 전후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전성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성경을 변개하는 것은 마음이 부패한 증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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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하여"인가? "말미암아"인가?
일전에 어떤 분이 교회의 환란 통과론에 대한 진리를 입증한다며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펴서 자기주장을 펼쳤습니다. 재림과 휴거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2:1은 환란 통과론, 환란후 휴거론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은 우리 주님의 오심(재림)과 우리가 그분께로 모이는 것(부활, 휴거)로 시작되기 때문이요, 1절과 3절을 연관시키면 자연스럽게 환란 통과론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about, regard to, as to, concerning) 말한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by) 말씀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영으로나 말로나 혹은 우리에게서 왔다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살후2:1-2). [Now we beseech you, brethren, by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by our gathering together unto him,](살후2:1)

우리 말 성경으로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응당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고 되어야 환란 전 휴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영어 킹 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매우 간단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래 두 가지에 대해서(관하여) 간청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로 말미암아 간청했습니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by). -주님의 오심(재림)
2.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말미암아(by).- 휴거, 부활
사도 바울은 우리 주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by), 또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말미암아(by) 성도들에게 간청했는데 간청한 내용은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살후2:3).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역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에 관하여"(concerning to) 간청하고 권면한 것으로 변개되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했다는 한글 킹제임스(말씀보존학회) 역시 이 부분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살후2:1,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흠정역)
Now we beseech you, brethren, by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by our gathering together unto him, (KJVI)
살후 2:1, 형제(兄弟)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求)하는 것은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降臨)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關)하여 (개역)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개정)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그분 앞에 우리가 모이게 될 일에 관해서 부탁할 말씀이 있습니다. (공동)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이는 일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표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앞에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일에 관하여 이제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한킹)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주께서 우리를 불러모으실 일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당부하겠습니다. (현대어)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과 우리가 그분 앞에 함께 모이는 것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현대인)
Now we request you, brethren, with regard to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our gathering together to Him, (NASV) *관하여
Concerning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our being gathered to him, we ask you, brothers, (NIV). *관하여
Now, brethren, concerning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our gathering together to Him, we ask you, (NKJV). *관하여
And now, brothers and sisters, let us tell you about the coming again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how we will be gathered together to meet him. (NLT). *관하여
As to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our being gathered together to him, we beg you, brothers and sisters, (NRSV). *관하여
However, brothers, respecting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our being gathered together to him, we request of you (NWT). *관하여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성경은 이미 본문 자체의 변개로 말미암아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틀어 놓았습니다. 한 글자, 한 단어의 변개는 성경의 핵심 교리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1절을 '관해서"라고 읽게 되면 3절과 연관되어 환란 통과론이 입증됩니다. 그러나 '말미암아'로 읽으면 주제 자체가 달라져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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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자는 몇인가요?
질문.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자는 몇인가요?
답변. 셋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헤롯이 몇 명인지, 요한이 몇 명인지, 마리아가 몇 명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모두 같은 사건인지 다른 사건인지 일부는 같고 나머지는 다른 사건인지 구분하지 못해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유명인들의 주석서나 신학자들의 견해를 찾지 말고 성경 자체의 본문을 유념해서 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1. 어떤 죄인인 여자(눅7:37-38).
[보라, 그 도시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으신 것을 알고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분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 곁에 서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 시작하여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고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발에 부으매](눅7:37-38).
장소: 바리새인 시몬의 집.
일시: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사역 마지막 때 쯤.
부은 사람: 어떤 죄인인 여자.
행위: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음
사람들의 반응: 예수님이 대언자라면 이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수군거림. 죄사함에 대해서서도 수군거림.
결과. 네 죄들을 용서 받았느니라(눅7: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
"어떤 죄인"이란 말로 인해 막달라 마리아로 추정하는 이들이 많으나 추정일 뿐이다.

2.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요12:3
[그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3)
장소: 베다니 사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집.
일시: 유월절 엿새 전.
행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음.
사람들의 반응: 가룟 유다가 이 일에 대해 분노함.
결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고 향유를 예비한 사람이었음을 증언해 주심. "나를 장사지낼 날을 대비하여 그녀가 이것을 간직하였느니라."(요12:7).

3. 어떤 여자 (마26:1-5, 막14:3).
[그분께서 베다니에 계실 때에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으시니 한 여자가 매우 귀한 나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그분의 머리에 부으매](막14:3)
일시. 유월절 이틀 전
장소.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
행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
사람들의 반응: 향유를 허비한 것에 대해 분개. 그 여자를 향해 불평함(막14:4,5).
제자들도 분개함(마26:8)
결과. 그 여자는 장사지내는 일을 위하여 미리 와서 내 몸에 기름을 부었다(막14:8).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그녀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게 하심(막14:9).
이 셋의 사건은 일시와 장소가 서로 다른 사건임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 향유를 드린 여인 등이란 제목으로 많은 이들이 말씀을 선포하고 그런 설교를 듣고 우리는 얼마든지 감화, 감동, 은혜를 받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가 시비가 되는 일이 없도록 명확히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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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교회란 무엇인가?
질문. 지역 교회란 무엇입니까? 더불어 가정 교회에 대해서 말해 주십시오.
답변. 아래 글을 보십시오.

성경에는 다양한 지역 교회들이 나옵니다. 바울 서신은 각 지역 교회에 보낸 편지들로서 그 지역의 이름을 따라 서신서의 이름을 부릅니다.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등이 그렇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몸은 복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이 어떤 지역, 어떤 도시, 어떤 마을에 교회가 있느냐? 고 말할 때 교회는 그 지역에 믿는 자들의 모임, 회중이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기도와 경배, 찬양과 말씀과 교제를 위해 함께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는 장소가 아니고, 건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간다는 말은 믿는 자들의 모임에 간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 집에 있는 교회”(롬16:5, 고전16:19, 골4:15, 몬1:2)란 말은 그 집에 주님을 섬기기 위해 성도들의 지속적인 만남과 모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정 교회입니다.
요즘 대형 교회에 반발해서 소규모 가정 교회가 성경적이라며 가정 교회 회복 운동을 주창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 교회란 모임 장소를 어느 가정, 어느 개인의 집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집을 성도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로 지정하고 거기서 기도와 찬양, 경배를 하며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기로 결정하면 '...의 집에 있는 교회'라 불립니다.
만약 어떤 학교의 동기, 동창들의 모임이 있으면 그들은 동창회를 어디에서 열 것인가 의논하고 결정합니다. 모임의 장소는 매번 달라질 수도 있고 아예 어떤 특정 장소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해병대 전우들이 모이면 전우회가 됩니다. 그들은 특정 장소에 건물을 빌려서 아예 ** 전우회란 간판을 걸고 활동합니다. 무엇이 동창회냐고 물으면 동창들의 모임이지 모임 장소나 건물을 말하지 않습니다. 전우회도 전우들의 모임이지 결코 어떤 장소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가정에서 모여야 한다거나 카페나 호텔에서 모여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들이 편리한 장소, 시각을 정하는 것뿐입니다.
지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복음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모임의 장소와 모임의 시각, 횟수 등은 회원(지체)들이 알아서 결정하면 됩니다. "...에 있는 교회"란 말은 "...에 있는 크리스천들의 모임, 회중"이란 말입니다. 어떤 지역에 성도들은 있지만 그들이 함께 모이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지역 교회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부르심을 받아 지역 교회를 세운다, 개척한다, 시작한다고 할 때 그 지역에 가서 믿는 자들의 모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함께 많이 모여 그 모임이 커지면 큰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 모임이 작으면 작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건전한 교회란 말은 그 모임이 건전하고 모이는 성도들의 성향, 활동이 건전하다는 말입니다.
지역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면 어느 지역에 성도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교회가 깨졌다고 하면 모임이 깨어진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분쟁이 있다고 하면 모이는 성도들 간에 분쟁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상의 언어요, 말의 용법이지 신학적 교리 용어가 아닙니다. 크리스천들 중에는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그것이 교회다"란 주장을 하면서 어떤 장소, 건물에 모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기 위해,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함께 모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의 말씀, 명령, 가르침을 믿고 배우고, 순종하고, 가르치고, 전파하고, 그분을 섬기고 경배하기 위해 어느 집에서 모이면 '...의 집에 있는 교회'가 되고, 따로 어떤 지역에 특정 장소(건물)를 지정해서 모이면 그 장소가 그 지역 '...에 있는 교회'라 불리게 됩니다. 이것을 지역 교회라고 부릅니다.
참고. 지역 교회는 지방 교회(윗트니스리 계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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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까?
질문. 에서는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까?
답변. 에서는 복을 받았습니다(히11:20).
단 야곱과 같은 복을 받지는 못했습니다(히12:17).
성경의 기록은 모순이나 오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다가올 일들에 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으며](히11:20).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뒤에 그가 복을 상속받고자 하였으되 거절당하였으니 그가 눈물을 흘리고 염려하며 뜻을 돌릴 곳을 구하였으나 그것을 찾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본문은 모순이 아니라 에서가 받은 복과 받지 못한 복에 대한 기록입니다. 에서가 받은 복은 창세기 27:39절입니다. 받지 못한 복은 야곱에게 빼앗긴 복입니다.
창세기 27장은 킹 제임스 성경과 현대 역본의 확연한 차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라, 네가 거할 곳은 땅의 기름진 곳과 위로부터 내리는 하늘 이슬의 기름진 곳이 되리라.](39).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이 구절은 39-40절은 족장 이삭, 아버지 이삭이 아니라 ‘대언자 이삭’(시105:15)이 맏아들 에서의 미래에 대해 대언한 것입니다. “보라, 네가 거할 곳은 땅의 기름진 곳과 위로부터 내리는 하늘 이슬의 기름진 곳이 되리라.”(39). 야곱에 복을 빼앗긴 에서는 다행히 척박한 땅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에서가 소위 말하는 땅의 복지(福地), 길지(吉地)에 살게 될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야곱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이 역시 놀라운 은혜요,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상속은 이삭에게 갔지만 쫓겨난 이스마엘 역시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복을 받았듯이 ‘에서’ 역시 기름진 땅에 살게 될 것이란 복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20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이삭은 다가올 일들에 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으며](히11:20). 이삭은 야곱만 축복한 것이 아니라 ‘에서’ 역시 축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창세기 27:28과 39절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즙을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27:28)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서에게도 동일한 복을 주면 빌어 줄 복이 없다고 했는데 뭔가 말이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역본들은 과감히 주의 말씀을 뜯어 고치며 이삭의 실수를 바로 잡아 주려고 합니다.
창세기 27:39의 현대 역본들을 보십시오.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개정).
[아버지 이사악이 아들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땅은 기름지지 않은 땅, 하늘에서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땅이다. 칼만이 너의 밥줄이 되리라.] (공동).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표준)
[그러자 아버지 이삭이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살아갈 들녘은 척박한 땅, 하늘에서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으리니](현대어)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가 사는 땅은 기름지지 않고 하늘의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며](현대인)
현대 역본들에 따르면 이삭은 에서를 축복한 것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한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지 않았습니까?
히브리서 11:20에는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28절에서 이삭은 야곱에게 복을 줄 때 “하나님께서...”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39절에는 ‘하나님’이 없고 에서의 노력,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풍성한 곡식과 포도즙”이란 부요함이 약속되어 있지만 에서는 그 부요함에 대한 약속이 없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기름진 땅에 살게 될 것임을 말해 주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든지 풍요로움을 보증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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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표(in/upon)는 어디에?
질문. 짐승의 표를 사람의 손 또는 이마 안(in)에 받는다는 것은 사람의 몸(손, 이마) 속에 표를 넣는 것인가요?
답변. in은 장소에 쓰이면 범위, 경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in their hands. - 그들의 손에. in은 범위를 나타냅니다. 신체에서 손 부위(부분) 즉 손에 해당하는 부위 안에다 표를 한다는 말입니다.
in their foreheads. - 그들의 이마에. in은 범위를 나타냅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 '이마'에 해당하는 부위(범위) 안에다 표를 한다는 말입니다.
전치사 'in'은 손과 이마의 범위를 정해 주는 말입니다.
계시록 20:4에 "...received his mark upon their foreheads, or in their hands"라고 말합니다.
in은 표를 받는 신체 부위이며 upon은 표가 찍히는 위치입니다.
먼지나 오물이 손에 묻으면 something dirty in my hand가 됩니다.
오물이 피부 속에 들어 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I have something in my hand라고 하면 손에 뭔가 있다는 말입니다. 손이란 신체 부위를 기준으로 그 경계 안에 있다는 말이지 '손이란 피부 가죽 밑에' 뭔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마에 도장을 찍으면 a stamp in the forehead /upon(on) the head 를 쓸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영어 전치사를 오용해서' 짐승의 표'는 손과 이마 부위 속에 베리칩을 넣는 것이란 이상한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봅니다. 초중고에서 in을 기계적으로 '안에'라고 배우고 그렇게 외운 이들 중에 '손안에, 이마 안에'란 말을 손속에(손의 피부 가죽 아래), 이마 속 즉 이마의 피부 아래를 말하는 것만으로 이해하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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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성도들의 몸속에 뭘 집어 넣으셨는가?
마귀는 사람들의 몸(손이나 이마)에 뭘 집어넣는가?
크리스천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매우 많은 듯합니다.
겔9:4, 주님은 '성도들의 이마 위에 표를 찍으라'고 하셨습니다.
"...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주님은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실 때 그 속에 뭔가를 집어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마 안이란 표가 새겨진 위치가 이마 안이란 말입니다. 이마 "속"이 아니라 이마 "안"입니다.
대환란 때 144,000명의 성도들의 이마에 주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계14:1, 22:4).
짐승 위에 탄 여자의 이마에도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계17:5). 마귀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속이고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흉내 내고 위조하고 가장하고 속입니다.
거짓 대언자가 사람들의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 표의 위치는 '안'(in) 과 '위'(upon)입니다. 몸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손이나 이마에 해당하는 신체 부위의 범위(경계) 안(in) 어느 부위 위(upon)에 기록한다는 말입니다.
불교의 중들, 라마승, 인도 사람들 중에 이마에 점(mark)을 찍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이마 안에(in), 이마 위에(upon) 점(표-Mark)을 찍지요.
피부 속에 뭔가를 집어넣은 것이 아닙니다.
몇 몇 사람들의 주장대로 짐승의 표를 사람의 몸속에 넣는다면 in은 성립하지만 upon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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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 --------댓글쓰기
베리 칩이 그 표라 생각한다면 칩은 피부 아래 들어가야 하니 그렇게 생각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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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Yoon
예, in을 손과 이마란 부위 안이 아니라 손과 이마 속으로 생각하며 열변을 토하는 이들이 킹제임스 교회 내에도 좀 있는 듯합니다.
이곳 캘리포니아에서는 해마다 자동차 등록증을 차량 번호판 오른쪽 맨 위에 붙이도록 규정합니다. 이것을 성경 식으로 표현하면 "캘리포니아 차량국(DMV)은 그들의 차량 번호판 안(in)에, 또 위(upon)에 표(mark)를 받지 아니한 차량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체 운전을 하지 못하게 하더라. 표 없이 운전하는 자는 벌금을 물고, 처벌하더라." ...이런 식이 됩니다.
차량 소유자는 번호판 옆에 공간이 있다고 해서 번호판 경계 밖에다 표를 붙여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안에, 그리고 위에 붙여야 합니다. '안'(in)이란 의미를 '속'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위에'란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in the hand/forehead, upon the hand/forehead는 그런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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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경 -------댓글쓰기
페이스 북이 이렇게도 연동되네요. 아무튼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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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천사는 누구인가요?
질문. 교회의 천사는 누구인가요?
답변. 교회의 천사는 교회의 천사입니다. 목사(장로, 감독-사역자)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천사를 천사가 아닌 교회의 사역자란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요한이 어떻게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핵심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의 천사'란 말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에 '교회의 천사'를 두셨다는 사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때는 어김없이 성경의 단어를 고치거나 의미를 고치려는 이들은 어느 때에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성경 변개자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천사들에게 편지(letter, epistle)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듣고 본 것을 '기록하라, 쓰라'(write)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있고, 마귀의 천사가 있고, 민족들을 다스리는 통치자인 천사(*예: 이스라엘의 통치자-미가엘)가 있고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 받은 천사가 있습니다(히1:14). 심지어 어린 아이들의 천사도 있습니다(마18:10).
*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천사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대상21:27).
* 주님께서는 천사에게 묻기도 하시고 답변하기도 하십니다(슥1:11, 13).
* 사람은 주의 천사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민22:34, 삿13:15,17, 슥4:4, 5:10)
* 사람은 천사에게 뭔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슥1:19).
* 사람은 천사와 대답할 수 있습니다(슥6:4).
* 사람은 천사에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눅1:18, 24). 사가랴와 마리아.
* 사람은 천사를 대접할 수 있습니다(히13:2).
* 사람은 천사와 씨름할 수 있습니다(창32:24, 호12:4).
* 사람은 천사에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계2:1,8,12,18, 3:1, 7,14).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천사들은 '사역자들'의 오역이 아닙니다.
밧모 섬에 있던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준 말씀들을 '기록하라(쓰라)'고 하셨습니다. 대언자들이나 사도들이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달리 요한은 선포가 아닌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주님께 받은 말씀은 누군가 각 교회로 전달하지 않아도 천사들이 충분히 읽고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하늘의 천사들이나 마귀의 천사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천사들'에게 준 것입니다. 천사들은 주님께서 요한을 통해 자신들에게 주신 말씀을 받고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과 책망을 다 보고 듣고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용하셔서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용하셔 성도들에게만 주의 말씀과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 목적은 이제 교회를 사용하사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엡 3:10).
천사들은 교회(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내어진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히 1:14).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천사들에게 주님이 뭔가를 가르치고, 섬기도록 글을 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대환란 때의 교회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서 사도들의 활동이나 사역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일하는 '천사들의 활동과 사역'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문제는 대부분의 한글 성경이 "기록하라"(write)를 "편지하라"로 번역함으로 오해의 빌미를 준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그라포"는 영어로 graph란 말의 어원으로서 '기록하라'는 뜻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 역시 'write'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 모세의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제정되었습니다(갈 3:19).
*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히2:2).
* 주님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섬기도록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히1:14).
* 주님께서 교회의 천사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쓰셨습니다(계2:1,8,12,18, 3:1, 7,14).
한글 개역이나 개정역은 "천사"를 "사자"로 번역함으로 주님께서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편지하도록 한 것처럼 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성도들 중에도 눈으로는 '천사'로 읽고 마음속으로는 '사역자'로 읽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 변개와 부패, 왜곡은 인쇄된 성경책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성경 신자들이라면 기록된 대로 믿기보다 자신이 이해하는대로 믿으려는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추가-
히브리어 '말라크'나 헬라어 '앙겔로스'가 기본적으로 전달자, 심부름꾼이란 뜻이 있기에 사람으로서의 사자(messenger)란 의미일 수도 있고 천사 Angel일 수도 있습니다. 원어의 다양성으로 인해 최종권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Angel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천사를 천사가 아닌 '사역자'란 주장은 지옥은 지옥이 아니라 무덤이란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역자일 수 있지만 사역자(목자, 감독, 장로)가 천사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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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리라.
질문. "그(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리라."(롬12:20)가 정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답변. 원수의 필요를 공급해 주고 그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를 먹이고 그가 목마르거든 그에게 마실 것을 주라. 그리함으로 네가 그(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리라.](롬 12:20).
위의 구절은 다양하게 해석이 됩니다.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다는 의미를 심판이나 보복, 징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든지 주님의 심판을 받게 한다... 등등의 별별 해석이 많습니다. 고대 중동의 문화나 관습을 알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고, 유대의 문화나 배경을 운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로마서 12:20의 전반부는 '나의 원수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의 원수가 곤란한 지경에 처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는 방관자가 되거나 통쾌해 하며 더욱 괴로움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울 수 있는 대로 도와야 합니다. 원수가 얼마나 궁핍한지 먹고 마시는 것조차 어려울 때 우리는 음식과 음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문제는 후반부입니다. "그리함으로"란 접속사와 뒤의 문장에서 막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부분은 중동의 관습이나 원어를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보면 됩니다.
잠언 25:21,22에 답이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에게 빵을 주어 먹게 하고 그가 목마르거든 그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면 주께서 네게 보답해 주시리라.] (잠 25:21, 22).
--한글 성경은 "조건"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의역입니다.
[If thine enemy be hungry, give him bread to eat; and if he be thirsty, give him water to drink:For thou shalt heap coals of fire upon his head, and the LORD shall reward thee.] (잠 25:21,22) -이유, 결과를 이끄는 부사절입니다.
주님은 "나의 원수"에게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빵을 주어 먹게 하라.
2. 네 원수가 목마르거든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3.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리라(한글 성경).- 주님의 보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결과. "주께서 네게 보답해 주시리라." 숯불은 빵과 물을 주는 일입니다.
본문은 "네가 너의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면 주께서 너에게 보답해 주시겠다."는 보상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일은 약속이 있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보답해 주시는 "네게"는 빵과 물을 준 사람이요, 숯불을 쌓은 사람입니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았다는 것은 원수에게 빵과 물을 준 것과 같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빵, 목마른 자에게 물, 불이 없는 자에게 숯불을 주는 것입니다. 화로에 불이 꺼진 이웃에게 불씨(숯불)을 담아 주듯이 원수에게 똑같이 그렇게 숯불을 담아 주면 주님께서 보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나 원수에게나 동일하게 선을 베풀고 필요를 공급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숯불을 쌓으리라'란 의미가 보복이나 심판이 아니라 선행임은 글만 읽을 줄 알면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통해 "네 원수를 갚지 말라"(레19:18)고 하셨기에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은 일은 결코 심판이나 보복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면 그 쌓은 자에게 보답해 주신다고 말씀하심에 주목하십시오.
로마서 12:20은 잠언 25:21-22에 의해서 '숯불을 쌓는다'는 의미가 심판이 아닌 선행이요,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보겠습니다.
잠언 25:21-22절의 문장 번역/해석을 해 드리고자 합니다.
[If thine enemy be hungry, give him bread to eat; and if he be thirsty, give him water to drink:For thou shalt heap coals of fire upon his head, and the LORD shall reward thee.](잠25:21-22).
"for"는 앞 문장을 그대로 받아 "이유'를 나타냅니다. 21절의 명령을 준 다음에 22절 시작에 "For...."는 우리말로 "이는, 이렇게 하는 것은" 정도에 해당합니다. 21-22절은 콜론으로 연결된 문장입니다. For는 이유와 결과의 절을 이끕니다.
"네 원수에게 먹이고 물을 주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에(이유) 주께서 네게 보상해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For는 이유를 나타내는 절입니다.
""네 원수에게 먹이고 물을 주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라. 이는(그리하는 것은-결과)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싸는 것이요, 주께서 너에게 보상해 주시리라." -For는 결과를 이끄는 절입니다.
한글 흠정역 성경은 조건으로 번역했는데 전체적인 의미가 훨씬 더 강조되지만 직역이란 원칙에서는 벗어난 듯이 보입니다. 의미가 달라진 오역은 아닙니다.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는 것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행위이기에(이유, 행한 것에 대한 결과), 주님은 너에게(원수에게 아님) 보상(원수에게 보복이 아님)해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주님은 원수에게 숯불을 쌓은 사람에게 보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논점은 주님께서 나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선을 행한 나의 일(선행, 의) 대해 보상을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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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하다, 중보 기도하다.
질문. 성도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중보한다, 중보 기도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답변.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성경 공부 시간에 질문한 향제님은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신데 성도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한다고 하는 것이 어색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취지로 질문하신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어색하거나 오류는 아닙니다.
중재자(mediator)와 중보(intercession)을 혼동한 듯합니다.

1. 예수님은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갈3:19,20, 딤전2:5). *mediator.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 이제 중재자라 함은 하나만의 중재자가 아니로되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갈 3:19,20). 어떤 천사,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리아, 죽은 성인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2. 예수님은 더 나은 언약의 중재자이십니다. *mediator.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 더욱 뛰어난 섬김의 직무를 얻으셨으며 그것에 의해 또한 그분은 더 나은 약속들 위에 세워진 훨씬 더 나은 언약의 중재자이시니라.](히 8:6).

3.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재자이십니다. *mediator.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영원한 상속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말하는 피 곧 뿌리는 피에 이르렀느니라.](히 12:24).
중보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intercession

1. 주님은 대언자들이 중보하도록 하십니다. *intercession
대언자들의 사역은 주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 뿐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주께 중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대언자이며 주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거든 이제 그들은 만군의 주께 중보하여 주의 집과 유다 왕의 집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들이 바빌론으로 가지 못하게 하여야 할지니라.](렘27:18).

2.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위해서(for) 중보한 것이 아니라 대적(against)하는 중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미리 아신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 기록이 엘리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대적하며 하나님께 중보하여 이르되,] (롬11:2). *intercession

3. 크리스천들은 불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해야 합니다.
*intercession
[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되] (딤전 2:1). 크리스천은 같은 성도들 뿐 아니라 세상의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중보는 하늘에 계신 주님만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4. 예수님은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십니다(히7:25). *intercession

5.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중보하십니다(롬8:26,27,34). *intercession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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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것인가? 노략질 한 것인가?
질문.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빌린 것인가? 노략한 것인가?
답변.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이제 백성의 귀에 고하여 모든 남녀가 각각 자기 이웃에게 은 보석과 금 보석을 빌리게 하라, 하시니라.](출11:2).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은 보석과 금 보석과 의복을 빌리매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그들이 빌려 주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하였더라.](출12:35, 36). *spoil- 약탈하다.
“빌리매....빌려 주게 하셨으며....노략하였더라.” 뭔가 말이 맞지 않아 보입니다. 빌릴 때 빌려 주면 그냥 받으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인들에게 빌리기 위해 금은보석과 의복을 요구했는데 이집트 사람들이 아무런 요구 사항 없이 조건 없이 빌려 주자 빌리는 대신 그들을 노략했습니다. 빌려 주면 감사함으로 받고 되돌려 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빌리는 것은 빚을 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빌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집트인들에게 빌려 주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거래, 무역입니다. 빌리는 것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필요 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노략은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빌리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빌렸다가 그들이 아무 조건 없이 요구하는 것들을 빌려 주자 노략했습니다. 출애굽의 날 이스라엘이 보여 준 자신들의 죄성, 탐욕에 대한 언급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구절에서 ‘빌리다’는 말은 킹 제임스 성경의 오역, 오류라고 주장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경이 옳습니다. 주님은 “빌리라”, “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이집트인들에게 “빌려 주게”(lent)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했습니다(출3:11, 12:36).

설명을 보십시오.
1. 뺏으라, 약탈하라, 노략질하라. 이것이 세상 전쟁에서 승리자, 정복자들이 재물을 얻는 방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주님은 파라오에게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이집트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도둑질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리게 하셨습니다.

3. 빌린다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은, 금, 의복을 빌렸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떠나는 백성들에게 빌려 주면 되돌려 받을 기약이 없습니다. 사실상 그냥 주는 것이요, 떼이는 것입니다. 이집트가 이스라엘에게 빌려 준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신 갚아 주실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4. 주님은 이집트 사람들의 눈에 은총을 베푸셔서 빌려 주게 하셨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빌리게 하셨는데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빌린 것이 아니라 ‘노략’(약탈)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동안 종살이를 하면서 당했던 고난, 억울함 등을 재물로 보상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빌리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빌리지 않고 ‘노략’한 것입니다. 빌린다고 하면 그들은 필요한 것만 요구할 것입니다. 빌린다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이기 때문입니다.
노략한다면 욕심대로, 원하는 대로 요구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집트를 떠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략했다고 말합니다.

5.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금, 은, 의복입니다. 이집트인들은 빌려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빌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대로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버리면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금, 은, 의복’에 대해 되갚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빌리라는 말은 주님께서 그것을 대신 갚아 주실 때 성립합니다.

6. 주님께서 ‘빌리라’고 하셨고 이스라엘은 노략(약탈)을 했습니다. 이는 이미 주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준 말씀 그대로입니다. [모든 여인이 자기 이웃 사람과 자기 집에 머무는 여인에게 은 보석과 금 보석과 의복을 빌리리니 너희가 너희 아들딸들에게 그것들을 입힐 것이요, 너희가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할 것이니라.](출3:22).
400년을 이집트인들 밑에서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은 재물을 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을 노략했습니다. 노략은 전리품을 챙기는 것이요, 약탈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10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신 터라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을 노략했다는 것은 그동안의 주종 관계가 뒤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나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 선물로 얻은 승리를 만끽해 본 것입니다.
이집트는 훗날 이 때 빌려준 만큼, 노략당한 만큼 이스라엘에게 가서 노략해 옵니다(왕상14:25,26 15:16-19). 주님께서 빌리라고 하시면 ‘빌리는 것’이 옳습니다. 노략해 간 것은 다시 노략질 당합니다.

7. 주님은 뺏으라, 약탈하라고 하지 않고 왜 “빌리라”고 했습니까? 뺏고, 훔치고, 약탈하는 것은 주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주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젠가 출애굽 때 가져간 금, 은, 의복의 원가와 이자를 계산해서 되갚도록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이집트 사람들에게 빌린(취한) 모든 재물은 주님께서 친히 이집트에 보상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로부터 원금과 이자를 받지 못해도 충분히 주님으로부터 넘치도록 물질적, 영적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행한 것으로 간주하시고 모두 갚아 주십니다(마10:42, 25:40). 이것을 ‘보상’이라고 합니다.

8. 성경은 이집트가 받을 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주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이집트여, 내 손으로 지은 아시리아여, 내 상속 백성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시리로다.] (사19:25). 주님은 이집트를 복 주시며 “내 백성 이집트여”라고 하십니다.
이상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빌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백성이 이스라엘에게 금, 은, 의복을 요구하는 대로 주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되갚음(보상) 받을 일이기에 빌려 주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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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목사=장로란 말이 됩니까?
질문. 성경에서 "감독=목사=장로"란 말이 성립합니까?
답변. 예.
참조할 글, <감독과 목사는 다른 직분입니까?>

예수님은 혼의 목자요, 감독이십니다. 사도들은 감독이며(bishop), 목자(pastor)이며, 장로(elder)였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은 자신을 일컬어 '장로'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감독이었고, 목자였습니다. 목자, 감독, 장로가 각기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다양한 역할이요, 직분입니다.
빌립보서 1:1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사도 바울은 빌립보 지역의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 내에 있는 세 부류의 사람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성도들, 감독들, 집사들"입니다. 성도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습니다.
자, 본문에서 말하는 감독들이 누구를 일컫는 말입니까?
사도행전 20:28을 보십시오.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한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 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장로들)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의 교회 곧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먹이게 하셨느니라.](행 20:28).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고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장로들을 향해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라고 말합니다. 장로가 감독이란 것입니다. 장로들을 감독으로 삼았지 장로 따로 감독 따로 세운 것이 아닙니다. 장로의 역할, 사역은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요, 그들의 감독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장로를 감독자로 삼으셨습니다. 장로 따로 감독 따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장로들을 '감독자'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장로가 감독입니다. 감독자는 양떼에게 주의를 기우리고 교회를 먹여야 합니다. 먹이는 것이 목자의 사역입니다. 감독이 곧 목자입니다(감독=목자). 이 등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베드로전서 2:25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로 돌아왔느니라.](벧전2:25). 혼의 목자가 따로 있고 감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분이십니다. 혼의 목자와 감독은 동격입니다. 목자가 감독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장로임을 밝히면서 동일한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벧전 5:2).

장로들에게 준 임무가 무엇입니까?
1. "양떼를 먹이고". 장로가 양들을 먹입니다. 장로가 양들을 먹이는 목자입니다.
2. "감독하되"(2). 장로가 양 떼를 감독합니다. 장로가 하나님의 양떼를 감독입니다. 장로=목사=감독은 동일한 직분입니다. 다만 역할, 사역의 강조점만 다를 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2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감독하며 너희에게 훈계하는 자들을 알고](살전 5:12). 형제들 가운데는 수고하고 주 안에서 형제들을 감독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감독, 목자, 장로는 결코 니콜라파의 성직 체계가 아닙니다.
형제들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형제들을 감독하며 훈계하는 자들이 없다면 그야 말로 비극입니다. 만인 제사장 교리는 성경적인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 교리가 교회 내에 목사(감독, 장로)를 부정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일부 교회에서 담임 목사, 부목사, 교육 목사, 행정 목사 등으로 세분해서 계급화 하는 것을 싫어해서 성경에는 '목사'란 직분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요, 오류일 뿐입니다.
저는 말씀 침례교회의 형제들 가운에서 수고하고 형제들을 감독하고 훈계하는 감독입니다.
저는 말씀 침례교회의 장로이며 양들을 먹이는 목사입니다. 하지만 저희 교회 형제들은 저에게 감독님, 장로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형제님 또는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감독, 목사, 장로란 호칭에 매우 민감한 나머지 이리 저리 말씀을 비틀고 거부하는 크리스천들이 진리 안에서 부드러움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에서 목사란 말은 성경에 없는 용어라며 배척하는 이들이 있지만 목사는 목자란 뜻으로 가장 비 권위적인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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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장 비성경적인 단어를 마치 목사가 성경적인 단어로 인식하네요.
결코 목사 = 장로 = 감독 ... 이렇게 뜻이 일치 되지 않습니다. ...
장로와 감독은 먹이는 면과 외부의 적을 감시하는 면에서 일치를 하지만 장로와 감독과 목사를 붙이면 아니 됩니다 ..
목사는 성경에 없는 천주교 에서 나온 계급주의 에서 파생된 단어 입니다
교황] 대주교] 주교] 신부] 평신도... 이런 체계에서 개신교는 목사] 평신도 로 나누어 놓았죠 ...
목사호칭에 너그러우시면 아마도 목사 호칭을 사용하는게 편하실 겁니다.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모든 믿는 이들이 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고 오직 주님만 대제사장이십니다. 목사란 직분은 없습니다. ... 주님] 목사] 평신도 이런 체계가 없습니다.
에베소서에도 목사라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원문) 목자와 교사 로 써져 있습니다.
형제님의 글의 논리대로 하자면 장로 = 감독 = 목자와 교사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사부분은 어떻게 해석해놓으시겠습니까 ?
형제님 .. 변개 하지 마십시오. ... 변개된 한글판 킹제임스 성경을 가지고 양심을 합리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한글판 킹제임스, 처음 나올 때 분명히 목사와 교사로 되었는데 출판인이 성직을 좋아 하다 보니 어느덧 다 목사로 되었더군요. 그 후 그 아류 킹제임스 성경도 다 목사라 적혀 있고 주님이 오실 때 다 된 거 같습니다. ... 주님 앞에서 빛으로 비추어 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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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님의 말은 목사가 캐톨릭 성직체계에서 파생된 단어요 성경에 없는 말이요, 성직 체계를 좋아하는 출판인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인 듯 합니다. 이것은 님이 믿고 싶은 대로 판단한 것이요,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에 불과합니다.

1. 목사와 목자, 목양자, 목동, 양치기.
교사, 스승, 사부, 선생님은 뉘앙스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같은 사람입니다. 목사, 목자, 목양자, 목동, 양치기는 같은 뜻이고 그렇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간호인, 간호사, 간호자,...다 같은 말입니다. '자'는 낮춤말, '사'는 약간 높임말의 뉘앙스를 풍기죠. 목자, 목사는 그런 뉘앙스의 차이입니다. 목사는 목자가 아니란 말은 운전사는 운전수가 아니란 말과 같은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2. 목사가 캐톨릭 성직 체계에서 유래한 말
캐톨릭은 주교, 사제라고 쓰지 '목사'라고 쓰지 않습니다. '목사'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고려 중종 때부터 사용된 한국어임)부터 백성들을 돌보고 감독하고 먹이는 직분을 맡은 관리에 사용된 말이며 캐톨릭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관리 사(牧使)가 아닌 스승 '사'(師)자를 썼지요. 놈 '자(者)'자를 쓰는 것보다는 스승 '사(師)'자를 붙이는 것이 한국 정서상 맞지요. 목자는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으니 당연해 보입니다. '사'(師)와 '자(者)'는 어떤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말입니다.
목민(牧民), 목사(牧使) ...이런 단어 자체를 모른다면 그냥 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배우면 됩니다. 자신의 무지를 남을 비난하고 탓하는데 사용하고 판단하는 일에 재빠른 크리스천들이 제법 많습니다.
목사는 목자, 목양자, 양치기를 뜻하는 한국어 용례일 뿐 성직 체계를 합리화하는 말이나 파생된 단어가 아닙니다. 출판인이 성직을 좋아하느니 등은 님의 편견에서 나온 판단이거나 비난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님이 말한 출판인은 성직 체계를 싫어하고 비판하는 분입니다. 사실과 자신의 견해를 혼동하지 않기 바라며 자신의 판단을 사실인양 오도하지 않기 바랍니다. 개역 성경을 번역했던 분들이 중국어, 일본어 성경에서 용어를 많이 차용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우리 말 단어인 '목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3. 목사는 비성경적 용어?
목사는 휴거나 삼위일체처럼 사람들이 만들어낸 단어가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다만 기호, 취향에 따라 목양자, 목자, 목동, 양치기 등으로 달리 부르겠다면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권위적인 면에서 감독이나 장로가 훨씬 더 성경적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목사는 양 무리를 먹이고 돌보고 감독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란 점에서 전혀 비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글의 핵심은 님이 말한 목자가 감독이나 장로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란 것입니다. 교회의 감독이 교회의 장로요 그 사람이 목자란 것이죠. 직분의 강조점만 다를 뿐 동일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목사란 단어는 성경 변개가 아니라 현실적 용례에 충실한 것입니다. 흥분하고 거품 물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대제사장이고 성도들이 모두 영적 제사장이지만 주님이 목자장이라고 해서 모든 성도가 다 감독이거나 장로나 목자인 것은 아닙니다. 목자는 성직 체계가 아니라 주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이요, 지역교회의 직분입니다.

4. 사실 오도?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는 다른 이들도 다 아는 내용이며, 자신이 믿는 정도는 다른 이들도 더 잘 믿고 있다고 여기십시오. 홀로 빛을 받고 다른 이들은 무지하고 타락한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천주교의 계급 체계와 목자(목양자, 목사, 목동, 양치기...뭐라고 표현하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연결해서 의심하고 비판하는 님의 문제입니다. 님과 같이 아는 사람들의 비판이나 의심, 오해를 받기 싫다면 '목자' '목양자' '목동' 등으로 부르면 됩니다. 무지하고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자에서 파생된 말이 목사란 것을 알면 됩니다. 다만 그렇게 믿기 싫고 인정하기 싫다면 '감독'이라고 불러도 되고 option은 많습니다. 교회에서야 형제님하고 불러도 되죠.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자를 보십시오.
목자가 양들을 먹이고, 목자가 양들을 감독하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킵니다. 목자는 성경에서 감독이요 장로란 의미를 확인하라는 것이 위의 본문입니다.

5. 목사(자)와 교사.
참고로 지금 성경에도 목사와 교사(목자 겸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pastor and teacher-목사(목자, 목양자, 양치기...)와 교사(스승, 선생, 사부...). 글을 쓰기 전에 사실 확인부터 하는 버릇을 꼭... 또 한 가지 필자 역시 '니콜라파의 교리'(성직 체계)를 미워하는 크리스천이요, 믿는 자는 모두 영적 제사장이란 성경적 진리를 믿고 가르치고 선포합니다.
이 글을 통해 배움을 얻고, 오해는 풀고 무지와 오류는 고침 받고 성도들을 멋대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악함은 꼭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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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질문.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라고 할 때 '벗기다"가 무슨 뜻입니까?
답변. 노략질했다는 뜻입니다.

설명.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공공연히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2:15). 우리말로 벗기사(having spoiled)란 부분은 노략질했다는 뜻입니다. 정복을 통해 다른 자의 소유물을 취한다는 뜻으로 전리품을 취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신 주님께서 지하 낙원에 있던 혼들을 전리품으로 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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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
질문. 영에 속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답변.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But he that is spiritual judgeth all things, yet he himself is judged of no man.
벌써 십 수 년 전 일이다. 어떤 목사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은 모든 것을 다 판단해도 되지만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고 하시며 설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듣는 이들 중에 '저 목사님은 과연 영에 속한 사람인가?' 이런 비판과 도전, 반발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나는 과연 영에 속한 사람일까? 이런 의문을 가진 이도 있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이 말씀은 누군가 영에 속한 사람이 되면 모든 사람을 판단할 수 있고 , 마음대로 판단할 자유와 권리를 얻게 되지만 반대로 자신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판단을 받지 않는 치외법권적 영역에 속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1. 영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이다.
spiritual-영적인. 우리말로 "영에 속한"이란 말은 상당한 의역 또는 해석으로 보이는데 '영적인' 사람이다. 영적 선물, 영적 몸, 영적 생각, 영적 집, 영적 깨달음, 영적 희생물, 영적인 복...등 spiritual이란 말은 그냥 '영적'이란 뜻이다.

2. 영적인 사람이란?
영적인 생각을 따르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고 육신적인 생각을 따르는 사람이 육신적인 사람이다(롬8:6). 사도 바울은 누구나 자신을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자는 자신이 쓴 편지들을 주의 말씀이요 명령인 줄로 알라고 했다.
주의 말씀은 영적이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고전 2:13).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들을 거둔다 해도 그것이 큰일이냐?](고전 9:11).
크리스천은 영적인 선물, 영적인 복을 받았으며 영적 희생물을 드리며 영적 사악함과 맞서 싸우며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영적 깨다름에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누구나 영적인 것에 참여하고 따르면 영적인 사람이다.

3.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일, 사물, 사건)을 판단하지 모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한다. 겉모양이 아닌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성경을 들고 판단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어떤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 좋은 것과 나쁜 것, 의와 불의, 거룩한 것과 속된 것, 하나님께 속한 것과 육신에 속한 것, 성경적인 것과 비성경적인 것 등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붙잡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영에 속한 사람은 다른 사람, 형제들, 남의 종을 판단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롬14:10,13). 성경은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약4:12)라며 경고한다.

4. 영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판단의 법규요, 판단의 말씀이다. 주의 판단에 따른 판단에 대해 아무 사람의 판단(견해, 주장, 의견 따위)로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경의 판단이면 족하다. 성경이 죄라고 한 것은 죄요, 불의라 한 것은 불의요, 불법이라고 한 것은 불법이요, 부정한 것이라고 하면 부정한 것이다.
성경의 판단은 어떤 사람에 의해 다시 해석되지 않으며 또 다른 판단이 필요치 않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 학자,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성경을 따라 내린 나의 판단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어떤 사안, 사건에 대해서 성경적인 판단을 내렸을 때 그 판단이 성경적이라면 세상의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예를 들어 필자가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애는 죄요, 악한 일'이라고 판단한다. 영적인 사람은 누구나 성경에 따라 이런 판단을 할 것이다. 나의 이 판단에 대해 내가 옳은지, 잘못인지 세상의 어느 누구의 판단을 구하지 않으며 또 다른 판단이나 의견을 필요치 않는다. 나는 그들의 판단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
심리학자, 생물학자, 유전공학자, 의사들이 의학적 문제니 심리적 문제, 성 정체성의 문제, 유전적 문제니 이런 저런 문제라고 말해도 나는 그런 모든 사람들의 판단은 나의 판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적인 사람들의 판단은 성경이 최종권위요, 주의 말씀이 판단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 사람의 판단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군가 나를 광신자, 꼴똥, 세상의 오물 덩어리라고 비난하고 판단하는 따위 등의 그런 판단은 피할 수 없다. '영적인 사람이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은 성경에 따른 판단에 대해 영적인 판단에 대해 누구의 판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성경이 죄라고 한 것을 세상 모든 사람이 본성이라고 한다고 해도 '나의 판단'은 그 누구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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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 댓글쓰기
아멘. 우리는 때로 일보다는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말씀에 따라 고쳐 나가겠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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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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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란 말은 비성경적 용어인가요?
질문. 목사란 말은 비성경적 용어인가요?
답변. 성경적 어휘(말씀, 용어)입니다.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 '목사'는 캐톨릭 성직 체계에서 나온 말이며, 비성경적 용어란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방 교회, 형제 교회를 비롯한 일부 교단과 '목사'란 단어에 거부감을 갖는 분들의 주장은 성경에 목사란 말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 과연 그럴까요?
주장1. 목사가 캐톨릭 성직 체계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실. 전혀 아닙니다. 캐톨릭은 주교, 사제, 추기경 등으로 쓰지 '목사'라고 쓰지 않습니다. '목사'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고려 중종 때부터 사용된 한국어임)부터 백성들을 돌보고 감독하고 먹이는 직분을 맡은 관리에 사용된 말이며 캐톨릭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관리 사(牧使)가 아닌 스승 '사'(師)자를 썼습니다. 놈 '자(者)'자를 쓰는 것보다는 스승 '사(師)'자를 붙이는 것이 한국 정서상 맞지요. 목자는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으니 당연해 보입니다.
'사'(師/士), '자(者)'는 어떤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말입니다.
목민(牧民), 목사(牧使)는 백성들을 먹이고 감독하는 사람들을, 목양(牧羊, 牧養)은 양떼들을 먹이고 감독하는 사람들에 사용하는 한국어입니다. 목사는 목자, 목양자, 양치기를 뜻하는 한국어 용례일 뿐 성직 체계를 합리화하는 말이나 파생된 단어가 아닙니다. 한국의 많은 성경 어휘들은 중국어, 일본어 성경에서 용어를 많이 차용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우리 말 단어인 '목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주장2. 목사는 비성경적 용어?
사실. 성경적 어휘(말씀)입니다. 원문이나 번역본 어디에나 목사(shepherd, pastor)란 말씀은 다 있습니다. 목사는 휴거나 삼위일체처럼 사람들이 만들어낸 단어가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다만 기호, 취향에 따라 목양자, 목자, 목동, 양치기 등으로 달리 부르는 것은 개개인의 문제입니다. 목사는 양 무리를 먹이고 돌보고 감독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란 점에서 전혀 비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목사란 단어는 성경 변개가 아니라 현실적 용례에 충실한 것입니다.

주장3. 목사는 계급 체계에서 나왔다?
사실. 목사는 지역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목자(목사) 는 성직 체계가 아니라 주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이요, 지역교회의 직분입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 겸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pastor and teacher-목사(목자, 목동, 목양자, 양치기)와 교사(선생, 사부, 스승?). 목자가 성직 체계란 주장은 대언자, 사도, 복음 전도자, 교사가 성직 체계란 주장만큼이나 헛소리입니다. '목사'가 비성경적이고 '목자'가 맞는다는 주장은 '교사'가 비성경적이고 '선생'이 성경적이란 주장이나 같습니다.

주장4. 목사가 아니라 목자로 번역해야 한다?
사실. 목사나 목자는 정확히 같은 말이며 어감(뉘앙스)의 차이일 뿐입니다.
목사, 목자, 목양자, 목동, 양치기는 정확히 같은 말이며 어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교사, 스승, 사부, 선생님은 뉘앙스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같은 사람입니다. 전에 간호원들이 '간호원'이라 부르지 말고 '간호사'라 불러 달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간호원, 간호인, 간호자, 간호사가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안내원, 안내인, 안내자, 안내사... 정도의 차이입니다. 목사가 목자의 오역이란 말은 운전사는 운전자, 운전수의 오역이란 말보다 더 헛소리입니다. 목사, 목자, 목양자, 목동, 양치기는 같은 뜻이고 그렇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는 낮춤말, '사'는 약간 높임말의 뉘앙스를 풍기는 것일 뿐입니다. 목자, 목사는 그런 뉘앙스의 차이일 뿐 성경 원문에 '목자'는 있어도 '목사'는 없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주장5. 목자는 양을 먹이는 자들이지 결코 감독하는 자가 아니다?
사실. 목자는 양들에 대해 먹이고 돌보고 감독하고 외부의 적들로부터 지키는 등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어느 주인도 들판에 양떼를 돌보는 목자를 세우고, 감독을 따로 세우는 주인은 없습니다. 라반의 양떼를 친 야곱은 목자였습니다. 이새의 양떼를 친 다윗 역시 목자였습니다. 야곱이나 다윗 옆에 양떼의 감독, 양떼의 장로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 야곱, 다윗이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고 지키고 돌보았습니다.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자를 보십시오. 목자가 양들을 먹이고, 목자가 양들을 감독하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킵니다. 목자는 성경에서 감독이요 장로입니다. 목자나 감독은 같은 사람입니다.

주장6. 목사란 말은 권위적이다?
사실. 가장 비(非) 권위적인 말입니다.
목사는 가장 천한 직업, 힘든 직업에 종사하는 자의 의미입니다. 중동은 물론이요 어느 나라나 목사(목자, 목동)는 천민 계층에 속했고, 그 지위는 농민, 상민보다 더 천한 직업이었고 고된 노동자였습니다. 감독, 장로란 말은 존경과 권위와 위엄이 내포되어 있지만 목자(목사)는 멸시와 천대의 의미가 훨씬 더 강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목자는 목사(牧使, 牧師, 牧士)라 불리면서 성도들로부터 존경과 높임을 받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양들이 목사를 존경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비성경적입니다.
목사란 말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이들은 '목자', '목양자', '목동', '양치기'로 부르면 됩니다. 교회에 와서 김 목사님 대신 김 목동님, 김양치기님....하면 좀 우습기는 하겠지만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가지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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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인가? 목사인가?
질문. 목자인가? 목사인가?
답변. 같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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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란 말은 비성경적 용어인가요?
집요하게 '목사'란 단어를 공격하고 비난하며 비성경적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형제의 무지와 완악함을 보며 이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주장을 온유함으로 바로 잡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혹자는 신약 성경에 18번 나오는 헬라어 포이멘(ποιμην)을 17번은 shepherd로 번역했는데 에베소서 4:11에만 목사로 번역한 것은 킹제임스 성경을 비롯한 모든 번역본의 오역이라고 주장합니다.
같은 히브리어, 헬라어이지만 단어를 달리 번역한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에도 다양한 의미가 있고 같은 의미의 단어에도 뉘앙스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학교에 들어가 몇 학점짜리 히브리어, 헬라어 강의를 듣고 겨우 알파벳을 읽고 사전을 찾아서 의미를 파악하는 정도의 사람들이 성경 원문을 운운하며 번역을 논하는 자체가 사실 우습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헬라어 포이멘(ποιμην)을 17번은 shepherd로 1번은 pastors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 아니라 그 문장 속에서 문맥상 본문의 정확한 의미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백성(양무리들)을 먹이는 사람들을 주님은 목양자(pastors)라 불렀습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먹이리라.][And I will give you pastors according to mine heart, which shall feed you with knowledge and understanding.] (렘 3:15). *목양자(pastor).
pastor란 단어는 shepherd의 고어에 해당합니다.
[pastor is an archaic word for shepherd.]
14세기 경 라틴어 "pascere"에서 나온 단어인데 '먹이는'(to feed)란 뜻입니다.
14세기 프랑스어 "pastur"는 herdsman, shepherd란 뜻입니다.
shepherd=sheep +herd 의 합성어입니다. herdman이 목동, 목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라고 할 때 목자들이 "herdmen"입니다.
염소를 먹이는 목자는 shepherd가 아니라 goatherd 가 됩니다.
에베소서 4:11에서 목자를 shepherd로 쓰지 않고 pastors라 쓴 것은 지역 교회 내에 sheep, goat, flock, bulls, dogs 등 별별 종자들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원어를 읽든 영어를 읽든 그 의미의 속뜻, 뉘앙스까지 파악할 능력이 안 되는 이들이 번역하면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단순하게 shepherd로 번역하고 말겠지만 의미를 알고 있는 이들은 pastor라 정확히 옮긴 것입니다.
목사, 목자, 목동, 목양자, 양치기는 동일한 역할, 동일한 인물, 동일한 직분입니다.
목자는 옳고 목사는 틀리다는 주장은 목자는 옳고 '목동'은 틀리다는 말과 같습니다. 목자, 목양자, 목사, 목동은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목사란 단어(용어)에 시비를 거는 이는 원어도 영어도 한국어도 모두 무지한 사람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언제나 옳고 정확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는 이는 그만큼 자신이 성경을 알지 못하는 고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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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ori ------------댓글쓰기
킹제임스 성경은 언제나 옳고 정확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는 이는 그만큼 자신이 성경을 알지 못하는 고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am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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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Louboutin --------댓글쓰기
킹제임스 성경은 언제나 옳고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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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소멸인가 불멸인가?
질문. 영혼불멸은 플라토의 철학적 가르침이지 성경적 진리가 아니라는 주장이 맞습니까?
답변. 영혼불멸은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혼의 소멸, 수면은 없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참으로 사람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에 있나이까?](욥 14:10).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거니와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다시는 보상도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 잊혔기 때문이로다. 또한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이제 사라졌나니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어떤 일 중에서 그들이 차지할 몫은 더 이상 영원히 없느니라.](전9:5,6).
이 구절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며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들, 안식교, 몰몬교 등에서 주로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욥기 14:10에 따르면 ... 사람이 죽으면 소멸된다고 말합니다. 소멸이란 단어는 한국어 어감이 매우 강하며 불멸의 반대말로 사용됩니다.
전도서 9:5-6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후에는 이렇다고 말씀합니다.
1. 사람이 죽은 후에(죽은 자들은)는 아무 것도 알 지 못한다.
2. 사람이 죽은 후에(죽은 자들은)는 보상도 받지 못한다.
3. 사람이 죽은 후에(죽은 자들은)는 그들의 기억은 잊혀 진다. 죽은 후에는 모든 기억이 잊혀 진다.
4. 사람이 죽은 후에(죽은 자들은)는 사랑과 미움과 시기가 사라졌다.
5. 사람이 죽은 후에(죽은 자들은)는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어떤 일도 그들이 차지할 몫은 없다.
영과 혼의 불멸을 믿는 이들에게 사람이 죽은 후에는 소멸되고(욥14:10),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기억이 잊혀지고 감정(사랑, 미움, 시기)이 사라지고 해 아래서 이루어진 어떤 일에서도 차지할 몫이 없다는 말은 뭔가 좀 이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무덤에 가 보면 그 죽은 시체가 뭔가를 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몸은 이미 흙으로 돌아가 소멸되어 버렸을 것이고, 시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시체는 감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보상(삯)을 얻는 일은 없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라도 지으면 죄의 삯이라도 받겠지만 죽은 자는 조금의 죄조차도 짓지 않습니다. 고로 어떤 보상(삯)도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동묘지는 조용합니다. 마귀는 죽은 자들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늙어서 치매만 와도 우리는 기억을 잃어버리는데 죽은 자의 기억이 잊혀 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죽은 후에는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사랑과 미움과 시기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육신이 죽었는데 무슨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분노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에게는 어떤 감정도 야망도 없습니다. 죽은 자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서도 차지할 몫이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죽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합니다.
위의 본문에서 욥과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후 즉 몸의 역할, 기능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죽은 후에 혼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 즉 몸의 기능과 역할은 전도서 7장에 기록된 말씀이 절대 진리입니다.
죽은 몸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어떤 일에 대해서 받을 몫이 없지만 ...몸을 떠난 혼은 모든 것을 알고, 느끼고, 기억하고, 각자 받을 몫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몸이 어떠하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계시나 조명이 없다 해도 그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아무런 지식이나 기억이나 감정이나 몫이 없다는 것은 불신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몸이 사람의 전부가 아닙니다.
몸이 죽을 때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혼은 하늘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종착역이 있습니다. 몸을 떠난 혼은 보고, 느끼고, 말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요청하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낙원에 있던 아브라함을 보고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3-31절을 펴서 보십시오. 죽은 부자의 몸은 장사되어 부덤에 놓여 있고, 땅에서 썩고 있습니다. 그의 혼은 천사들에 의해 지옥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보았습니다(눅16:23). 혼은 보고 판단하는 지적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고통을 말하며 물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눅16:24). 뜨거움을 느끼고 필요를 요구합니다. 감정, 느낌, 판단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덤에서 그의 죽은 몸이 한 일이 아니라 지옥에서 그의 혼이 한 일입니다!
욥이나 솔로몬이 기록한 죽은 몸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사람이 죽으면 소멸(끝)이니 아무런 기억도 생각도 감정도 없다는 따위의 혼의 수면/죽음의 교리를 설파하는 이들은 무지한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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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일 -------댓글쓰기
사람이 죽으면 영과 혼이 분리 됩니까?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 가고 혼은 믿는 신자라면 천국에 가고 불신자라면 음부에 가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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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Yoon
신자라면 혼이 하늘에서 주와 함께 있게 됩니다.
불신자라면 그 혼은 지옥에 있게 되지요.
음부가 아니라 "지옥"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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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다윗에게 인구 조사를 시켰는가?
질문. 누가 다윗에게 인구 조사를 시켰는가?
답변. 사탄이 선동했고 다윗이 했습니다.

[다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오르매 그분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움직이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 하고 말하게 하시니라.](삼하24:1)./흠정역
주께서 누군가를 움직여서(move) 말하게 했다면 그것은 "대언"입니다.
성경의 대언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대로(move) 말한 것입니다(벧후1:21).
개역, 개정, 표준역 성경에 따르면 주님께서 다윗에게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고 말한 것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거짓입니다. 주님은 다윗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向)하여 진노(震怒)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感動)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人口)를 조사(調査)하라 하신지라 (개역)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개정)
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 "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여라." (표준)
흠정역(한킹)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움직이셔서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고 말하게 하셨다"고 번역했는데 주님은 다윗에게 그런 말을 하도록 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다윗이 주의 영의 움직임대로 한 말이라면 이 말씀은 주의 영을 받아 말한 대언이요, 거룩한 주의 말씀이 됩니다. 다윗이 이 말을 말했을 때 요압과 그의 군대 대장은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삼하23:3,4).
그들은 다윗의 말이 주의 말씀이 아니며, 주께 받은 말씀이 아님을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사탄의 충동을 받아 한 말인지 몰랐을 지라도 주의 말씀이 아님은 확실히 알고 반대했습니다. 만약 주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말하도록 시키신 것이라면 다윗은 아무리 큰 반대와 핍박이 있더라도 한 마디도 더하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말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자,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봅시다.
KJV: And again the anger of the LORD was kindled against Israel, and he moved David against them to say, Go, number Israel and Judah.
성경 본문을 보면 이렇습니다.
- 주의 분노가 다시 이스라엘(다윗이 아님)을 향해 타올랐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기고 무죄한 피를 흘리는 죄 때문이다.
-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다윗이 아님)을 치시려고 했다.
- 주님께서 다윗을 움직이셨다.
- 다윗은 "가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고 말했다. (주님이 한 말씀이 아님. 주님이 다윗에게 이 말을 하도록 시키신 것이 아님. 이 말은 사탄이 다윗을 선동해서 그 선동을 받아 한 말임-대상21:1. 다윗이 주의 감동을 받아서, 주의 영이 움직여서, 시키시는 대로 한 말이 아니라 사탄의 충동을 받아 다윗이 한 말이다.)
개역 성경을 읽는 이들은 주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흠정역 성경을 읽는 이들은 주께서 다윗에게 그런 말을 하도록 움직이셨다(감동-move)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을 직역하자면 이렇습니다.
[주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분노가 불타올라 그들을 대적하여 다윗을 움직이시니 그가 말하기를, "가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 하니라.](삼상24:1). "하고 말하게 하시니라."
다윗이 영적인 마음을 지녔다면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불타올라서 자신을 움직일 때, 회개하라, 금식하라, 주께로 돌아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온 나라에 금식과 회개를 선포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자신을 움직이실 때 다윗은 느닷없이 자기 신하들에게 "가라....수를 세라."는 인구 조사를 명령해 버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주님의 분노가 타오를 때 즉시 아론에게 "향로를 취해 제단으로부터 불을 그 안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놓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주}로부터 진노가 나갔으므로 재앙이 시작되었느니라."(민16:46)고 주의 분노로 말미암는 재앙을 막거나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모세는 주의 분노가 타오르자 즉시 그 사실을 알렸고 재앙이 시작됨을 선포하면서 곧바로 향로를 취해 향을 놓고 백성들을 위해 속죄할 것을 명했습니다. 모세는 즉시 향을 놓고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들과 산 자들 사이에 섬으로"(민16:48) 주의 재앙이 그쳤습니다.
이것이 대언자나 제사장의 직무입니다. 범죄로 인해 주의 분노가 타오를 때 해야 할 일은 주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와 회개, 속죄, 금식 등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시인하며 겸손히 주의 긍휼을 구하며 속죄하는 것이 다윗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다윗을 움직인 것은 회개, 금식, 겸손, 바로 잡음을 위한 것이었지만 다윗은 엉뚱하게 '인구 조사'("가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고 명령했습니다. 속죄와 회개, 금식을 명령해야 할 때 그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습니다.
다윗이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주님의 주권, 허락하신 뜻,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의 시험 등 다양한 의견과 견해를 제시해서 해석하겠지만 성경은 명료하게 답변해 줍니다.
주의 영이 다윗을 움직일 때 사탄이 일어나 그를 선동(provoke-충동질)했기 때문입니다.(대상21:1)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일어나 다윗을 선동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하니라](대상21:1). [And Satan stood up against Israel, and provoked David to number Israel.]
주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분노가 불타올라 다윗을 움직일 때 사탄 역시 즉시 다윗을 선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주님 앞에 있을 때 사탄도 함께 왔고,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주의 천사 앞에 서 있을 때 그의 오른쪽에 사탄이 서서 대적했던 것과 같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1. 하나님의 영께서 다윗을 움직이셨고(move), 사탄은 다윗을 선동(provoke)했습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분노하셨고, 사탄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일어났습니다.
3.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지 않고 대신 주의 심판을 받도록 대적하고 올무를 놓습니다.
4. 사탄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하도록 선동했고, 다윗은 그 선동에 따라 행했습니다.
5.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사탄 역시 일합니다.

다윗은 주께서 움직이시고 사탄이 선동할 때 누구를 따를 것인가? 무엇을 따를 것인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사탄의 충돌질, 선동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가 거의 동시에 임할 때 성도들은 잘 분별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 여러 번 발견됩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마4:1, 눅4:1). 사탄이 예수님께 죄를 짓도록 시험했지만 예수님은 악을 거절하고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간 예수님은 마귀를 대적했지 마귀의 선동(provoke)에 따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시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욥에게 죄를 입술로 죄를 짓도록 선동한 것은 사탄입니다. 욥은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그의 선동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입술로 죄를 짓는 대신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습니다.
발람은 주의 영께서 그를 움직이시는 대로 이스라엘을 향해 대언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이 움직이는 대로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고 행음하도록 했습니다(민25). 이스라엘은 발람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헀습니다.
다윗은 사탄이 자신을 선동(충동-provoke)할 때 자신의 순전함을 지키고 이스라엘에 속죄와 금식, 회개를 선포했어야 했습니다. 모세처럼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고 주님께 긍휼과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주의 영을 받은 대언자요, 주의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주의 분노가 타오를 때 주의 진노, 재앙, 심판을 돌이킬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범죄한 백성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주의 진노가 불타오를 때마다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한 일을 기억해 보십시오. 백성들을 위해 중보했던 사무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의 진노가 타올라 우리를 움직이시고, 우리 마음에 감동이나 부담을 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 보십시오.
깨어 있고 주의하십시오. 주님께서 일하실 때 사탄 역시 우리 곁에 부추기며 선동하며 대적합니다(슥3:1). 오늘날 목자들이 범죄에 빠진 혼들을 위해, 잘못을 범하는 성도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다윗은 사탄이 자신을 선동하는 대로 따름으로 죄를 범하고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했습니다. 이것이 깨어있지 못할 때 성도들이 범하는 죄요, 연약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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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댓글쓰기
아멘! 바르게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이었는데 이렇게 가르쳐주시니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운데 늘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바르게 알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이트를 알게 되어 진리의 말씀들이 알리고자했던 말씀들을 제대로 알게 되기를 바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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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누구를 택해야 하는가?
질문.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누구를 택해야 하는가?
답변. 내가 택한 사람이 당선되기보다 주님이 택한 사람이 당선되기를 바라면 됩니다.
필자는 교회의 목자로서 선거 때만 되면 성도들 사이에 정치적 성향의 차이, 다름으로 인해 적잖은 신경이 쓰인다. 식사 때, 교제의 시간에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고 긴장이 된다.
성도들은 같은 주, 같은 영, 같은 믿음, 같은 교리라면서도 정치적 성향은 왜 다를까? 정치 지도자를 뽑는 일은 영적인 일, 주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선거를 통해 세상의 변화(발전)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선거 혁명, 선거를 통한 세상의 변화, 선거를 통한 개혁, 선거를 통해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 자체가 반성경적이며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누가 당선되면 역사의 진보고 누가 당선되면 후퇴라는 말은 그저 선거꾼들의 선동이요, 말일 뿐이지만 그런 말을 받아 앵무새처럼 떠드는 크리스천들도 있다.
세상은 선거를 통해 사람들이 바꾸는 것이 아니다. 선거를 통해 자신의 크리스천의 삶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선거를 통해 내 자신이 바뀌는 것은 더욱 아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선거는 그리스도인들이 뭔가를 기대하며 할 일이 아니다. 선거 때만 되면 지지하는 정당, 후보를 중심으로 신자와 불신자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연합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 기이한 일이다.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할 때 각국의 교회, 크리스천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군대를 위해, 승리를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은 어느 나라의 크리스천들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국의 선수들이 승리하도록 기도한다.
하나님은 어느 나라의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정기적으로 각종 선거가 벌어진다. 모두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 후보가 당선되기를 기도한다.
자, 그럼 하나님은 어느 크리스천의 기도를 들으실까?
우리는 여당의 승리나 야당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이 언제나 선하고 옳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후보가 선하거나 의로운 것은 더욱 아니다. 욕한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일 수 있고 열렬히 지지한 사람이 더럽고 사악한 인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후보가 당선되든 싫어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주님의 손에 있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요, 그들이 얻는 권세는 주님께서 주신 권세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뜻 안에, 주님의 권세 아래 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기도하기보다, 이들을 통해 성도들과 교회가 서로 간에 서로 분열하고 분쟁하고 다투고 논쟁하고 파당을 짓게 하는 어둠의 권세를 부숴주실 것을 기도한다. 마귀들이 밀 까불듯이 까부는 이런 풍조에 성도들이 휘둘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성도들이 좀 더 성장하여 말씀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여 내 손으로, 내가 좋아하는, 내가 판단해서 뽑은 지도자가 최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도자를 주시도록 기도한다.
세상의 선거가 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서로 다투는 것은 그들이 생각과 중심, 목표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요, 자신이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나와 너, 우리 편 너희 편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생각하자. 나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왕국과 의를 추구하는 기도를 하자.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유익, 나의 지지, 나의 편, 나의 무엇'이 아닌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
필자는 여당/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들에게 뭔가 영적인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필자는 그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 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필자는 성도들이 여당과 야당의 지지자들로 갈라져 다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세상의 통치는 하나님의 허락 아래(요19:11) 마귀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는 권세임을 믿는다.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내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리라." (눅4:6).
마귀는 헤롯이나 빌라도에게 정치권력을 주었듯이 지금의 여당, 야당 지도자 중 누구에게나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줄 것이다! 후보자가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마귀에게 받은 선물이다. 물론 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당선되기를 바란다. 손에 칼을 잡고 불법과 악을 행하는 자들을 제대로 징벌해 준다면 그가 누구든 그 점에서 하나님의 사역자이며(롬13:4), 필자는 시민으로서 권위에 복종하며 존경을 보내며 그를 위해 기도하며 순종할 뿐이다(벧전2:13).
필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편이며, 그분을 지지할 뿐 이다.
전쟁이든 경기든 선거이든 입학이나 입사 시험이든 배우자 선택이든 주거지의 선택이든 모든 선택에 나의 판단과 선택이 아닌 주님의 선택, 나의 뜻이 아닌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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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가요?
질문.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가요?
성경에는 마귀의 말, 사람들의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답변.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외에도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만 기록해 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한 말, 천사들이 한 말, 수많은 사람들이 한 말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신자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단어)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반면 어떤 신자들은 성경의 일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대부분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 않느냐?
성경에는 사탄이 한 말도 있고, 파라오가 한 말도 있고, 이교도들이 한 말도 있고 바리새인들이나 장로들이 한 말들도 있는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율법)을 주실 때처럼 그렇게 직접 하신 말씀이나 산상수훈처럼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만 주의 말씀이고 사탄이나 파라오, 아비멜렉, 아브라함, 롯, 사라, 에서, 야곱, 라반 등이 한 말은 주의 말씀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에덴에서 뱀과 여자가 나눈 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가룟 유다가 제사장들과 나눈 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빌라도와 유대인들이 나눈 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이들이 한 말(대화), 행동, 생각, 의도, 행적 등에 관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자신의 대언자,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뱀이 여자에게 한 말은 모세의 상상이나 전승이나 창작적 기록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친히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에덴에서 여자가 혼자 한 생각, 상상, 말, 행동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대언자에게 말씀해 주셨기에 그 말씀이 현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가 한 말이든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대언자와 사도들에게 주셨고 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단어(말씀)는 성경 속에 한 마디(단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every word=all Scriptures)은 모두 영감으로 주어졌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말씀들을 주셨고,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한 말이든 빌라도가 한 말이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단어)은 모두 주님께서 대언자/사도들에게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 말, 행위에 관련된 모든 것이 주의 입을 통해, 주의 영을 통해 주어졌기에 성경의 모든 단어(말씀)는 주님의 말씀이요, 주님이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한 때 욥기를 읽을 때 욥과 그의 친구들의 대화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나눈 말들을 녹음해 둔 것도 아니고 누가 녹취해 둔 것도 아닌데 몇천년이 지난 지금도 듣고 보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대언자에게 영감으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사탄이 나눈 대화, 욥과 그의 종들, 욥의 아내가 한 말, 욥의 친구들이 한 모든 말을 성령을 통해 자신의 대언자에게 말씀해 주셔서 기록들(Scriptures)로 남겨 주셨습니다. 그들이 한 말이 주의 입(영, 숨)을 통해 성경 기록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주의 말씀, 주의 작품입니다. 모든 성경은 다(한 단어도 빠짐없이) 주의 말씀입니다. 모든 단어에 주의 숨(영감)이 주어져 있고, 모든 단어가 순수하고 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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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홍 ---------------댓글쓰기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는 할머니.... 등장인물들의 대사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며 들려주심의 예로 설명해도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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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1. 원본에 없는 구절도 들어갔다.- 불신에 찬 거짓말쟁이들의 주장입니다.
2. 예를 드신 구절은 원본에 있습니다. 수많은 사본들에도 있습니다. 없다고 믿는 이의 오류입니다. 후대에 발견된 오류투성이의 사본이나 자신이 가진 사본에 없다고 해서 원본에 없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고 믿는 바보들이 간혹 있습니다.
3. 수많은 성서들 중에서 성서학자들이 뽑아서 지금의 성경이 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믿음의 성도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쓰던 것을 성경으로 부른 것입니다. 정확히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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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댓글에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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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이름을 지워 버린다.
질문. 주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이름을 지워 버린다는 말씀은 크리스천의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까?
답변. 아닙니다. 아래 설명을 읽으십시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하지 아니하시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출 32:32-33).
모세는 "주님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 이미 자신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이미 주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주를 믿고 율법을 지키고 의를 행하면 그 때 그 사람의 이름이 주의 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 이름이 있는데" 그들이 범죄할 때 그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으로, 단체적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묻힌 모든 사람들은 다 구원 받은 자들이고, 이들은 다 그 이름이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자신의 책(주의 책)에 기록하셨는데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사람들, 모세와 더불어 바다와 구름들 사이에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 날 구원 받았고, 한 날 침례를 받았고, 한 날 주의 반석에서 나온 영적 음료를 마신 주의 백성입니다(고전10:1-4).
주님께서 친히 세운 왕국인 이스라엘은 세상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의 기본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1. 국가의 영토- 약속의 땅 가나안 땅.
2. 국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3. 헌법- 모세의 율법. 국가와 국민들의 기본 헌법.
이 셋은 모두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 학생들의 출석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아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결석한 학생들은 날자 별로 그 이름에 붉은 색 줄이 그어집니다. 국민들은 태어나는 순간 호적이 등재됩니다. 범죄할 때 전과자란 줄이 그어지고, 죽을 때 그 이름에 붉은색 또는 검은 색 X 자가 그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날에 태어난 민족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의 군대로 불렸고,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모든 백성들의 이름은 병적부 즉 주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은 범죄할 때 그 이름이 지워집니다.
주의 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자를 간단한 예를 보면 이렇습니다.
1. 할례를 받지 않는 혼(창17:14).
2. 성소에 쓸 향 기름을 혼합하거나 타국인에게 붓는 자(출30:33), 자기가 냄새를 맡으려고 그것을 만드는 자(출30:38).
3.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출31:14).
4. 부정함을 지닌 혼이 주께 속한 화평 헌물의 희생물의 고기를 먹는 자(레7:20,21).
5. 불로 예비하여 주께 드리는 헌물 짐승의 기름을 먹는 자(레7:25)
6. 피를 먹는 자(레7:27).
7. 수간하는 자, 동성과 눕는 자(레18:29).
8. 근친상간을 하는 자(레20:17).
9.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레23:29). 기타 등등....
주님은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 모두의 이름을 지워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고 너로부터 그들보다 강하고 큰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기에](신 9:14). 이 구절을 통해 멸망당할 뻔 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그들의 이름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범죄하는 혼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주께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실 뿐 아니라 주의 분노와 그분의 질투가 그 사람을 대적하여 연기를 뿜으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에게 놓이리라. 주께서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시고](신 29:20). [그의 후손이 끊어지게 하시고 다음 세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시 109:13). 이름이 미리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워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사악한 자들의 이름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주께서 이교도들을 책망하시고 사악한 자들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무궁토록 없애셨나이다.](시 9:5). 지옥에 간 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의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눅16).
이스라엘은 범죄했지만 그 이름을 지우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말렉은 지우셨습니다.
[주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우리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더라.] (왕하 14:27). 지우셨다는 말씀은 이미 그 이름이 책에 있었음을 전제로 합니다.

자, 그럼 크리스천은 어떻게 됩니까?
크리스천은 주님을 믿는 순간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누구나 이미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은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가 범죄할 때 지워졌다면 생명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의 생명이 다시 태어날 때 기록됩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의 이름을 호적에 먼저 올릴 수는 없습니다. 아들로 태어났을 때 그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이 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으므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제자들의 이름이 처음부터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하늘에 기록되었음이 분명합니다.
크리스천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은 복음을 믿을 때 그 때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또한 참된 멍에 동료인 네게도 간절히 권하노니 복음 안에서 나와 함께 수고하고 또 클레멘트와 나의 다른 동료 일꾼들과 함께 수고한 저 여자들을 도우라.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모든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면 바울은 이런 사실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주를 믿는 순간 기록된 것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어떤 경우에도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주의 책과 어린양의 생명책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서 구원 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오류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뼈에 속한 지체들로서 그분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들이니라.](엡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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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사라의 눈가리개가 된다?
질문. 아브라함이 사라의 눈가리개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답변.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해서 남들이 사라의 정체,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가렸다는 뜻입니다. 사라의 눈가리개가 아니라 "사라에게 ...모든 사람에게 눈가리개"가 됩니다. 본문을 정확히 봐야 합니다.
---------------------눈가리개가 되리라.
눈에 눈가리개를 하고 있으면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눈가리개를 하면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없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너를 위한 눈가리개가 된다?
[사라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네 오라비에게 은 천 개를 주었은즉, 보라, 그가 너와 함께한 모든 사람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너를 위한 눈가리개가 되리라, 하였더라. 이같이 사라가 비난을 받았더라.](창20:16). [And unto Sarah he said, Behold, I have given thy brother a thousand pieces of silver: behold, he is to thee a covering of the eyes, unto all that are with thee, and with all other: thus she was reproved.] (창 20:16).
이 구절을 아브라함이 사라의 수치를 가려준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수치를 가려 주는 눈가리개가 되어 주신다. 등등의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에게"(to, unto)란 단어를 "위한"(for)으로 번역(오역?)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한글 성경(흠정역, 한킹 포함)은 '위하여'(for)라고 함으로써 긍정적 해석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본문 구절은 칭찬이나 위로가 아니라 '비난'(책망)입니다. 눈가리개란 단어 자체가 비난임은 "thus"(이같이, 그같이)란 말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너를 위한(for) 눈가리개" 가 아니라 "너에게...에게..." 눈가리개가 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눈가리개가 된다...'사라와 함께한 모든 사람'과 '함께한 모든 다른 사람'에게도 눈가리개가 된다는 말입니다. 왜 눈가리개가 됩니까?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아브라함에게 은 천개를 준 이유를 그가 "네 오라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오바리에게 은 천개를 주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남편인 줄 알았으면 은을 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사라의 거짓말에 속았습니다. 사라는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라의 일생에 이만한 수치와 욕을 당한 적이 없는 그런 비난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 하고, 사라가 남편을 오라비라고 하는 한 아브라함은 누구에게나 '눈가리개'가 되어 그들이 사라를 남의 아내로 바로 보지 못하고 남편이 없는 여자로 오인,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란 오빠가 사라 너에게와 너와 함께한 사람들,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가리개'(남을 속이는 역할)가 될 것임을 비난한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의 눈을 가리는 눈가리개는 탐욕, 불신, 뇌물, 사람을 두려워함 등 다양합니다. 거짓말 역시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눈가리개입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사라의 오빠임을 자처함으로써 아비멜렉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라'에 대해 바로 보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게 한 눈가리개였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요 대언자라 불린 아브라함이 이방 왕 아비멜렉에게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눈가리개가 되지 말라는 책망을 받은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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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37절은 초림 때 성취된 사건인가요?
질문. 예수님을 찌른 사람들이 그분을 본다(요19:37)는 것은 초림 때 성취된 예언인가요? 재림의 문맥인데 왜 십자가 사건에서 성취되었다고 합니까?
답변. 아닙니다. 성경은 성취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림 때 성취될 구절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과 그분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음을 기록하면서 구약 성경 두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더라.](요19:36). /시34:20절 성취.
[또 다른 성경 기록이 다시 이르되, 그들이 자기들이 찌른 자를 보리라, 하느니라.] (요19:37)./ 슥12:10절의 말씀. 성취가 아님. "이르되."
36절은 시편 34:20절의 성취입니다. [그분께서 그의 모든 뼈를 지키시매 그것들 중의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였도다.](시34:20). 주님께서 창에 찔리심으로 곧 바로 죽어서 로마의 군사들은 그분을 내려서 죽음을 확인하고 뼈를 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뼈들이 꺾이지 않은 것은 성취입니다.
37절은 스가랴 12:10의 인용인데 성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 기록이..."이르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아직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재림의 문맥이며 요한 계시록 1:7에서 사도 요한이 다시 한 번 기록합니다. "그들이....보리라."는 부분은 재림 때 성취됩니다.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계1:7).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분이 구약 성경에서 미리 기록된 그 분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죄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스가랴 12:10을 보십시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그를 위하여 애곡하며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듯 그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리로다.](슥12:10).
사도 요한은 이 구절에서 "또 다른 성경 기록이 다시 이르되, 그들이 자기들이 찌른 자를 보리라, 하느니라."고 부분 발췌를 했는데 이 말씀의 성취가 아니라 이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옆구리를 창에 찔리셨고 성경의 증언에 따라 그분은 메시야(그리스도)란 것입니다. 말씀대로 초림 때는 그분이 찔려셔야 하고 재림 때는 그분은 자신을 찌른 자들에게 보이셔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구약 성경에서 찔리신 분(슥12:10)이 십자가에서 옆구리를 창에 찔린 예수님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림 때 십자가에서 그분의 몸이 창에 찔리지 않으시면 성경 본문에 "그들이 자기를 찌른 자를 보리라."는 말씀은 훗날 성취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자기들이 찌른 자를 보리라."는 말씀이 있음으로 찔리신 예수님은 메시야이시고 스가랴 12:10에서 기록된 주 하나님이시란 것을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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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가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율법을 지키란 말인가요?
질문. 행위가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이 말씀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를 말합니다.
자, 본문을 보십시오. "행함이 없이는"-설교. http://av1611.net/3386
성경은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절대 진리입니다. 믿음은 있는데 행위가 없다고 한다면 그 말은 몸은 있는데 '숨, 호흡, 생명'이 없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몸은 영안실이나 공동묘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약 2:17).
[그러나, 오 허무한 사람아,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약2:20).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위 없는 믿음도 죽었느니라.](약 2:26).
성경에서 행위는 다 같은 종류의 행위가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가 있고 믿음의 행위가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 육신의 일은 죽은 행위(히6:1)입니다.
율법의 행위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롬 3:20).
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롬 3:28).
3. 율법의 행위로 구하면 걸려 넘어진다.
[무슨 까닭이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그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구하였기 때문이라.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느니라.](롬 9:32).
4.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될 수도 없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갈 2:16).
5. 율법의 행위로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갈3:2). [그런즉 너희에게 성령을 제공해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서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하시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하시느냐?](갈3:5).
6.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갈3:10).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입니다(살전1:3).
야고보서에 말하는 행위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믿음의 법, 믿음의 영, 믿음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걷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안에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요, 열매입니다. 이런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는 살아 있고 활동력이 있고 권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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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은 주님을 만났습니까? 안 만났습니까?
질문. 백부장은 주님을 만났습니까? 안 만났습니까?
답변. 만났습니다.
본문입니다. 마8:5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그분께 나아와 그분께 간청하여.....
마8:8....주여, 주께서 내 지붕아래고 오심을 내가 감당할 자격이 없사온즉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눅7:6, 백부장이 친구들을 그분께 보내어 그분께 이르되, 주여 , 친히 수고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할 자격이 없나이다.
이 사건은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주님께 나아와 요청을 했고 누가복음에는 유대인 장로들을 보냈고, 다시 자기 친구들을 보냈던 것으로 나옵니다.
1.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로 보냄(눅7:3). 장로들의 절박한 간청(눅7:4-5). 장로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서 고쳐 주실 것을 간청함. 백부장은 직접 오도록 청한 적이 없음.
2. 예수님이 집 근처 도착(눅7:6).
3.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 집에 오시는 것을 만류함(눅7:6).
4. 친구들은 예수님께 백부장의 말을 전해 줌. "말씀만 하옵소서."(눅7:7).
주님은 백부장의 친구들을 통해 백부장의 말을 들으심.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을 들으심.
여기서부터 마태복음의 백부장의 행적이 나옵니다.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낸 후에 집에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집 가까이에 이미 주님이 와 계셨던 고로 밖으로 나와 주님을 만났습니다.
5.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로 나아왔다(마8:5-13).
7. 예수님은 백부장으로부터 직접 그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셨다.
8. 주님은 백부장에게 "네 길로 가라. 네가 믿은 그대로 네게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말씀하심(마8:13)
9. 주님은 백부장을 돌려 보내셨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각에 그의 종이 나았다(마8:13).
자, 그럼 정리합니다.
주님이 가버나움에 들어 오셨습니다.
1. 백부장은 자신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즉시 유대인 장로들을 그분께 보내 부탁했습니다.
2.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에 자기 친구들을 보내 자신의 할 말을 전했습니다. /누가복음.
3. 백부장은 직접 주님께 나아가 말씀드렸습니다./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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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백부장이 믿은 것, 그의 큰 믿음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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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 --------- 댓글쓰기
목사님의 말씀에 대한 설명을 읽자면 늘 모순되는 것을 아닌 것으로 알기 쉽게 풀어주시는 것에 놀랍니다. 여태까지는 모순되는 구절은 누군가가 잘못 적었거나 아님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을 적어서 그렇겠지 하고 신경 안 썼는데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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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질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답변. 그들이 아니라 '너희'(or 우리)입니다.

마태복음 5:16은 제자(신자)들이 빛을 비추어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행위를 보여 그것을 본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의미로 읽거나 설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선행을 본다고 해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리가 선행을 보여 준다고 해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KJV)] (마 5:16).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lorify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마 5:16).
우리가 선한 행위를 보여 주어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면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볼 수 있고(may see), 그로 인해(우리를 통해 비춰진 빛으로 그들이 본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 우리는 등불로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
2. 빛을 비추면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게 된다.
3.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본문을 정확히 번역하자면,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 (that-결과/목적)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게 될 것이요(볼 수 있을 것이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뒤는 명령문)](마5: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는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지 "그들에게" 준 명령이 아닙니다. par·en·thet·ical comma(,)에 주목하라.
주의 명령에 따라 빛을 비추어 사람들을 보게 해 준 사람들은 우리를 등불로 삼아 빛을 비추게 해 주신 하나님, 우리가 비춘 빛으로 사람들이 보게 된 것으로 인해 우리는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추는(let...shine) 것뿐입니다.
자신이 등불로서 빛을 비추어 누군가에서 선한 행실을 볼 수 있도록 헀다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추신.
헬라어를 언급하시는 분이 계셔서 영어-헬라어 대역을 올려 두겠습니다. 동사의 격변화, 시제, 단복 수까지 모두 나와 있는 것들이 인터넷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헬라어를 전혀 모르시는 분들은 strong 성구 사전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Let your umwn light jwV so outw shine lampw before emprosqen men anqrwpoV, that opwV they may see eidw your umwn good kaloV works ergon, and kai glorify doxazw your umwn Father pathr which o is in en heaven ouranoV. (마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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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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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좋은 코멘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형제님처럼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워낙 유명하고 익숙한 구절이라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요.
.............. 헬라어나 영어 문법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Let이 뒷 문장까지 걸리지는 않습니다. 물론 they may에 연결되는 문장이 아닙니다. (, and glorify....). 만약 형제님 견해대로 하면 "그리고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느니라."로 번역됩니다. 전혀 말이 안 됩니다.
지금 한글 성경은 명령문으로 번역을 했는데(돌리게 하라) 이는 , and Let them glorify...로 문장을 파악한 것입니다. 이 역시 한 눈에 보아도 문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Let을 문장 전체 동사에 다 걸어 버립니다. "너희의 빛은 비추게 하고, 사람들은 선행을 보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돌리게 하라"(매튜 핸리 주석).-경건한 해석, 적용이지만 정확한 의미는 아닙니다.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여기까지는 O.K. (그들로 하여금-X, 그들이-X)-이런 단어가 없음. and glorify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마 5:16).
"그리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평서문이 아닌 명령문임.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빛을 비추고, 선한 행실을 보여 준 사람들 즉 "너희들"입니다. 다시 한 번 문장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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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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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잘 알려 주셔서 거듭 감사합니다.
1. Let your light shine...."
-(너희는/주어-생략. 명령문이므로, Let은 간접 명령문을 이끔).
-너희의 빛을/목적어. "(너희는-주어) 너희의 빛을(목적어) ...비추어....., **형제님이 말한 your light가 주어가 아님.

2. ,and glorify... 영광을 돌리라.
- parenthetical comma(,)에 주목할 것.
- "돌리게 하라"가 아님.

3.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가 정확함.
앞에 나온 they가 주어이면 "그들이 ....영광을 돌리느니라."가 됨.
이 역시 맞지 않음.

", and 는 독립적인 명령문임. 주님은 "너희에게" 빛을 비추라고 명령하신고로 또 다시 ye를 표시할 이유가 전혀 없음. "that"은 종속절이지만 ,and glorify는 독립적인 명령문 문장임. 주님은 빛을 비추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셨고 영광을 돌리는 것 역시 '너희'에게 주신 명령임. 명령의 대상이 되는 주체(주어)가 다르지 않음. 문법상 전혀 문제없음.
참고로 이것은 저의 독자적 주장이 아니라 영어를 아는 이들은 누구나 다 문장 자체로는 그렇다고 인정함. 별로 난해한 문장으로 여겨지지 않기에 형제님이 교제하는 선교사들에게 물어보아도 좋을 듯...
"The statement is not when men see our good works they will glorify the Father but that when men see our good works we glorify our Father in heaven.-James W. Knox. 형제님 덕분에 몇 권 찾아 보다 나온 내용임. 저의 해석과 비슷한 듯해서 참고로 올려 봄.

5. 이 문장은 헬라어 분석이 전혀 필요치 않음. 물론 헬라어를 보면 해석자의 해석, 견해에 따르게 됨. 헬라어 본문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다르면 킹제임스 번역이 맞음. 헬라어 사전 편찬자들의 해석보다 킹제임스 역자들의 해석이 정확도가 있다고 봄.
저는 이 문장이 너무 쉽고 명료하게 이해가 되어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견을 주시는 형제가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통화 한 번 하도록 해요. 고맙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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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해야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살아야지, 권력의 자리에 올라야지, 사회 각 분야에 주도적인 위치를 점해야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설교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런 목사님들이 누구라는 것은 말 안 해도 아실 것입니다. 일부 유명하고 크다는 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렇게 설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악한 일을 했을 때가 아니라 선한 일을 했을 때라는 것. 그것이 요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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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10에 주의 날은 일요일이라고 해도 무방한가요?
질문. 계시록 1:10에 주의 날(Lord's day)은 일요일(주의 첫날)이라고 해도 무방한가요?
답변. 전혀 아닙니다.

성경에 일요일은 항상 주(週)의 첫날이라 불렀으므로 주(主)의 날은 주일 즉 일요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첫날이라고 할 때 '주'는 Lord 가 아니라 Week입니다. 주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week)은 일요일로서 주의 날(Lord’s day)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주의 첫날, 일요일은 주일(週日)이지 주의 날, 주일(主日)이 아닙니다. 주(主)와 주(週)도 구분하지 못하는 지각으로 성경 강해를 하는 분들은 주(主)와 주(酒)도 구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들 중에서 일요일을 안식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황당하지만 주의 첫날(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웃기는 일입니다.
교회 목사 또는 성경 교사란 사람들의 이런 부주의 또는 무지는 참으로 성도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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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입니까?
질문. the faith of Christ는 그리스도의 믿음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까?
답변.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성령의 선물, 열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옴.
그리스도 안에 있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우리의 믿음의 대상.
이 둘은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사랑함"의 차이와 같습니다.
흔히 'of'는 소유격이지만 목적격, 주격, 동격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of에 대해서는 번역, 해석에 논쟁이 생기곤 합니다.
the faith of Christ Jesus는 그런 논쟁 가운데 있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믿음인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지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of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faith란 단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faith는 전성명사나 명사화된 단어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동사 ‘웃다’에서 ‘웃음’으로, 형용사 ‘높다’에서 ‘높이’로 등의 경우는 전성 명사입니다.
faith는 동사로나 명사로도 쓰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love는 명사나 동사가 모두 됩니다.
faith는 순수한 명사입니다. 문제는 영어가 아닌 한국어입니다.
한국어로 '믿음'은 '믿다'-'믿음'이란 전성명사입니다. 이것은 believe- belief에 해당합니다.
faith에는 동사적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믿음(faith)을 명사화된 동사로 생각해서 "...를 믿는 믿음"인 줄로 주장하는 것은 오해이며 오류입니다.
the Spirit of Christ -그리스도의 영.
the life of Christ -그리스도의 생명.
the body of Christ-그리스도의 몸.
the wisdom of Christ -그리스도의 지혜.
the blood of Christ -그리스도의 피.
the righteousness of God-하나님의 의
위의 예들에서 보듯 of의 격(주격, 소유격, 동격, 목적격 따위)을 결정해 주는 것은 of란 전치사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단어입니다.
The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 of가 다른 식으로 전혀 해석 될 수 없습니다. 앞에 있는 Son이 of의 격을 결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of의 격에 따라 the Son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of는 the Son과 God의 관계를 규명해 주는 역할만 합니다.
그럼 the faith of Christ는 어떨까요?
of는 faith와 Christ의 관계를 규정하지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고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믿음"(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X) 외에 달리 해석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도 명확합니다.
1.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2.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 믿음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4.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5.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믿음을 나누어 주십니다.
6.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7.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 성경 구절을 봅시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4).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좋은 지위를 얻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에서 큰 담대함을 얻느니라.](딤전3:1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네가 내게 들은 건전한 말씀들의 틀을 굳게 붙들고](딤후1:13).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딤후3:15).
믿음의 대상은 다양하지만 믿음의 출처, 근원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믿음이 아닌 다른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흠정역에 번역된 faith of Jesus Christ는 100%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롬3:22, 갈2:16, 2:20, 엡3:12, 빌3:9. 약2:1.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신학적 견해에 따라 설교하고 주장하고 비판하지만 주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주석서들, 신학자들, 부흥사들이 "...를 믿는 믿음"으로 주석하고 주장합니다. 물론 크리스천이라면 예외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문제없이 수용되지만 본문 자체의 기록만으로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옳고 맞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듯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달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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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에서 백배를 받는다?
질문. 이 시대에 집과 ...토지를 백배나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변.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예전부터 자주 받은 질문 중의 하나가 마가복음 10:30입니다.
"이 시대에....백배나 받되"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지금 이 시대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되 핍박과 함께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막 10:30).
주님께서 주님을 헌신적으로 따른 제자들에게 주신 보상에 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 집과 형제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되..." 이 말씀은 기복주의, 현세주의를 지향하거나 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도들은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이 자신들의 생애에 성취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 성도들은 자신들의 집과 토지를 팔아 교회로 가져왔고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사도들의 발 앞에 자신들의 가산을 판 헌물을 가져왔습니다(행5:2). 사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을 선한 청지기들로서 주를 믿는 성도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성도들이 낸 헌금, 헌물, 재산 등은 사도들 개인의 소유로 기증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바 "백배나 받되"란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공동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믿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자기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또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떼면서 단일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고] (행2:44-46).
"믿은 모든 사람들이....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은 이 시대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았습니다.
크리스천은 각기 개인 자산과 공동 소유의 자산이 있습니다. 이것은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자산을 성도들 공동 소유로 생각하지 않고 교단의 것, 교회 지도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둑질이나 다름없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수많은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를 얻었습니다(마12:50).
성경은 성도들을 믿음의 집안(갈6:10)이라고 말합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수천 명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이 빵을 떼며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습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모두가 부모 형제요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대로 또한 핍박을 겸하여 받았습니다. 다가올 세대에는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과 약속을 받습니다. 주의 말씀, 약속은 완전합니다.
*참고.
본문에 나오는 "이 시대에서(in this time)"를 천년 왕국의 시기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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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 간 사람은 70명인가요? 75명인가요?
질문.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 간 사람은 70명인가요? 75명인가요?

답변.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먼저 성경 본문을 봅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와 그와 함께 이집트에 이른 모든 혼 즉 야곱의 아들들의 아내들 외의 모든 혼이 예순여섯이더라.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태어난 아들들은 두 혼이었으며 야곱의 집의 모든 혼 곧 이집트에 이른 혼은 일흔 혼이었더라.](창46:26-27).
[그때에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자기 아버지 야곱과 그의 모든 친족 일흔다섯 혼을 부르니](행7:14).
먼저 숫자를 보십시오. 창세기 45:26절은 66명이라고 합니다. 대상은 "야곱의 허리에서 나와 그와 함께 이집트에 이른 모든 혼"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아내들 외에 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며느리는 제외되었고, 손주 며느리도 제외되었습니다. 야곱과 함께 온 야곱의 씨들이 66명입니다. 야곱을 포함하면 67명이 됩니다.
창세기 45:27절은 70명이라고 합니다. 이미 이집트에 요셉과 요셉의 아들들 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야곱을 포함해서 이집트에 이른 '히브리 민족'은 70명입니다(66+야곱, 요셉, 므낫세, 에브라임).
이는 출애굽기나 신명기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미 요셉이 이집트에 있었으므로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모든 혼이 일흔 혼이더라.](출1:5)
[이집트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칠십 명이었으나 이제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하늘의 별들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10:22)
자, 그럼 신약에서 스데반은 75명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 야곱과 그의 모든 친족 75명을 불렀습니다.
[그때에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자기 아버지 야곱과 그의 모든 친족 일흔다섯 혼을 부르니](행7:14).
요셉은 야곱의 씨 뿐 아니라 "친족 모두"를 포함한 수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일어나서 브엘세바를 떠나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파라오가 그를 데려오려고 보낸 수레들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어린것들과 아내들을 태웠더라.](창46:5). 이집트로 내려 온 사람들 중에는 구약 성경에서 계수되지 않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야곱과 그의 씨들 뿐 아니라 '아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이미 가나안 땅에 있는 자기 친족의 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로 내려 오게 될 혼들이 야곱과 75명이란 것입니다. 이미 이집트에 있는 자기 가족 4명은 제외한 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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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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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본문 속에 답이 있습니다.
[그때에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자기 아버지 야곱과 그의 모든 친족 일흔다섯 혼을 부르니](행7:14).
이 때 요셉의 손자들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이 부른 사람이 75명입니다. 이집트에 있는 사람을 부를 수는 없지요. 게다가 태어나지도 않는 아이들을 "부른 사람" 속에 계수할 수도 없고요.
"자기 아버지 야곱과 그의 친족 75명"이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요. 기록된 대로 읽고 이해하고 믿으면 됩니다. 위에서 "아내들"은 야곱의 아내들이 아니라 야곱의 자식들의 아내들 즉 야곱의 며느리들입니다(창46:5).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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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숨었다?
질문. 예수님께서 숨었다?
답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 8:59, 개역). 도망자 예수?
[그때에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하거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시고(but Jesus hid himself,)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렇게 나가시니라.](요 8:59, KJV).
사람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러 하셨을 때 예수님은 숨어서 피하셨는가요? 예수님께서 숨어서 성전에서 나가셨나요? 개역 성경과 흠정역 성경은 같은 구절임에도 문장의 길이가 많이 다릅니다. 직접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시고 성전에서 그들 한 가운데를 지나서 나가셨습니다. 돌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갑자기 그들의 눈에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셨기 때문입니다.

1. 롯의 집으로 온 사람들은 천사들이 눈을 쳐서 볼 수 없었습니다.
[작은 자든 큰 자든 그 집 문에 있던 남자들을 다 쳐서 눈을 멀게 하니 이에 그들이 문을 찾느라 힘들어하더라.](창19:11)
2. 엘리사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되어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그가 {주}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이 사람들을 치사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니 그분께서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을 치사 눈을 어둡게 하시니라.](왕하6:18)
3. 예수님께 돌을 들어 치려 한 자들은 주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므로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나가셔도 볼 수 없었습니다(요8:59). [그때에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하거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시고(but Jesus hid himself,)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렇게 나가시니라.](요8:59, KJV).
구약과 달리 신약에서 주님은 대적자들의 눈을 쳐서 보지 못하게 하거나 어둡게 하시는 대신 자신을 그들의 시야에서 숨겨 버리셨습니다. 천사들이 사람들의 눈에서 자신을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자신을 사람들의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하신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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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린양이 언제 죽임을 당하셨는가?
질문. 하나님의 어린양이 언제 죽임을 당하셨는가요?
답변. 세상 끝에(히9:26).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죽으셨나요?
예수님께서는 창세 때(세상이 창조된 때) 죽으셨나요?
예수님께서는 창조 이후로 계속해서 살해 되셨나요?
설교단에서 "창세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그런 가르침은 굉장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는 딱 한 번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 피 흘리심은 단번에 드려진 영원한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세상의 창건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히9:26). 성경은 그분께서 세상의 창건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창건 이후로(since-이래로), 또는 세상의 창건 후에(after), 세상의 창건 때에(when) 주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렸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란 설교나 가르침이 매우 많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헛소리가 창세 전 선택, 예정이란 장로교의 교리와 잘 맞기 때문에 쉽게 받아 들여졌습니다.
우리 말 성경의 끊어 읽기, 수식 관계가 이 교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렇게 문장을 의미 단어로 묶어 읽으면 주님은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9:26절에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라고 하심으로 이렇게 끊어 읽는 것은 오독, 오해임을 밝혀 줍니다. 주님은 세상의 창건 이후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정하신 때에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세상 끝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계시록 13:8은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이렇게 묶어야 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세상의 창건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용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누군가를 밝히는데 그들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세상의 창건 이후로부터..." 한 번도 그분의 생명책에 이름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성경 해석은 사사로운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계시록 17:8이 정확하게 해석해 줍니다.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앞으로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라.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여전히 있는 그 짐승을 보고 놀라리라.](계 17:8).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창세기 13:8에 땅에 거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말해 줄 뿐 아니라 "세상의 창건 이후로"란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아니라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풀어 주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창세 이래로, 창세 때에 주님이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교회에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란 말을 자주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은 '창세로부터'가 수식하는 말은 죽임 당한 어린양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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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댓글쓰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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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댓글쓰기
어느 장로교에서 그런 말을 하냐? 장로교 교회는 안 나가봤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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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창세 전 선택, 예정은 캘빈 교리의 기본입니다. 어느 장로교가 아니라 모든 장로교가 그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드러내지 말고 모르겠거든 당신이 알거나 다니는 장로교회에 문의해 보시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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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창건 이후로(계13:8, 17:8)
아래 쓴 글 -[하나님의 어린양은 언제 죽임을 당하셨는가?]에 보충 설명이다.
"세상의 창건 이후로..."(계13:8, 17:8).
아래 두 구절을 자세히 비교해 보자. 똑 같은 문장 구조이다.

1. whose names we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계17:8). ---생명책이 누구의 생명책인지 뒤에 설명을 달면 아래와 같이 된다.
2.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계 13:8).

자, 그럼 첫 번 째 문장에서 "세상의 창건 이후로..."란 말이 무엇을 수식하는지 보자. whose names we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계17:8). "세상의 창건 이래로"란 부사구가 수식하는 말은?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이다. 수식어란 수식하는 말과 연결했을 때 자연스럽게 말이 된다. "세상의 창건 이후로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완벽하게 문장이 된다. 어디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들인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름들"은 주어이다.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자.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계17: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계 13:8). "세상의 창건 이후로"란 부사구가 수식하는 말은? "기록되지 않은"이다. 수식어는 피수식어와 완벽하게 호응을 이룬다. "세상의 창건 이래로 기록되지 않는 자들..." 어떤가? 완벽하다. 어디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인가? "어린양의 생명책이다." 어린양은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생명책"이 된다. 세상의 창건 이래로 말이 무엇을 수식하는지 알려면 영어를 못해도 성경만 비교해도 정확히 알 수 있다. "slain"(죽임당한)은 어린양을 꾸미는 수식어로 분사이다. the Lamb (which was) slain이란 문장으로 '어린양'을 수식하는 말일 뿐이다.
FROM을 BEFORE, WHEN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창세전이니, 창세 때라고 말하는 이들은 아예 신경 끊자. 자기주장을 위해 말씀을 바꾸는 이들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
계시록 13:8에서는 17:8에 있는 생명책이 누구의 생명책인지 말해 주고 있다. 생명책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창세 이후로"란 부사구의 수식 관계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 13:8의 본문은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이다. 본문은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아니고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으로 읽는 것이 정확한 수식 관계이다.
자, 만약 필자의 문법적 구문 분석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자.
그럼 문법을 떠나 성경 자체의 의미론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
영문법의 기본 원칙은 형태보다 의미가 우선이다.
주님은 창세 이후로 죽으셨다. 창세 때나 창세전에는 당연히 죽을 수가 없으시다.
주님은 창세 이후로 역사적 어느 시점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게 언제인가?
약 2,000년 전 갈보리 사건이다.
창세 때는 아니고 창세전은 더욱 아니고 창세로부터 쭉 죽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창세로부터, 이래로, 이후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한다면 주님은 계속해서 고난을 받았거나 여러 번 고난을 받으신 것이 된다. "영문법은 형식 우위가 아니라 내용 우위이다." 내용상 말이 안 된다.
[... 이는 그분께서 친히 자신을 드리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행하셨기 때문이라.](히7:27).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히9:26).
성경은 단 한번이라고 말한다. 단 한 번 나타나사 죽으셨지 창세로부터 계속해서 여러 번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 한 번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이다. 고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slain)'이란 말은 자체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창세로부터"가 수식하는 말이 무엇인지 쉽게 결정지을 수 있다. 계시록 17:8에 완벽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약 2,000년 전 딱 한 번 자신을 죽으셨고 자신을 희생물로 드리셨다.

자,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참으로 그분께서는 세상의 창건 이전에 미리 정하여졌으되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해 드러나셨으며](벧전1:20).
주님은 세상의 창건 이전에 죽임당할 어린양으로 정해지셨다. 죽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죽음이 정해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미리 계획하신 예정이다. 하나님은 누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인지는 창세전에 미리 정하셨다.
그럼 주님은 언제 죽으셨는가?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해 드러나셨으며"라고 한다. 본문이 스스로 다 설명한다. 솔직히 영어 분석 따위가 필요치 않다.
이 마지막 때가 언제인가? 히브리서 9:26절에 답이 있다. "이제 세상 끝에..."라고 한다.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세상의 창건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히9:26). 주님은 여러 번 나타나신 적이 없다. 고로 여러 번 죽으실 수 도 없다.
한 구절 더 보자.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갈 4:4).
주님께서 언제 오셨는지 알 수 있다. "충만한 때가 이르매"-미리 정하신 계획대로 이 마지막 때에 드러나셨다. 베드로가 말한 "마지막 때"요, 히브리서에 말한 "이 세상 끝에..."라고 한 그 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 죽으심, 부활은 그분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정하신 것이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지매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 베드로전서 1:20에 기록된 창세전에 미리 정해지고 계획된 일이 성취된 사건, 시점이 여기다! 창세전에 계획된 일이 언제 이루어졌는가 보라.
[무엇이든지 주의 손과 주의 계획이 미리 작정하사 이루고자 하신 것을 다 행하려 하였나이다.](행4:28). 그분의 받으신 고난, 죽음은 창세전에 정해진 일이고 마지막 때에 드러나 성취된 일이다.
고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으셨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죽은 어린양이 아니라 창세전에 미리 정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충만한 때가 이르러, 마지막 때, 이제 이 세상 끝에 나타나 죽임을 당하셨다. 이것이 성경 기록이다!
계시록 13:8의 "창세로부터"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수식하는 말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는 자들"임을 확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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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의 결여인가?
질문. 어둠은 빛의 결여인가?
답변. 아닙니다. 어둠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어떤 무신론자 교수의 질문에 "어둠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빛의 결여다. 악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선의 결여다."란 말로 답변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는 정말 탁월한 답변으로 들리지만 성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창1:2의 어둠은 빛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사45:7). [I form the light, and create darkness: I make peace, and create evil: I the LORD do all these things.](사45:7).
성경 신자라면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어둠과 악은 주님께서 창조(create) 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창조물들이 감히 신학적으로 그럴리가 없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식으로 아니라고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의 어둠은 빛이 있기 전(빛이 없었기 때문에)의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때로 성경은 알기 어려운 것보다 믿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 신자들의 할 일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사람들이 성경 기록보다 사람들의 해석이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을 따라 말씀을 왜곡하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황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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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에게도 영 또는 혼이 있습니까?
질문. 짐승에게도 혼이 있습니까?
답변. 예,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직 성경에서만 찾고 그 기록을 믿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짐승은 영과 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의 사사로운 견해이지 짐승들을 만드신 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1. 짐승에게는 영이 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누가 알리요?](전 3:21). [Who knoweth the spirit of man that goeth upward, and the spirit of the beast that goeth downward to the earth?] (전3:21).
성도라면 신학자들의 말이 아니라 기록된 주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가장 건전하고 온전한 지식은 성경 말씀을 읽고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주의 기록된 말씀을 믿는 것이 원형 그대로의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2. 짐승에게는 혼이 있습니다.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숨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
[In whose hand is the soul of every living thing, and the breath of all mankind.](욥12:10).
성경은 '모든 생물의 혼'이라고 말합니다.
[오 주의 산비둘기의 혼을 사악한 자들의 무리에게 넘겨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들의 회중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시74:19).
"주의 산비둘기의 혼"이란 표현은 다윗이 자신을 일컬어 한 시적, 비유적 표현입니다.
동물에게 혼이 없다면 이런 표현은 어려울 것입니다.
모든 생물이 짐승, 동물을 말한다는 것은 성경 스스로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창1:28).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모든 생물과 모든 가축을 기억하시니라....](창8:1).
[모든 육체 중에서 너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날짐승과 가축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너와 함께 데리고 나아가 그...](창8:17)
[{주}께서 ...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또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 모든 생물을 또 치지 아니하리니](창 8:21)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숨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
[그것이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날짐승들에게 가려졌나니](욥28:21).
[주의 손을 여시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시나이다.](시145:16).
성경에서 "모든 생물"이란 주의 말씀은 짐승, 동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생물(짐승, 동물)의 혼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누가 어떻게 말했든, 어떻게 배우고 알았든지 간에 성경은 모든 생물(동물, 짐승)에게 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믿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게 성경을 고쳐서 읽거나 해석하는 목자들은 죄를 시인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신자라면 자신의 생각을 성경 말씀에 따라 고치고 맞추어야 합니다.
단순하고 쉬운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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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 댓글쓰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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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성 ------------댓글쓰기
지금까지 저도 짐승은 육과 영만 있는 것으로 알고 가르쳤는데 그럼 짐승의 혼은 짐승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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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짐승의 몸이 흙으로, 영이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으로 보아 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고로 해석이 아니라 그냥 유추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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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혼은 지옥에 가셨습니까?
질문. 예수님의 혼은 지옥에 가셨습니까?
답변. 예. 가셨습니다.
이 진리는 대부분의 한국의 크리스천들만 잘 알지 못하는 진리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말에 놀랄 수도 있고 처음 들어본 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자, 성경을 봅시다.
--십자가의 강도, 낙원에 대한 것은 이 글을 참조하십시오.
http://av1611.net/3285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시16:10).
다윗이 쓴 이 시편에 나오는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시16:10)란 말은 다윗 자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사실은 신약에서 분명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구절을 인용해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행2:27).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느니라.](행2:31).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그분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않고 나온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은 몸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 혼을 지옥에",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라며 그분의 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혼은 지옥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시편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나를 향하신 주의 긍휼이 크사 주께서 내 혼을 가장 낮은 지옥에서 건지셨나이다.](시 86:13).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낮은 지옥에서" 건짐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지옥에 가지 않으셨다면 지옥에서 건짐 받을 일도 없습니다.
주님 자신의 증언을 보십시오.
주님은 자신의 몸이 아닌 혼이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있게 될 곳이 어디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12:40).
사람의 아들(예수님)이 계신 땅의 심장부는 결코 요셉의 돌무덤이 아닙니다. 돌무덤은 땅의 표면에 있습니다. 땅의 심장부는 그분의 혼이 간 지옥입니다.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엡4:9).
사도 바울은 주님의 승천을 설명하면서 먼저 그분께서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몸은 십자가에 높이( 땅 위로) 달리셨지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신 사건이 아닙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승천이라면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은 그 분의 혼이 지옥으로 가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몸뿐만 아니라 그분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사 그를 고통에 두셨은즉 주께서 그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실 때에 그가 자기 씨를 보고 자기 날들을 길게 하며 또 {주}의 기뻐하시는 일이 그의 손에서 번영하리로다.](사53:10).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지옥"으로 가셨다는 구절은 또 있습니다.
[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벧전3:19).
예수님께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그리로 가지 않으시고 멀리서 영으로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가사"란 한 마디가 주님이 지옥에 가셨음을 입증합니다. 이곳은 무덤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이상의 성경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혼이 지옥으로 가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매주 사도 신경을 외우면서도 이 부분이 삭제된 본문을 외우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영어판 사도 신경을 보면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한국어 판 삭제)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신 사실은 한국 교인들만 잘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고 무지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성경을 믿으십시오.
단순하고 쉬운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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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판과 두루마리 책
질문. 돌 판과 두루마리 책에는 주의 말씀이 앞면(단면)에만 기록되어 있습니까?
답변. 아닙니다. 앞, 뒤로 양 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화나 성화에 나오는 그림들에는 모세가 두 개의 돌 판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십계명이 각 돌 판의 앞면에 다섯 개 씩 기록된 것으로 나옵니다. 영화감독이나 화가들이 그렇게 그린 것이지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돌 판에 기록되었는데 돌 판의 단면(앞면)에만 기록된 두 개의 판이 아니라 앞, 뒤 양면으로 기록된 두 개의 돌 판입니다.
[모세가 돌아서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언 판이 그의 손에 있었고 그 판들의 두 면에 곧 이쪽 면과 저쪽 면에 글이 쓰여 있었더라.](출32:15).
[And Moses turned, and went down from the mount, and the two tables of the testimony were in his hand: the tables were written on both their sides; on the one side and on the other were they written.](출32:15).
자, 그럼 하늘의 성막으로 가서 주님이 가진 두루마리 책을 봅시다.
하늘의 왕좌에 앉으신 분의 손에 있는 책은 두루마리 책입니다. 일반적으로 두루마리 책은 단면에만 기록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진이나 그림에서 보는 두루마리 책은 앞면만 기록하고 뒷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 책은 안과 뒷면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 일반적으로 아는 상식이나 지식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왕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그것은 안과 뒷면에 글이 적혀 있고 일곱 봉인으로 봉인되어 있더라.](계5:1). [And I saw in the right hand of him that sat on the throne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side, sealed with seven seals.](계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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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댓글쓰기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께 주의 보좌 앞까지 꿰뚫어 보는 지혜와 지식의 은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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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chin ------------ 댓글쓰기
영화에서 나오는 십계명 돌 판과 성경에 하나님 말씀을 비교해서 말씀 하신다면 예수님 탄생 장소의 마구간에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서 마구간에서 예수님한테 절하는 모습을 우리는 영화나 그림으로 볼 수 있는데,,, 성경은 마2장 11장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성탄절 때보면 마구간에서 경배하는 모습은 ,, 성경 말씀대로 이해 하면됩니다,
십계명 돌판도 성경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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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맞습니다. 잘못된 것이죠.
1. 마구간이 아니라 집입니다.
2. 바친 물품은 세 가지가 맞지만 경배한 사람이 세 명이란 말은 없습니다.
3. 누가복음의 탄생 기록과 마태복음과의 차이를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은 늘 기록된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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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언제 여호람에게 편지를 썼는가?
질문. 엘리야는 언제 여호람에게 편지를 썼는가?
답변. 승천 직전입니다.
이미 이전에 자세히 포스팅한 글이 있습니다. 참조하십시오. 중복되는 질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들림을 받았는가?>
[대언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네 아버지 여호사밧의 길들과 유다 왕 아사의 길들로 걷지 아니하고](대하 21:12).
대언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그의 죄와 불법, 악행을 책망하고 주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독자들 중에는 "엘리야는 이미 승천하지 않았던가?"라고 생각하며 엘리야의 승천에 의문을 표시하거나 성경의 모순, 오류를 지적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엘리야는 승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어딘가로 옮겨졌다는 궤변을 펼치는 이들이 매우 많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어느 산간 지역이나 계곡, 섬, 바다 등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옮겨졌다.
[그들이 여전히 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보라,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나타나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으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 성경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지 어느 계곡이나 바다나 산으로 옮겨졌다고 하지 않았다.
그럼, 엘리야가 유다 왕 여호람에게 보낸 편지는 무엇인가?
엘리야의 승천 시점과 유다왕 여호람이 왕 위에 오른 시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엘리야는 남왕국 유다가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언자였다. 이 때 남북 왕국은 서로 인척 관계를 맺으며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엘리야는 여호람 2년 때까지 이스라엘 땅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대언자 엘리야는 유다 왕 여호람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았고, 북왕국에서 남왕국 유다까지 직접 가서 말씀을 전하는 대신 글로 써서 죄를 책망했고 그 뒤에 승천했다.
승천 시점은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낸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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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가 무슨 뜻입니까?
질문. 셀라가 무슨 뜻입니까?
답변. 셀라(히브리어:סלה )-멈춰서 들으라" 입니다.
히브리어는 한 단어에 다양한 의미를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1.성경을 읽을 때 셀라라는 말을 발견할 때면 일단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셀라는 멈추어 깊이 생각하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뭔가를 멈추고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셀라의 또 다른 의미는 목소리를 높여서 찬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시편을 노래할 때 읽는 사람은 잠시 멈추었다가 이 부분부터 목소리를 더 크게 해서 읽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셀라는 강조의의미라고 합니다. 셀라라는 부분부터 목청을 높여서 읽거나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3.교리적 의미로는 셀라가 나오는 부분은 모두 문맥적으로 주의 오심, 재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셀라가 나오는 구절들은 영원을 의미한다고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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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뒤에 압살롬이
질문. 무엇을 기준으로 사십년인가?
답변. 사무엘로부터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지 40년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기 시작했습니다(삼하15:6).
그 다음 절에는 "사십 년 뒤에 압살롬이...." 라고 말합니다.
앞 절에 바로 이어서 읽으면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기 시작한 지 사십년이 되는데 압살롬의 나이로 보나 무엇을 보아도 사건 개요로 보나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4년이라고 본문 자체를 고쳐 버렸습니다.
7절 앞에 (¶ -문장 단락 표시)를 주목하십시오.
[¶ 사십 년 뒤에 압살롬이 왕에게 이르되, 내가 {주}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원하건대 내가 가서 헤브론에서 내 서원을 갚게 하소서.] (삼하 15:7)
킹제임스 성경은 이런 문장 단락 표시를 해 두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표시입니다.
"사십년"은 압살롬이 반역을 결정한 때로부터 사십년이 아닙니다.
70인역 성경, ASV, ESV, NIV…등에는 본문의 40년을 4년으로 고쳐 놓고 원문의 오류를 고쳤다, 가장 정확한 성경이라고 광고합니다. 실상은 부패요 변개입니다.
본문에서 40년은 다윗이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지 40년입니다.
40년은 유대인들에게 한 세대가 바뀌는 중요한 기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울 왕이 40년을 통치했고, 다윗 왕이 40년을 통치했고, 솔로몬이 40년을 통치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의 목자가 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왕이 되지 못한 채 있다가 훗날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고 7년 뒤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40년을 통치 기간으로 여겼고 압살롬의 참모였던 아히도벨은 이제 왕위가 바뀔 때가 되었다고 여겼고 아버지 다윗이 왕위에 오른 예를 모델로 삼아 '압살롬'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착착 준비 작업을 시켰던 것입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지 40년째이지만 아직 왕위 재위 기간은 4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자신도 아버지 다윗처럼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때가 차면 왕위에 오를 계획을 세웠음이 17절 말씀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가 행한 일을 그대로 답습하려 했던 것임을 본문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것처럼 압살롬은 백성들을 재판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모방하고 왕좌를 얻으려는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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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보내신 악한 영?
질문.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악한 영을 보내시나요?
답변. 예. 하나님은 '악한 영, 거짓말하는 영, 강한 미혹'을 보내십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다른 영을 받습니다.
자, 성경의 기록을 보십시오. 해석이 아니라 기록된 본문을 읽고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누가 보내셨는지 주어에 주목하십시오.

1.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셨고(삿9:23), 불순종하는 사울 왕에게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삼상16:14,15,16,23, 18:10, 19:9).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신하였으니](삿 9:23). 아비멜렉을 심판하기 위해 주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
[¶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삼상 16:14) 한 때 사울은 성령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울을 떠나시고 주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 그 다음 날 [하나님]으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하매 그가 집의 한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 ...](삼상 18:10). 사울은 성령을 받았을 때 대언을 했는데 '악한 영'을 받고서도 대언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두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외치지만 악한 영을 받고서도 대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2. 하나님은 아합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습니다.
(왕상22:22-23, 대하18:21-22).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무엇으로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그의 모든 대언자들의 입에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겠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를 설득하겠고 또 이기리라. 나아가서 그와 같이 하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보소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왕상 22:22-23).
아합은 거짓말을 믿고 전쟁터에 나갔다고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누군가에게 '악한 영'이나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신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인 내용일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3. 하나님은 강한 미혹을 보내십니다(살후 2:11-12).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이 다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11-12).
이 시대에 많은 이들이 진리를 믿지 않고 거짓말을 믿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기뻐한 이들"이 정죄를 받게 하기 위해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을 믿도록 허락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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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댓글쓰기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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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0965 ------------ 댓글쓰기
목사님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성령님이 떠날 수도 있나요?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났다는 말씀이 조금 이해가 안갑니다. 말씀 부탁드려요 저는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식이 부족하여 여쭙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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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구약의 경우 사울에게서 주의 성령이 떠났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한 후 성령이 떠나지 않기를 구했습니다.
삼손을 성령이 떠났다가 마지막에 기도했을 때 다시 돌아왔습니다.
신약의 경우...
성령이 떠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그분께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알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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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댓글쓰기
그럼 사울은 구원을 잃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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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사울은 주의 성령을 잃었고, 왕좌를 잃었고, 자식들을 잃었고 자신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사울이 지옥에 갔느냐? 이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논란이 매우 많습니다.
[또한 {주}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라, 하매](삼상28:19).
사무엘의 말에 따르면 사울과 사울의 아들들이 죽어서 사무엘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지하 낙원에 있었다면 사울과 그의 아들들 역시 그러했다고 봅니다.
성경 본문에 따르면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해석은 다양합니다. 주의 말씀을 믿으면 됩니다.
참고로 구약에서 다루는 구원은 전쟁, 기근, 역병, 포로됨, 재앙 등에서의 육체적 생명의 구원이지 혼의 구원은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살았다"는 뜻이 1차적 의미이고 구원을 잃었다고 하면 "죽었다"는 뜻입니다. 신약과는 그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이란 단어를 모두 죄로부터 지옥에서 받는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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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댓글쓰기
당시 사울은 접신하고 있었는데 그럼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일까요? 죄송하지만,
이것도 매우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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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진짜 사무엘입니다. 사람들의 견해, 주장, 학설을 들으면 우리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1. 여인은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은 사울이시니이다, 하매](삼상28:12).
여인은 속임수로 사무엘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진짜 사무엘을 보았기 때문에 놀란 것입니다. 만약 악한 영의 도움을 받아 평소처럼 사람들을 속였다면 그녀는 결코 놀라서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늘 하던 대로 점을 쳐주고 돈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여인이" 놀라서 크게 소리쳤다..." 이것은 접신하는 여자 자신도 이외의 상황이었고 두려웠던 일입니다. 여인은 사무엘을 보았고 변장한 사울의 정체도 그 자리에서 알아보았습니다.

2. 여인은 사무엘을 보았지만 사울은 사무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본 모양을 묻고 확인해야 했습니다. 이 때 사울 왕은 접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자기 얼굴을 숙여 땅에 대고 절하니라.](삼상28:14).

3. 사울이 사무엘인 줄 알고 자기 얼굴을 숙여 땅에 대고 절했습니다.
-거짓 사무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사무엘과 사울은 정상적인 대화를 했고 사무엘은 여전히 그에게 대언했습니다. 그의 말은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삼상28:15-19). 이는 참 대언자와 거짓 대언자를 구분하는 율법의 명시적 판별법입니다.

5. 사무엘이 한 말은 점쟁이들이나 술사들이 쓰는 상징이나 비유적 언어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했고 그 일시와 결과까지 정확했습니다. 이는 대언자의 화법이며 그가 말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는 거짓 대언자가 되고 그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성경에서 거짓 대언자들이 왕 앞에 내 놓는 말들은 어김없이 결과가 정 반대였습니다. 그러나 주의 대언자들이 하는 대언은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여자를 통해 올라온 사무엘은 주의 대언자 사무엘이었고 그의 말은 문자 그대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여기서 사무엘은 거짓이 아니라 진짜 사무엘이라 확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이면 절대 결론이나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답을 알려 줍니다. 이것은 성경 공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며 철칙입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보다 사람들의 의견, 학설에 귀를 기울임으로 평생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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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댓글쓰기
아멘!. 늦은 시간에 구체적인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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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친자인가 양자인가?
질문. 우리는 하나님의 친자인가 양자인가?
답변. 둘 다입니다.
성경 공부 시작하기 전에 누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자입니까? 양자입니까?
친자와 양자는 개념이나 느낌이 너무나 다르게 다가옵니다.
한국 문화는 혈통 문화입니다. 피보다 진한 것은 없다! 이것이 상식입니다. 양자를 삼아도 양자를 친자로 속여서 키웁니다. 훗날 자주 듣는 증언은 '머리 검은 짐승은 키워봐야 소용없다.'입니다. 피로 연결되지 않는 관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계부, 계모에 대한 적대감도 혈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입양이 활발하지 않는 것도 이런 '피의 관계'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 이 부분을 성경에 적용해 봅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친자입니까? 양자입니까?

1. 우리는 하나님이 낳으신 친자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셨고, 우리는 그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1:12~13)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의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2).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며 낳으신 그분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자도 사랑하느니라.](요일5:1).
크리스천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점에서 크리스천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자입니다.

2.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입양된 양자이다.
몸이 하나님께로 태어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의 부모를 통해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고 하나님도 없고 약속도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아들로 부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양자입니다.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롬8:15)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롬8:23)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4:5)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로 입양하심으로써](엡1:5)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친자입니까? 양자입니까?
둘 다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친자이기도 하고 양자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성령을 통해 낳으신 것은 우리의 영입니다. 우리의 몸과 혼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의 영, 속사람을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친자입니다. 입양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몸, 겉 사람을 말합니다. 이 부분은 재림 때 구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양자됨은 우리 몸이 구속 받는 것을 말합니다. 양자 삼으시는 영이란 우리의 죽을 몸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몸을 부활하게 하시는 영이란 뜻입니다. 아들로 입양되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 몸의 구속, 변화, 새 몸을 입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입양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들(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몸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천은 "영으로는 하나님의 친자, 몸으로는 그 분의 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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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댓글쓰기
아멘! 감사합니다. 크리스천은 영으로는 친자! 몸으로는 양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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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 댓글쓰기
아멘! 우리를 친자와, 양자로 삼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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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엽 --------댓글쓰기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은 양자되는 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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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위의 본문에 있습니다. 롬8:15, 본문을 잘 읽으세요. 내용이 다 나옵니다.
양자 삼으시는 영(the Spirit of adoption)을 받았기에 우리 몸이 죽어도 부활해서 구속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자 삼으시는 영=the Spirit of adoption. 성령을 말합니다. 양자가 되는 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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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엽---------- 댓글쓰기
the Spirit of adoption.. 양자됨의 그 영..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신 영을 받았기에 그 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로 입양이 되는 것이지 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지요.
친자와 양자는 엄연히 다름을 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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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하나님이 낳으셨고 그분에게서 태어났기에 친자도 맞지요.
위의 본문에 다 있습니다. 다시 읽으시기 바랍니다.
님이 말한 "양자됨의 그 영"은 성령님이시죠. 신자의 영은 성령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니 친자도 맞지요. 크리스천은 친자/양자 둘 다 됩니다. 이 역시 본문에서 다 다루고 있는 내용이니 다시 언급하지 않습니다.
한국어도 영어도 잘 안 되시는 분들이 영어를 가지고 딴지를걸면 조금 귀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되는 쉬운 내용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게 잘 안되더군요. 이해 불가하시면 조용히 물러나 있거나 그냥 통과해 주세요.
거듭 미안함을 전하면서 댓글 딴지 사양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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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자가 누구죠?(갈3:20)
질문. 중재자가 누구죠?(갈3:20)
답변. 모세입니다.
갈라디아서 3:20절에 언급된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모세입니다. 중재자란 단어를 성경 사전이나 색인에서 '중재자'란 단어를 찾아서 관련 구절을 꿰면 예수님이 됩니다. 성구 사전이나 컴퓨터를 이용하시는 분들은 때로 문맥이 아닌 구절만 보다가 이런 실수, 오류를 자주 범합니다. 평소에 늘 성경을 통독해 두어야 컴퓨터 프로그램의 편리성에서 오는 오류를 피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문맥을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법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 (갈3:19).
[이제 중재자는 하나만의 중재자가 아니로되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갈3:20).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갈3:21)
3:19절부터 보면 한 중재자는 율법의 중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모세'입니다.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에 한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딤전2:5).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는 더 이상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중보자, 돕는 이, 변호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롬8:26)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7)
예수님은 성도들의 중보자이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롬 8:34)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중재자가 아니라 "변호인"이 필요합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캐톨릭이 말하는 "마리아, 수호천사, 죽은 성인들"은 중재자도 중보자도 돕는 이도 변호인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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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까지요..." 란 무슨 뜻입니까?
질문. "요한까지요..." 란 무슨 뜻입니까?
답변. 아래 설명을 읽으십시오.
[모든 대언자와 율법은 요한까지 대언하였나니](마 11:13).
모든 대언자란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침례인 요한까지를 말하는데 이는 구약 시대의 전체 대언자들을 언급한다. 율법은 좁게는 십계명, 모세 오경을 언급하고 구약 성경 전체를 말한다.
"모든 대언자와 율법은" 요한까지 대언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
요한까지란 말은 요한의 시대까지만 대언했다는 뜻이 아니다. 대언자들은 교회 시대, 대환란, 천년 왕국과 영원까지 대언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대언과 율법 종료설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 "모든 대언자와 율법은 요한까지 대언하였나니"란 구절을 자주 인용하고 사용하는데 이는 본문의 오해이다.
1. 말씀하시는 방법
주님께서 "모든 대언자와 율법은 요한까지 대언하였나니"라고 하신 것은 말씀하시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요한 때까지 즉 구약에서는 주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고 주로 백성들에게 율법과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지금은 율법과 대언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요한까지 말씀하신 방법과 달리 이후로는 율법과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말씀하신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히1:2).

2. 통치 체계
주님께서는 이전에 율법과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시고 신정 통치를 하셨다. 요한까지는 모두 율법과 대언자들을 통해 한 주의 말씀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요한까지는 주님께서 대언자들을 보내시고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지만 이제는 아들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아들을 증언하시며 그분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속에 모든 일을 행하신다. 가르치시고 다스리시고 힘주시고, 열매를 맺으시고...뭐든지 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다.

3. 본문 자체의 의미
하늘의 왕국에 대한 선포는 율법과 대언자들이 요한까지 선포했다. 요한이 하늘의 왕국에 대해 선포한 구약의 마지막 대언자이다. 침례자 요한 때까지 율법과 모든 대언자들의 핵심 선포는 '하늘의 왕국'이었으며 요한은 그것을 선포했다. 이제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선포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늘의 왕국을 배척하자 주님은 더 이상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셨다. 사도행전의 사도들 역시 그러했다. 하늘의 왕국은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선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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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들, 직무(officers, office), 사역자(직무 수행자)
질문. 한국의 어떤 목사님께서 "office, officer"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지역 교회는 "직무"만 있지 "직무자"(사역자)는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office(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을 officers(관원들)라 부르지 않고 ministers(사역자, 직무자)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officer(s)는 국가 공무원, 행정직 공무원입니다. 당연히 교회 내에서 officer(s)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감독, 장로, 집사가 있을 뿐 officer(s)-공무원, 관원들이 있을 이유가 없지요. 교회에는 office를 맡은 ministers가 있습니다.
office란 직무란 뜻입니다.
그럼 교회 내에 직무가 없는가? 당연히 있습니다.
사도는 사도의 직무가 있고(롬11:3), 감독은 감독의 직무가 있고(딤전3:1), 집사는 집사의 직무(딤전3:10,13)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모두 각자 지체로서 '직무'를 가지고 있습니다(12:4). 섬김의 직무(고후9:12,13). 직무란 역할, 임무란 뜻인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office"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율법은 율법의 직무(역할-office)가 있고 복음에도 영의 직무(역할-office)가 있습니다. 고후3:7,8 정죄의 직무, 의의 직무라고 말합니다(고후3:9).
지역 교회에는 office만 있지 officer는 없다고 열변을 토하시는 분을 보면 교회 내에는 officer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minister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요. 세상에서는 office를 맡은 자들을 officer라 부르고 교회에서는 office를 맡은 자들을 minister라 부릅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달리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이 제사장 직의 직무(office)를 받아 그 직무를 수행합니다(히7:5). 제사장 직무는 있지만 제사장이 공무원이나 관원(officer)은 아닙니다. 그냥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감독은 마땅히 감독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집사는 집사의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직무(office)를 수행하는 사람은 직무에 맞는 직위, 지위가 있습니다.
직무만 있고 직무자(지위, 직위)는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제사장이, 사도의 직무는 사도가 수행합니다. 집사의 직무는 집사가 수행하고 감독의 직무는 감독이 수행합니다. 대언자, 감독, 집사, 사도, 성도들은 모두 맡은 직무가 있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로서 직무 수행자입니다.
교회의 감독, 집사는 직무를 맡았지만 그들을 "officer"(관원, 국가 공무원)가 아닙니다. 지역 교회는 관청이나 행정 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office"(직무)를 맡은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 성경은 그런 직무를 맡은 그들을 minister라고 부릅니다. 그런 직무(office)를 맡은 사람이 지역 교회 내에는 있으며, 있어야만 합니다. 직무만 인정하고 직무를 맡은 사람(직무자, 사역자)을 부정하는 것은 거짓 교리이며 사악한 자들의 속임수입니다.
지역 교회에는 office만 있지 officer는 없다. 그러나 minister는 있습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 겸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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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 집사의 직무, 딤전3:10 이 사람들도 먼저 시험해 보고 그 뒤에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들이 집사의 직분을 수행하게 할지니라.
딤전3:13 집사의 직분을 잘 수행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좋은 지위를 얻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에서 큰 담대함을 얻느니라.
섬김의 직무, 고후9:12-13 이 섬김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제공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게 되느니라. 이 직무의 실행을 통해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인하고 복종하며 또 그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러이 나누어 주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멘!
집사의 직분과 섬김의 직무를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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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의 복장 규례의 차이
질문. 출애굽기 28장과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복장 규례가 다른가요?
답변. 다릅니다.
참고할 글. <대제사장의 복장 규례>
저녁에 교회에 다녀왔다 제가 성막 강해를 한 출애굽기 강해에 비밀 댓글이 달려서 살펴 본 내용입니다. 글을 달아 주신 분의 의견을 들었고 한국에서 성막 강의로 유명하다는 목사님의 글도 보고 몇 권의 참고 자료도 마치 스캔하다시피 보았습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남의 자료나 의견이 아니라 성경 본문 자체입니다. 언제나 본문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답을 얻으면 됩니다.
출애굽기 28장에는 대제사장의 복장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고 복장 규례가 나옵니다. 여기 복장 규례에 대한 강해, 설명을 보시려면 http://av1611.net/2471를 참고하세요.
대제사장이 평소 입고 성소에서 주님을 섬기던 복장입니다.
[¶ 너는 그 옷의 단 밑으로 단의 주위로 돌아가며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로 석류들을 만들고 또 돌아가며 석류들 사이에 금방울을 달되 그 겉옷의 단 주위로 돌아가며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를 달지니라. 그것은 아론이 섬기기 위하여 입을지니라. 그가 {주} 앞의 성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에 그의 소리가 들리게 할지니 그리하여야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출28:32-35). 아론이 평소 성소에 들어가고 나올 때 입어야 할 옷의 규례가 이렇습니다.
레위기 16장은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대속죄일 입니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평소와 같은 복장으로 성소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약식으로 입습니다.
[또 그는 거룩한 아마 속옷을 입고 살 위에 아마 반바지를 입으며 아마 허리띠를 띠고 아마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의복들이니라. 그러므로 그는 물로 자기 살을 씻고 그것들을 입을 것이며] (레 16:4). 겉옷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3절에 보면...[그런즉 아론은 어린 수소를 죄 헌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 헌물로 삼아 성소에 들어올 것이요,](레16:3)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16장의 복장 규례는 그 날이 대속죄일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일곱 명절 중에 이 날은 전혀 다른 명절입니다.
다른 이유는 그 날이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대속죄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로 인해 그들을 위하여 한 해에 한 번 속죄하기 위해 너희에게 영존하는 법규가 될지니라. 아론이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레16:34).
레위기 16장은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올 때 준 명령입니다(2,3).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관한 복장에 대해 언급이 없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겉옷을 다시 입으라는 명령이 없고, 유대인들의 전승이나 문맥적 의미를 볼 때 지성소에서도 겉옷을 입지 않았으리라 판단됩니다. 저는 그동안 대속죄일에 입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복장이 평소 섬길 때와 다른 것은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언급했지만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옷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성소라고 하는데 개역 성경은 지성소라고 말함으로 지성소에 입고 들어간 세마포 옷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이는 오류입니다. 레위기 16장에는 지성소에 들어갈 때 옷에 관한 복장 규례는 언급이 없습니다.
레위기 16:23, ¶ 아론은 회막(會幕)에 들어가서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細麻布) 옷을 벗어 거기 두고 (개역)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 (개정)
그런 후에 아론은 성막으로 다시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고운 모시 옷을 벗어 기에 두고 (현대인)
아론은 회중의 성막에 들어가서 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아마 의복들을 벗어 거기에 두고 (흠정역).
성소에서 대제사장의 복장이 출애굽기 28장에 나오는 평소에 섬기는 복장과 다른 것은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2,3). 명시적 성경 기록은 어떤 추론보다 앞섭니다. 평소 성소에서 섬길 때 났던 대제사장의 겉옷에서 나던 방울 소리는 대속죄일에는 성소에서는 날 수 없었고 지성소에서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로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섬기는 동안 방울 소리가 나서 밖에서 듣는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레위기 16:12-16절까지만 대제사장의 지성소 사역입니다. 여러분이 본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에스겔서에 나오는 제사장의 복장 규례는 출애굽기와 다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안식을 얻기 전이고 천년 왕국은 안식을 얻은 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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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위의 글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입었던 지성소 복장 규례에 관한 성경의 명시적 확증은 아닙니다. 지성소 부분은 본문과 전승 등에 바탕을 둔 유추, 추론입니다. 오해 없기 바랍니다.
1. 성소에 관한 대제사장 복장의 차이는 확증(출28:35과 레16:3,4).
**이 부분은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으로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입었던 옷은 평소 성소에서 주님을 섬길 때 입었던 옷과 다릅니다.

2. 지성소는 성소의 복장이 그러했던고로 그 복장 그대로 들어갔으리라 보는 것임. 달리 겉옷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습니다(윗글).

3. 지성소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갖추어 입어야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 이 역시 추론임. 하나님이 주신 옷을 제대로 입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4. 예표론으로 속죄일은 십자가의 대속의 모형이므로 주님의 겉옷은 십자가에서 벗겨지셨지만 부활후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갈 때는 온전히 입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역시 추론임.
개역 성경이나 개정역은 레위기 16:23절에서 성소를 지성소로 바꾸어서 지성소에서 입었던 옷이라고 말씀을 변개해서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잘못된 본문을 바탕으로 성막 강해를 비롯해 진리를 논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며 레위기 16장은 성소에서 입었던 옷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5. 본문의 기록과 추론의 차이를 항상 염두에 둘 것. 때로 자신의 추론을 성경의 기록처럼 말해서는 안됨. 생각이나 추론은 가능성만 열어 두어야 함. 때로 주장이 강해서 그 주장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속죄일에 지성소의 대제사장의 옷에서 나는 금방울 소리, 겉 옷 등에 대해 논증이나 토론을 할 때 성경 말씀이 아니라 추론이고 유추임을 밝히기 바랍니다. 때로 이런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마치 뭔가를 깨달은 것이 있는 것처럼 추론과 주장을 "기록된 성경 말씀"처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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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은 (큰 흰 왕좌) 심판을 받나요?
질문. 천사들은 (큰 흰 왕좌) 심판을 받나요?
답변. 받습니다.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주님 앞에 심판을 받듯이 천사들도 심판을 받습니다. 어떤 분이 천사는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심판이 없고 심판은 오직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고 말하면서 히브리서 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 9:27)란 말씀으로 죽음과 심판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분명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직 사람만이 죽고 사람에게만 심판이 있다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천사들도 죽습니다. 신들도 죽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이들(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사람들같이 죽을 것이요, 통치자들 중의 하나같이 넘어지리로다.](시82:6-7).
우리는 성경에서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사람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들이나 천사들은 불멸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지으면 지옥으로 던져지고 어둠의 사슬에 갇히기도 합니다. 사람만 죄를 짓고 죽고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도 죄를 짓고 죽고 심판을 받습니다. 위의 시편에 언급된 신들은 "지극히 높으신이의 아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자들로 천사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천사들, 새벽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창6:2,4, 욥1:6, 2:1. 욥38:7).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이들이라."
신들="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의 아이들"=천사들=새벽별들.
이들을 때로 "영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모두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구절에서 신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이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란 의견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0:34,35절에 이 구절을 인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너희 율법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하였노라, 하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그분께서 신들이라 하셨으며 또 성경 기록은 깨뜨리지 못할진대](요10:34-35)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인용해서 시편에 나오는 [신들]을 사람들이라고 규정하지만 정반대로 시편을 통해 우리 주님이 인용한 구절들에서 "너희들"이 신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명시적으로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이들"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신들"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이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높이신 이의 아이들"입니다.
사람들의 해석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폐할 수 없습니다. 시편 82:1, 5-7절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이나 통치자들이 아님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신들은 창세기 3:5절에 처음 나오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세기 6장, 욥기 1:6, 2:1, 38:7절에 나옵니다. 욥기 1,2장의 사건은 노아의 홍수 이전에 이 땅에 있던 '하나님의 아들들'과 같은 '천사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대부분 천사들, 영들이라 부르는데 이교도들은 주로 '신들'이라 부릅니다(고전8:5).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에 나오는 기록된 대로 믿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라고 믿고, 리비야단은 하마나 악어로, 신들은 통치자들로, 너희 중 하나는 마귀니라고 하면 마귀가 아니라 '마귀들린 사람'이라고 믿는 식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재판관들을 일컬어 신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이들이라고 부른 예는 없습니다. 주의 영을 받은 대언자들조차 신들이라 불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천부장, 백부장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 적도 없고 그런 암시조차 없습니다. 시편 82:5-7절을 보면 이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신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지금 본문에서 벗어난 주제인고로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지옥은 범죄한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곳입니다.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마25:41).
주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이유, 목적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 그럼 천사들이 앞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자들의 회중 안에 서시며 신들 가운데서 재판(심판)하시는도다.](시82:1).
"강한 자들의 회중"은 하늘의 군대 즉 천사들을 말하며, "신들 가운데서" 재판하신다고 할 때 신들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이 심판(재판)을 받는 것처럼 신들(천사들)도 심판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6:3을 보십시오.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심판-judge)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물며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은 얼마나 더 많이 판단하겠느냐?](고전6:3). [Know ye not that we shall judge angels? how much more things that pertain to this life?] (고전6:3).
성경은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었고 그렇게 불린 천사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다가올 세상은 천사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성도들에게 맡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다는 것은 계시록 20:3에도 나옵니다.
[또 내가 보니 왕좌들과 그것들 위에 앉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더라...](계20:3).
베드로후서 2:4, 유다서 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아니하사 지옥에 던지시고 어둠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벧후 2:4).
천사들도 죄를 짓는 자들이 있고 그들은 지금 지옥에 던져졌습니다. 언제까지인지 보십시오. 죄를 범한 사람들이 죽어서 혼이 지옥에 가듯이 천사들 역시 범죄하면 죽어서 지옥에 던져집니다. 지옥에 간 혼들이 심판을 받듯이 지옥에 있는 천사들도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지옥에 던져진 혼들을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심판 때까지 지옥에 있다가 지옥이 그 죽은 자들을 내어 줄 때 함께 나와서 주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백보좌 심판은 결코 사람만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유 1:6).
천사들이 나오고 이들이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다고 합니다. 큰 날의 심판이란 큰 왕좌 심판 즉"백보좌 심판 때까지"란 말입니다.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계20:13).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어 주는데 여기서 '죽은 자들'은 사람들의 혼들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던져진 범죄한 천사들까지 포함됩니다. 지옥이 범죄한 천사들은 그대로 남겨 두고 사람들만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다 내어 줍니다. 사람들이든 천사들이든 큰 날의 심판 때까지만 지옥에 있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고로 우리는 천사들 중에도 사람들처럼 범죄하고 죽어 지옥에 가 있으며, 불신자들이 심판을 받을 때 지옥에서 나와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확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진리는 그리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 외의 다른 이론이나 지식, 교리 등으로 배운 이들이 단지 믿기 어려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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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인가요?
질문. 하나님의 왕국이 구원 받은 크리스천을 말하는 건가요?
답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은 어느 교회나, 교파나, 교단이나 지역을 초월해서 성령과 주님의 보혈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뜻한다. ..."라고 하셨다면서 그것이 맞느냐고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왕국의 정의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1.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하나님의 왕국이 거듭난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합니다(요3:3,5).

2.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Kingdom 과 people은 전혀 다릅니다. 누구든지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왕국은 주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 안에도 있었습니다(눅17:21). [또 그들이 이르기를, 여기를 보라! 혹은, 저기를 보라! 하지도 못하리니,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7:21). 여기서 주님께서 "너희 안에"라고 한 "너희"는 크리스천들이 아니라 주님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4. 하나님의 왕국은 주의 권능으로 마귀들린 자들이 쫓겨날 때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주님께서 열두 사도와 70명의 제자들을 이스라엘 도시들로 보내 왕국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내 쫓아 주게 하셨는데 그 때 많은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

5. 하나님의 왕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 (롬 14:17).

6. 하나님의 왕국은 "교회나 교파나 교단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성령과 보혈로 거듭난 크리스천들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온 세상에 있는 거듭난 크리스천들을 일컬어 성경은" 그분의 자녀, 그분의 백성, 그분의 형제들, 그분의 신부, 그분의 지체...." 등 다양하게 부르며 이것을 한 마디로 "그분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거듭난 성도들이 인종, 성별, 나이, 민족, 언어와 관계없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란 의미에서 "유기체 교회, 몸된 교회"란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교회는 단수로서 "교회들"이란 지역 교회들과는 구분됩니다.

7. 때로 목회자란 사람들 중에도 교회(church)란 단어의 단수와 복수조차 구분하지 못해 엉뚱한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Word of God- words of God, God-gods, Son of God-sons of God 조차 구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교회 목사님이 이런 분이라면 대들지 말고 그분을 위해 조용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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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은 하늘 또는 구원의 모형인가요?
질문. 가나안은 하늘 또는 구원의 모형인가요?
답변. 전혀 아닙니다.
모형론적(예표)으로 보는 이들 중에 가나안을 천국(하늘) 또는 구원의 모형으로 보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참으로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말미암는 잘못을 범하는 예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미리암 역시 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민20:1). 그럼 가나안에는 누가 들어갔는가? 이것은 상식적인 평범한 질문과 답변이지만 가나안은 구원이나 천국(하늘)의 모형으로 설정해서 설교하는 분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자신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아닐까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가나안은 하늘이나 구원의 모형이 아닙니다.
이집트가 세상의 모형이고 파라오가 적그리스도,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면 그들은 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홍해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에서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고](고전10:2).
광야의 생활은 순례의 길입니다.
그럼 가나안은 무엇을 예표합니까? “상속의 유업”입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했던 히브리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역병으로 그들을 쳐서 그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너로부터 그들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니라.](민14:12). 광야에서 죽은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혼들이 아니라 상속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가나안 땅을 “상속하게 할 땅, 상속으로 줄 땅”이고 말합니다.
순례의 길에서 삶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을 결정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그들의 상속입니다(신1:38, 2:31, 3:28, 4:21,389, 12:10, 15:4 등등).
어떤 설교자는 구원 받는 자가 많지 않다고 하면서 출애굽한 자들 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이 2명밖에 없다는 식으로 선포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광야의 백성들처럼 죄와 불순종으로 죽고 결국 가나안에 못 들어간 사람들처럼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지 않을까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는 오류요 오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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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어떤 구절의 번역은?
질문. 성경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성경의 어떤 부분, 특정 구절들은 개역이나 NIV, NASV 등이 킹제임스 성경보다 정확한 번역이 아닌가요?
답변. 아닙니다. 어휘가 서로 다른 경우에는 KJV가 언제나 옳고 정확합니다.
주의. 이 글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곳 미국과 한국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목회자들, 성도들 사이에서 제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자들의 회중 안에 서시며 신들 가운데서 재판하시는도다.] (시 82:1).- 흠정역(KJV).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시82:1) -개역.
[¶ 너는 신들을 욕하지 말며 네 백성의 치리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출 22:28)-흠정역(KJV).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출 22:28) -개역
원어의 엘로힘의 뜻에는 신들도 있지만 "재판관들"(통치자들)도 있습니다. 그럼 그 원어의 어휘 정의는 누가 결정합니까? 사람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결정하면 성경의 번역이나 해석은 다양해집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신들'이라고 한 부분을 개역 성경은 '재판장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습니까?
킹 제임스 성경에서 [신들]은 신들이 아니라 재판관, 또는 통치자란 뜻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손에 킹제임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구절들은 개역 성경이나 현대어 역본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강단에서 "이 구절은 현대 역본들이 더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킹제임스 성경에서 신들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재판관들입니다. 개역 성경을 보십시오."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말한 바 양의 탈을 쓴 이리들처럼 이런 분들은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들인 체 할지 몰라도 사실은 킹제임스의 성경의 탈을 쓴 거짓말쟁이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신들'이라고 말하면 신들이고 재판관이라고 하면 재판관이며, 통치자들이라고 통치자들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부분(구절, 어휘)은 개역 성경이나 NIV, NKJV, NASB 등이 킹제임스 성경보다 더 정확한 것이 아니라 100% 다 부정확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있는 이 곧 일곱 금 등잔대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2:1). -흠정역, KJV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계2:1). -개역, NIV
위의 구절에서 천사라고 읽고 '사역자'라고 설명하거나 해석해 주는 것보다 아예 사역자로 읽고 사역자로 설명해 주는 것이 정직한 영을 가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천사로 읽고 설교는 '사역자'라고 열변을 토한다면 정직하게 이 구절은 개역 성경이 옳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낫습니다. 어차피 원문에는 '사역자'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 본문에서는 침례라고 읽고 세례를 주는 사람들이나 자기 손에 있는 성경에서는 세례로 읽고 침례를 주는 이들이나 다를 것이 없는 부류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교회들, 목회자들, 성도들 속에도 원어, 원문을 들먹이며 킹제임스 성경의 어휘를 슬며시 현대 역본들을 따라 변개해 버리는 거짓말쟁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배교는 멀리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까운데서, 속에서부터 주의 말씀을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함에서 난 자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이런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자신과 믿는 바가 다르다고 이렇게 심하게 비난할 수 있는가? 라면 제게 분을 품는 목회자,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분들은 제게 분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낫습니다. 제게 분노하거나 욕한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굳게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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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에 관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
1.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났는데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성령님이 떠날 수도 있나요?
답변. 구약의 경우 사울에게서 주의 성령이 떠났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한 후 성령이 떠나지 않기를 구했습니다.
삼손을 성령이 떠났다가 마지막에 기도했을 때 다시 돌아왔습니다.
신약의 경우...
성령이 떠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그분께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알면 됩니다.

2. 사울은 구원을 잃었나요?
사울은 주의 성령을 잃었고, 왕좌를 잃었고, 자식들을 잃었고 자신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사울이 지옥에 갔느냐? 이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논란이 매우 많습니다.
[또한 {주}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라, 하매](삼상28:19).
사무엘의 말에 따르면 사울과 사울의 아들들이 죽어서 사무엘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지하 낙원에 있었다면 사울과 그의 아들들 역시 그러했다고 봅니다. 성경 본문에 따르면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해석은 다양합니다.
주의 말씀을 믿으면 됩니다.
참고로 구약에서 다루는 구원은 전쟁, 기근, 역병, 포로됨, 재앙 등에서의 육체적 생명의 구원이지 혼의 구원은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살았다"는 뜻이 1차적 의미이고 구원을 잃었다고 하면 "죽었다"는 뜻입니다. 신약과는 그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이란 단어를 모두 죄로부터 지옥에서 받는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3. 사울은 접신하고 있었는데 그럼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일까요?
답변. 진짜 사무엘입니다. 사람들의 견해, 주장, 학설을 들으면 우리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a. 여인은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은 사울이시니이다, 하매](삼상28:12).
여인은 속임수로 사무엘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진짜 사무엘을 보았기 때문에 놀란 것입니다. 만약 악한 영의 도움을 받아 평소처럼 사람들을 속였다며는 그녀는 결코 놀라서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늘 하던대로 점을 쳐주고 돈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여인이" 놀라서 크게 소리쳤다..." 이것은 접신하는 여자 자신도 이외의 상황이었고 두려웠던 일입니다. 여인은 사무엘을 보았고 변장한 사울의 정체도 그 자리에서 알아보았습니다.
b. 여인은 사무엘을 보았지만 사울은 사무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본 모양을 묻고 확인해야 했습니다. 이 때 사울 왕은 접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자기 얼굴을 숙여 땅에 대고 절하니라.](삼상 28:14).
c. 사울이 사무엘인 줄 알고 자기 얼굴을 숙여 땅에 대고 절했습니다.
-거짓 사무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d. 사무엘과 사울은 정상적인 대화를 했고 사무엘은 여전히 그에게 대언했습니다. 그의 말은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삼상28:15-19). 이는 참 대언자와 거짓 대언자를 구분하는 율법의 명시적 판별법입니다.
e. 사무엘이 한 말은 점쟁이들이나 술사들이 쓰는 상징이나 비유적 언어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했고 그 일시와 결과까지 정확했습니다. 이는 대언자의 화법이며 그가 말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는 거짓 대언자가 되고 그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성경에서 거짓 대언자들이 왕 앞에 내 놓는 말들은 어김없이 결과가 정 반대였습니다 . 그러나 주의 대언자들이 하는 대언은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여자를 통해 올라온 사무엘은 주의 대언자 사무엘이었고 그의 말은 문자 그대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여기서 사무엘은 거짓이 아니라 진짜 사무엘이라 확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이면 절대 결론이나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답을 알려 줍니다. 이것은 성경 공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며 철칙입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보다 사람들의 의견, 학설에 귀를 기울임으로 평생 답을 얻지 못합니다.
4. 사울 왕은 자살했나요? 죽임을 당했나요?
답변. 자살을 시도했다 실패해서 죽여 줄 것을 구했습니다. 사울의 자살을 도와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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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 태어난 날?
질문.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하나님께서 그분을 아들로 낳으신 날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부활하신 날은 예수님께서 아들로 태어난 날이 아니라 "권능 있게 선포된 날"입니다.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주장1. "내가 네게 오늘 이르노니..." 또는 "오늘 내가 네게 이르노니"란 뜻으로 킹제임스 성경이 콤마의 위치를 잘못 찍었다는 주장(안식교, 몰몬교 등의 주장).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는 이들의 주장은 일단 무시합니다.
주장2. 오늘이란 말은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캘빈주의자들의 주장. 성경은 "이 날, 오늘"이라고 한 특정한 날을 지정하심으로 이 말 역시 의미 없는 말입니다.
주장3. 오늘이란 말은 주님이 부활한 날이다. 이 주장은 ‘암스롱파’라고 불리는 미국의 이단 교회에서 주창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하나님께서 그분을 낳은 날이란 것이다. 이 주장은 한국의 킹제임스 성경 진영에서도 퍼져 있고 필자도 한 때 미혹되었던 주장이다.
시편 2:7절, 히브리서 1:5,6절을 보라.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하나님께서 어느 한 날에 친히 한 아들을 낳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영원 전부터 아들이니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날’(this day)이라고 하는 역사의 한 날에 아들을 낳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조언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사9:6). 한 아이가 태어났고 한 아들이 주었졌는데 그게 언제인가? 부활 때에 태어나고 주어졌는가? 이는 말도 안 된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요3:17). 주님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요, 보내신 아들임을 선포하셨다(사9:6).
시편 2:7절의 정확한 해석은 히브리서 1:5,6절에 나온다. [그분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중의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또 다시 그분께서 그 처음 나신 분을 세상에 들어오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 하시고](히1:5,6). 하나님이 한 아들을 낳으신 때는 부활한 날이 아니라 6절에 "세상에 들어오게 하실 때"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언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셨는가? 부활하기 전에 이미 그렇게 부르셨다.
이런 주장이 왜 나오는가? 사도행전 13:33절의 오독, 오해 때문이다. 32절부터 읽지 않고 33절만 달랑 읽어서 생기는 오독이다. 32-37절까지 바울이 선포한 말씀을 보라.
"기쁜 소식-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밝히 알린다. 기쁜 소식,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이 성취된 사실은 모르는 이들에게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선포한 기쁜 소식, 주님이 주신 약속과 성취
- 시편 2:7. 아들을 주셨다.
- 시 16:10. 죽으심과 부활. 썩음을 보지 않고 일으켜 지심. 이런 약속을 주님께서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3:33절은 시편 2:7절을 인용해서 아들을 낳으신다는 약속의 성취를 선포하고 시편 16:10절을 인용해 34-37절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의 약속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시편 2:7절은 부활한 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활은 시편 16:10절에 나오며 바울은 그 말씀을 인용해서 그분의 부활을 선포했다.
로마서 1:4,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1:4). 부활은 그분이 아들로 태어나셨던 분이시요, 하나님의 한 아들이심을 권능있게 선포하는 날이지 결코 태어난 날을 선포한 주님의 생일을 선포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13:33절이 주님의 탄생일이라면 그 날이 교회의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
참고로 히브리서 4:7, 사도행전 17:31절의 "오늘, 한 날"은 부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구절들은 시편 95:7-8을 인용한 것으로 부활과는 무관한 날이다.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낳으시고 주신 날은 그분께서 세상에 들어오신 날이요, 성육신한 날이지 부활하신 날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3:33에서 바울은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시면서 시편 2:7절을 인용한 것은 그가 태어난 날을 증언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을 통해 주님께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낳았다고 말씀하신 아들, 독생자(獨生子-only begotten Son)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부활을 통해 입증하셨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에 사울이 자기의 병기 드는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능욕할까 염려하노라, 하였으나 그의 병기 드는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하려 하지 아니하므로 사울이 칼을 취해 그 위에 쓰러지매 그의 병기 드는 자가 사울이 죽은 것을 보고 자기도 마찬가지로 자기 칼 위에 쓰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삼상 31:4-5).
사울이 자살했다고 하는 성경 본문입니다. 사울은 자기 병기 든 자에게 죽여 달라고 했지만 두려워하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칼에 자신이 쓰러졌습니다.
[사울이 자기 뒤를 바라보다가 나를 보고는 나를 부르시기에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에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족속이니이다, 하매 그가 다시 내게 이르되, 내 생명이 아직 내게 온전히 남아 있어 고통이 내게 임하였나니 원하건대 너는 내 위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에 그가 쓰러진 뒤에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확신하고 이에 그 위에 서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던 관과 팔에 있던 팔찌를 벗겨 그것들을 여기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삼하1:7-10).
사울은 자살 시도를 했지만 죽음은 단번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칼에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남아 있었던지라 그는 아말렉 족속의 한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죽여 줄 것을 부탁했고 그가 사울을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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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요?
질문. 마태복음 6장10절 말씀에 "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요?
답변.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현재 한글 성경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이루어진 것 같이"라고 해서 과거형으로 읽게 됩니다.
자, 본문을 봅시다.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 6:10).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 있는 대로,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대로"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 있는 대로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국이 임하는 것은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복음을 보세요. [...Thy will be done, as in heaven, so in earth.] (눅 11:2).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 이루어지는 그대로 땅에서 이루어지리이다.
하늘에서나 땅에서 동일하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 둘 다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은 계시록에 잘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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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에게 믿게 한다?
질문. 믿는 자들에게 믿게 한다니 무슨 말인지요?
답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흠정역)
같은 구절이지만 아래 성경 역본들에서는 볼 수 없는 구절이다.
요한일서 5:13,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205,465)]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永生)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____________ (개역)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____________ (개정).
나는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려는 것입니다.___________(공동)
<영원한 생명을 아는 지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____________ (표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있는 여러분에게 이런 글을 써보내는 것은 다시 한번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____(현대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____________ (현대인)
공란은 삭제된 부분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쓴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한다.
1.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려한다.
2. 하나님이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한다.
현대 역본들은 한 가지만 있다.
문제는 이 글을 쓴 대상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이다.
고로 1번은 말이 되는데 2번은 말이 되지 않는다. 믿는 자들에게 믿게 하려 한다고 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현대 역본들은 과감하게 이 구절을 지워 버렸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빼거나 더하거나 바꾸는 일은 마귀와 그의 사역자들이 하는 일이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쓴 글이지 불신자들에게 쓴 글이 아니다. 특히 서신서들은 당연히 신자들에게 보낸 글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이 글을 쓴 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믿음--->생명)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면 그 분을 믿어야 한다(생명--->믿음).
불신자 때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고 신자는 이미 소유한 생명으로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from faith to faith)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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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enish에서 're'는 접두어가 아닌가요?
질문. replenish에서 're'는 접두어가 아닌가요?
답변. 접두어가 맞습니다.

이 질문과 답변은 성경의 교리 문제가 아니라 영어 어휘에 관한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교리에 맞추고 옹호하기 위해 사실을 부정하는 일은 크리스천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replenish. 채우다, 다시 채우다. replenish란 단어는 라틴어가 아니라 불어에서 나왔기 때문에 re는 접두어가 아니란 주장은 거짓입니다. 불어, 스페인어 역시 라틴어 범주에 속합니다.
웹스터 사전이나 옥스퍼드 사전은 물론이고 인터넷의 온라인 사전 어디를 찾아보아도 re +plenish라고 설명합니다. 접두어인지 아닌 지 이런 것을 아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re'를 떼고 그 단어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plenish 란 단어가 있으면 're'는 접두어가 되고 그 단어가 없으면 접두어가 아닌 한 단어가 됩니다. 영어로 plenish란 단어가 있고 그 의미가 같은 의미라면 replenish의 're'는 접두어입니다.
plenish [ˈplɛnɪʃ] vb (tr) Scot to fill, stock, or resupply
[from Old French pleniss-, from plenir, from Latin plēnus full]
이 단어는 여러분이 가진 영한사전에도 다 등재되어 있는 평범한 어휘입니다.
"채우다, 넣다, 저장하다, 보충하다...." 이렇게 설명되어 있을 것입니다.
영어에서 plenish란 단어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뜻은 채우다.
그럼 그 단어 앞에 're'가 붙으면 그 단어는 '다시' 란 뜻이 되든지 강조의 의미가 됩니다.
refill =re+fill 과 정확히 같은 용법입니다.
recover, restore, replant, replay...와 같이 're'를 떼고 단어의 의미가 같은 류의 뜻이라면 're'는 접두어가 맞습니다. replenish와 plenish의 관계는 refill과 fill의 관계와 정확히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단어입니다.
영어권에 사는 사람이라고 영어에 정통한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14세기경에 불어에서 차용된 영어 단어인데 어원설명을 보면 이렇습니다.
웹스터 사전의 어원 설명.
Middle English replenisshen, from Anglo-French repleniss-,stem of replenir to fill, from re- + plein full, from Latin plenus— more at full
First Known Use: 14th century

옥스포드 사전의 어원 설명.
Origin: late Middle English (in the sense 'supply abundantly'): from Old French repleniss-, lengthened stem of replenir, from re-'again' (also expressing intensive force) + plenir 'fill' (from Latin plenus 'full').

옥스포드 사전에서 re는 다시('again)이란 뜻도 있고 강조 용법( expressing intensive force)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쨌든 're'는 접두어입니다. 의미는 "다시 채우다 (or) 충분히, 가득 채우다."이며 접두어입니다.
여러분이 커피숍에서 물이나 주스, 커피 등을 마시는데 점원이 와서 다시 채워주는 것을 리필(refill)한다고 할 것입니다. 잔이 텅 비었을 때 다시 채울 수도 있고 반 쯤 남았을 때 다시 채울 수도 있고 약간 밖에 안 마셨지만 다시 채울 수도 있습니다. 다시 채운다는 말은 적게든 많게든 필요로 하는 만큼, 요구하는 만큼 채우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아담에게 "다시 (or 가득, 충만히) 채우라-replenish"고 하셨습니다. 당시 땅은 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지금 상태가 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 창세기 1:2의 빈 땅을 채우셨고 그 다음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다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채워야 합니다. 창세기 1:28 절의 정확한 의미가 이것입니다.
노아에게 주신 명령도 동일합니다. 다시(가득)는 그 의미상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배를 채우든 빈 냉장고를 채우든 가득 채우는 것은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있지 않을 때 필요로 하며 요구되는 행위입니다.
이 단어로 갭 이론, 재창조론 등을 따지며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논리로 삼는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이고 본래 의미는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재 창조론을 믿는 것, 믿지 않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이 글은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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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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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주 --------- 댓글쓰기
귀신은 무엇으로 설명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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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귀신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귀(들)입니다. 사람의 혼은 몸을 떠나면 하늘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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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죽어서 부자와 함께 하였다(사53:9)?
질문. 예수님께서 죽어서 부자와 함께 하였다(사53:9)는 말이 무엇입니까?
답변. 죽어서 부자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부자와 함께 무덤을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53:9절, [또 그는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 무덤을 만들었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사53:9). And he made his grave with the wicked, and with the rich in his death; (KJV).
문장에서 주어(He)와 동사(made), 목적어(grave)는 한 번입니다.
우리말로는 한 개의 동사를 두 번(만들었으며...함께 하였으니)으로 각기 다르게 번역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오역입니다.
이 구절은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묻히심, 장사지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흠정역 성경에는 동사가 두 번 나옵니다.
"만들었으며...함께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풀어서 번역한 결과입니다.
본문에서 동사는 made 한 번입니다.
"And he made his grave with...., and with...."입니다.
한국말로 정확히 번역하자면 "그분은 사악자들과 함께,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 자기 무덤을 만드셨느니라."입니다.
어떤 분이 예수님께서 "죽어서 부자와 함께 하였으니..."라고 했으니 죽어서 지옥간 부자와 함께 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죽으셔서 무덤을 만드신 말씀이지 죽은 후에 지옥에 간 말씀이 아닙니다.
grave는 십자가나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죽으셔서 자신의 무덤을 사악한 자들과 함께, 부자들과 함께 만드셨다는 말씀인데 신약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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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주일의 예표, 그림자인가요?
질문. 안식일은 주일의 예표, 그림자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안식일의 실체는 주일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천년 왕국)입니다.
주일(주의 첫날)은 안식일과 아무 관련이 없고 예표와 실상의 관계가 아닙니다.
예표와 실상에 대해 말할 때 율법은 신약의 그림자란 말을 자주 합니다.
예를 들어 유월절 어린양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모형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그리스도의 할례의 모형입니다.
성경은 율법은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는 가지고 있으나 그 일들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므로 그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린 그런 희생물들로는 거기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10:1).
우리는 예표론을 통해서 귀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표와 실상을 잘못 연결하는 것입니다.

1. 땅에 있는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입니다.
[이 제사장들은 모세가 성막을 만들려 할 때에 [하나님]께 권고 받은 바와 같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를 섬기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조심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 양식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라, 하시느니라.](히8:5).

2. 구약의 성막/성전은 오늘날 지역 교회의 모형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막과 신약의 교회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란 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모형과 실상의 관계는 아닙니다.
제사장은 목사의 모형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몸이 성경이 말씀하시는바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 성전입니다.
3. 안식일은 주의 첫날(주일)의 모형이 아닙니다.
이 둘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골2:16-17).
성경 본문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이미 온 것들이 아닙니다. "다가올 것들"이란 말은 미래의 일입니다.
안식일은 남아 있는 안식으로 다가올 것 즉 '천년 왕국'의 모형입니다(히4:4-9).

4. 크리스천들은 안식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지키도록 주신 율법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표적입니다(출31:13,17, 겔2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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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는 딸을 번제 헌물로 드렸습니까?
질문. 입다는 딸을 번제 헌물로 드렸습니까?
답변. 예, 그렇습니다.
입다의 맹세로 드린 번제 헌물은 성경 신자들 가운데서 논쟁이 심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11:31).
입다는 주께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는데 '번제 헌물'은 누구나 아는 대로 희생물을 태워서 드리는 헌물입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사람 그것도 다름 아닌 자기 딸이었다는 점입니다.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그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심히 참담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도다.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매] (삿 11:34-35).
입다는 자기를 맞으러 나오는 딸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슬퍼했고 참담해 했습니다. 번제 헌물로 드려야 할 것이 자기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설교자들, 주석가들이 여기서 번제 헌물은 번제 헌물이 아니라 영적 희생물로서 평생 독신으로 살며 주께 헌신하는 것이란 주장을 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을 태워서 바치는 헌물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란 점입니다.
둘쨰, 인신공양은 이교도의 관습이며 주께서 금하신 법입니다.
셋째, 번제 헌물로 사람을 바치는 규정은 없습니다.
위의 셋은 모두 성경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럼 입다가 맹세한 번제 헌물은 어떻게 됩니까? 입다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면 태워서 드리고, 사람이면 독신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번제 헌물은 독신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1. 번제 헌물이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영적 희생물, 헌신이란 뜻이 아닙니다.
이는 창세기 22:2에서 이미 확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2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 헌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창22:2).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이삭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하라는 뜻으로 알아 듣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나무와 불과 칼을 준비해서 문자 그대로 번제 헌물로 드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번제 헌물은 희생물을 태워서 드리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늘날 성경을 왜곡하는 현대의 배교한 목회자들이나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어쩌구 저쩌구 하거나 하나님은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번제 헌물은 번제 헌물이 아니라 헌신을 말하는 것이며, 아들 이삭을 평생 독신으로 바치면 그것이 영적 희생물(롬12:2)이라고 멋대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생자 이삭을 문자 그대로 번제 헌물로 바치라는 명령으로 정확히 알아들었습니다. 입다나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바보가 아닙니다.
참고로 성경에 번제 헌물로 드려지는 희생물은 어린양(창22:7), 숫양(창22:13), 비둘기(출29:25), 송아지(레9:3), 수소(레23:18)입니다.

2. 애곡하다는 성경적 뜻과 용례를 통해 정확히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자기 딸을 '번제 헌물'로 드리기로 맹세했고 딸은 아버지가 맹세한 대로 행하도록 자신을 준비했습니다. 입다의 딸은 번제 헌물로 드려지기 전에 두 달 동안 산에 올라가 자기 동무들과 애곡했는데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삿11:37-38).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애곡하지 않고 "처녀됨"으로 애곡했다는 말로 인해 번제 헌물로 드려진 것이 아니라 독신 생활을 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이는 앞으로 처녀로 평생 살 것에 대한 애곡이 아니라 처녀 됨으로 죽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곡입니다.

-처녀됨으로 인해 애곡한다?
이스라엘 처녀들은 자신들이 결혼하기 전 처녀 된 자신에게 메시야가 나올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사7:14). 여자의 씨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주}가 새 일을 땅에 창조하였으니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둘러싸리라.](렘 31:22).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한 여자에게서 메시야가 탄생한다는 예언의 말씀으로 모든 이스라엘 처녀들의 소망이요 꿈이었습니다. 입다의 딸은 이 부분에 대한 믿음이나 소망이 매우 컸기에 처녀됨으로 죽는 것에 대해 애곡한 것입니다.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아니하였더라.-KJV)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더라.](삿11:39-40).
입다가 딸에게 서원한 대로 행했는데 한글 흠정역 성경에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더라."(40-KJV)입니다.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입니다.
한글 성경은 마치 처녀로 살게 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도록 시제를 살짝 고쳐 놓았는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입다가 맹세한 대로 딸을 번제 헌물로 드릴 때에 입다의 딸이 처녀였다는 말입니다.
입다의 딸과 그녀의 친구들이 애곡했던 것은 그녀가 처녀 상태로 주께 번제 헌물로 드려졌던 것에 대한 애곡입니다. 죽지 않고 처녀로 드려진 것에 대한 애곡이란 것은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3. 독신으로 사는 것이 주께 자신을 드리는 영적 희생물?
이런 해석은 상당히 인기 있는 해석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어린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어머니 한나에 의해 주께 드려진 후로 사무엘은 독신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사무엘이 주께 드려진 사실로 애곡하지 않았습니다. 주께 드려진다는 의미가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군가 나실인으로 또는 다른 방식으로 주께 드려지는 일은 전혀 애곡할 일이 아닙니다.
입다의 딸이 처녀된 상태로 번제 헌물로 드려졌기에 그녀의 친구들은 죽기 전 두달, 죽은 후 매년 나흘씩 그녀를 위해 애곡했습니다. 아버지의 잘못된 맹세로 인해 처녀된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져 죽었기 때문입니다.

4. 애곡은 누가 언제 하는가?
애곡이란 표현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될 때, 민족의 멸망과 같은 고난에 대해 쓰는 것이지 처녀됨에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애곡이란 표현이 언제 사용되는지 보면 이 문제는 너무나 간단하게 풀립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었을 때 애곡했고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애곡했습니다. 구약에서 100번 이상 애곡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누가 언제 누구를 위해 애곡하는지, 무엇 떄문에 애곡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죽지도 않고 살아서 주의 집에서 주님을 섬기는 여자를 위해 온 이스라엘의 길르앗 지역 여자들이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한다는 것은 성경적 용례도 없거니와 상식 이하의 발상입니다.

5. 번제 헌물은 문자 그대로 태워서 드리는 헌물입니다.
기록된 대로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해석을 가미해서 진리를 왜곡하는 일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입다가 맹세로 드린 헌물이 성경적으로 옳다, 그르다 따위의 평가나 해석의 문제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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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댓글쓰기
명쾌하게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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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 댓글쓰기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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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아 ----------- 댓글쓰기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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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 ----------- 댓글쓰기
꼼꼼히? 성경을 읽어보니 처녀됨에 애곡한 사람은 입다의 딸이고 이후 해마다 애곡한 이스라엘의 딸들은 입다의 딸을 위해 애곡한 것이지 입다의 딸처럼 처녀됨을 애곡했다는 말씀은 없네요. 즉 다른 사람들은 입다의 딸의 죽음에 애곡했지만 정작 본인이었던 입다의 딸은 자신의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낳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에 애곡했다는 말이네요.
입다의 딸의 믿음이 대단합니다.
또한 현대 역본들이 '처녀로 죽음으로 인하여 애곡했다'고 함으로 감추려고 한 것은
입다의 딸이 안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입다의 딸이 결혼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애통해했다는 식으로 말함으로 입다의 딸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절대 지켜야한다는 신실함과 하나님의 권위 안에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권위를 따르는 딸로 또한 메시아를 출산하기를 강하게 원했던 믿음이었네요.
입다는 그런데 어쩌다 그런 서원을 했을까 모르겠네요. 자기 집 문에서 나와 자기를 맞이하는 "것"이 무엇이길 기대했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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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입니까? 예수입니까? (히4:8).
질문. 여호수아입니까? 예수입니까? (히4:8).
답변. 예수님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 주석가들, 설교자들이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고 고치려는 시도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잡아 보려는 이런 시도는 무모할 뿐 아니라 신성 모독적인 일입니다.
히브리서 4:8절입니다. [만일 예수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분께서 그 뒤에 다른 날을 말씀하려 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4:8).
누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는지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아니라 주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고 또 이 땅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수1:13).
[이제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주}의 종 모세가 요르단 저편에서 너희에게 준 너희 소유의 땅으로 가서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되](수22:4)
그럼 히브리서 4:8에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준 예수는 구약에서 증언한 "주 너희 하나님"입니다. 히브리서의 핵심 내용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절대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될 수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말한 대로 정확히 예수님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구구절절이 여러 가지 설명을 붙일 수 있지만 성경 신자들은 단순명료하게 말씀으로 확증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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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 댓글쓰기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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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 댓글쓰기
아멘,명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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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 --------- 댓글쓰기
안식을 이미 주셨다면 이란 말씀은 아직 안식을 안 주셨다는 말씀인데 예수님이 주신 안식 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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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여기에 있습니다. <http://av1611.net/3554>
성경에는 네 가지 안식이 나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안식은 얻었습니다. 남아 있는 안식(하늘의 왕국-천년 왕국)은 아직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히브리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약속의 땅-안식)을 주셨고 다른 안식(남아 있는 안식, 저 안식)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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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홍 --------- 댓글쓰기
히브리서 강의 듣는 중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예수" JESUS 의 헬라어 이름이 히브리어의 이름으로 "여호수아" Joshua : "여호와께서 구원하심" 보다는 "예수아" Jeshua : "그가 구원하실 것이다"의 이름이 맞는 것이 아닐까요?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1)
킾 바이블 게시판의 글 중에서 김문수 목사님의 견해도 공감이 가거든요.
김문수 목사님 글중에... 저는 이것이 여호수아를 예수로 음역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식으로 음역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 "여호와"라는 단어를 전부 헬라식으로 고쳐서 "예와"라고 음역해야지 왜 주(큐리오스)라고 옮기도록 하셨을까요?
또 마태복음 1:8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조상 중에는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어로 이오사파트, 요사파트(Ιωσαφατ, Iwsafavt)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도 그리스어로 음역하여 이오수아, 요수아(Ιωσουα)라고 해야 하는데, 성경은 히 4:8에서 예수스(Ιησουσ)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 4:8의 "예수(예수스)"는 여호수아의 그리스 식 음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 4:8의 예수가 여호수아를 음역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여호사밧의 "여호"는 "이오, 요(이오타, 오메가)"가 되는데, 여호수아의 "여호"는 왜 "예(이오타, 에타)"가 되는지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영화 "회복"을 시청했는데 "메시아닉 쥬"들이 주님을 "예수아"라고 발음하는 것을 들었거든요. (에스라 성경사전을 보면 "예수아"라는 인물이 "여호수아"라고도 불렸다는 내용을 보면 구분할 필요 없는 이름 같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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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의 여호수아(יְהוֹשֻׁ֣עַ)를 헬라어 구약 성경 번역본에는 Ἰησοῖ (Ἰησοῦς)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여호수아” יהושוע가 그리스어 성경으로 번역될 때에 “이에수스” Ἰησοῦς 는 한국말로 '여호수아, 예수스'가 됩니다. 헬라어 발음 표기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스, 야소, 예수아 등의 차이는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어떻게 음차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중국어 성경에서 한국어로 번역할 때 “야소” 耶穌 라고 되어 있었기에 한국어로는 1:1로 맞추어 "예수"라고 한 것입니다. 저의 할머니는 평생 야소라고 하셨지요. 오늘날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예수는 헬라식 발음이고 제우스의 발음과 비슷하다고 해서 히브리식 발음인 '예수아"라고 하자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일개 유대 청년인 예수를 자신들의 위대한 선조인 여호수아와 비슷한 발음으로 불리는 것을 극히 싫어합니다.
“예수아”라는 발음은 아람어이면서 동시에 현대 히브리어입니다. 현대 히브리어로 “예수”라는 말을 “예슈아” יֵשׁוּעַ 로 번역합니다.
시라아 역본인 페쉬타(킹제임스와 같은 계열임)에서는 예수님을 “예슈아”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 아람어로는 예수아, 영어로는 Jesus이고 한국어로는 예수님이신 것이지요.
이미 첫줄에 언급했듯이 헬라어 구약 성경에 여호수아서 1:1에 여호수아를 "이에수스"라고 했는데 이것이 마태복음 1:1에 전통 원문이라고 하는 T.R에 나오는 예수님(Ιησους Iesous ee-ay-sooce)과 표기가 같습니다. 고대에 어떻게 불렀고 표기했는지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호세아'를 '여호수아'로 불렀고 신약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그분의 이름을 모세가 불렀던 것처럼 호세아가 아니라 '예수'라 부르라(call)고 했습니다. 천사가 여호수아라 부른 것을 마태가 헬라어로 그 이름을 번역이나 음역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천사는 그분의 이름의 발음을 알려 주었던 것이지요. 호세아(여호수아)라 하라가 아닌 "예수라 하라."(thou shalt call his name JESUS).-마1:21. 그래서 그 분을 예수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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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홍
다방면으로 설명해주시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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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물"(standing water)이 무엇입니까?
질문. "서 있는 물"(standing water)이 무엇입니까? 물기둥처럼 위로 서 있는 물인가요?
답변. 고여 있는 물, 움직이지 않고 고여 있는 물로 흐르는 물의 상대어입니다.
시편 107:35, 114:8절에 standing water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 흠정역 성경에 "서 있는 물"로 직역을 했는데 한국말에 없는 표현입니다. 물이 서 있다는 말은 정지해 있다는 뜻이지 앉고 선다는 의미로 분수처럼, 물기둥처럼 서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광야가 변하여 서 있는 물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물 샘들이 되게 하시고](시107:35) [He turneth the wilderness into a standing water, and dry ground into watersprings.](시 107:35)
[그분께서 반석을 변하게 하사 서 있는 물이 되게 하시며 부싯돌을 물 샘이 되게 하셨도다.] 시114:8) [Which turned the rock into a standing water, the flint into a fountain of waters.](시 114:8)
여러분이 욕조에 받아 둔 물이 있다면 그 물을 "standing water"라고 합니다. 흐르는 물이 'running water'입니다. 그 말의 상대어가 되는 것이 standing water입니다.
연못, 저수지, 오아시스 등도 고여 있는 물입니다. 시편에서 주님의 재림 때 광야가 변하여 그런 물이 가득한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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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교회를 수태했다?
질문. 예수님께서 교회를 수태했다?
답변. 전혀 헛소리입니다.
오늘날 일부 교단, 목회자들 중에 지역 교회론을 설파하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교회를 수태하셨다가 낳으셨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서 침례교회 목사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는 말을 듣고 웃고 넘기고 말았는데 그 강연을 들은 분이 반복해서 질문을 해 왔습니다.
성경 지식을 떠나 상식이 없는 주장입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님이 교회를 수태하셨다면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교회 역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홀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산모가 잉태된 아이와 함께 죽은 꼴이 된 것이고 교회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가 됩니다. 그럼 예수님의 부활 때 그분의 몸속에 수태해 있던 교회도 부활한 겁니까? 아예 말도 안 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머리가 돈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돌아 버린 자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은 큰 신비니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성경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아내 된 여자를 얻기 위해 깊은 잠(죽음)을 자야 했습니다.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은 아내 된 교회를 얻기 위해 죽으셔야 했습니다.
죽음 후에, 죽음을 통해 아내(교회)를 얻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몸속에 오랫동안 아내를 수태해서 낳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담의 몸속에서 그의 아내를 끄집어 낸 산파가 아닙니다.
아담은 6일째 만들어졌고 여자 역시 그 날 그의 몸에서 취해져 같은 날 지음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수태해서 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속에 수태해 있는 교회를 끄집어 낸 산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수태한 기간이란 말 같지 않는 소리를 태연스레 하며 무지를 자랑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들이 어느 신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명색이 목사라면 성경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상식에라도 맞게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하루 만에 땅을 만들고 순식간에 민족을 태어나게 하시며(사66:8) 교회를 세우십니다. 사람의 거듭남 역시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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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11:35)
질문.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답변. 사람들의 불신과 무지 때문입니다. 아래 설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우셨던 장면이 나옵니다(눅19:41, 요11:35). 이외에도 예수님은 우셨습니다(히5:7).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이런 질문에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각기 그럴 듯한 추측, 상상, 자기 경험에 비춘 감정이입 등을 통해 주님이 우셨던 장면을 떠올립니다.
성경 본문을 앞뒤로 읽어 보면 주님이 우셨던 이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고 잠자는 나사로를 깨우러 오셨습니다.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니](요11:11)
생명이신 분에게 죽음이란 없습니다. 이런 예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막5:39). 사람들은 소녀의 죽음에 슬피 울었지만 주님은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잠든 자를 깨우듯 죽은 자를 깨우십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울고 있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죽음으로 고통 받는 가족들, 친지들, 주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께서 덩달아 우신 것이 아닙니다.
자, 그런데 죽은 자를 두고 왜 슬피 우느냐고 하셨던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요 11:35).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거기 있던 유대인들에게 동일하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고 물으시지 않고 주님께서도 우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나사로가 죽은 줄 아셨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심을 말씀하셨기에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잠에서 깨우러 오셨기에 나사로의 죽음 자체를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주님께서 사람들이 죽음으로 인해 받는 슬픔과 고통에 동화된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우신 것입니까? 32절을 보면 예수님을 본 마리아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때에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하더라.](요11:32).
예수님이 여기 안 계셔서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는 마리아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믿는 신자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사람을 보냈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리라, 하시더라.](요11:4)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믿었습니까?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게 된 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을 것이란 사실을 들었을 때 믿었을까요? 그들은 주님이 죽기 전에 오셔셔 고쳐 준다는 의미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지 않으셨기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하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마리아는 나사로의 죽음이 예수님의 책임이요, 병들었을 때 연락을 했지만 빨리 오지 않으셨던 예수님 때문이란 원망,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울었고 그와 함께 한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 병자들을 살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은 왜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믿는 자(마리아)와 믿지 않는 자(유대인들)의 견해가 동일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죽지 않도록 고칠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고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란 사실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죽음은 어떻게 할 수 없고 죽은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죽은 자는 단지 잠자는 자에게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나사로가 죽은 뒤에 뒤늦게 오신 예수님께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울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원망하며 우는 것을 보신 주님은 영으로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요11:33). -예수님이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신 이유.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기록하기에 따로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생명이신 분을 앞에 두고 죽은 자로 인해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요, 이 일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란 말은 믿지 않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로와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분이 잠든 자를 깨우러 현장에 오셨지만 그들에게는 그분은 없는 분처럼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분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그분이 누구인지 믿지 않고(불신) 알지 못했기(무지) 때문입니다.
주님의 괴로움, 신음, 눈물은 사람들의 불신에 기인합니다.
37-38절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이르되, 눈먼 자의 눈을 열어 준 이 사람이 이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속으로 신음하시며 무덤에 가셨는데 그 무덤은 동굴이며 그 위에 돌이 놓였더라.](요11:37-38). 예수님이 "다시...신음"하신 이유.
38절에서 주님은 "다시...신음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란 말은 33절에서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신 이유와 동일한 이유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불신'의 말을 할 때 속으로 신음하셨습니다.
그렇다면 35절에서 예수님이 왜 우셨는지는 너무나 간명하게 답이 나옵니다.
죽은 자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산자들이 불쌍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고통당하는 것에 감정이 동화되어 우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고 되물으시고 책망하십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마리아를 비롯해 유대인들은 죽음에 슬퍼하고 죽은 자로 인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병자는 죽지 않도록 고칠 수 있지만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이 정도까지만 믿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적과 권능과 표적을 행하는 분이지만 죽은 자는 어찌할 수 없다는 불신으로 슬피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라도 사람의 병은 해결할 수 있지만 죽음은 해결할 수 없다는 불신과 생각이야 말로 주님이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는 마리아조차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우신 이유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입니다(눅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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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만 --------- 댓글쓰기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에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신 것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 때문에 슬퍼하지 않아도 될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생들이 불쌍해서, 즉, 죽음의 권세 앞에 힘없이 굴복하고 슬퍼만 하는 인생들이 가엾어서 우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들의 슬픔과 울음에 동화되어 우신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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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말씀하시는 내용은 익히 회자되는 내용이요, 수없이 선포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좀 더 자세히 설명했으니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님의 견해는 자신의 감정이입니다.
주님은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님의 표현대로라면 죽음의 권세 앞에서 힘없이 굴복하고 슬퍼만 하는 인생을 가엾어서 우는 사람들)을 보시고 함께 운 것이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막5:39).
주님이 여기서는 이랬다 저기서는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 해석은 자기감정 이입이나 주관을 개입시키는 것보다 본문이 말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이 슬피 우신 다른 곳을 보면 됩니다(눅19:41).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불신과 무지로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보시고 "신음하고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라 "슬피 우셨습니다." 고로 이 장면에서 우신 이유는 가엾어서가 아니라 "무지와 불신"이 더 타당합니다.
요한복음 11장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신 결과의 표현이 울음입니다. 고로 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답 글로 의견을 말씀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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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만 ------------ 댓글쓰기
친절한 답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목조목 풀어 주시는 성경 말씀 감사히 잘 받아먹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복과 은혜의 통로로서 더욱 많은 섬김 감당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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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좀 더 주의해서 좀 더 신중하게 주의 말씀을 전하도록 깨어 있겠습니다. 미천한 글이나 말을 잘 받아 주시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서로", "함께" 은혜 안에서 강건하게 자라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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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 -------------- 댓글쓰기
저도 최상만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근데 요즘 킹제임스로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윤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NIV에 의하면 33절과 38절이 'deeply moved in Spirit'이라고 되어있어서 '깊이 감동받거나 심히 마음이 움직였거나'는 식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저도 예수님이 덧없는 죽음을 맞아 슬퍼 우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함께 우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킹제임스로 읽어나가니 다르게 읽혀지더라구요.
11장 전반적으로 걸쳐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이 영광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살리실 것을 암시하시지만 사람들은 계속 못 알아듣고 여러 번에 걸쳐,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그리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고 탓하고 하는 상황인 것이 느껴지고 또 킹제임스는 33절과 38절을 'groaning in spirit'이라고 해놓았기 때문에 (원어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영으로 한탄하시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윤성목 목사님 말씀처럼 말해도 듣지 못하고 봐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탄식으로 우셨다고 보는게 이해가 됐습니다.
언젠가 목사님이 말씀하셨듯이 해석은 나중 문제고 일단 성경은 원어에 가깝게 써놓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NIV는 이미 예수님이 'compassion'으로 우신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원어를 고쳐놓았기 때문에 그 걸 읽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해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원어 그대로 번역해놓은 킹제임스를 읽으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부분이 NIV로 읽을 때랑 다르게 읽혀지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어떤 성경으로 읽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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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연 ----------- 댓글쓰기
이 글을 읽으며, 구원을 받은 후에도 주님으로 하여금 신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우시게 한 수많은 불신의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네요...TT
주님의 긍휼하심과 오래 참으심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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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아론을 죽이지 않으셨나요?(출32:1-6)
질문. 하나님은 왜 아론을 죽이지 않으셨나요?(출32:1-6)
답변.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제 아내가 궁금해 하던 것입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입(대언자)으로 임명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으로 올라갔을 때 아론에게 나아가 '금송아지'를 만들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론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백성들의 압력에 굴복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출32:2-4).
아론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자는 누구나 올무에 걸립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려니와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사도들 중에 베드로가 구약의 아론과 비슷한 예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경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멸하려고 하셨습니다(출32:10). 아론 역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 중보했고(출32:11-12)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론이 먼저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론이 멸망당하지 않는 것은 모세의 중보를 하나님이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내리려 하던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니라.](출 32:14).
어떤 이들은 이 장면에서 아론의 아들들은 다른 이상한 불을 드렸다가 즉사했는데 아론은 왜 죽이지 않았느냐? 형평성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오류입니다. 주님은 흔들리는 언약궤에 손을 댄 웃사를 그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죽이셨고 어떤 이는 징계를 내리시지만 살리셨습니다. 다윗과 같은 경우에는 율법에 따라 죽어야 하지만 주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었음에도 죽지 않고 산 것은 주님의 긍휼, 뜻을 돌이키심 때문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압력이나 굴복이 아니라 자신들이 임의대로 주의 법을 바꾸고 자기들 기준에 따라 세우려고 했기에 즉각 죽이신 것입니다.
모세는 형 아론은 위해서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신명기 9:20절, [{주}께서 또 아론에게 심히 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바로 그때에 아론을 위해서도 기도하고](신9:20). 모세는 아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아론에게 심히 분노하셨고 그를 멸하려 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때에 아론을 위해 기도했고 아론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범죄자를 위한 중보자의 기도...이것은 우리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살게 된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벌할 때 주의 편에 선 자들을 모았는데 그 때 레위 자손들이 모세에게로 나왔습니다. [이에 모세가 진영의 문에 서서 이르되, 누가 {주}의 편에 속하느냐? 그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니 레위의 모든 아들들이 함께 모여 그에게로 오매](출32:26)
아론은 범죄했지만 레위 자손으로서 주의 편에 서서 모세에게로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날 그는 주의 편에 선 형제들의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를 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3,000명이 그 날 죽임을 당했습니다. 범죄한 베드로는 회개하고 주의 편에 섰듯이 아론 역시 범죄자들을 떠나 모세에게로 나와 주의 편에 섰고 모세의 중보 기도로 그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론처럼 세상의 압력에 굴복해서 죄를 범합니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십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육신을 따라 살거나 죄에 거하면 죽임을 당합니다(롬8:13).
회개하고 주의 편에 서면 그는 살림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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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8,10절에서 예수님은 거짓말하신 겁니까?
질문. 주님께서 육신의 형제들에게 “나는 ...이 명절(장막절)을 지키러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요7:8)고 하신 후에 은밀하게 올라가셨는데(요7:10) 주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까?
답변. 설명을 읽으십시오.
이 질문은 제가 성경을 처음 통독할 때 매우 놀랐던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했던 선교 단체에서도 이 본문에 대해서는 어설프게 해설을 해서 듣던 제가 더 짜증이 난 기억이 있습니다.
일단 주님은 거짓말하시지 않으시며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7장의 본문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1절부터 본문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로 인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거주지에서 다니려 하지 않으셨습니다(1). 때는 장막절이 가까이 왔습니다(2).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은 예수님에게 “여기(갈릴리)를 떠나 유대 들어가”라고 합니다(3).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려 하는데 형제들이란 사람들은 예수님께 유대로 가라고 하니 한 마디로 죽으러 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하는 일을 보게 하소서”(3), “...당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4)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마귀의 음성입니다.
형제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5절에 나옵니다. “이는 그분의 형제들도 그분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요7:5). 믿지 않는 형제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로서 살인자들입니다(요8:44).
주님은 그들에게 답변하시기를,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7:6)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내 때”는 마지막 유월절로서 죽으시는 때입니다(마26:18).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마26:18)라고 하신 것을 통해 내 때가 언제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모친 마리아에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형제들에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요7:6)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8절의 주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충만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절을 지키러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하시니라.](요 7:8).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형제들은 예수님에게 이 명절에 올라가 “당신이 하는 일을 보게 하소서”(3), “...당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4)라고 했지만 주님은 이 명절(장막절)에 올라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때가 아직 충만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주님이 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씀은 형제들이 요구한대로 자신이 하는 일을 세상이 보게 하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는 일을 하기 위해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가는 것은 율법의 명령입니다. 반드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명절을 지키러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직”이란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올라가라는 형제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이는 모순이 아닙니다. 주님이 거짓말하신 것이 아닙니다(10).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기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이 명절(장막절)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은밀히 가시지만 때가 되면 형제들이 요구한 대로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명절(유월절)에 올라가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이며 마지막 유월절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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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8:26절에서 "날들이 차지 아니 하였으므로"가 무슨 뜻인가요?
질문. 사무엘상 18:26절에서 "날들이 차지 아니 하였으므로"란 말씀이 있는데 날들이 차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나요?
답변. "날들이 끝나지(지나지) 않았으므로"란 뜻으로 몇 날(일)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의 신하들이 이 말들을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니라. 날들이 차지 아니하였으므로 다윗이 일어나 자기 사람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들 중에서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수를 채워 왕에게 드림으로 왕의 사위가 되려 하매 사울이 자기 딸 미갈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삼상18:26,27)
여기서 "날들이 차지 아니하였으므로"(삼상18:26)란 말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and the days were not expired(KJV).
이해를 돕기 위해 쉽고 익숙한 영어 표현을 보겠습니다.
The day was expired. 그 날(하루)이 끝났다.
The year was expired. 그 해가 다 지났다.
그럼 성경 본문에서 and the days were not expired(KJV)란 말이 무엇인지 쉽게 감이 잡힐 것입니다.
아직 여러 날(몇 일)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약속을 잡았는데 그 약속한 날이 지나가지 않고 남았다는 것이지요.
계약을 했다면 계약한 날까지 여러 날들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음식물에 "유효기간"이란 말이 expiration date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게 딸을 주어 사위로 삼기로 약속했는데 조건으로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개를 요구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요구, 제안을 듣고 차일피일 미루다 날들을 다 "끝내 버린 것"(expired)이 아니라 곧 바로 나가서 200명의 포피를 구해왔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그 날 당장 구해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 여유를 주었기 때문에 "몇 날(일)이 남았는데..."란 표현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요구 조건을 듣고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유효 기간("날들이 차지 아니하였으므로")이남아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200개를 구해 왔던 것입니다.
한국어 성경에서 직역을 해서 "날들이 차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해서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날들이 끝나지(지나지) 않았으므로"라고 하는 것이 약간 더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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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창3:5),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창3:22)
질문.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창3:5),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창3:22)란 말씀에서 신들과 우리 중의 하나가 누구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신들은 천사들을 말하고 "우리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3:5)
개역 성경은 이 구절에서 사탄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되어 있어서 설교자들 중에 마귀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듯이 사람에게 하나님과 같이 될 것처럼 교만을 부추겼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원죄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이란 설명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잘못된 성경에서 나온 잘못된 해석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성경 본문을 잘 보십시오.
마귀는 여자에게 말할 때 "네가.."라고 하지 않고 "너희가"라고 말했습니다.
여자에게 말하면서 "너희가...너희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여자가 아니라 아담이었습니다.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란 말은 천사들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신들은 거짓 신들, 우상을 제외하면 천사들을 말합니다.
"너희는 신들이라..."(시82:6)고 말할 때 신들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신들입니다.
사탄은 너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1. 너희의 눈이 열리고...true.
2.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false
3.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알게 되며...true
4. 절대 죽지 아니하리라---false 사탄이 한 말은 참과 거짓이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가지를 말씀하셨고 사탄은 여러 가지를 말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담은 사탄에게 속지 않았습니다.
[또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딤전 2:14).
아담의 죄는 신들과 같이 되고 싶었다거나 혹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교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먹지 말라"고 한 주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주님이 아담에게 준 명령(창2:17)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이 한 가지였고 아담은 그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창3:11, 17).
"...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네가 먹었느냐? 하시니"(창3:11)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는 그것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하고 말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 ..."(창3:17).
아담의 죄는 교만이 아니라 "불순종"입니다. [한 사람(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롬5:19)
자, 22절을 보겠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창3:22).
주님은 남자(아담)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아담)이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중의 하나"란 말은 천사들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라고 하실 때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합니다(창1:26, 3:22, 11:7, 사6:8).
아담은 선악을 알게 나무의 실과에서 나는 것을 먹기 전에는 '선악'을 알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 비로소 그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독자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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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는 위험합니까?
질문.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는 위험합니까?
답변. 가장 안전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완전한 믿음의 반석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는 유일한 성경을 믿는 신앙인데 이는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그리스도와 정확히 같은 신앙입니다.
크리스천들 중에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킹 제임스 성경의 완전성, 순수성, 절대성을 강조하면 정색을 하거나 불편해 하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개역 또는 개역 개정, 표준역, 현대인의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든 성경을 완전하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강단에서 목사님은 성경, 성경을 외친다 해도 그 자신 역시 자신이 말하는 성경이 어느 성경인지는 특정하지 않고 막연하게 그냥 성경을 외칩니다.
요즘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목사들 중에서도 "킹 제임스 성경은 좋지만 유일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위험하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 다원주의와 마찬가지로 성경 다원주의, 혼합주의자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교회, 아는 분들 중에 이런 목회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가장한 거짓 일꾼입니다.
이들이 흔히 들이 대는 변명 중에 하나가 1800-1900년대의 위대한 설교자들, 부흥사들, 선교사들의 책에 흠정역 외에 R.V(개역) 성경으로 보충 설명을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라킨의 세대적 진리는 킹 제임스 성경으로 진리를 전하고 있지만 중간에 세대, 세상이란 말을 설명하면서 개역 성경을 인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토레이 목사의 책에 몇 구절에 불과하지만 R.V 번역으로 자기주장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예전에 웟치만 니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분은 성경 본문과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 다를 때면 어김없이 자기주장대로 번역된 역본을 찾아내 설교했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 프란시스 쉐퍼의 책 전집을 사서 읽은 적이 있는데 중간 중간에 어김없이 자신의 견해로 성경을 고치는 일을 반복하곤 했습니다. 이런 분들은 위대한 목사요, 구령자인지 몰라도 이런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오류입니다.
이럴 때 성경 신자들이 할 일은 그런 부분은 그냥 무시하고 읽으면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더하거나 빼거나 바꾸어서 읽는 그 부분은 100% 그 사람의 오류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택한 바른 성경으로 설교하거나 주석하면 될 일인데 손에는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설교하거나 책을 쓸 때는 다른 성경 역본을 가지고 와서 고치는 일을 합니다. 바른 성경으로 선포하고 강론한 부분 외에는 어떤 멋진 말이어도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완전한 주의 말씀이 있다면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는 것 자체가 오류입니다.
전에 누가누가 그러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주장은 성경이 아닌 사람을 기준이요 푯대요 반석을 삼는 것으로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필자의 주변에 킹 제임스 성경을 공격하는 어리석은 목사들 중에 은근슬쩍 위대한 신앙 선배들이 저지른 실수와 오류를 자신의 불신과 오류를 정당화하는데 사용하려고 애쓰는 이들을 자주 봅니다. 원어로는 이런 뜻도 있다,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성경 말씀을 고치는 이들은 가장 간교한 자들입니다.
킹제임스 유일주의의 위험성이니 어쩌니 하는 이들을 조심하십시오.
킹제임스 성경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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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인 -------- 댓글쓰기
음...처음부터 자신이 택한 바른 성경이라.....음....처음부터 자신이 택한 바른 성경이 있을 수 있나??? 킹제임스는 바른 성경으로 선택되어진 것인가??? 지금까지의 성경 중에 가장 원어에 가깝게 번역된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아직 원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성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음...아무튼 킹제임스를 아까고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다른 번역본은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조심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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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뭘 그리 혼란의 창시자의 영에 사로 잡혀 중얼거리시는지요. 많은 그리스도 중에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시듯, 많은 영들 중에 한 분 성령이 계시듯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번역본은 안된다라고 하는 것은 조심스럽네요."라는 것 보다는 "다른 번역본도 다 괜찮다네요."가 훨씬 더 웃깁니다. 동성애 역본인 Queen James Bible, 여호와의 증인들의 역본인 신세계 역본도 괜찮다는 생각이 훨씬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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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인 -------------- 댓글쓰기
네 맞습니다. 킹제임스가 저도 좋아요..... 다른 번역본은 다 괜찮다네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원어가 번역된 성경을 가진 나라가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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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신자들 중에 원어에 대한 동경이 자연스럽지만 한 편으로는 망상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는 이미 완벽하게 분해되어 있습니다. 어휘마다 번호가 다 붙여져 어디에 사용되었는지까지 다 정리된 상태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가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 정리가 끝난 상태란 말이지요.
킹 제임스 성경은 원어 해석에 대한 최종 기준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 자체가 일부 학자들이 만든 원어 사전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원어 단어들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고로 누구든지 원어를 보고 번역하면 킹제임스 성경과 정확히 같은 성경이 나와야 합니다. 역으로 킹제임스 성경으로 번역하면 정확히 원어 성경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성경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에 비교적 또는 가장 가까운 성경이 아니라 원어 성경과 동등합니다. 그럼 문제는 간단히 풀리지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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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 댓글쓰기
죄송합니다.. 너무 무지해서 제가 보고 있는 성경이 킹 제임스 흠정역(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를 보고 있는데 (동성애 역본인 Queen James Bible,) 같은 성경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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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참으로 어이가 없네요.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과 최근에 동성애자들이 만든 Queen James Bible이 같으냐고 하니 장난을 치는 듯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한 우리 말 성경입니다. 읽고 믿음으로 공부하면 됩니다.
그럼,
기영렬 ------------ 댓글쓰기
웹서핑을 하다가 예전에 제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댓글에 올립니다.
제목 :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이 보존한 유일한 참 성경인가? <뉴스코리아 기고글>
내가 읽고 있는 성경에 과연 오류가 없는가? 크리스천이라면 한번쯤 해 보았을 질문이다. 대개의 크리스천들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전혀 오류가 없음을 믿는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왜 그렇게 많은 번역본들이 존재하는가?” 이다. 영어만 해도 30여 가지가 되고 한글만 해도 10여 가지의 번역본이 있다. 그리고 각 번역본은 서로서로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가 성경이 오류가 없고 영감 되었다고 믿는 것은 성경원본에 제한한다. 그렇다고 사본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역본이 전혀 쓸모없거나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나름대로 충분히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큰 문제가 없도록 사본과 번역본들을 보존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역본 가운데 전혀 오류가 없이 하나님이 완벽하게 보존하신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1998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말씀보존학회(이송호)의 주장이다. 그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1611년)만이 ‘하나님이 유일하게 보전한 단 하나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필자도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하게 보존된 단 하나의 오류도 없는 말씀이라고 주장할 때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킹제임스성경 외의 모든 성경은 오류가 심각하고 마귀에 의해 왜곡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모든 교회는 빨리 성경을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바꾸어야 한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성경을 읽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하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본비평(사본을 통해 원본을 추적하는 학문)은 모두 중단해야 한다. 완전히 보존된 말씀이 있는데 무슨 사본학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심각한 죄인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그래도 혹시 킹제임스 성경이 그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보존하신 유일한 성경일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단호히 답할 수 있다. ‘아니다!’ 킹제임스성경은 번역본으로서 매우 훌륭한 번역임에 이의가 없다. 그러나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1611년에 영국에서 번역된 영어 성경이다. 그 이전에는 제네바 성경이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는 그간 존재하던 영어 성경이 원문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54명의 번역가들을 중심으로 5년간 성경을 번역하게 했다. 이들은 당시 공인성경으로 받아들여졌던 헬라어 성경을 토대로 그 당시 존재하던 번역본과 가장 오래된 사본을 참조하여 번역했다. 문제는 그 공인성경(Textus Receptus)에 있다. 그렇다면 텍스투스리셉투스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최초 사본의 탄생>
현재 원래 저자들이 기록한 성경 원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종이와 잉크가 발달되지 못해서 성경의 각 책들은 대부분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에 기록되어서 교회에 회람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파손되기 쉬운 것이었으므로, 신자들은 그것이 낡아지기 전에 개인적인 소장을 목적으로 다른 종이에 손으로 베껴두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단순히 개인적으로 소장한다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영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많은 사본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사본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본은 약 5500종류이며 이것들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1450년 인쇄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보존되었다.

<히메네스의 성경: 최초의 헬라어 인쇄본>
그러나 1450년 쿠텐베르그의 인쇄술이 발명됨으로 사본 시대는 거의 막을 내리고 인쇄된 성경을 만들려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1514년에 스페인의 주교 히메네스(1437-1517)가 최초로 여러 번역 대조성서라는 것을 발행했다. 그러나 교황의 재가를 얻은 것은 1520년이었고, 1522년 이후에 최초로 공개되었다. 최초의 헬라어성경 인쇄본이었다.

<에라스무스 성경>
그러나 1522년까지 히메네스 성경이 발표되지 않음으로 그 틈을 타서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성경을 세상에 선보인다. 스위스 바젤의 유명한 출판업자였던 요한 프로벤이 스페인에서 진행 중인 여러 번역 헬라어성경(polyglotbible) 소식을 듣자 그것이 세상에 나오기 전 선수를 쳤다. 그는 에라스무스를 설득했고, 상당한 보수를 약속받은 에라스무스는 1515년 6월에 다시 바젤에 가서 조판을 위해 신약성경 사본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신약 성경 전체를 담고 있는 사본은 불행히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몇 개의 사본을 정리해서 성경을 완성한 후 인쇄소에 넘겼다.

<라틴어를 헬라어로>
메츠거 박사에 의하면 에라스무스가 이용한 이 사본은 바젤대학 도서관에 있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두개의 사본들이었는데, 모두 12세기의 것들이었다라고 주장한다. 더 심각한 것은 계시록의 경우는 오직 한 개밖에 없었는데다가 마지막 한 장이 떨어져 나가, 여섯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 성경을 대본으로 그 부분을 다시 헬라어로 재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부분은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헬라어 사본과도 일치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텍스투스 리셉투스(킹제임스 성경의 원본)에 오늘까지 그대로 실려 있다.
에라스무스는 그 마지막 부분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부분도 역시 라틴 불가타 번역을 대본으로 수정을 가했고, 인쇄소에 보내진 지 불과 일 년도 못되어 1516년 3월1일에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거기에는 수백의 오류가 발견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계속해서 수정판이 등장했는데, 초판 1516년, 제2판 1519년, 제3판 1522년, 제4판이 1527년 그리고 제5판이 히메네스의 것을 비교하여 약90여 군데를 수정한 후 1555년 출판되었다. 그의 성경은 모두 5-6개의 사본을 토대로 만들어진 많은 오류를 포함한 성경이었다.

<스테파누스 성경: 표준 헬라어 성경으로>
에라스무스 성경은 비공식적으로 베니스, 스트라스부르크, 바젤, 파리 등에서 30여 종류나 출판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에라스무스의 것을 몇 군데 고친 것 뿐, 근본적으로 저급한 형태의 헬라어 성경을 재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파리의 유명한 출판업자 스테파누스가 파리에서 세 번 제네바에서 한번 헬라어 성경을 출판했다. 그의 초판과 둘째 판의 본문은 히메네스의 것과 에라스무스의 것을 혼합했다. 3판은 에라스무스의 4,5판 본문을 거의 따르고 있었다. 이 스테파누스의 제3판이 영국에서 헬라성경 표준으로 인정된 것이다.

<베자 성경: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고착>
제네바에서 칼빈의 친구이며 후계자였던 종교개혁자 베자(1519-1605)는 1565년과 1604년 사이에 적어도 9판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그가 죽은 1611년에 10판이 출판되었다. 그가 출판한 헬라어 본문은 스테파느스의 제4판(1551년)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양질의 베자사본과 클라로몬타나 사본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것을 주 만 달뿐 본문을 수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때까지 공인으로 받아온 전통본문과 너무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번역본은 텍스투스 리셉투스를 고착시켰다. 1611년 영어 흠정역 번역자들은 이 베자 사본을 원본으로 사용해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엘제비어 형제의 Textus Receptus, 1633년>
이후 1624년 라이덴에 인쇄업자 엘제비어 형제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는데 그것의 본문은 주로 베자의 1565년 판을 취한 것이었다. 그 후 1633년에 제 2판을 찍으면서 서문에 이것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수락된 본문(Textus Receptus) ‘텍스투스 리셉투스’ 라는 말을 적었다. 이렇게 해서 스테파누스, 베자, 엘제비어가 출판한 여러 판의 헬라어 본문 신약 성경이 오늘날 킹제임스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텍스투스리셉투스’의 칭호를 갖게 된 것이다.

<요약>
킹제임스 성경의 근간이 된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문제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텍스투스레셉투스는, 사본들 중후기에 만들어진 소문자 사본 5,6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주로 비잔틴 형의 본문이다. 비잔틴 형의 본문은 4세기 이후부터 유행한 것이며, 2세기, 3세기의 파피루스나 대문자 사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사본은 인위적인 많은 변개(變改)가 많이 발견되는 소위 훼손된(corrupted) 사본들이다.

2)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에라스무스가 라틴 불가타를 역(逆)으로 번역한 부분(계시록 마지막 6절)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임의로 불가타와 비교하면서 수정한 부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3) 성경에서 ‘절 없음’등은 텍스투스 리셉투스가 인위적으로 첨가된 부분이 확인되어 원래 더 권위 있는 사본에 맞게 고친 것이다. 절 없음은 이전에 이미 구분된 절 때문에 절 없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5)아무리 잘된 번역도 100% 정확할 수는 없는 법이어서, 어느 하나만이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요컨대, 킹제임스 성경이 만들어 질 때는 가장 권위 있는 원어 성경은 ‘텍스투스리셉투스’ 밖에 없었다. 그 후에 많은 사본들이 발견되고, 본문 비평학이 발달하여, 원본에 보다 가까운 본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텍스투스 레셉투스 지지자들(킹제임스 만이 참 성경)이 텍스투스 레셉투스만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이 보존한 유일한 성경이라는 주장은 무리한 것이며 우려할만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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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Yoon
KJV가 뛰어난 성경이긴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완전하지 않다는 말을 길게 쓰셨군요. 그럼 완전한 성경은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최초의 원본 외에는 완전하지 않다는 믿음이 한 가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되어 영원히 완전하다는 믿음이 하나입니다. 저는 영원한 보존과 완전성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위에 신문에 기고한 글은 아주 부정확한 지식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소위 말하는 에라스무스, 스테파누스, 엘지비어 등이 편집해서 출간한 T.R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고 초대 교회에서부터 면면히 내려온 원문들은 물론이요 아람어, 라틴어를 비롯한 모든 역본들과 성구집, 설교집까지 다 수집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고로 T.R의 문제점을 아무리 논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T.R이 아니라 모든 사본들, 역본들을 다 종합해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KJV 성경은 T.R보다 훨씬 우수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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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댓글쓰기
아멘.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시12:6~7,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서대로부터 영원히 보존 하시리이다.
막13:31,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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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연 -------- 댓글쓰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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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불변하는 것은 무엇이지요? (히6:18절)
질문. 히브리서 6:18 절에서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불변하는 것은 무엇이지요? 복주고 번성케 하는 것 두 가지를 말씀하나요?
-2013년 6월 21일 어느 분이 방명록에 질문하신 것을 누가 다시 질문하셔서 그대로 복사해서 이리 옮겼습니다.

히브리서 6:13절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신을 두고 맹세로 확증된 것입니다(6:14-16). 아브라함은 약속의 불변함을 보여 준 예입니다.
2.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은 불변한다(6:17). 이 역시 맹세로써 확증하신 일입니다.
그럼 6:18절에서 두 가지 불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모두 성경 속에 있습니다.
본문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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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열매인가? 첫 열매들인가?
첫 열매인가? 첫 열매들인가?(firstfruit vs firstfruits)

firstfruits란 단어는 현대 영어에서는 단 복수 동형입니다. 요즘 영어 사전을 펼쳐보면 firstfruit이란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first fruit, first-fruit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첫 열매란 뜻의 firstfruit/s 는 총 32번이나 나오는데 그 중 두 번은 firstfruit이고 30번은 firstfruits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는 단복수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헬라어 단어(aparche-Strong 536)로는 단, 복수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봅시다. .
[첫 열매(firstfruit)가 거룩하면 덩어리도 거룩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들도 그러하니라.](롬11:16). [또 네가 네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첫 열매(firstfruit)와 네 처음 깎은 양털을 그에게 줄 것이니](신18:4).
동일한 히브리어, 헬라어이지만 구약에 한 번, 신약에 한 번 firstfruit(단수형)이 나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firstfruit(첫열매)과 firstfruits(첫열매들)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경 신자라면 사람들이 만든 영어 사전이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말하는 바 그 말씀에 주의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학자, 신학자, 교수, 성경 번역자, 목사 등 그 누가 뭐라고 말하든 성경 기록이 우선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firstfruits를 단수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 말씀 전체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자, 몇 구절을 봅시다. 자. 성경이 스스로 말씀을 보여 줍니다.
[네가 밭에 뿌린바 네 수고의 첫 열매(firstfruits)의 수확절을 지키라....](출23:16).
[너는 네 땅의 첫 열매(firstfruits)의 처음 것을 {주} 네 [하나님]의 집에 가져갈지니라. ...](출23:19).
첫 열매는 한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확 전에 처음 맺힌 열매들을 말합니다. 당연히 복수형입니다.
첫 열매는 땅에서 얻은 처음 것입니다. "첫 열매의 처음 것'이라고 하니까 첫 열매는 한 개가 아닌 복수형일 수밖에 없습니다. 첫 열매란 집합(단체 개념의 수확물)에서 처음 난 것입니다. 한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열매(firstfruits)에 대한 구약의 관련 구절들은 한결같이 복수형이며 '첫 열매들'입니다. 처음 난 한 개가 아니라 수확 이전에 처음 나온 열매들(수확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
[너는 칠칠절 곧 밀 수확의 첫 열매 명절을 지키고 한 해가 끝날 때에 수장절을 지킬지니라.](출34:22). 첫 열매 명절-첫 열매, 수확, 이삭줍기에서 첫 열매들을 수확해서 드리는 주께 드리는 봉헌물이 있고 그것을 기념하는 명절이 있습니다. 출34:26, 레2:12,14.
첫 열매는 밭에서 처음 열매를 맺은 한 개의 열매가 아니라 첫 수확물 전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 너희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레 23:10).
첫 열매 "한단"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첫 열매는 처음 한 개(단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 즉 수확물을 말하는 복수형입니다. 첫 열매의 빵이라고 하면 빵 한 개가 아니라 보리빵 스무개를 가리킵니다(왕하4: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열매는 단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첫 열매"이신 그분은 혼자가 아니라 "첫 열매 한 단"으로 수확물의 첫 열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첫 열매인가? 첫 열매들인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firstfruits.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고전15:23). firstfruits.
그리스도는 한 분이신데 성경은 왜 firstfruits라고 복수형을 사용했을까? 현대 영어로 해석하면 단 복수 동형인고로 여기서는 간단히 단수로 번역하거나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firstfruit(단수), firstfruits(복수)로 구분하고 있으므로 firstfruits를 단수라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스스로 구분해 둔 것을 우리는 임의로 바꾸거나 합칠 수 없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성령의 조명,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첫 열매들이란 처음에 맺히는 한 개의 열매가 아니라 처음에 맺힌 수확물이기 때문이다.
고전15:20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시기에 함께 부활한 자들이 있는 고로 첫 열매들(firstfruits)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주님 홀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이 함께 부활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첫 열매 수확물의 개념입니다.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그분의 부활 뒤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27:52,53).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firstfruit이 아니라 firstfruits이 사용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첫 열매들(수확물)로서 구약 성도들이 함께 부활했습니다. 주 예수님 한 분만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고전15:23에서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들로 기록된 것은 그분이 여럿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속한 몸들(열매들)이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5:23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신약 성도들의 부활입니다. 고로 첫 열매들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의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전 15:20에 따라 firstfruits이 단수로써 한 명(한 개)라면 고전15:23에서 동일한 firstfruits 역시 한 명(한 개)부활하고 휴거되는 사람 역시 한 명이란 결론이 됩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계시록 14:4을 보자. 대환란 성도들이 나오는데 이들 역시 첫 열매들이다.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니 그들은 처녀들이니라. 이들은 [어린양]께서 가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며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이더라.](계14:4). firstfruits(첫열매)가 한 명이 아니라 무려 144,000명이나 됩니다. 환란 성도들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로서 첫 열매들입니다. 이들은 이삭줍기에 해당합니다.
첫 열매들 -구약 성도들, 신약 성도들, 환란 성도들이 모두 첫 열매들입니다.
두 번 째, 세 번 째 열매가 아닙니다. 모두 다 죽음으로부터 처음 나신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아니라 첫 열매들이라 불리시는 것은 그분은 십자가 사건 때나 휴거 때나 대환란 때나 언제나 홀로가 아닌 "자신의 성도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가야 지방의 첫 열매(firstfruits)는 한 명인가? 여럿인가?
-아가야 지방의 쳣 열매는 여럿(복수)이다.
두 구절을 보자. 로마서 16:5, 고린도전서 16:15입니다.
[또한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인사하라. 내가 매우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가야에서 그리스도께 첫 열매가 된 자니라.](롬 16:5). [Likewise greet the church that is in their house. Salute my well-beloved Epaenetus, who is the firstfruits of Achaia unto Christ.](롬16:5). 에배네도 한 명을 일컬어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말함으로 이곳에 사용된 firstfruits은 단수란 주장은 "who is..." 에서 is(단수 동사)에서 판단한 것입니다. 에배네도는 아가야의 첫 열매가 아나라 쳣 열매들입니다. 그는 아가야 지방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첫 열매들"에 속한 한 사람입니다. 에바네도가 주어이기 떄문에 복수 동사 are가 아니라 단수 동사 is가 쓰인 것은 당연합니다. 뒤에 보어가 복수형(firstfruits)인데 이는 에베네도 외에도 아가야 지방에는 다른 여러 사람의 첫 열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바나와 그의 집이 바로 그들이다.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에서 두 번 째 열매인가?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인 것과 또 그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전념해 온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고전 6:15).
[I beseech you, brethren, (ye know the house of Stephanas, that it is the firstfruits of Achaia, and that they have addicted themselves to the ministry of the saints,)] (고전 16:15). 스데바나의 집과 그들이 아가야에서 첫 열매입니다. 스데바나 한 명이 아니라 스데바나의 집과 그들(they)입니다. 그들은 아가야에서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firstfruits)가 단수 즉 한 명이 아님을 다 보여 줍니다. 첫 열매가 에베네도와 스데바나의 집(그들-they) 입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두 사람 이상입니다. 첫 열매가 단수라면 에베네도나 스데바나의 집중에 하나는 첫 열매가 아니라 두 번 째 열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첫 열매(firstfruits)는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복수형입니다.
결론.
고전15:20을 읽고서 예수님이 첫 열매(firstsfruits)라고 기록된 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가 아닙니다. 첫 열매들은 복수형이고 그 의미는 복수입니다. 아가야 지방에서 첫 열매(들)는 에베네도와 스데바나의 집입니다. firstfruits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입니다. 단수(형)는 firstfruit입니다. 이것은 현대 영어 사전이 아닌 킹제임스 성경 영어의 용법입니다.
1. Stephanas is the firstfruits of Achaia(고전16:15).
2. Epaenetus is the firstfruits of Achaia unto Christ(롬16:5).
3. Christ is the firstfruits of them that slept(고전15:20).
4. These(144,000 saints in Great tribulation) are they which follow the Lamb whithersoever he goeth. These were redeemed from among men, being the firstfruits unto God and to the Lamb.(계14:4).
동사의 수는 주어에 따라 결정된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firstfruits는 주어가 아니라 보어입니다.
영문법에서 주어와 보어의 수는 일치시키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지 않다면(1,2,3번의 예)그 보어는 군집명사 또는 집합 명사입니다. 4번은 정확히 수의 일치가 이루어졌습니다. fristfruits는 바로 집합 명사입니다. is란 단수 동사를 들어서 뒤에 있는 보어의 수를 단수라고 단정하고 가르치는 것은 무지요, 본질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기본 영문법 ***주격 보어와 수의 일치***
한국의 중고등 학교에서 기계적으로 수의 일치에 대해서만 문법 교육을 받은 이들은 is(단수 동사) 하나만 보고 뒤에 있는 보어의 수를 단수로 판단하고 규정해 버립니다. 주어와 주격 보어(또는 목적어와 목적격 보어)의 수의 일치란 문법규칙(통사론적 규칙)이 아니라 의미론적으로 앞뒤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논리적 일치)
자, 일상적인 간단한 예문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Though colors, trends and expectations of Valentine's Day might change over time, one thing stays the same. The most popular gift for many to give or receive on the holiday is still flowers.
동사는 is 이지만 보어는 flowers입니다.
Flowers are the most common gift. But as the popularity of flowers keeps growing, their price also surges around Teacher’s Day. The report also said that bouquets are still a popular gift despite their high price.
동사는 are이지만 보어는 gift입니다.
Flowers, chocolate and jewelry top the gift-giving lists of most experts this year, in that order. Spending on those gifts, however, is broken down differently. Jewelry hauls in the most revenue for the special day, but flowers are still the more popular gift by far.
동사는 are이지만 보어는 gift입니다.
동사가 is(단수)라 해서 뒤에 있는 보어는 단수나 복수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1. The only thing we need now is some new curtains.
2. The most popular gift is flowers. (O) The most popular gift is a flower. (?)
3.. My only hope for the future is my children.
4. Their principal crop is potatoes.
참고 서적:
Randolph Quirk et al, A Comprehensive Grammar of The English Language, Longman(CGEL), p.767
The Cambridge Grammar of the English Languag. p512.
Michael Swan, Practical English Usage, 제2판, p.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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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킹제임스 어휘(firstfruit/firstfruits)로나 교리적으로나 그 무엇으로 보아도 첫 열매란 "firstfruits"는 복수임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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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것이 오면"(고전13:10)이란 말씀은 신약 성경의 완성을 말합니까?
질문. "완전한 것이 오면"(고전13:10)이란 말씀은 신약 성경의 완성을 말합니까?
답변. 아닙니다. 주의 재림을 통해 이 땅에 "하늘의 왕국이 오면"이란 말입니다.
소위 근본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10절에서 "완전한 것이 오면..."에서 "완전한 것"은 신약 성경의 완성이라고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이는 오류입니다. 저도 예전에 배운 대로 알고 그렇게 말하고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완전한 것이 맞습니다.
일단 본문을 보십시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대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 언어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있다 해도 사라지리라.](고전 13:8)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대언하나](고전13:9)
[완전한 것이 오면 그때에는 부분적인 것이 없어지리라.](고전13:10)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앞으로 없어질 것들이 무엇인지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8,10절은 "앞으로 없어질 것들"에 관한 대언입니다.
8절에서 "대언, 타 언어들, 지식"은 없어지고 그치고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9절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대언한다고 말합니다.
10절에서 완전한 것이 오면 그 때에는 "부분적인 것"(대언, 지식)은 없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정해야 할 것은 "완전한 것"과 "그 때"입니다.
12절을 보면 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고전13:12)
12절에 "지금은...그 때에는..."에는 두 번 반복됩니다. 지금은 교회 시대입니다. 그 때에는 언제입니까? 그 때가 언제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아는" 그 때입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된 때가 전혀 아닙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하늘의 왕국이 세워진 때입니다.
1.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왕국의 세워지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 집니다. 지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던 지식이 그 때에 사라집니다.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사11:9).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리로다.](합 2:14).

2. 주님께서 순수한 언어를 돌려주심으로 타 언어는 사라집니다.
[그때에 내가 그 백성에게 순수한 말을 돌려주어 그들이 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한마음으로 그를 섬기게 하리니](습3:9).

3. 그 때에 대언을 했다가는 죽임을 당합니다(슥13:3). 대언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여전히 대언을 하면 ...그가 대언할 때에 그를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찌르리라.](슥13:3).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면서 성령의 은사로 주장하는 타언어(방언)의 은사는 비성경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말씀을 잘못 인용해서 사용하는 것 역시 동일한 오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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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재 -------- 댓글쓰기
저도 이 구절을 얼마전 묵상하면서 동일하게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다르지 않게 해석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귀한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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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댓글쓰기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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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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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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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교회에는 왜 십자가가 없나요?
질문. 목사님 교회에는 왜 십자가가 없나요?
답변. 십자가는 사형 도구이며 모든 이교도들에게 있는 문양이지 그리스도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 문양이나 형상이 성도들의 믿음에 유익한 것이라면 주님께서 또는 사도들이 그런 것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라거나 집이나 교회에 만들어서 세울 것을 명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명령은 고사하고 암시조차 없습니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이교도의 물결이 로마 캐톨릭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어디에서도 십자가 형상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걸린 십자가는 누구에게 어떤 믿음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매우 그럴듯하지만 거짓말입니다.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십자가를 볼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까? 십자가 반지, 십자가 목걸이, 몸에 십자가 문신을 해 다닌다고 해도 그것을 보는 것으로 예수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중에 널려 있는 장대를 본다고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 십자가를 볼 때 저는 생각해요. 저는 생각이 납니다. ....
만약 당신이 십자가를 보고 생각나는 예수라면 그 예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거짓 예수입니다. 사람이 십자가를 볼 때 주 예수님이 생각나고 생각이 되어진다면 나는 몇 백, 천 개의 십자가로 교회와 집안, 차량 안에 아예 도배를 해 두겠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손 등이나 이마에 아니면 몸의 곳곳에 십자가로 문신을 새겨 두라고 권면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보는 것으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걷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5:7)
오늘날 교회 다마 십자가 형상이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 건물 밖은 물론이고 안에도 있고 설교단에도 헌금함에도 헌금 봉투에도 십자가 문양이 있습니다.
어디서나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보고 믿음 생긴 사람이 있습니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매일, 매주 보아도 그걸로 믿음 생겼다는 이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아무리 쳐다보아도 예수님은 그것을 본 사람 마음 안에 생각 속에 현현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십자가 문양, 모양, 형상으로 우리 안에 예수님을 형성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십자가는 놋 뱀을 매단 장대처럼 예수님을 못 박아 달아 올린 나무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믿음을 자라게 하려 한다면 그는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것이지(롬10:17) 사람들이 만든 십자가를 보는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은 그럴 듯한 말에 속아서 비성경적인 일들을 선한 의도와 목적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버리고 척결해야 할 것들을 붙들기도 합니다. 이는 가증스럽고 헛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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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 2:3의 "떨어져 나간다."는 말은 교회의 휴거를 말하나요?
질문. 살후 2:3의 "떨어져 나간다."는 말은 교회의 휴거를 말하나요?
답변. 전혀 아닙니다. 문맥을 파악하지 못한 근본주의자들 중에 환란 통과론을 방어하기 위해 본문을 왜곡해서 "떨어져 나간다."를 휴거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fall away의 의미.
fall이란 단어의 '떨어진다.'는 의미는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떨어진다, 넘어진다,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fall away의 의미는 교회의 휴거나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적 예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13절, [바위 위에 있는 것들은 들을 때에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나 뿌리가 없어 잠시 믿다가 시험의 때에 "떨어져 나가는 자들"(fall away)이요,] (눅 8:13).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아들인 자들 중에 믿다가 "떨어져 나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fall away입니다.
히브리서 6:6절,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히6:6). 히브리서 6장에서는 누군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fall away)이라고 말할 때 떨어져 나간다는 의미는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배교의 의미입니다.
베드로전서 1:24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 풀은 마르고 그것의 꽃은 떨어지되(falleth away)](벧전1:24).꽃이 떨어지는 것이 fall away입니다.
성경 스스로 단어의 용례와 의미를 정의하는 고로 우리는 별로 어려움 없이 진리를 배우고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을 보십시오.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falling away)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that day-주의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살후 2:3).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날'과 '그 날'(that day)에 대해서 말합니다.
3절의 '그 날'은 2절의 '그리스도의 날'이 아닙니다. 그 날은 주님의 지상 재림이고 그리스도의 날은 주님의 공중 재림 즉 교회가 휴거하는 날입니다. 성경이 두 개의 날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 구절은 너무나 간단하고 쉽게 풀립니다.
3절의 그 날을 2절의 그리스도의 날인 줄 알고 해석하는 이들이 환란 통과론자들의 주장입니다.
환란 통과론자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1절, 그리스도의 오심,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임-교회의 휴거,
2절. 그리스도의 날....휴거 되는 날, 공중 재림
3절.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남, 죄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남. 그리고 그 날(that day)이 이른다.
"그 날"은 1,2절에 나온 '그리스도의 날'이다. 고로 환란 통과가 맞다.
이런 주장에 당황한 환란 전 휴거론자들의 주장, 반론이 이것입니다.
3절의 falling away first(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고)는 교회의 휴거가 먼저 일어난다는 뜻이다. fall away는 배교란 의미가 아니라 휴거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휴거가 있고 죄의 사람(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면 그 날(휴거)가 일어난다는 해석이 되어 더욱 말이 안 되는 모순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falling away란 구절 자체가 휴거를 의미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자체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falling away는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바른 해석은 이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을 보십시오.
1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살후2:1)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에 관하여 간청한 것이 아니라 "말미암아" 간청했습니다. 주의 공중 재림과 성도의 휴거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말미암아"(by) 간청한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 설교자들이 단어를 바꾸어서 "말미암아"를 "관하여"(concerning)으로 바꾸어서 읽고 주해함으로 오류를 범합니다.
2절, [너희는 영으로나 말로나 혹은 우리에게서 왔다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살후2:2).
"그리스도의 날"은 주의 공중 재림의 날, 휴거의 날입니다(고전1:8, 빌1:6, 2:16). '그리스도의 날'은 복된 소망의 날, 영광스런 날입니다. 문제는 초신자들로 구성된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날과 '주의 날'(그 날)을 구분하지 못하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지만 바울은 그곳에서 3주도 있지 못하고 떠났고 그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오해, 무지로 흔들리고 불안해하는 형제들에게 준 답변,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불안해하는 "그 날"에 대한 바른 진리의 지식을 알려 주면 됩니다.
3절.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살후2:3).
바울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법으로도 속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임합니다. 그러나 '그 날' 즉 주의 재림, 지상 재림의 날은 언제 어떻게 임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다니엘의 70이레 마지막 한 주) 그 날(주의 재림)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주의 지상 재림 전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징조는 배교(떨어져 나가는 일)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올리브 나무의 원가지들이 올리브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떨어져 나가는 것이지 하늘로 들림을 받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들림을 받아 위로 올라가는 것은 fall 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어디서 무엇으로 부터 떨어져 나갑니까?
1.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다가 환란이 닥치면 떨어져 나가는 자들이 누가복음 8:13절에 나옵니다.
2.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히6:5) 떨어져 나가면 새롭게 하여 회개함이 불가능합니다(히6:6).
우리는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올리브 나무에서 떨어져 나갔듯이 마지막 때에 누군가 떨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초림 때 올리브 나무의 원가지들인 유대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꺾였고 재림 때 이방인들은 주님의 선하심에 거하지 아니함으로 잘려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을진대 그분께서 또한 너를 아끼지 아니하실까 조심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하심을 보라. 넘어진 자들에게는 엄하심이 있으나 네가 그분의 선하심에 거하면 너를 향하여는 선하심이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잘려 나가리라.](롬11:21-22). "그렇지 않으면 너도 잘려 나가리라."(롬11:22)는 말씀이 데살로니가후서 2:3에 나오는 falling away입니다.
이 땅의 지역 교회는 점점 세상과 연합함으로 배교합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라 불리는 마지막 교회를 주님께서 자신의 입에서 토해 내시는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계3:16). 주를 믿음으로 접붙여졌던 이방인들은 더 이상 주를 찾지 않음으로 그들은 잘려 나갑니다(롬11:22). 초림 때 잘렸던 원가지들(유대인들)은 다시 접붙임의 기회를 얻지만 이 때 잘려 나간 가지들(이방인들)은 다시 접붙여질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주의 몸 된 교회, 그분의 지체들은 죄의 사람이 이 땅에 자신을 드러내기 전(대환란 전)에 하늘로 들림을 받습니다.
살후 2:1-3절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날"과 "그 날"(주의 날)을 구분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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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20에 450년이란 연도 수는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 오류가 아닙니까?
질문. 사도행전 13:20에 450년이란 연도 수는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 오류가 아닙니까?
답변. 아닙니다. 이 부분은 다른 모든 역본에도 동일하게 450 년으로 동일합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거할 때에 그들을 높이시며 거기서 그들을 높으신 팔로 데리고 나오시고 광야에서 약 사십 년 동안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며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사 그들의 땅을 제비뽑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그 뒤에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 동안 그들에게 재판관들을 주셨느니라.(행13:17-20)
이 부분에서 450년이 오역이나 잘못 계산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 공동 번역, 표준역, 현대어 성경 모두 예외 없이 450년이라고 번역합니다. 흠정역에서 이 부분이 오역이라면 다른 성경도 다 오역입니다.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NIV, NLT, NASB, NRSV, NWT 등 여러분이 구할 수 있는 어떤 성경을 펴 보아도 이 부분은 모두 450년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역본들 간에도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부분입니다.
자, 그럼 사사기를 펴서 이 부분을 보고 계산해 보면 됩니다.
삿3:8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리사다임을 팔년 동안 섬기더니 (8년) 8
삿3:11 그 땅에 사십 년 동안 안식이 있더니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으니라(40년) 40
삿3:14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 동안 섬기니라.(18년) 18
삿3:30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의 손 밑에 굴복하매 .. 팔십 년 동안 안식이 있었더라. (80년) 80
삿4:3 그가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하였으므로. (20년) 20
삿5 31. 그 땅에 사십 년 동안 안식이 있었더라. (40년) 40
삿6 1. {주}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시니(7년) 7
삿8:28. 기드온 시대에 사십 년 동안 그 지역이 평온하였더라. (40년) 40
삿9:22. ¶ 아비멜렉이 삼 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더니(3년) 3
삿10:2. 이십삼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다가 죽어서 사밀에묻히니라. (23년)
23
삿10:3. 그 뒤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니라. (22년) 22
삿10:8. 그들이 그 해에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고 학대하되 곧 십팔 년 동안 요르단 ...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였고 (18년) 18
삿12 7. 입다가 육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였고 그때에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어서 길르앗의 도시들 중의 하나에 묻히니라. (6년) 6
삿12:9 ...그가 칠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니라. (7년) 7
삿12:11 입산 이후에는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을 재판하되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였더라. (10년) 10
삿12:14. 그에게 아들 마흔 명과 손자 서른 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어린 나귀 일흔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팔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니라. (8년) 8
삿13 1.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40년) 40
삿15 20. 블레셋 사람들의 시대에 그가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니라. (20년) 20
삼상 4:18 ... 그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였더라. (40) 40
총 년도 수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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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48절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자들"은 누구입니까?
질문. 사도행전 13:48절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자들"은 누구입니까?
답변.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다 믿더라.](행13:48).
이 구절을 읽고 구원 예정론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이도 있고, 아닌 것은 알겠는데 말문이 막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이방인들이 듣고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듣고 믿은 이방인들을 일컬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이 믿었다고 하면 예정론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누구를 정하셨습니까? 주 하나님은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도록 정하셨고 믿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도록 정하셨습니다.
"정해진 자들"이란 뜻, 개념은 신학자들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규정해 줍니다. 아래 구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셨느니라.](살전5:9). -주님은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도록 정하셨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회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너희에게 밝히 말하였기 때문이라.](행20:27).-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믿는 자들의 구원은 주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을 성경은 '정해진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작정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이라.](엡3:11).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자들"은 복음을 들었을 때 믿는 자들입니다.
캘빈주의자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반대로 이해함으로써 구원 예정론을 주장하는데 이는 성경으로 잘못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을 주시기로 계획하시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은 주님의 뜻과 계획을 선포하고 누구나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이해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는 자들을 바로 잡아 줄 수 있도록 무장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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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율법(명령)을 사람이 어떻게 다 지킵니까?
질문.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율법(명령)을 사람이 어떻게 다 지킵니까?
답변. 크리스천에게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래 내용을 읽어 보십시오.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의 수많은 명령들을 보면 질려 버리거나 지레 지킬 수 없다고 합니다. 자, 그럼 크리스천들이 율법(명령)들을 다 지키는 간단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1.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다.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걸으면 "우리 안에서(in us-NOT by us) 율법의 의가 성취됩니다. 율법의 의는 우리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성취됩니다. 이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2.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것도 빚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느니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한 것과 어떤 다른 명령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 안에 간략하게 들어 있느니라.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성경에는 십계명을 비롯해서 많은 다른 명령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을 순종하고 행함으로 율법을 완성하고 성취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계명을 지켰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그는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수많은 명령들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율법을 성취한 것입니다.

3. 이미 온 율법이 성취된 한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온 율법이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갈5:14).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 사랑,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셨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법이요 왕가의 법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이는 구원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지키는 명령이요 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백, 수천 종의 명령들이 이 한 말씀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과거형). 우리는 믿음으로 취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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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1절에 "이후로는...너희가 보리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질문. 요한복음 1:51절에 "이후로는...너희가 보리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답변.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주신 이 답변은 주님 자신을 증언하는 것으로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주님 자신이심을 밝힌 것입니다.
제자들은 야곱이 꿈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한 실체를 꿈이 아닌 현실에서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요1:51)
이 구절은 창세기 28:12절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가 꿈을 꾸었는데, 보라, 사다리가 땅 위에 세워졌고 그것의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더라. 또 보니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것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더라.](창28:12).
야곱이 본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록을 다 압니다. 천사들이 하늘과 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닥다리는 무엇입니까? 사닥다리는 사물이 아니라 메시야(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사닥다리가 누구인지를 나다나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요1:51)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예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야곱이 본 사닥다리의 실체가 신약에서 예수님 자신인데 야곱은 사닥다리를 보았고 제자들인 너희는 실체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땅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훗날 제자들은 하늘이 열리고 주님께서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영광중에 땅으로 오는 것을 봅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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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3의 “if so be”의 의미가 어떻게 되는지, 흠정역과 한킹의 차이를 설명해 주세요.
질문. 베드로전서 2:3의 “if so be”의 의미가 어떻게 되는지, 흠정역과 한킹의 차이를 설명해 주세요.
답변.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If so be ye have tasted that the Lord is gracious.](벧전2:3)
너희가 [주]께서 은혜로우신 것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흠정역)-조건절로 번역.
그렇게 함으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느니라. (한킹)- 결과절로 번역.
흠정역과 한킹이 상당히 다르게 번역된 것은 “so be”의 번역 때문입니다.
이는 구문을 조금 이해해야 합니다. If so be...의 구문은 “be 이하의 내용이 그러하다면(so be-그와 같다면)”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맞추어 그대로 직역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맛보았다면 주께서 은혜로우신 것을.” (3).
그럼 동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모하라”(desire)는 말씀은 2절에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는 것인데 3절과 같이 주께서 은혜로우신 것을 너희가 맛보았다면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1-3절이 한 문장입니다. 이 부분을 흠정역은 “그리하라”고 받았습니다. 한킹은 문장 구조를 잘못 분석(해석)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오역을 했습니다. if는 조건, 가정문이지 이런 결과문을 도출하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 자체의 구문을 봅시다. 성경은 성경 스스로 어휘의 정의를 규명해 줄 뿐 아니라 문장 구조도 정확히 규명해 주는 자체 사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 사전을 보기 전에 먼저 성경 자체 내에서 If so be로 시작하는 동일한 구문을 찾아보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If so be they will hearken, and turn every man from his evil way, that I may repent me of the evil, which I purpose to do unto them because of the evil of their doings.](렘 26:3). 어느 역본에 관계없이 모두 “그들이 귀를 기울이면(들으면)”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킹 역시 so be를 ‘그리하면’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조건절로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if so be 가 나오는 모든 구절을 다 찾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수14:12, 삼하11:20, 사47:12, 렘21:2, 51:8, 애3:29, 호8:7, 욘1:6, 마18:13, 롬8:9,17, 고전15:15, 고후5:3, 엡4:21, 벧전2:3)에서 if so be는 모두 조건절이며 if의 의미 그대로입니다.
자, 그럼 사전을 찾아봅시다. 이 구절은 ‘고어적’ 표현입니다.
사전을 찾아서 볼 때 고어의 의미를 찾아서 보면 됩니다.
if so be
(archaic,고어) If; if it happen (that); supposing that.
-Oxford English Dictionary, Second Edition, 1989
흠정역 성경의 번역이 옳습니다.
간단한 예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구절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But ye are not in the flesh, but in the Spirit, if so be that the Spirit of God dwell in you. Now if any man have not the Spirit of Christ, he is none of his.](롬 8:9).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구절을 한킹의 벧전2:3절처럼 구문을 잘못 파악하면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 됩니다. 한킹 역시 이 구절은 if so be를 정확히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구문을 베드로전서 2:3에서는 다른 방식을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원어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간단한 영어 구문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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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괄호()는 무엇입니까?
질문.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괄호()는 무엇입니까?
답변. 문장에서 원인, 이유, 목적 등을 이해하기 위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괄호로 된 구절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 헬라어 원문에는 괄호가 없을 뿐 아니라 마침표, 쉼표, 감탄부호 등도 없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은 영어로 번역하면서 원문의 말씀을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 이런 부호들을 영어 표기법에 맞게 사용했습니다. 문단 표시 기호도 사용했는데 이는 독자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탤릭체는 원어에 없지만 영어에는 필요한 단어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괄호 속의 말씀은 문장의 의미를 해석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일종의 주석 기능입니다. 이후로 현대 역본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따라 괄호를 사용해서 번역했는데 킹제임스에는 223번에 걸쳐 괄호가 나옵니다. 괄호로 어떤 문장을 묶은 것은 원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영어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오역이 아니라 원어의 정확한 번역을 위해 사용된 번역 기법의 장치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괄호를 제거해도 문장이 쉽게 이해됩니다.
간단하게 창세기에서 두 구절을 예로 보겠습니다.
[이제 보소서, 이 도시는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오 내가 거기로 도피하게 하사 내 혼이 살게 하소서. (그것은 작은 도시가 아니니이까?) 하매](창19:20).
괄호 속의 문장은 롯이 피하고자 하는 소알이란 도시에 대한 설명입니다. 괄호가 없어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괄호로 처리한 것은 롯이 그렇게 말한 이유, 원인, 목적 등을 설명해 줍니다.
[그녀의 혼이 떠나려할 때에 (이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더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냐민이라 하였더라.](창35:18).
라헬의 혼이 떠나는 장면인데 혼이 떠난다는 것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괄호로 묶어 주었습니다. 독자들은 "혼이 떠난다=죽었다"는 의미를 눈으로 간단히 확인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괄호는 쉽고 빠르게 눈으로 전후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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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막9:43-44)에서 "그들의 벌레"는 무엇입니까?
질문. 그들의 불도 꺼지지 않고,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막9:43-44)에서 "그들의 벌레"는 무엇입니까?
답변. 불 못에 던져진 사람들의 사체(carcasses)를 말합니다.
성경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생명의 부활과 정죄의 부활이 있다고 말씀합니다(단12:2, 요5:28-29, 계20:5). 부활이란 몸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부활하면 하나님의 형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의 영광스런 몸을 입습니다.
불신자들이 부활하면 그는 어떤 형상을 입게 될까요? 우리가 하늘에 있는 분의 형상을 입는 것 같이 불신자들 역시 지옥에 있는 자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지금 현재 지옥에 있는 자들은 '혼'이 지옥에 있습니다.
부활한 후에 심판을 받아 둘째 사망(불 못에 던져진)에 처해진 자들은 부활한 몸을 입고 그곳에 있게 됩니다.
이사야66:24절, [그들이 나아가서 내게 범법한 사람들의 사체들을 보리니 그들의 벌레는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이 모든 육체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사66:24)
성경은 "범법한 사람들의 사체들을 보리니"라고 합니다. 쓰레기 소각장에 불타고 있는 쓰레기들을 보는 것처럼 불타고 있는 사체들을 보는데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부활한 몸은 흙이 아니기 때문에 뜨거운 불에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사체에 붙은 불을 "그들의 불"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할 것이요." 이 말씀은 몸이 불꽃 가운데서 타지만 몸에 붙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지옥에 간 부자는 혼이 불꽃 가운데 고통을 받았지만 둘째 사망을 하면 그 몸에 불이 붙어 버립니다.
"그들의 벌레는 죽지 아니할 것이요."란 말씀은 그들의 사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불에 타면 죽고 소멸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체(둘째 사망에 처한 몸)"는 뜨거운 지옥 불에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불 못의 뜨거운 불 속에 사는 죄인들의 몸을 일컬어 '그들의 벌레'라고 합니다. 이는 그 몸의 형상이 벌레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벌레가 사람이란 사실은 다음 구절들에서 명확하게 보입니다.
[하물며 벌레인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 벌레인 사람의 아들이야 어떠하겠느냐? 하니라.](욥25:6). 욥은 죄인인 사람들을 벌레인 사람, 벌레인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늘로 들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같이 되고, 아들의 형상을 입지만 지옥으로 떨어진 사람은 벌레가 됩니다.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오니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멸시거리이니이다.](시22:6). 이 구절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때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죄가 되시고 저주가 되셨습니다. 이때의 모습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오니"라고 하셨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벌레'입니다.
[너 벌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주} 곧 네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말하노라.](사41:14).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일인이지만 다른 이름입니다. 야곱은 벌레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벌레입니다.
벌레란 표현이 '사람, 사람의 아들들, 죄를 담당하신 주님 자신, 육신의 이스라엘(야곱)'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의 벌레란 말씀에서 벌레가 사람을 일컫는다는 사실은 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옥에는 누가 있는가?
지옥. [사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모든 민족들도 그리하되](시9:17)-개인, 민족들. [그러나 너는 끌려가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들로 내려가리로다.](사14:15)-마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계 20:15)-죄인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아니하사 지옥에 던지시고 어둠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벧후 2:4)-범죄한 천사들.
불 못. [짐승이 잡히고 또 그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대언자도 그와 함께 잡혔는데 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기적들로 속이던 자더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으로 불타는 불 호수에 던져지고](계19:20). -짐승, 거짓 대언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계21:8)-둘째 사망에 처해진 자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계 20:15)-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본래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 된 곳입니다(마25:41). 고로 거기에는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 마귀의 자녀들이 거하게 됩니다.
육신의 장막(몸)과 달리 부활해서 둘째 사망을 한 이들의 사체는 불 속에서도 죽지 않는데 이것을 일컬어 "그들의 벌레는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막9:44,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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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37절은 교회인가요? 신전인가요?
질문. 사도행전 19:37절은 교회인가요? 신전인가요?
답변.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9:37절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나 어리석은 자들이 주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 오류를 지적할 때마다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의미상 신전이 분명한데 왜 '교회'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또는 오역이란 것입니다. 신전(사원)과 교회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같은 말입니다.
어떤 이는 제임스 왕이 '교회'란 단어는 건드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킹제임스 역자들이 할 수 없이 원어에는 신전이 맞지만 '교회'라고 두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만약 그런 이유로 성경 어휘가 결정되었다면 킹제임스 역자들이 서문에 밝힌 번역 과정과 자세는 그들의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원어는 물론이요 이전 역본들과 부지런히 비교해서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할 때 그들이 오늘날 헬라어 사전을 의지해서 그 의미를 더듬는 일부 신자들처럼 번역한 것이 아니라 헬라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본문을 봅시다.
[교회 물건을 탈취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여신을 모독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여기로 끌고 왔느니라.](행19:37).
[For ye have brought hither these men, which are neither robbers of churches, nor yet blasphemers of your goddess.](행19:37).
ηγαγετε γαρ τους ανδρας τουτους ουτε ιεροσυλους ουτε βλασφημουντας την θεαν υμων(T.R)
ιεροσυλος hierosulos hee-er-os'-oo-los, church, temple
이 말은 사도 바울이 한 말이 아니라 에베소의 한 고을 서기가 한 말입니다.
도시에 소동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을 진정시키며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교회 물건을 탈취하지 않았고 에베소의 여신 다이아나를 모독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을 잡아 이곳으로 끌고 온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에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는데 고을 서기는 왜 신전이라 하지 않고 '교회'라고 한 것입니까?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신전을 교회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신전과 교회의 단어에 전혀 구분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에베소 사람들이 신전을 교회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정보이며 지식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신전과 교회를 엄격히 분리해서 부르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불교의 신전은 모두 '절'(사), '사원' 또는 '서원'이라고 부릅니다.
불국사, 해인사, 법주사, ....이런 식입니다. 불국 교회, 해인 교회, 법주 교회라 부르면 웃거나 어이없다고 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언어 용례는 이 둘을 철저히 구분해서 쓰는 묵계 또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에 '사' 또는 '서원'을 붙이는 예도 없습니다.
순복음사, 금란사, 사랑의 사...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나 사도행전 시대에 유대나 그리스에서는 일반인들의 언어에서 사원(신전)과 교회는 같은 의미의 같은 단어였습니다. 이는 서양 문학이나 소설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는 Baptist church가 많지만 Baptist temple도 많이 있습니다. 둘 다 교회입니다. 제가 사는 이곳 저의 집 주변에 있는 몇 개의 침례교회 이름을 적어 보겠습니다.
Immanuel Baptist Temple, grace Baptist Temple, Torrance Baptist Temple
Deaf Baptist Temple, Calvary Baptist Temple, Sunnymead Baptist Temple
Highland Baptist Temple, 이곳에는 temple과 church의 구분이 없습니다.
반대로 church란 간판만 보고 들어갔다가는 힌두교 사원이나 무슬림 사원으로 들어가는 일도 허다합니다.
한국 사람은 무슬림 교회라고 하지 않고 무슬림 사원이라고 부르지만 무슬림 교도들은 자기들 사원을 무슬림 교회라고 부릅니다. 한국인들은 절을 일컬어 절, 서원, 불교 사원이라고 하지만 미국 불교 협회의 이름이 "The Buddhist Churches of America(BCA) or American Buddhist Churches(ABC)"입니다. 그들은 불교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은 최근에 일어난 언어적 용례가 아니라 복음서와 사도행전 시대에 이미 그러했던 것이 지금까지 전래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19:37절에서 고을 서기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교회'(churches)라고 말했습니다. 에베소의 고을 서기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한 교회는 사원, 신전, 서원과 같은 의미의 교회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미 그 당시에 그들의 언어적 용례와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에베소의 고을 서기가 그리스어로 시민들에게 한 말은 영어로 번역하면 문자 그대로 정확히 church입니다. church는 한국에서만 기독교의 독점 어휘이지만 사실은 크리스천들만의 어휘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God, Ghost, Spirit 등도 성경의 고유 독점 언어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모두 사용되는 공통의 어휘입니다. Church란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temple 역시 성도들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공용 어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확증합니다.
자신이 아는 알량한 지식으로 성경을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오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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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왜 엘리사의 곁을 지나가면 그 위에 겉옷을 던졌나요?
질문. 엘리야는 왜 엘리사의 곁을 지나가면 그 위에 겉옷을 던졌나요?
답변. 대언자 사역의 계승, 후임 사역자를 지정하는 것입니다.
설명.
and Elijah passed by him, and cast his mantle upon him.](왕상19:19)
우리 말 흠정역에 "엘리야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자기의 겉옷을 그(him-엘리사) 위에 던졌더니"(왕상 19:19)란 본문에서 엘리야는 자기 겉옷을 엘리사 위에 던졌습니다.
1. 옷을 벗는다.- 직위(직업)를 그만 두다. 은퇴하다.
[아론에게서 그의 의복들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지리라, 하시니라.](민20:26)
[모세가 아론에게서 그의 의복들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거기서 그 산의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민 20:28)

2. 옷을 벗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직위, 지위의 승계.
아론의 직위, 지위는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주어졌습니다.

3. 하나님은 엘리야가 반복해서 홀로 자신만 남았다고 하자 너를 대신할 대언자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조가 바뀌고(아합 왕조에서 예후 왕조), 대언자도 바뀝니다(엘리야에서 엘리사로).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출신의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 대신 대언자가 되게 하라.](왕상19:16)

4. 엘리야는 주의 말씀을 듣고 돌아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그를 불러 기름을 붓고 대언자로 삼는 대신 자기 겉옷을 던져 주었습니다. 자기의 대언자 직분을 엘리사에게 넘겨주는 행위입니다.

5. 엘리사는 엘리야가 던져준 겉옷을 받고 대언자의 소명을 받은 것을 알아 채고 농사를 집어 그만 두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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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대언자 미가야의 말을 듣고도 왜 아합과 함께 전쟁에 올라갔나요?
질문. 역대기하 18:16-22절에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대언자 미가야의 말을 듣고도 왜 아합과 함께 전쟁에 올라갔나요?
답변. 설명을 보십시오.
아합과 달리 여호사밧은 주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두려워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합의 궁에 있는 거짓 대언자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언자가 전해주는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다만 여호사밧은 미가야 대언자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참고로 했을 뿐입니다.
아합과 사돈 관계요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현재는 전시 상황입니다.
여호사밧이 주의 뜻을 물은 것은 그 뜻에 순종해서 전쟁을 할까 말까 결정하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니라 전쟁은 무조건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는데 이 전쟁을 하면 결과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거짓 대언자들은 100% 좋은 말로 승리만 예언했고 미가야는 패배와 아합의 죽음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유다의 왕으로 통일 왕국의 군주가 되고 싶은 뜻이 있었고 대언자 미가야의 말대로 이 전쟁에서 아합이 죽는다면 전쟁에 올라간다 해도 전혀 손해 볼 일이 없었습니다. 만약 대언자 미가야가 이 전쟁에서 여호사밧이 죽는다고 했다면 그는 올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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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22장6절 후반부에 나오는 유다왕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와 7절에 나오는 아하시야는 동일 인물인가요? 21장16-17절. 22장1절을 보면 ??? 왕하9장16절에도 보면 요람왕을 보러 온 왕은 아하시야라 되어 있네요, 아사랴라는 이름은 대하21장2절에 보면 여호사밧왕 아들 즉 여호람의 왕의 동생인듯 한데 4절에 보면 여호람왕이 동생들을 다 죽였다고 되어 있어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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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남북 왕국에는 동명이인이 몇 있습니다.
남왕국 유다: 여호사밧-여호람(왕상22:50)-아하시야(왕하8:25)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아하시야-*여호람(요람/왕하3:1)-예후(왕조가 바뀜)
겹치는 이름이 나오죠. 여호사밧과 아합이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은 아합이 죽은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이는 왕조 간에 사돈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왕 아하시야가 병든 이스라엘 왕 여호람(요람)을 찾아 왔다가 군사 정변(예후의 반란)을 목격하지요.
대하 21:2절에 나오는 아사랴는 여호사밧의 아들 즉 여호람의 형제입니다. 여호람은 왕이 되었을 때 형제들을 죽였는데 이는 이들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긴밀한 관계로 자신의 왕위가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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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럼 대하22:6~7에서 병든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을 보러 간 사람은 유다왕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와 아하시야 두 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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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peace
여호람을 보러 간 사람은 남왕국에서 많았습니다. 남왕국의 왕들, 통치자들, 형제들이 모두 함께 갔지요.
1. 예후가 아합 왕조를 대상으로 군사 정변(반란)을 일으킬 때 남왕국 유다에서 왔던 통치자들과 여호사밧의 아들들(아하시야의 형제들)이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후가 아합의 집에 심판을 집행할 때에 "유다의 통치자들과 아하시야의 형제들의 아들들 곧 아하시야를 섬기던 자들"(남왕국의 왕족, 권력자들)을 만나서 그들을 죽였더라.](대하22:8)
2. 유다왕 아하시야(오므리 딸의 아들) 역시 죽음(by 예후)을 당합니다(대하22:9).
3. 질문하신 대하 22:6-7절에서 나오는 유다왕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는 아버지를 따라 이스라엘에 온 것입니다. 2명입니다. 이 때 예후에 의해 죽은 왕족들, 통치자들로 말미암아 남왕국은 왕조가 끊기는 일이 발생했고 북왕국 출신의 오므리의 딸 '아달랴'가 권력을 잡은 여왕이 되었지요. 오므리의 딸 아달랴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보고 아예 다윗의 씨를 멸하려고 모조리 죽였는데 요아스가 겨우 피했고 그가 커서 아달랴를 몰아내고 왕이 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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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간 출애굽 1세대는 갈렙과 여호수아 둘 뿐인가요?
질문. 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간 출애굽 1세대는 갈렙과 여호수아 둘 뿐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은? <http://av1611.net/3517>
•1차 인구 조사 때 계수된 20세 이상의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자들, 군대, 불평한 자들. -못 들어감.
•인구 조사에서 제외된 자들. 레위 지파, 여자들, 아이들, 20세 이하의 사람들, 불평하지 않고 주를 온전히 따른 자들.
•엘르아살은 레위 지파로서 죽지 않았다. 민34:17
•주님께서 모세 위에 있던 영을 취해 주신 70명의 장로들. 민11:17절을 유념해서 보라.
•그들은 모세와 함께 짐을 져야 한다. 광야에서 죽어 버리면 모세와 함께 짐을 질 수 없다.
•70인의 장로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있었고 더 오래 산 자들도 있었다. 수 24:31, 신11:7, 삿2:7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주의 모든 행적을 다 본 자들로 후대에 증언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작년 6월에 이런 주제들에 대해 정리해서 설교했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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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1:24, 교만하고 거만한 조롱자가 그의 이름이니라.
질문. 잠언 21:24절이 무슨 말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 말 뜻이 와 닿지 않습니다.
답변. 아래 설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진노 가운데 행하는 자를 가리켜 교만하고 건방져서 비웃는 자라 하느니라.](잠21:24-흠정역). 24 Proud and haughty scorner is his name, who dealeth in proud wrath.
비교해 보시면 금방 알겠지만 나름 의역이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의역을 해도 우리 말 뜻이 쉽게 와 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만한 진노 가운데 행하는 자는 그의 이름이 "교만하고 거만한 조롱자"이니라.] 정도가 우리 말 직역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술을 즐겨 마시는 자를 일컬어 우리는 '술꾼, 알콜 중독자' 라고 부릅니다. 자주 술에 취하는 자를 우리는 '술주정뱅이'로 부르기도 합니다. 아랫마을 술주정뱅이 아저씨라고 하면 그의 이름이 술주정뱅이가 되지요.
매일 담배를 물고 다니는 아저씨를 부를 때 우리는 어디에 사는 골초 아저씨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늘 골 때리는 말과 행동만 하면 그냥 우리는 그를 그냥 '꼴통'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약을 상습 흡입하면 '약쟁이, 뽁쟁이'라고 합니다.
술주정뱅이, 골초, 꼴통. 욕쟁이, 약쟁이....이런 말은 그가 그 가운데 행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되곤 합니다. 악함 가운데 행하는 자를 악인, 사악한 자라 부르고(그렇게 부를 때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됩니다), 간교함 가운데 행하는 자를 간교한 자(그것이 그의 이름이 되죠)라 부르지요. 교만한 진노 가운데 행하는 자는 교만하고 거만한 조롱자가 그의 이름이 됩니다(24)
성경에서 야곱이 늘 속이고 빼앗는 일을 했을 때 "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옳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이같이 두 번이나 나를 속여 빼앗았나이다."(창27:36)라고 했는데 야곱이 그의 이름이 된 것은 그가 속임수 가운데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잠언 본문으로 가서 "교만한 진노"(in proud wrath) 가운데서 행하는(deal) 자를 일컬어 우리는 그에게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일까요. "교만하고 거만하게 조롱하는 자"(Proud and haughty scorner)가 그의 이름이 됩니다.
교만하고 거만했던 파라오는 "proud wrath" 가운데 행하기에 "Proud and haughty scorn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proud wrath" 가운데 행하기에"Proud and haughty scorner"입니다. 대부분 불신자들은 "proud wrath" 가운데 행하기에 "Proud and haughty scorner"가 그의 이름입니다.
24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이 파악이 될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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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4:5절, 천년 왕국에서 사람들(백성)이 자기 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질문. 미가서 4:5절, 천년 왕국에서 사람들(백성)이 자기 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답변. 문자 그대로입니다. 천년 왕국에서 민족들이 자기 신(마귀)을 따르다 멸망하는 일이 있습니다.
자,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미가서 4:3-7절입니다. [¶ 그가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심판하며 멀리 있는 강한 민족들을 꾸짖으리니 그들이 자기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자기들의 창을 쳐서 가지 치는 낫을 만들리라.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며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고](미4:3) -천년 왕국 때의 일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에 앉으리라. 아무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하리니 만군의 {주}의 입이 그것을 말하였느니라.](미4:4) -천년 왕국 때의 일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각각 자기 신의 이름으로 걷되 오직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원무궁토록 걸으리로다.](미4:5)-천년 왕국 마지막 때 있을 민족들의 반역 사건입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반역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내가 다리 저는 여자를 모으고 쫓겨난 여자를 모으며 또 내가 괴롭게 한 여자를 모아 다리 절던 여자를 남은 자가 되게 하며 쫓겨난 여자를 강한 민족이 되게 하고 {주}가 이제부터 심지어 영원토록 시온 산에서 그들을 통치하리라.](미4:6-7). -천년 왕국 때의 일입니다.
미가서 4:3-7절은 천년 왕국에 대한 본문입니다.
모든 구절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데 5절에서 약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백성들(이방인들)이 각각 자기 신의 이름으로 걷는다."는 말입니다. 천년 왕국에서도 민족들에게 우상, 자기 신이 있는가? 모든 백성이 다 하나님을 믿고 주를 경배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백성들이 자기 신의 이름으로 걸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성경에는 천년 왕국 때 땅의 민족들이 자기 신(마귀)를 따르다 주의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는 기록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천년 왕국에 대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천년 왕국에서 이 세상에는 죄도 없고 죄인도 없고 저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해요 오류입니다. 천년 왕국은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다. 천년 왕국은 저 하늘에 있는 하늘 왕국이 아닙니다. 천년 왕국은 이 땅에 세워질 하늘의 왕국입니다. 고로 천년 왕국에서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저주가 있습니다. 사망이 있습니다. 천년 왕국의 마지막은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로 심판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천년 왕국 때 민족들이 따르는 자기 신이란 이 세상 신이었던 용, 마귀, 사탄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마귀는 지금 이 세상의 신이고 천년 왕국 때 역시 민족들이 따르고 섬기는 신이 됩니다. 천년 끝없이 깊은 구렁에 묶여 있다가 풀려날 때 세상 민족들을 속이고 민족들은 다시 그를 따릅니다.
[마귀요 사탄인 그 용 곧 저 옛 뱀을 붙잡으니라. 그가 그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바닥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어 가두고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이 찰 때까지는 그가 더 이상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니라. 그 뒤에는 그가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나리라.] (계 20:2,3). 마귀가 묶여 있는 동안 민족들은 자기 신을 섬기지 못합니다. 이 때 세상은 우리 주와 그분의 통치자들(왕과 제사장이 된 성도들)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주를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그 민족에게 비를 주지 아니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 천 년이 다 차매 사탄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고 나가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속이며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하게 할 터인데 그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계 20:7,8). 천년이 찰 때 마귀는 풀려나고 민족들은 본래 자기들의 신이었던 마귀를 따르게 됩니다. 민족들은 천년 동안 반역의 영이 속에 있다가 드디어 열매를 맺어 표출되어 나옵니다. 이 때 미가서 4:5에 있는 대로 민족들은 자기 신(마귀, 용)을 따를 것이란 예언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 성취됩니다.
천년 왕국 때 하나님이 아닌 자기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가 있습니다. 민족들은 천년 동안 표면적으로는 예루살렘으로 경배하러 올라오고 율법을 지키지 마음속으로는 주 하나님이 아닌 자기 신의 이름으로 걷다가 마지막 때에 마귀가 풀려나 그들을 속이면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이때에 유대인들은 끝까지 주 하나님만 섬깁니다.
이 진리는 많은 신자들에게 생소해 보이는 진리일 수 있습니다(이런 분들은 이 홈페이지에서 천년 왕국과 세상, 천년 왕국과 이방인...씨리즈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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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킹제임스 성경인가요? 다른 성경을 인정하지 않나요?
질문. "왜? 킹제임스인가요? 다른 성경을 인정하지 않나요? 목사님 설교 아무리 들어봐도 편향적인 성향이 너무 심한 것 같네요. 이 세상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진짜 성경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수많은 교회들이 사용하는 다른 성경들을 보시는 분들은 뭔가요?"
답변. 그동안 여러 차례 많은 분들에게 불평이 가득하고 조롱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미 설교나 이 싸이트에 있는 글들로 충분하지만 간략하게 답변합니다.

1.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요?
답변. 킹제임스 성경이 순수하게 보존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그 사실을 믿기에 그 사실을 선포합니다.
2. 다른 성경을 인정하지 않나요?
답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한 주이시고 성령은 한 영이시고 다른 하나님, 다른 그리스도, 다른 영은 인정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고 다른 성경이란 말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다른 것을 잘 용납하는 신자가 아닙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 11:4).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시고 다른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니며 다른 예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듯 다른 성경 성경이란 말 자체가 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란 뜻입니다.
저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킹제임스 성경 대신 다른 성경으로 옮겨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1:6)
3. 목사님 설교 아무리 들어봐도 편향적인 성향이 너무 심한 것 같네요.
답변. 맞습니다. 저의 설교는 God only, Jesus Only, King James Bible Only입니다. 지극히 편향적입니다. 저의 설교와 강해, 글 모두가 지극히 편향적이며 흑백론, 이분법입니다.
4. 이 세상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진짜 성경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수많은 교회들이 사용하는 다른 성경들을 보시는 분들은 뭔가요?"
답변. 개역, 개정, 현대인의 성경.... 등을 보시는 분들은 유사 성경을 보고 있는 분들입니다. 물론 개역 성경 내에 상당히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다른 성경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란 뜻입니다. 아마 개역 성경 쓰는 분들도 자기가 읽고 사용하는 성경을 완전하다고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6.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이다...이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요?
답변. 말장난입니다. "이 분은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면 "이 분만 나의 하나님이시다"란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당신은 그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면 그 말은 "당시만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란 뜻입니다. 많은 이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주이신 것은 맞지만 예수님만 주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고 훈계하려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한다면 당연히 "킹제임스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자가 "이 사람이 나의 남편이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만 나의 남편이다"란 뜻입니다. 만약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은 나의 남편이란 말은 맞지만 이 사람만 나의 남편이라고 해서는 곤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참 신자 행세를 하며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7. 목사님은 원어 성경을 보고 해석하지 않고 왜 킹제임스 성경을 보고 해석합니까?
답변. 원어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은 같은 성경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 성경을 translate(옮긴) 것입니다. 원어의 정확한 해석(옮김)이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제가 원어 사전을 뒤적여서 옮기면 오류투성이일 뿐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가 그대로 옮겨져 있기 때문에 그 작업을 누군가 다시 할 필요가 없습니다.
8. 목사님 설교를 몇 편들어 보니 부담스럽고 이해가 잘 안되고... 포기했습니다.
답변. 잘 하셨습니다.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저도 거룩한 것들을 개들에게,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다 "그것들이 그것들을 자기들의 발밑에서 짓밟고 다시 돌이켜" 저를 찢을까 염려합니다(마7:6). 자신이 주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씻음 받았다는 확신이 있을 때 다시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전제요건은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때 다시 듣고 공부해 주십시오. 그 때부터 잘 들릴 것입니다. 저는 학자들의 자료에 의지해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최대한 성경 그 자체만 사용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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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 댓글쓰기
아멘, 아멘입니다. 똑 떨어지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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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난어부 --------- 댓글쓰기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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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현 ------------- 댓글쓰기
ㅎㅎ~~아멘입니다. 저에게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가르쳐주는 성경교사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강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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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5절에 의, 절제, 심판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질문. "바울이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니 벨릭스가 떨며 응답하되,..." 이 구절에서 바울이 선포한 의, 절제, 심판은 무엇입니까?

답변.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의, 절제, 심판입니다.
의-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절제 - 성령의 열매. 성령을 따름으로써 육신의 욕망을 이루지 않음. 무절제한 애정, 욕정을 책망하고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라는 책망이자 권면입니다.
심판 - 믿지 않는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정죄와 심판, 복음을 믿지 않는 자, 방탕하고 무절제한 자에게 임할 심판에 대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상이 바울이 벨릭스에게 선포한 복음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통해 복음의 말씀, 핵심을 들었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말씀이 그 속에 권능 있게 임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절제란....육신대로 사는 삶이 무절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절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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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있는 빵을 희생물, 헌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나요?
질문. 누룩 있는 빵을 희생물, 헌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나요?
답변. [그 납작한 빵 외에도 또 누룩 있는 빵을 자기의 화평 헌물의 감사 희생물과 함께 자기의 헌물로 드리되](레7:13)
모든 희생 헌물에는 기본적으로 누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룩이 허용되는 헌물이 있습니다. "자기의 화평 헌물의 감사 희생물"에는 누룩 있는 빵을 드립니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희생 헌물에는 일체의 누룩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화평 헌물...자기의 헌물"에는 누룩 있는 빵을 드립니다. 이 헌물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우리 자신을 예표하는 헌물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희생물은 자원해서 드리는 헌물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율법에 정한대로가 아닙니다. [너희가 {주}께 감사의 희생물을 드리려거든 너희 자신의 의지대로 드리고](레22:29)
감사의 희생물과 드리는 누룩 있는 빵은 바로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히스기야가 응답하여 이르되, 이제 너희가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분하여 {주}께 드렸으니 가까이 나아와 희생물과 감사 헌물을 {주}의 집으로 가져오라, 하매 회중이 희생물과 감사 헌물을 가져오되 마음에 원하는 자들이 다 번제 헌물을 가져오니라.](대하 29:31) *참조-시107:22, 116:17절.
본문에 "너희가 너희 자신을...주께 드렸으니...마음에 자원하는 자들이 다 번제 헌물을 가져 오니라"고 합니다. 감사 헌물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원해서 드리는 헌물인데 "자기 자신"을 함께 드립니다(롬12:1).
그리스도는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잘못도 없고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 누룩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입니다. 반면 우리는 구원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 있는 육신의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 자신을 예표하는 헌물에는 누룩이 들어갑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 12:1)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고전5:7). 누룩은 육신의 본성, 죄성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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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3:11절 말씀을 설명해 주십시오. "마음속에 세상을 정하여 두셨으므로"
질문. 전도서 3:11절 말씀을 설명해 주십시오. 개역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은 본문이 너무 다르군요.
답변.[He hath made every thing beautiful in his time: also he hath set the world in their heart, so that no man can find out the work that God maketh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전3:11-KJV)
[그분께서 자신의 때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셨고 또 그들의 마음속에 세상을 정하여 두셨으므로 아무도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 낼 수 없도다.](전3:11, 흠정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개역).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상을 정하여 두셨다는 것(KJV)이 무슨 말씀입니까? 개역처럼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개역)고 하면 뒤에 접속사는 “그러나”가 되어야 하고 킹제임스 성경처럼 “그들의 마음속에 세상을 정하여 두셨으므로”라고 하면 뒤의 접속사는 “그러므로”(so that)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때에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또한(also)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하여 두셨습니다(set).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현 세상, 다가올 세상, 이 세상, 저 세상 등 온통 세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해 아래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는 자신의 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사색, 탐구) 하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세상 외의 일은 생각을 하거나 상상을 해도 와 닿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마음을 다해 그토록 하늘이나 영원에 대해 철학적, 종교적 탐구를 거듭해도 제대로 그 실체를 알 수 없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상을 정해 두셨기 때문에 세상 밖의 일을 알고 깨닫고 확신하기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하고 성경이란 특별 계시가 필요합니다.
전도서 3:11절은 인간의 종교적 철학적 난제들을 풀어주는 구절입니다. 해 아래 사람들이 수련과 깨달음으로 하나님, 영적 존재, 영원과 하늘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그 세상을 사람들 마음속에 정해(set) 주셨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의 마음속에는 하늘을 정해 두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소망이나 애정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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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2절처럼 크리스천들은 믿고 나서 따로 성령을 받습니까?
질문. 사도행전 19:2절처럼 크리스천들은 믿고 나서 따로 성령을 받습니까?
답변. 아닙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 하니 ...](행 19:2).
이 구절은 은사주의자들이 신자들을 상대로 성령을 받으라고 외치는 대표적인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은 별개의 것이고 믿은 후로 기도나 안수, 기타 어떤 것을 통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그들...너희"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라고 불렸습니다(행19:1). 그들은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행19:3).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그분의 사역도 알지 못했고 복음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 불신자였습니다.
은사주의 부흥사들은 결코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1.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믿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2. 그들이 받은 침례는 복음을 믿은 다음 '주의 이름'으로 받은 침례가 아니었습니다.
3. 그들이 받은 침례는 요한의 물 침례였습니다.
4. 그들은 제자로 불렸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5. 그들은 제자로 불렸고 침례를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요한의 제자, 요한의 물 침례를 받았을 뿐 크리스천들이 아니었습니다.
6.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을 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7. 그들은 복음을 듣고 믿은 후 즉시 침례에 순종해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누구의 제자인지, 복음을 믿는 자들인지, 누구의 침례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행19:2)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즉시 그들에게 침례 요한이 증언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들이 믿어야 할 분이'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습니다(행19:5). 믿음의 표현, 믿음의 증언이 주의 이름으로 침례입니다. 믿는 자들이 믿은 후에 받는 것이 물 침례입니다.
바울은 침례를 받은 그들에게 안수해 주었는데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셨고 그들이 타언어로 말했습니다(행19:6).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은 이를 통해 바울의 증언이 진리요 사실임을 확증했습니다.
복음을 믿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사도행전 19:2절의 본문을 들이대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는 순간 성령을 받았고 그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주라 부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전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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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질문.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아래 설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예루살렘의 사도들(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안수를 해 주었을 때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해서 믿기 훨씬 전 이미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 날 그 도시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 날 구원 받았습니다.
[¶ 여자의 말이, 지금까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그분께서 내게 말하였다, 하고 증언하므로 그 도시의 사마리아 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그분을 믿더라.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께 와서 그분께 간청하여 그분께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를 것을 구하니 그분께서 거기에 이틀을 머무르시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믿고](요4:39-41).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더라.](요4:42).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 복음을 듣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요한과 안드레, 빌립, 나다나엘은 믿은지 3년 반이 지난 뒤에야 성령을 받았습니다.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오순절까지 살지도 못하고 죽었지요.
예루살렘의 믿는 성도들에게 처음 성령이 임한 것은 승천하신 후 열흘 뒤입니다(행2). 사마리아의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처음 임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한 날입니다(행8). 이방인들 중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처음 임한 것은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날 그 때입니다(행10). 이들은 모두 성령을 받기 전에 믿었습니다.
성령은 그들이 믿은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친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성령이 임한 역사적 사건을 살펴봅시다.
승천 후 첫 오순절에 예루살렘에는 천하 각지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 날 그 자리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 제자들은 이미 그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임한 성령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임했지 사마리아나 이방인들에게 임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사마리아에 있는 신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 후엔 이방인입니다. 이때는 베드로가 직접 복음을 전했기에 따로 안수의 과정 없이 바로 성령이 임했습니다(행10).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아니라 사도들(베드로나 요한)이 직접 복음을 전했다면 안수의 과정 없이 그들은 바로 성령을 받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사도들의 안수란 과정을 거친 후에 성령을 주신 것은 사도들을 교회의 기초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으뜸 모퉁잇돌이 되시나니](엡2:20).
사도들을 통해 사마리아에 믿는 이들에게 성령이 임한 후에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는 순간 성령이 임합니다. 사도들은 그 후로 더 이상 사마리아에서 안수를 주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사건은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한 것과 같이 역사상 단 한 번 있는 단회적 사건입니다. 이후에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믿는 자들은 누구의 안수를 받을 필요 없이 믿을 때 누구나 즉각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이 또 내려와 안수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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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오늘도 편안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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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바르게 알고 말씀을 읽을 수 있게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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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 성경은 T.R에서 번역한 것인가요?
질문. 킹제임스 성경은 T.R에서 번역한 것인가요?
답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T.R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을 공격합니다. 당시 사본의 수가 적었다, 사본에 오류가 많았다...이런 식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은 T.R에서 번역한 것이므로 완전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T.R(수용 원문, 전통 원문, 표준 원문)이라 부르는 헬라어 신약 성경은 특정인이 출간하기 위해 편집한 사본입니다. 지금 누구라도 사본들을 모아서 한 권의 T.R을 편집해서 출간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본들에서 장절을 뽑아서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T.R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T.R에 사용된 사본들을 포함한 것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은 대문자 필사본, 소문자 필사본, 성구집, 교부들의 작품과 설교집, 파피루스 단편들, 초기 역본들 : 페쉬타, 이집트 역본들, 고딕 역본들, 유럽어 성경, 아르메니아 약본, 그루지아 역본, 아라비아 역본, 슬라브 역본 등 거의 모든 역본들을 다 번역에 필요한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캐톨릭 역본도 구해서 성경 번역에 함께 참조했습니다. 이전에 나온 영어 성경들도 모두 번역에 비교 대상으로 부지런히 연구했습니다.
T.R은 어차피 신약 성경 뿐이며 그나마 완전하지 않습니다. 원문, 사본, 원본을 운운하는 이들 중에 대부분은 킹제임스 성경이 T.R에서 번역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T.R은 에라스무스 판, 스테파누스, 베자 판본보다 훨씬 정확하며 완전한 성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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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영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질문. 사람 속의 영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사람의 영은 사람 속에 하나님이 지으신 겁니다.
성경 공부 중에 사람의 영에 대해 받은 질문입니다. 혼과 몸은 쉽게 인식이 되지만 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영은 혼이 아닙니다. 영과 혼을 구분하지 않고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아래 말씀을 정리해 두시기 바랍니다.
1. 사람의 영은 사람 속에 있습니다.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외에 어느 누가 알리요? ...”(고전2:11).
2. 사람의 영은 사람의 것들을 압니다. -영은 지각의 기능이 있다.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외에 어느 누가 알리요? ...”(고전2:11).
3. 사람이 영은 하나님이 사람 속에 지으신 것입니다.
“... {주} 곧 하늘들을 펼치고 땅의 기초를 놓으며 사람 속에 사람의 영을 짓는 이가 말하노라.”(슥12:1). 영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4. 사람의 영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 땅 위의 백성에게 숨을 주고 그 안에서 걷는 자들에게 영을 주는 [하나님] 곧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사42:5).
5.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 교통수단입니다.
[사람의 영은 {주} 의 등잔불로서 배 속의 모든 부분을 살피느니라.](잠20:27).
6. 사람의 영은 병약함을 지탱합니다.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함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잠 18:14)
7. 사람의 영이 없으면 몸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약 2:26).
8. 사람의 영은 몸이 죽을 때 위로 올라갑니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누가 알리요?”(전3:21),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전12:7).
9.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만일 자신의 마음을 사람 위에 두시고 그의 영과 그의 숨을 자신에게로 거두신다면](욥34:14)
10. 하나님은 사람 속에 있는 영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11. 사람의 영이 내게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셨고 [전능자]의 숨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 33:4). 고로 영이 없는 몸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약2:26).
12. 하나님이 흙으로 지은 몸에 자신의 숨을 불어 넣었을 때 사람 속에 사람의 영이 지어졌습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성령)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이 사람 속에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13. 하나님은 복음의 말씀, 성령을 통해 사람의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이 낳으시는데 이것이 거듭난 영, 다시 태어난 영입니다.
14. 다시 태어난 사람의 영은 주와 결합하여 한 영이 됩니다. 이는 둘이 한 몸을 이루는 부부처럼 둘이 한 영을 이루는 영적 결혼입니다. 주님은 신랑이 되십니다.
창세기 2:7을 보십시오. 사람의 삼위일체가 나옵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몸)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영)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창2:7).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몸)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영)을 콧구멍에 불어 넣으셨는데 이 때 사람 속에 영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되었다”(became)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부활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마른 골짜기에 마른 뼈들에게 “내가 숨을 너희 속에 들어가게 하리니...너희 속으로 숨을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겔37:5-6)고 하십니다. 뼈들에 몸을 입히시고 숨을 불어 넣습니다. 첫 사람 창조의 과정과 같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라, 힘줄과 살이 그 뼈들 위에 생기고 살갗이 그것들을 덮었으나 그것들 속에 숨은 없더라.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바람에게 대언하라. 바람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오 숨아,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죽임 당한 자들 위에 숨을 불어 그들이 살게 하라, 하라.](겔 37:8-9).
마른 뼈들(죽은 자들) 위에 힘줄과 살(몸)을 만들고 그 다음에 숨을 불어 넣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살아 있는 혼이 됩니다. 사람의 창조 과정은 먼저 몸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 그 속에 숨(영)이 불어넣어지면 “살아 있는 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고전15:45).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was made).
혼 역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혼을 만들어 주신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렘38:16)란 말씀에서 혼은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범죄한 혼은 지옥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씨앗을 우리 속에 두고 성령으로 우리의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는데(약1:18, 벧전1:23, 2:2) 이것은 우리의 영입니다. 사람의 영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요3:5,7). 사람의 영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다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벧전1:3).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약1:18).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으며”(벧전1:3).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벧전2:2).
진리의 말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영은 주와 결합하여 한 영을 이룹니다.
“그러나 [주]와 결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불신자들의 영은 지금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엡2:3-4).
불신자들의 영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영이 다시 태어난 사람이 새 사람이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영이 다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이 태어난 사람의 혼은 구원 받았습니다.
영이 다시 태어난 사람의 몸은 주님 오실 때에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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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첫 날은 의미가 같습니까? 하나님이 첫 날 창조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질문. 처음과 첫 날은 의미가 같습니까? 하나님이 첫 날 창조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답변. 아닙니다. "처음에"와 "첫날"은 단어와 의미가 모두 다릅니다.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첫 날 창조하신 것은 "빛"입니다. 하신 일은 어둠에서 빛을 나누신 것입니다(3,4).
설명- "처음에"는 "첫 날에"가 아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창1:1)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 말 성경은 "하시니라"라고 시제가 변개되었다. 단어가 변개될 때 진리 역시 변개된다.
창세기 1장 본문을 보자.
1:1절에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다. 하시니라(현재)가 아님.
2절부터는 계속해서 And ("그리고")가 반복된다. **우리 말 성경에는 이 단어가 삭제되었다(흠정역?).
성경의 변개와 삭제는 언제나 진리를 흐리게 하거나 가려 버린다.
창세기 1:1-31절까지 철저히 순차적이다.
2절은 1절 뒤의 일이다.
3절은 2절 뒤의 일이지 동시 상황이 아니다.
4절은 3절 뒤의 일이다.
5절은 4절 뒤의 일이다. 계속해서 그러하다.
27절을 보라. 순차적으로 뒤의 일이 아닌 것은 "And"를 쓰지 않았다.
31절은 30절 뒤의 일이다.
만약 2절이 1절 뒤의 일이 아닌 26과 27절과 같은 관계라면 "And"가 아니라 "SO"가 와야 한다. 그래야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 우리 말 성경에는 아예 번역조차 하지 않는 이 AND가 놀라운 진리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하신 일과 하나님께서 첫째 날 하신 일의 차이다.
창세기 1장에서 6일 창조 과정을 보여 주신 것만 알면 부분을 아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주님께서 처음에 하신 일과 그 후로 6일간 하신 일을 기록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첫 날"이 아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하신 일-하늘과 땅의 창조
첫째 날 하나님이 하신 일-빛을 만드시고 어둠으로부터 빛을 나누심.
둘째 날 하나님이 하신 일...
셋째 날 하나님이 하신 일...이렇게 6일간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한 기록이 성경 첫 장이다. 성경 다른 곳과 달리 창세기 1장에서 And는 철저히 시간적 순서다. 단 한 구절도 예외가 없다.
27절을 보라. "그래서"(so)라고 접속사를 쓰고 있다. 26절과 27절은 And가 아니라 So의 관계이다. 1:1과 2절, 2절과 3절의 관계는 so가 아니라 And의 관계이다.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 1:27). And가 아니다. So라고 되어 있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창1:1) 이때는 이미 새벽 별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천사들은 6일 창조 과정에 만들어진 존재들이 아니다. 일본이 아무리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이듯 간극은 없다, 아니라고 아무리 우겨도 천사들은 6일 창조 과정에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믿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니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도 필자는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을 변개하지는 말자.
창세기 1:1은 상태 동사가 아니라 동작 동사이며 시제는 과거이다. 이것은 성경의 주장이 아니라 기록된 사실이다. 1:2절 역시 과거 시제이다(움직이시니라가 아니라 움직이셨다.). 철저히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1. 처음에 Dr. Kim이 집을 지었다.
2. 그리고 집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고 어둠이 집 안에 가득했다. Dr. Kim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기록을 읽을 때 우리는 Dr. Kim이 집을 짓기는 지은 것인가?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인가? 아직 집을 짓는 중인가? 아니면 Dr. 김이 지은 집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Dr. Kim은 분명히 자신의 입으로 처음에 집을 지었다고 했는데(과거) 그 집의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면 그것은 집을 아직 안 지은 것, 덜 지은 것이지 다 지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가 지은 집에 뭔 문제가 터진 것이다. 누군가 Dr. Kim의 집을 박살을 내었던지 안에 있는 것들을 다 털어 가버렸든지...홍수에 잠겨 버린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 중에 덜 해 놓고 다 했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시작하신 일이나 아직 진행 중이시거나 미완성의 일을 "했다"(done)고 선언하지 않으신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셨다."(1)라고 하지 않고 성경은 "처음에...하셨다."(1)고 기록하고 있다. 진행이나 미완이 아니라 이미 창조가 끝난 사건이다. 성경을 변개해서 읽지 않도록 하라.
창세기 1:2은 창조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1절에서 끝이 난 역사적 사건이다. 2절 역시 역사적 사건이다. 3절 역시 역사적 사건이다. 많은 이들이 1절을 기록된 대로 역사적 사건으로 읽지 않고 성경 변개를 시작한다. "하시니라...하시기 시작하셨느니라..." 이런 식이다.
자, 우리는 성경 본문에 기록된 대로만 보자.
하늘, 땅은 처음에 창조되었고(창:1)
빛은 첫째 날 만들어졌고(창1:4)
물, 어둠, 깊음은 처음과 첫째 날 사이에 있었다(창1:2) 읽으면 알 수 있는 단순한 진리다. 그러나 이를 믿지 못하는 이들은 성경을 왜곡한다.
"처음에"와 "첫 날"은 결코 같은 단어, 같은 뜻이 아니다.
자, 두 구절을 보자.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요1:1)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처음에"가 "첫 날"이라면 "첫 날에 말씀이 계셨느니라"(요1:1)가 된다. 첫째날부터 생명의 말씀이 계셨다? 끔찍한 주장이다(요일1:1). 이는 성경 변개요 부패일 뿐이다. 부패한 마음으로 말씀을 부패시키는 자들이 교회 내에 제법 있다. 처음에는 전혀 첫 날이 아니다.
처음에란 말에서 "...의 처음"이 6일 창조 과정의 첫 날이라면 "....의 처음"이라고 해야 한다. 왜? 처음에(in the beginning)의 용례를 찾아보라. "...달의 처음...해의 처음...통치의 처음..."과 같이 뭔가의 처음에 사용된다. 창세기 1:1에 처음이 "첫 날"의 의미라면 "창조의 처음에..."라고 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의 용례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바로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1,2). "처음에"는 "첫 날에"가 될 수 없다. 첫 날이란 의미로 쓰려면 "....의 처음"으로 수식어를 잡아야 한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처음에 계셨고(in the beginning),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 계셨다.
[처음부터 계셨던(from the beginning)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요일1:1). 예수님은 첫 날부터 계셨던 분이 아니라 첫 날 이전 즉 처음부터 계셨다. 예수님께서 첫날부터 계셨다는 것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맨 먼저 예수님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창조의 시작(처음)이신 분이지 창조의 첫 날이신 분이 아니시다. 즉 창세기 1:1에 등장하는 하나님, 창조주이신 분이란 말씀이다. 진리는 기록된 대로 믿을 때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 성경의 하루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그대로 되니라."가 하루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가 하루의 시작(저녁)이고 "그대로 되니라"가 하루의 마지막이(아침)다.
만약 창세기 1:1-2절 말씀을 첫 날에 포함시키려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과 땅이 있으라, 어둠이 있으라. 깊음이 있으라, 물이 있으라...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1-2) 이렇게 기록되어야 한다. 첫 날 이전에 1,2절이 있었다. 첫 날의 시작은 3절이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어떤 날에도 두 번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한 날에 두 번 말씀하실 때는 한 개는 창조 행위가 아니라 복을 주시든지 먹을 것을 주시든지 임무를 주시든지 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하늘, 땅, 물, 어둠, 깊음을 만드신 날이 첫 날이란 주장은 성경을 떠나 한글 자체의 읽기도 안 되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을 기록된 대로 믿는 그 사람은 쟁기를 잡은 소년이나 부엌칼을 잡은 아녀자라도 어떤 창조 과학자나 근본주의 신학자, 성경 번역자들보다 더 선명한 영적 조명을 받는다. 알량한 지식으로 성경의 진리를 반박하는 자들에게 여러분은 그 대상이 목사든 신학자든 성경 번역자든 개의치 말고 기록된 선명한 본문으로 답해 주라.
**집회 중에 받은 질문과 답변을 정리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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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가요. 좋은 하루 되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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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언제나 그렇듯 명쾌하고 선명한 말씀에 속이 시원합니다.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성경교사, 목사님을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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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태 ------- 댓글쓰기
명쾌하게 설명해주심 감사합니다. 몇일동안 어떤 글로 인한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한방에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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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Kim ----------- 댓글쓰기
만약 창세기 1:1,2절 말씀을 첫 날에 포함시키려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과 땅이 있으라, 어둠이 있으라. 깊음이 있으라, 물이 있으라...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1,2) 이렇게 기록되어야 한다.
첫 날 이전에 1,2절이 있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개역)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무엇보다 "하시니라"의 뉘앙스가 강한 무의식적 편견을 준 점이 많은 것 같네요.
...창조하셨다.
...움직이셨다.
그리고 ..이르셨다...있었다.
그리고 ... 낮이라 ..밤이라...부르셨다.
그리고 그 저녁과 아침이 첫 째 날이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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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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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Yoon
한꺼번에 모아서 수정할 겁니다.
형제님 '비밀글'로 셀폰 전화번호 좀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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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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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땅은 왜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나요?
질문.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땅은 왜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나요? (창1:2)
답변. 깊음 속에서 어둠과 물로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명.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라. 그리고 땅은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고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니느라.](창1:1,2). 시제의 오역 바로잡음.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창1:1,2).
한글 성경의 시제가 오역되어 있어서 모두 바로 잡았습니다. 오역된 성경과 시제가 바로 잡힌 성경은 읽을 때 그 의미 뿐 아니라 느낌이 다를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1). 이 말씀을 기록된 대로 믿지 않고 "창조하기 시작하시니라. 창조를 덜 하셨더라. 창조 중이었더라. 창조는 미완이었더라...."고 고쳐서 이해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속에 자신이 믿는 프로그램에 따라 성경을 변개시켜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을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1). 역사적 사건으로 이미 창조가 끝이 난,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둠은 깊음의 표면에 있었고 물들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물들, 깊음, 어둠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첫 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어둠이 창조되어 있었습니다.
관련 구절을 통해 이 단어가 어떤 용례에 사용되는지 보면 1:2절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34:11에도 동일한 표현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토후", "보후"가 쓰인 예를 보겠습니다.
[¶ 다만 가마우지와 해오라기가 그것을 차지하며 또 올빼미와 까마귀가 그것 안에 거하리니 그분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돌들을 팽팽히 드리우실 터인즉] (사34:11).
"혼란(토후)의 줄과 공허(보후)의 돌들..."(사34:11). 창세기 1:2절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에서 사용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단어의 표면적 뜻은 그 의미의 내면적 뜻이 있습니다.
*토후(תֹּהוּ tohuw to'-hoo) -그냥 형태가 없는 것이 아니라 황폐하게 되어 형태가 없는 것이다. 이는 일반 히브리어 사전에서도 "격변 따위로 형태가 파괴된"이라고 나옵니다. "a desolation (of surface), i.e. desert; figuratively, a worthless thing; adverbially, in vain:--confusion, empty place, without form, nothing, (thing of) nought, vain, vanity, waste, wilderness"
보후(בֹּהוּ bohuw bo'-hoo-) -텅 빈, 망쳐짐으로 빈. 단어의 사전적 뜻 뿐 아니라 성경적 용례로도 이 단어의 사용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레미야 4:23절, [내가 땅을 보니, 보라,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하늘들을 보니 그것들에는 빛이 없었고](렘4:23). -이 구절에서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던 것은 아직 미완성의 상태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토후, 보후"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이는 일반 히브리어 사전에서도 "격변 따위로 형태가 파괴된"이라고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벌어진 일입니다. 히브리어 "토후, 보후"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형태가 망가지고 내용물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탈무드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모세오경 강의를 펴면 어디에나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이 땅이든 민족이든 가정이든 형태가 없고 비게 됩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 1:2의 형태가 없었고 비었다는 말은 심판의 결과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창세기 1:1절에서 창조되었던 하늘과 땅이 1:2절에서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다는 것과 물로 덮여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것이 심판의 결과임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34:11, 예레미야 4:23절에서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던 것"은 본래 있었던 완전한 것이 주의 심판으로 빚어진 결과로 인한 것이지 아직 미완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님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진리를 외면하고 왜곡하는 이들이 꽤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는 자, 읽는 그대로 믿는 자에게는 깨닫기 쉽고 명백한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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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 댓글쓰기
잠언 8:9 깨닫는 자에게는 그것들이 다 명백하며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올바르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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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연 ----------- 댓글쓰기
앗! 이제서야 하나씩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봐도 못 보고 들어도 듣지 못했는데... 그게 다 제가 믿음이 없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주님의 위대하심과, 크신 긍휼과 은혜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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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왜 저녁과 아침인가요?
질문. 성경은 왜 저녁과 아침인가요?
답변. 첫째 날 주님은 빛을 만들기 전 어둠 속에서 말씀하시고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오늘날 우리 시각으로 오후 6시부터 하루가 시작됩니다.
이방인들이 아침과 저녁이라고 하는데 비해 성경의 시각은 저녁과 아침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창1:5)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창 1:8)
[그 저녁과 아침이 셋째 날이더라.](창1:13)
[그 저녁과 아침이 넷째 날이더라.](창1:19)
[그 저녁과 아침이 다섯째 날이더라.](창1:23)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더라.](창1:31)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하루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란 말씀으로 하루 일을 시작하시고 [...그대로 되니라.]로 하루 일을 마치십니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기 전 하늘과 땅은 물에 덮여 있었고 어둠이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가 일을 시작하시는 하루의 시작, 저녁입니다. "...그대로 되니라."는 일을 마치는 하루의 끝 아침입니다.
창세기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르시되..."라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첫째 날 저녁입니다. 어둠 속에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의하십시오. "밤과 낮"이 아니라 "저녁과 아침"입니다. 주님은 하루를 저녁에 시작하시고 아침에 마치십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창세기 1:1,2절을 첫째 날에 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하늘, 땅, 물, 깊음, 어둠을 다 지으신 후에 빛을 지을 때 비로소 "이르시되...."라고 말씀으로 일을 시작하신 것이 됩니다.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성경 지식이 없으면 상식이라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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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6절에 "그 때 있었던 세상"은 언제인가요?
질문. 베드로후서 3:6절에 "그 때 있었던 세상"은 언제인가요?
답변. 창세기 1:1절의 하늘과 땅입니다.
창세기 1:3-31절의 하늘과 땅은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입니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 무엇인지, 언제인지만 알면 구절은 다 풀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을 중심으로 "그 때 있었던 세상"과 "다가올 세상"(새 하늘과 새 땅)을 나눕니다. 이것은 성경이 스스로 구분해 주고 있으므로 누군가의 해석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 본문을 보십시오.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벧후3:4).
-이 말은 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벧후3:3)이 와서 하는 조롱하는 말이요, 불신의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사실,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글자만 읽을 줄 알뿐 무지한 어떤 독자들은 이 말씀이 주께서 하신 말씀인 줄로 알고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럼 "사실은 무엇입니까? 5-7절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3:5). -사실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3:6). -사실입니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여 간직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벧후3:7).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에 대한 흔하고도 인기 있는 해석은 아담에서 노아의 홍수까지는 '그 때 있었던 세상',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 대환란까지를 '지금 있는 세상', 천년 왕국을 '다가올 세상'으로 구분합니다. 이는 잘못된 구분입니다. 말씀을 잘못 나눈 것입니다.
그럼 지금 있는 세상(현 세상)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입니까? 앞으로 다가올 세상이 천년 왕국 이후입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 창세기 1:3부터란 사실을 압니다. 그럼 다가올 세상은 천년 왕국 이후입니다. 그럼 "그 때 있었던 세상"은 언제입니까? 창세기 1:3절 이전 즉 창세기 1:1절입니다. 지금 있는 세상은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있습니다(5). 그 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창1:2, 깊음의 표면, 물)으로 멸망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 알 수 있는 분명하고 쉬운 진리이지만 믿기 싫어서 말씀을 왜곡하는 혼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성경은 "아담부터 천년 왕국까지"를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현 세상), 천년 왕국 이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을 다가올 세상이라고 합니다. 아담, 아벨, 셋, 에녹, 노아, 셈, 야벳 등은 모두 현 세상,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에 살았습니다.
아담부터 노아 때까지를 이전 세상, "그 때 있던 세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개콘 수준에서나 나올 만한 웃기는 일입니다. 아담, 아벨, 셋, 노아는 모두 현 세상의 사람들이요,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에 산 사람들입니다. 노아 시대 이전에 있던 하늘들과 땅이 지금 있습니다. 노아 이전의 사람들이 현 세상의 사람들이란 사실은 성경의 증언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지금 이 세상의 통치자"입니다(요12:31, 14:30, 16:11). 마귀의 통치권은 노아 이후가 아니라 아담 때 탈취한 것입니다. 고로 현 세상(지금 이 세상)은 결코 노아가 될 수 없고 현 세상의 출발은 노아의 홍수가 될 수 없습니다.
주목할 것은 우리가 사는 현 세상은 노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부터 즉 창세기 1:3부터 천년 왕국이 끝나서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 불살라 질 때까지(벧후3:7)입니다. 현 세상(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창세기 1:3-벧후3:7, 계20:11절까지 지속됩니다.
다가올 세상은 베드로후서 3:13절부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벧후3:13).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다가올 세상이 오기 전에 불로 타 버립니다.
그럼 첫 사람 아담이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현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때 있었던 세상"은 언제입니까? 창세기 1:1,2절입니다.
그럼 "그 때에 있었던 세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습니다.
믿는 자들 중에서 성경을 들고 성경을 왜곡하는 수법을 잘 봐 두기 바랍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 (벧후 3:3,4).
마지막 날들에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는 자들이 있습니다.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4)고 하며 "하나님의 날"(벧후3:12)이 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은 성도들의 휴거나 부활을 말하는 공중 재림이나 천년 왕국 전에 임하는 주님의 지상 재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즉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 조롱하는 자들의 조롱은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이 불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하나님의 날"에 관한 것입니다.
비웃는 자들은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 불"로 멸망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것을 부정하고 그런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이 이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은 절대 멸망하지 않고 창조의 시작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된다고 주장합니다.
천년 왕국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노아의 홍수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부정하는 것은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 불에 타 없어진다는 다가올 "불의 심판"과 창세기 1:2절에 있었던 "물의 심판"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이란 사람들도 이들과 동조하며 그 때 있었던 세상을 믿지 않고 조롱합니다.
아담 이후로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같은 것은 있었지만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 심판을 받아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벧후3:12)는 말씀과 같은 하늘과 땅이 멸망하는 그런 심판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지와 불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물로 심판받았던 일은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담 때부터 그런 심판은 없었기에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심판, 하나님의 날에 대한 심판이 앞으로도 없다는 주장은 거짓입니다. 아담 이전에 있었던 일을 부정하면서 아담 이후에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속임수입니다.
"그 때의 세상(지금 있는 하늘과 땅이 아님)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다"는 것은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창세기 1:2절의 물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하늘과 땅을 깊음의 물속에 덮어 버린 그 심판은 아담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속이는 자들은 창세기 1:1,2절의 사실을 알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3:5-6).
오늘날 근본주의자들도 애써서 이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고 창세기 1:1,2절을 창조의 첫 날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옛적부터 있었습니다.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 땅은 옛적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기껏 6,000년 정도 밖에 안된다, 하늘과 땅은 모두 첫 날 창조되었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같이 있었다고 외치지만 성경은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라고 합니다.
땅이 물에서 나왔다고? 노아의 홍수를 말하는가? 전혀 아닙니다. 창세기 1:1절에 창조되었던 땅은 창세기 1:2절의 물에 덮여 있다가 나온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노아의 홍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는 영과 부활, 천사들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중동의 설화, 신화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일부러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창세기 1:1,2절의 사건입니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은 현재 우주의 모습입니다. 지금 지구를 비롯한 하늘들과 땅은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습니다.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은 창세기 1:2절에 있던 물로서 하나님이 궁창을 만들면서 위로 올린 물입니다. 노아의 홍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입니다. 노아의 홍수라면 땅(지구)이 물에서 나온 것은 맞다 해도 물 가운데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물을 궁창 위 아래로 나누시고 지구를 궁창 가운데 두신 것을 말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늘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땅의 식물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바다의 생물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은 노아의 홍수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조상들 이래로..."란 말을 "창조의 시작 이후로"라고 고쳐서 읽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조롱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의 시작 이후로 조상들 이래로 있는 것처럼 그대로 계속 있지 않았고(물의 넘침으로 멸망이 있었음-창1:2), 앞으로도 계속 있지 않을 것입니다(불로 심판이 있을 것임-벧후3:10-12).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천년 왕국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 그런즉 이 모든 것이 해체될진대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 모든 거룩한 행실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서두르라. 그 날에 하늘들이 불이 붙어 해체되고 원소들도 뜨거운 열로 녹으려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벧후3:10-13).
***주의 날-그날-하나님의 날-그 날에...." "그분의 약속에 따라." 조롱하는 자들이 믿지 못한 약속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담부터 천년 왕국까지가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입니다. -현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전에 현 세상은 불로 해체 되어 버립니다.-현 세상의 심판
그럼 "그 때의 세상"(창1:1)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습니다(창1:2).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물의 넘침으로 멸망한 상태가 창세기 1:2절입니다.
그 때의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할 때 구원받은 자는 없습니다. 즉 노아의 홍수 때는 구원 받은 사람이 여덟에다 수많은 동물들이 구원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후서 3장의 본문은 노아의 홍수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추가***
베드로후서 2:5절의 "옛 세상"과 3장의 "그 때 있었던 세상"을 연결 짓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는 내용 자체, 대상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벧후 2장은 사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1. 죄를 지은 천사들(벧후2:4) -아끼지 아니하심.
2. 폭력, 강탈로 가득한 사람들-대홍수 이전의 죄인들(벧후2:5),-아끼지 아니하심.
3. 소돔과 고모라의 죄인들(벧후2:6)-아끼지 아니하심. 이 세상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대상이 누구든지 관계없이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다룹니다.
벧후 3장은 "하늘들과 땅"의 심판을 다룹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자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1. 그 때 있었던 세상은 물로 멸망했다.
2. 지금 있는 세상(하늘들과 땅)은 불로 멸망 한다.
3. 앞으로 올 세상(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베드로후서 2장은 현 세상에서 죄를 지은 자들(천사들 포함)에 대한 심판이고 베드로후서 3장은 '하늘들과 땅'에 대한 심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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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하우스 -------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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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태 ---------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then......But.....now[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
now[ ]의 시작이 아담이후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But 앞의 then이 언제인지를 모른다고들 하니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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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아 ---------- 댓글쓰기
아멘~!!! 감사합니다.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 해 주신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저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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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모 -----------댓글쓰기
아멘, 지혜와지식의 영을 주셔서 말씀그대로 믿고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가르치는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옳은 말씀에 "아멘" 하고 말씀을 신뢰할 수 있게 분별의 영을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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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라가 맞습니까? 작은 숲이 맞습니까?
질문. 아세라가 맞습니까? 작은 숲이 맞습니까?
답변. 음역과 번역의 차이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아세라 상, 아세라 목상, 아세라 형상" 등은 킹제임스 흠정역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에는 40번이 나오는데 그냥 "아세라"라고만 할 뿐 "아세라 상, 아세라 목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세라"는 히브리어 אֲשֵׁרָה 'asherah ash-ay-raw'란 말의 음역입니다.
아세라의 뜻은 groves(작은 숲)입니다.
아세라상, 아세라 목상, 아세라 형상과 같은 말은 아예 오류입니다.
아세라는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아세라는 페니키아의 여신 아세라, 아스타르테 또는 아스다롯이라 불리는 여신에게서 나온 단어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여신 이름이 아닙니다.
1. 아세라상, 아세라 목상- 오류(개역, 개정)
2. 아세라- 음역(한킹).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한 단어를 음역한 이유는?
3. 작은 숲-번역(흠정역)
아세라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든 작은 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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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하우스 ------- 댓글쓰기
잘 보고 가요. 오늘도 상쾌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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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연 -------- 댓글쓰기
아하, 그렇군요! 아세라 목상, 아세라 형상이라는 표현을 일반 교파 교회 다닐 적에 많이 들었는데, 지금까지 그게 여신과 관련 있는 건 줄 알았어요.
KJV에서의 groves가 아세라인 줄 오늘 첨 알았네요. 저의 주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가 창피하기도 하면서 하나씩 배워가는 게 정말 즐겁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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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향품과 기름을 예비한 날은 언제인가요?
질문. 여자들이 향품과 기름을 예비한 날은?
답변. 유월절 예비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날, 무덤에 묻히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그분의 몸을 장사지냈고 여자들은 향품과 기름을 예비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 중에 안식일(큰 날)과 일반 안식일 사이에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했다고 주장하고 믿는 이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막16:1)란 말과 "안식일 다가오더라."(눅23:54)란 말을 떼어다 여자들이 안식일(큰 날)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토요일) 사이에 향품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말 시제가 불분명해서 생긴 오해요 오류입니다.
[그 날은 예비일이며 안식일(큰 날)이 다가오더라. 갈릴리에서부터 그분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를 따라가서 그 돌무덤을 보고 또 그분의 몸을 어떻게 두었는지 보고 돌아가서 향품과 기름을 예비한 뒤 명령에 따라 안식일(큰 날)에 안식하더라.](눅 23:54-56).
누가복음 23:54-56절에 따르면 여자들은 예수님의 돌무덤, 그분의 몸을 어떻게 두었는지 보고 와서 바로 향품과 기름을 예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간에 두 번의 안식일이 있었고 안식일이 지난 후에 향품을 예비하고 안식일을 쉬었다가 안식일이 지난 후에 무덤으로 간 것이 아니고 큰 날이라 불리는 안식일 전에 향품을 예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신자들 중에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향품을 사두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성경을 부주의하게 읽은 까닭입니다.
마가복음 16: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그분께 기름을 바르려고 "이미" 향품을 사 두었더라.](막16:1). [And when the sabbath was past,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alome, **had bought sweet spices, that they might come and anoint him.](막16:1).
"안식일이 지났을 때....**이미** 향품을 사두었더라."(막16:1). 우리말로 "이미"라고 번역된 이 부분은 영어로 대과거(had bought)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큰 날(안식일)에 향품을 사 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예비일에 사두었다는 말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큰날)과 안식일 사이에 향품을 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날은 "예비일"이고 그 날 저녁부터 "그 안식일"(큰 날)이 됩니다. [그런즉 그 날은 예비일이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그 몸들을 십자가에 남겨 두려 하지 아니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고 그 몸들을 치워 달라고 간청하니 (이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라.)](요19:31)
여자들은 오후 6시가 되기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하고 향품과 기름을 예비했고 큰 날(안식일)이 다가왔을 때 쉬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매주 안식일에 쉬고 나서 주의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주의-오역의 예, [안식일이 지난 후,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살로메가 좋은 향료를 샀으니 이는 주께 와서 붓고자 함이더라.](막16:1-한글 킹제임스,).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큰 날(안식일)이 지나서 여자들이 향료를 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안식일과 안식일 사이에 향료를 준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오역으로 말미암는 오류, 오해입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여자들은 안식일 전에 향품을 준비했고 이어진 안식일(큰 날)과 매주 안식일에 움직이지 못했고 주의 첫날 일찍 무덤으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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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지금 시각으로 무슨 요일입니까?
질문.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지금 시각으로 무슨 요일입니까?
답변. 목요일 오후 3:00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추측이나 추론할 필요가 없는 사실들.

1. 예수님은 주의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주의 첫날 일찍...”이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주의 첫날에 일찍 일어나신 뒤에...](막16:9).
이 날은 지금 시각으로 토요일 오후 6:00-9:00 p.m 정도입니다. 아무리 빨라도 토요일 오후 6:00 전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토요일 심야를 넘어 일요일 새벽까지 간다면 "일찍"이란 말이 좀 어색해 집니다.
2. 예수님이 죽으신 시각은 오후 3:00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날은 유월절 예비일입니다.
3. 성경은 반복해서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에 일으켜진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4.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한 날은 예비일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못 박히시고 묻히신 날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신 날에 대해 살펴봅시다.
1. 성금요일- 금요일 오후 3:00?
예수님이 죽으신 날에 대한 해석 중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알려진 해석은 금요일입니다. 성 금요일이라고 할 만큼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 금요일 오후 3:00에 죽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하루 만에 부활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2. 수요일 오후 3:00?
성경 신자들 중에 이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마태복음 12:40절에 3일 밤, 3일 낮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72시간에 맞추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12:40).
3 days and 3 nights.
이렇게 계산하면 예수님께서 토요일 오후 6:00 정각에 부활하셨다고 해도 72시간 +@(3시간)이 됩니다. 72시간에 강제로 맞추려면 토요일 오후 3시에 부활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주의 첫날 일찍 부활하셨다는 말씀이 거짓이 됩니다. 무덤에 묻힌 시각만 72시간으로 계산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을 받고 죽은 지 셋째 날이라고 했지 묻힌 지 셋째 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다면 주의 첫날까지는 넷째 날이 되며 삼일 밤, 삼일 낮이 아니라 나흘 밤, 나흘 낮이 되고 맙니다. 주님이 토요일 6:00 에 부활하셨다고 계산해도 사흘 밤, 나흘 낮이 됩니다. 무엇보다 셋째 날, 사흘이란 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3. 목요일 오후 3:00?
주의 첫날 아침 일찍, 해가 뜰 시각, 아직은 어둠이 있을 때에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지금 시각으로 일요일이지만 여전히 주의 첫날입니다. 주의 첫날은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일요일 오후 6:00까지입니다. 여자들은 주의 첫 날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었고 그 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주의 첫 날 낮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third) 되는 날이요,(눅 24:21)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죽으신 날로부터 주의 첫 날이 셋째 날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의 첫 날(토요일 오후 6:00-일요일 오후 6:00)이 셋 째 날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언제 죽으셨는지는 명백하고 단순하게 계산 할 수 있습니다.
목요일 오후 3:00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각, 이 날 묻히셨음.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함.
목요일 오후 6:00-금요일 오후 6:00- 죽으신 지 첫째 날(큰 날-안식일), 1st day
금요일 오후 6:00-토요일 오후 6:00- 죽으신 지 둘째 날(매주 안식일), 2nd day
토요일 오후 6:00-일요일 오후 6:00- 죽으신 지 셋째 날, 3rd day -주의 첫 날, 부활하신 날.
목요일 오후 3:00-6:00. 1 day(3시간).
목요일 오후 6:00-금요일 오전 6:00 –1 night(12시간)
금요일 오전 6:00-금요일 오후 6:00 –1 day(12시간)
금요일 오후 6:00-토요일 오전 6:00- 1 night(12시간)
토요일 오전 6:00- 토요일 오후 6:00- 1 day(12시간)
주의 첫날. 토요일 오후 6:00- 토요일 오후 부활한 시각- 1 night(? 시간).
이렇게 3 days, 3 nights가 됩니다.
자, 성경의 반복된 증언을 보십시오. [¶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마 16:21)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 다시 일으켜지리라, 하시니 ...](마 17:23)
[... 셋째 날에 그가 다시 일어나리라, 하시니라.](마 20:19)
[그러므로 명령하사 그 돌무덤을 셋째 날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마 27:64)
[....그가 죽임 당한 뒤에 셋째 날에 일어나리라, 하셨기 때문이라.](막 9:31)
[.... 셋째 날에 그가 다시 일어나리라, 하시니라.](막 10:34)
[.... 셋째 날 일으켜지리라, 하시니라.](눅 9:22)
[그분께서... 셋째 날에 완전하게 되리라, 하라.](눅 13:32)
[.... 셋째 날에 그가 다시 일어나리라, 하시되](눅 18:33)
[.... 셋째 날 다시 일어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눅 24:7)
[... 이같이 기록되었은즉 ....셋째 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며](눅 24:46)
[[하나님]께서 그분을 셋째 날에 일으키시고 ....](행 10:40)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고전 15:4).
지금 우리 시각으로 목요일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고 6시가 되기 전에 요셉의 무덤으로 옮겨서 장사 지낸바 되셨습니다. 목요일 오후 6:00부터 죽은 지 첫째 날이 됩니다. 금요일 6:00부터 죽은 지 둘째 날이 되고 주의 첫 날인 토요일 6:00부터 고난을 받고 죽으신 셋째 날이 됩니다. 이 날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수요일 3:00 P.M 죽으심?

죽으심
묻히심
큰날(안식일)
향품예비
안식일
주의첫날
수3:00
수6:00전
수 6:00,
1st day
목6:00,
2nd day
금 6:00,
3rd day
토 6:00,
4th day
1 day
2 day
3 day
4 day
in 4 days


1. 이 주장에 따르면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 죽은 지 넷째 날이 된다. 성경은 죽은 지 셋째 날이라고 했다.
2. 여인들이 향품을 예비한 날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신 예비일이다(눅23:56).

3. 예수님께서 땅의 심장부에 사흘 밤, 사흘 낮이 아니라 나흘 낮과 나흘 밤을 있게 된다. 수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00까지 72시간에다 수요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토요일 오후 6시부터 부활한 시각까지 더하면 75시간 +@가 된다.

4. 죽은 지 “사흘 안에”(in 3 days), 사흘 뒤에(마27:63)라고 하신 말씀과 맞지 않는다.
**이 주장은 성경 오역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입니다.
[안식일이 지난 후,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살로메가 좋은 향료를 샀으니 이는 주께 와서 붓고자 함이더라.] (막 16:1-한킹). 한킹에 따르면 안식일이 지난 후 여자들이 향료를 샀다고 합니다. 이는 오역입니다. [And when the sabbath was past,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alome, had bought sweet spices, that they might come and anoint him.] (막 16:1).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서(과거) 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대과거-had bought) 샀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23:54-56절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요일 오후 3:00 P.M 죽으심?

죽으심
묻히심
큰 날(안식일)
안식일
주의첫날
목 3:00,
목 6:00 전
목 6:00,
1st day
금 6:00,
2nd day
토 6:00,
3rd day
1 day
2 day
3day
in 3 days


1.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한 날은 예비일 즉 목요일 오후 6시 전이었다.
2.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시각은 오후 6:00 전이었다.
3. 주의 첫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이 날이 그분이 죽으신 셋째 날이라고 했다.
4. 삼일 밤, 삼일 낮이 된다. 땅의 심장부에 72시간을 있는 것이 아니라 삼일 밤, 삼일 낮을 계신다.
5. 죽은 지 “사흘 안에”(in 3 days), 사흘 뒤에(마27:63)라고 하신 말씀과 정확히 맞다.
성경 신자들 중에 삼일 밤, 삼일 낮을 강조하면서 ‘셋째 날’이란 말은 무시해 버리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모든 말씀은 다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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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 창세기에서 제정되었다면 아담이나 셈, 에녹, 노아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요셉도 안식일을 지켰나요?
질문. 안식일이 창세기에서 제정되었다면 아담이나 셈, 에녹, 노아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요셉도 안식일을 지켰나요?
답변. 전혀 아닙니다.
유대교, 메시아닉 유대교, 안식교를 비롯한 율법주의자들의 거짓 주장입니다.
창세기에서 주께서 일곱째 날 안식하시고 안식일을 복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입니다(출20:11). 주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날을 지정해 지키도록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담, 아벨, 셈, 에녹, 노아 등 그 누구도 안식일을 지킨 적이 없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역시 단 한 번도 안식일을 지킨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기억하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을 때에 {주} 네 [하나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거기서 데리고 나왔나니 그러므로 {주} 네 [하나님]이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게 하였느니라.](신5:15). [And remember that thou wast a servant in the land of Egypt, and that the LORD thy God brought thee out thence through a mighty hand and by a stretched out arm: therefore the LORD thy God commanded thee to keep the sabbath day.](신5:15)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안식일을 지키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므로”란 한 단어 속에 안식일이 언제 누구에게 주어지고 누가 지켜야 하는지 선명하게 밝혀집니다.
“그러므로”란 한 단어에서 모세의 율법 이전에 믿음의 족장들이 안식일을 지켰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과 논쟁은 끝이 납니다. 성경 말씀(단어)이 주는 빛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논쟁을 일거에 잠재웁니다.
모세 이전에 어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시거나 알려 주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이방인이나 이교도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또 주의 거룩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려 주시며 주의 종 모세의 손으로 훈계와 법규와 법들을 그들에게 명령하시고](느9:14). "그들에게"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주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알려 주셨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간혹 크리스천들 중에 '안식일 준수'의 유혹에 빠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십계명을 운운하며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외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사람들(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키되 그들의 대대로 안식일을 준수하여 영속하는 언약으로 삼을 것이니라.](출31:16)
안식일 준수 대상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출애굽을 했기 때문입니다(신5:15).
둘째,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출31:13,17, 겔20:12,20).
셋째, 영속하는 언약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출31:16).
느닷없이 주일 예배는 태양신 숭배니 로마 캐톨릭이 만든 것이니 하면서 안식일 준수를 외치며 그것이야 말로 성경적 본질을 회복하는 것인양 속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크리스천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주의 첫날은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요, 성령이 강림하신 날로서 모든 성도와 교회가 태어난 날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으며](벧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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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7:29절에 전적으로 봉헌된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는 말씀이 무슨 말인가요?
질문. 레위기 27:29절에 전적으로 봉헌된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는 말씀이 무슨 말인가요?
답변. 누구에게 봉헌된 자인지 확인하면 됩니다.
설명.
[전적으로 봉헌된 자 곧 사람들 중에서 전적으로 봉헌될 자는 결코 무르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레27:29). [None devoted, which shall be devoted of men, shall be redeemed; but shall surely be put to death.](레 27:29)
"봉헌된 자, ...봉헌될 자"란 말로 인해 이것이 주께 봉헌된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면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주께 자신을 드린 자는 나사르 사람(나실인)입니다. 나사르 사람은 자기를 구별하여 주께 드립니다(민6:2). 삼손은 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었습니다(삿13:7).
본문에는 나사르 사람에 대한 법이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 봉헌된 자(바쳐진 자)는 주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린 사람이 아니라 마귀에게 드린 사람입니다. 주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물을 드리는 자들로서 점술가, 점치는 자, 우상 숭배를 주관하는 이들로서 자신을 마귀에게 드린 자들입니다.
[¶ 또한 부리는 영을 지닌 남자나 여자 혹은 마술사인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들은 그들을 돌로 칠지니 그들의 피가 그들에게 돌아가리라.](레20:27).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명령인데 성경에서 반드시 죽이라고 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들에게 은이나 금, 재물과 같은 것을 받고 그들을 구속해 줄 수 없습니다.
**************
주님께서 입에서 토해 내시는 자들은 누구인가요?
질문. 주님이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사람에게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계3:16)라고 하셨는데 이들은 누구인가요?
답변. 뜨겁지도 찾지도 않는 물로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다른 교회와 달리 이 교회는 지역 이름 다음에 교회란 단어가 붙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회처럼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계3:15-16).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는 대환란 때 남은 자들의 교회입니다. 이들은 환란 성도들로서 신약의 크리스천들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를 향해 주님은 그들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자신의 입에서 토해 내겠다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를 미지근한 물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물을 입으로 마시는 대신 입에서 토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자, 그럼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입에 있는 물인지 살펴봅시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고전12:27)
[우리는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들이니라.](엡5:30)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그분이 마시는 물이 아니라 그분의 입술, 혀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미지근한 물이 아니라 그분의 몸의 살과 뼈들에 속한 지체들입니다. 고로 이 말씀은 크리스천들의 구원의 상실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서 공부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대환란 때 남은 자들 중에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자들에 관한 것으로 엄중한 경고입니다. 대환란 때 남은 자들은 끝까지 견디는 자,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난해한 구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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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연 ---------- 댓글쓰기
제가 성경을 잘 몰랐을 때, 이 말씀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제 자신이 봐도 저는 미적지근한 물인데 토해버리신다니...! 어렸을 때 "휴거"라는 영화를 보고서는 잔뜩 겁에 질려서 '혹 휴거 안 되면 어떻게 도망 다녀야하나?...', '그들이 날 죽이더라도 제발 편히 죽여주기를...'이런 생각 계속 했었거든요. 이제는 주님을 뵈올 날을 생각만 해도 양 입술이 위로 너무 올라가서~~^_________________^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을 배울수록 그분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신지 깨닫고, 그저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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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0:18절에 사람의 혼이 소멸한다는 말이 성경에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질문. 이사야 10:18절에 사람의 혼이 소멸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답변. 혼의 수면, 혼의 소멸(사멸) 등은 모두 비성경적 이단입니다. 혼의 소멸은 혼이 지옥에 던져져서 불로 고통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설명.
[그의 숲의 영광과 열매를 많이 내는 그의 들의 영광을 소멸시키되 혼과 몸 둘 다를 소멸시키리니 그들은 마치 깃발을 드는 자가 힘을 잃는 때와 같이 되리라.](사 10:18).
혼은 불멸이란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이 구절은 당황스런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혼의 수면, 혼의 소멸은 안식교의 이단 교리입니다. 소멸의 한국어 뜻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consume은 불태워지는 것입니다. 혼은 불 속에서도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혼과 몸 둘 다를 소멸시키리니...."는 말은 앞에 나온 것과 숲의 영광과 들의 영광을 소멸시킨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불태운다는 말입니다. 흠정역 성경에 소멸이라고 번역된 consume은 불태운다는 뜻입니다. consume은 불태워서 멸한다는 뜻이지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혼과 몸 둘 다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혼과 몸을 지옥에서 불로 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 {주}여, 내가 고난 중에 있사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눈이 고통으로 소멸되었사오며 참으로 내 혼과 내 배도 그러하나이다.](시31:9)
"내 혼과 내 배도 그러하나이다(소멸되나이다)".
성경에서 혼이 소멸한다는 뜻은 그 혼이 지옥에서 불타는 고통의 심판을 말합니다.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다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우리 주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히12:29). *consuming fire. *태우는 불이시니라.
주님은 불로 징벌하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살후1:8).flaming fire.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날 터인데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살후2:8)
[짐승이 잡히고 또 그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대언자도 그와 함께 잡혔는데 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기적들로 속이던 자더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으로 불타는 불 호수에 던져지고](계19:20)
주께서 친히 불로 징벌하는 것이 이사야 10:18, 시편 31:9절에 나오는 consume입니다. 혼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눅16:24). 그의 혼은 지옥의 불꽃 가운데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불 타고 있었습니다. 그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즙 곧 그분의 격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즙을 마시리라. 그가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계14:10).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 역시 산 채로 불 호수에 던져져 몸과 혼이 고통을 받습니다.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계20:10).
혼이 소멸한다는 말에 당황해서 혼의 사멸, 소멸(완전히 없어짐)이란 뜻인가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말 교열(교정)이 필요한 어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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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 헌물과 함께 드리는 음료 헌물로 "독한 포도주"(strong wine), 독주(strong drink)를 사용합니까?
질문. 번제 헌물과 함께 드리는 음료 헌물로 "독한 포도주"(strong wine), 독주(strong drink)를 사용합니까?
답변. 아닙니다.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설명.
민수기 28:6-8절은 매일 드리는 번제 헌물과 음료 헌물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것은 항상 드리는 번제 헌물로서 향기로운 냄새가 되도록 시내 산에서 정하신 것이며 불로 예비하여 {주}께 드리는 희생물이니라. 7. 또 그것의 음료 헌물로는 어린양 한 마리마다 사분의 일 힌을 드리되 너는 성소에서 {주}께 독한 포도주를 부어 음료 헌물로 삼을 것이며 8. 저녁에는 다른 어린양을 드리되 아침의 음식 헌물과 그것의 음료 헌물같이 너는 그것을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희생물로 드릴지니라.](민28:6-8)
독한 포도주(strong wine)은 독주(strong drink)가 아닙니다. strong wine은 음료 헌물로 드리는데 사용되는 것으로 발효, 독성이 가장 강한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도와 맛과 향이 가장 진한 최상품의 포도즙을 말합니다. strong wine은 제조 과정에서 물이나 알코올이나 기타 다른 어떤 물질을 썩어서는 안 됩니다. 순수한 포도의 즙 100%를 사용해야 합니다.
민수기 28:7절에 "독한 포도주"(strong wine)란 말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딱 한 번 이곳에만 쓰입니다. 구약의 제사법을 설명해 놓은 탈굼이나 탈무드에 보면 이 부분에 대해서 음료 헌물로 드리는 포도즙은 가장 좋은 포도즙, 가장 맛과 향이 진한 포도즙, 농도가 가장 짙은 포도즙(strongest, best, choicest wine)을 선택해서 어린양 한 마리마다 1/4 힌을 드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전 희생물이 있는 동안 레위 제사장들이 드린 음료 헌물은 독한 포도주(술)가 아니라 맛과 향과 농도가 가장 진한 포도즙을 부었다는 것은 기록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좋은 포도즙의 최상급에 해당하는 포도즙을 strong wine이라고 합니다. 현대식 영어로 표현하면 best wine, choicest win입니다. strong이란 단어는 술에 쓰면 독한, 약에 쓰면 약효가 뛰어난, 향기나 맛에 쓰면 "진한, 좋은"이 됩니다. good wine 보다 strong wine이 훨씬 더 나은 wine입니다.
strong wine을 어린양에게 쏟아 붓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피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같이 쏟아지셨고(시22:14), 자기 혼을 쏟아 죽음에 이르셨습니다(사53:12). 주님은 자기 몸을 향기로운 헌물로 하나님께 드리셨고(엡5:2) 그 피는 참 음료이셨습니다(요6:55).
어린양은 주 예수님의 몸을, 독한(? 진한, 좋은) 포도즙은 주 예수님의 피를 예표합니다. strong wine은 good wine의 최상급에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우리 말 번역이 애매하긴 하지만 본문의 의미는 정확히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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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연 ---------댓글쓰기
"오 사람들이 주의 선하심과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행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기 원하노라!" -시편 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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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태 ------------- 댓글쓰기
명료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strong coffee의 strong 느낌 번역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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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Church of Christ(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답변. 물 침례를 통한 구원, 행위 구원, 구원의 상실, 무천년주의 등 골고루 비성경적 이단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교회의 이름만 보고 그 교회의 교리를 살피지 않음으로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멋진 이름입니다. 이 교회는 말일 성도 즉 몰몬교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정말 성경적인 이름을 가진 이 교회는 안상홍 증인회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란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알렉산더 캠벨이 주도적으로 일으킨 이단 교회입니다. 1920년대에 한국에도 들어와서 도시나 동네마다 그 지역 이름을 따서 "...그리스도의 교회"란 교회가 캠벨파 교회입니다.
1.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 최초의 목사. 미국에서 유래함.
2. 교파, 교단을 부정하여 교회 이름 앞에는 지역 이름만 붙인다. 그들의 교회가 이미 한 개의 교파(교단)로 분류되고 있고 그들 역시 다른 교회(?)와 차별화함으로 교파, 교단을 가지고 있다.
3. 물 침례로 말미암은 구원(행2:38).
특징은 구원의 필수 요건으로서 물 침례를 주장한다. 언제나 물 침례는 구원에 앞선다는 주장으로 성경 신자들은 그들을 "물개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 믿음으로만 구원은 정죄 받는 이단이라고 주장하며 믿음+행위 구원을 주장함(히5:9).
5. 믿는 자의 구원의 상실, 영원한 저주를 가르침.
6. 휴거는 없음.-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란 이유로 믿지 않음.
7. 무천년 주의- 이 땅에 물리적이고 문자적인 천년 왕국이란 없음.
8. 변형된 세대주의. -말씀을 잘못 나눔. 이들은 세대주의를 받아들이지만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지 않고 임의로 나눕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신자들 중에서 이것만 보고 속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1920년경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이미 30여년전 일이지만 저는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두 곳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잠시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공부하면서 이들이 성경과는 매우 동떨어진 이단 교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론, 종말론, 천년 왕국, 침례, 교회론 등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가 거의 없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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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요한일서 5:6-8절의 "물과 피"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아래 설명을 보십시오.
설명. : 먼서 성경 본문을 보겠습니다.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8. 땅에 증언하는 셋이 있으니 영과 물과 피라. 또 이 셋은 하나로 일치하느니라.] (요일 5:6-8).
대부분의 주석서들에 이 구절에 관한 해석을 보면 "물은 물 침례(세례), 피는 십자가의 피"라고 말합니다. 물 침례는 본문과 하등의 상관이 없으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 침례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어떤 신자들은 "물"을 말씀의 물이라고 갖다 붙이기도 하는데 역시 의미 없는 말입니다.
요일 5:6절을 보십시오.
1."이 분(예수 그리스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6).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요1:14),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고(빌2:7),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신 분(히2:16),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딤전3:16)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2.이분은....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6). 물은 여자에게서 나신 육신의 탄생을 말합니다(요3:5). 이사야 48:1절에 사람의 출생을 일컬어 물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오 야곱의 집이여, 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유다의 물들에서 나왔으며 {주}라는 이름으로 맹세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급하되 진실함도 의로움도 없이 하는도다.](사48:1). 이런 구절은 잠언 5:16,18절에서도 잘 나옵니다. 여자를 일컬어 "네 우물, 네 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물로만 오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육체"로만 오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3.이 분은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6).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인류는 모두 한 피로 만들어졌습니다(행17:26). 예수님은 모든 인류가 지닌 한 피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육체)은 여자(물)에서 나왔지만 피는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행20:28). "[하나님]의 교회 곧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행 20:28).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신성)이심을 동시에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물과 피로 오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6).

4.7절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말씀, 성령님"(7).
5.8절은 땅에서 증언하시는 것 셋을 말합니다. "영과 물과 피"입니다.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이심을 땅에서 증언하시는 것으로 예수님 자신의 어떠하심이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을 아셨습니다(막2:8). 예수님은 자신의 영으로 탄식하셨고(막8:12) 영으로 신음하셨고(요11:33), 영으로 증언하셨고(요13:21), "거룩함의 영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습니다(롬1:4). 물과 피는 6절에서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언해 줍니다(롬8:9, 벧전1:11).

6.8절을 정리하면 "영-그리스도의 영, 물-그리스도의 육신(몸), 피-그리스도의 피(하나님의 피)"입니다. 이 셋은 땅에서 증언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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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계시록 3:10절의 keep....from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답변. 아래 설명을 읽으십시오. 이미 예전에 한 번 정리한 글이지만 다시 올립니다.
설명.
[Because thou hast kept the word of my patience, I also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which shall come upon all the world, to try them that dwell upon the earth.](계3:10-KJV).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계3:10)-흠정역. "의역" 수준. "시험의 때(시각)로부터"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기 때문에 나도 시험의 때에 너를 지키리니, 이는 온 세상에 임하여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는 때라.](계3:10) -한글 킹제임스. "시험의 때에.."(from이 아니라 in)으로 번역됨. "시험의 때로부터"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3:10)-개역. "시험의 때로부터"
전에 권위역 성경을 번역하던 한 형제가 이 구절은 환란 통과론을 명백히 가르친다고 주장하면서 개역과 흠정역의 오류를 지적하곤 했습니다. 개역이나 흠정역에서 keep ____from 구문을 숙어적으로 번역해 버린 탓에 직역을 해서 의미를 오용하는 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습니다.
keep.....from은 "...로부터 ...를 하지 못하도록 막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구문론적으로 의미가 맞습니다. 직역 원칙이 성경 번역의 원칙인지라 그냥 직역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그 의미는 변하지 않습니다. Keep이란 단어가 "지킨다."고 할 때 지키는 것은 "....하지 않도록 지켜 주는 것(막아 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학교 폭력으로부터 너희를 지켜 주겠다고 하면 학교 폭력을 당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말이지 학교 폭력을 당하면서 그 고통을 묵묵히 견디게 해 주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근으로부터, 기근의 때로부터 지켜 주겠다고 하면 기근의 때에 기근을 당하지 않게 해 준다는 말이지 기근 속에서 주림의 고통을 당하면서 견딜힘을 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시험의 때(시각)로부터 너를 지켜주겠다"고 하면 시험을 당하면서 고통 가운데 시험을 이기게 해 준다는 말이 아니라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영어를 들고 따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영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I will keep her from parking there. 라고 하면 거기에 주차하는 것으로부터 지켜 준다가 아니라 거기에 주차를 못하도록 막았다는 말입니다.
He kept me from sending letter to Sally. 그가 셀리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켰다가 아니라 "편지를 보내지 못하게 막았다"는 뜻입니다.
I was kept from going to theater by my mom. 극장에 못 갔다는 말입니다.
We have to keep the news from getting to the reporters. 기자들에게 뉴스를 전달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말입니다.
영어의 keep...from의 용례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keep ...from 구문은 숙어이든 따로 떼어서 해석하든 간에 keep 속에 '..않도록'이란 부정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지킨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부정어의 의미를 잃어버림으로 오역이 됩니다.
저는 킹제임스 성경에서 전 구절들을 모두 다 찾아서 정리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논의와 토론이 이루어졌기에 이미 완벽히 정리가 끝났습니다. 늘 성경 본문만 펴서 공부하는 형제들이 명료하게 진리를 발견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영원히 지키신다... 이 속에는 '부패하지 않도록'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성도들을 지키신다. ...이 역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이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구절을 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시험의 때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시험의 시각이 무엇인지는 성경 스스로 정의해 줍니다.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입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의 때가 대환란이라면 우리는 시험의 시각으로부터, 즉 대환란으로부터(from) 보호 받습니다. 대환란 중에/가운데 우리의 믿음, 생명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대환란(시험의 시각)으로부터 "너"를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시험의 시각은 7년입니다. 이 7년의 시각으로부터(from the hour of temptation) 주님은 성도들을 지켜 주십니다. 환란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식으로 읽는 사람들은 환란 통과자들입니다.
환란 전 휴거를 믿는 이들은 환란 전에 들림 받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것(keep)이라고 생각합니다. 환란 통과를 믿는 이들은 대환란 속에서 모든 시험을 당하지만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주님께서 지키시는 것(keep)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키는 대상(목적어)은 성도들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지키느냐고 하면 "시험의 시각(대환란 기간)으로부터" 지키십니다. 주님의 지키심으로 시험의 시각과 나와는 무관합니다.
"from the hour of temptation"(시험의 시각으로부터). "-시험의 시각 동안"이 아닙니다. 시험의 와중에서도 아닙니다. 시험의 시각 가운데서가 아닙니다. '시험의 때에'가 아닙니다. '시험의 시각(대환란)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런 순간에 헬라어로 뛰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from에 해당하는 헬라어 ek는 "out of, without"의 의미입니다. 한국어든 영어든 헬라어든 의미는 동일합니다.
아래 글은 제가 아는 형제가 성경을 펴서 직접 정리한 글입니다. 이런 자세로 성경을 공부하면 거짓말쟁이들이 속임수와 말장난에 속지 않게 됩니다. '법규를 지키다' 할 때의 keep 말고 keep from은 "지키다"와 "방지하다, 면하다"가 모두 가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keep from의 의미는 무엇으로부터 keep from하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면모가 있습니다.
A. 도덕적인 의미는 별로 없이 무서움, 역경, 고난, 올무부터 물리적으로 지키고 보호하다 (무서운 것)
시 140:4 Keep me, O LORD, from the hands of the wicked
시 141:9 Keep me from the snares which they have laid for me
잠 3:26 The LORD shall keep thy foot from being taken
잠 21:23 keepeth his soul from troubles
미 7:5 keep the doors of thy mouth from her that lieth in thy bosom
유 24 He (God) is able to keep you from falling
계 3:10 I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B. 악, 우상, 거짓, 음행 등 나쁜 것으로부터 삼가다, 피하다, 멀리하다 (더러운 것)
출 23:7 Keep thee far from a false matter
신 23:9 keep thee from every wicked thing
수 6:18 keep yourselves from the accursed thing
대상 4:10 keep me from evil (야베스의 기도 중)
시 19:13 Keep back thy servant also from presumptuous sins
시 34:13 Keep thy tongue from evil, and thy lips from speaking guile
잠 6:24 To keep thee from the evil woman
잠 7:5 keep thee from the strange woman
사 56:2 keepeth the sabbath from polluting it, and keepeth his hand from doing any evil
사 56:6 keepeth the sabbath from polluting it
요 17:15 thou (Father) shouldest keep them from the evil
행 21:25 they [should] keep themselves from things offered to idols, and from blood
살후 3:3 The Lord shall keep you from evil
요일 5:21 keep yourselves from idols
물론 이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삼가고 피하고 멀리하는 것 자체도 뭔가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니까요. 또한,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 결국은 올무이고 우리에게 역경과 고난을 안기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3:10은 물론 A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걸 굳이 "시험의 때로부터 너를 지키리니"만 해야 맞고 "시험의 때를 면하리니"라고 하면 무조건 틀렸나요?

A 의미에 속하는 다른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시 141:9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덫으로부터 keep from해 주소서 --> 결국 덫에 '안' 걸리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잠 3:26 주님께서 너의 확신이 되시므로 네 발을 갑작스러운 두려움, 황폐함으로부터 keep from 한다. --> 거기에 걸려들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잠 21:23 자기 입과 혀를 잘 지키는 자는 trouble로부터 자기 혼을 keep from한다. --> 결국은 trouble을 예방할 수 있고 '안' 겪는다는 뜻입니다.
미 7:5 자기 품에 안긴 여인에게라도 입을 keep from하라 --> 입조심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유 24 능히 너희를 falling(넘어지는 것)으로부터 keep from하실 수 있는 분 --> 넘어지지 않게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넘어지긴 넘어지는데 안 다치고 곱게 넘어지도록 '지켜'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 3:10... 시험의 때로부터 keep from!
그렇다면 지키고 보호한다는 게 결국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상 원천적인 예방일까요, 아니면 사후약처방식 땜질일까요? 각자 상상해 보시길.
성경을 성경으로 영어 KJV 본문을 부지런히 대조하며 전례를 분석해 보면, 속 시원히 답이 나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keep ...from에 관련된 위의 성경 구절들을 직접 펴서 확인해 보시시 바랍니다.
2014-09-01 19: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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